[인디언밥 8월 레터] 기억하는 시간

2017. 8. 29. 12:24Letter

 

기억하는 시간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이 올해로 20회를 맞았다는 걸 아시나요? 지난 달 스무 돌을 맞아 준비한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아카이브 전시에서 전시해설을 했습니다. 2012년 프린지에서 인디스트를 한 이후 때로는 인디언밥을 통해, 때로는 그냥 관객으로 프린지페스티벌을 찾았지만 이번 경험은 사뭇 달리 다가왔습니다. 구술사의 전달자로서, 또 다른 구술사의 발화자로서 관객을 맞이하는 것은 색다른 기분이었습니다. 해설을 위해 전해 듣고, 찾아보고, 되살려낸 많은 것은 고스란히 제 기억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중 몇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1999년 프린지는 예술의전당에서 열렸습니다. 인천항에서부터 끌고 온 대형 선박을 앞마당에 정박해 두고, ‘전당’처럼 묵직굵직한 이름이 붙은 공간을 점거해 난장을 벌이겠다는 결심은 이어지는 폭우에 떠밀려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이 해 축제는 역대급 초호화 협찬 라인업으로 패션피플의 시대정신 스포츠리플레이, 백화점 지하에서만 볼 수 있던 외국물 에비앙과 함께 소맥과 치킨뱅이 일변도의 독립예술인 취식형태에 경종을 울리는 서양파 주류 바카디 등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관객이 워낙 적어 참여 예술가들만 실컷 취해 밀레니엄과 Y2K를 앞둔 한가위 강강수월래에 몸을 던졌다고 합니다. 예매처는 홈페이지가 아닌 전화번호로 공지되었고 독립예술제 나우누리와 하이텔 계정이 PC통신 시대의 도래를 알렸습니다. 저는 이 해 이전에 쓰던 천리안 메일에서 다음 메일로 주소를 이전했고 메일 주소가 있는 몇몇 친구들에게 플래시 애니메이션 카드를 보내는 데 빠져 있었습니다.

 

2002년 프린지는 한일월드컵 특수를 노려 5월에 개막했습니다. 16강을 가네 마네 내기했던 조별리그 시작 전의 분위기대로 적당한 시점에 축구의 불씨를 옮겨 받아 흥행하고자 했으나 그해 한국이 4강에 진출하는 바람에 부푼 꿈이 꺾이고 말았습니다. 옮겨올 줄로만 알았던 불씨가 희붐하기는커녕 아주 봉화처럼 훨훨 타오르는 바람에 윈윈 전략에는 빨간불이 켜지게 됐지요. 그해 대표적인 광장이었던 시청 앞은 물론 자동차극장, 대형 호프집까지 축구 중계 화면을 띄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응원장이 되던 걸 생각해 보면, 도심 가운데 관객 수용이 전문적으로다가 가능한 극장들이 독립예술에 자리를 내어준 셈인데… 그해 극장을 찾은 사람들은 어떤 복장으로 등장했을지(혹시 비 더 레즈?) 축제에 참가하느라 재방송을 기다려야 했던 사람들은 거리만 걸어도 쏟아지는 경기 결과를 어떻게 피했을지, 훗날 프린지의 터가 된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첫해는 지금과 어떻게 달랐을지 궁금합니다. 

 

 

2002년과 2003년 프린지 포스터 가운데에는 검은 고양이가 등장합니다. (2004년 포스터에도 조그맣게 있습니다.) 당시 홍대 인근에 길고양이가 많이 살았는데, 집이 없지만 얽매인 데도 없이 자유로운 길고양이의 모습이 독립예술인과 닮아 있어서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설명을 듣자마자 참지 못하고 ‘그냥 자기모에화 아닌가요’라고 질문했는데, 역시 예술은 좀 자기모에화를 하면서 지속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지금이야 ‘사람들 다 고양이 있고 나만 고양이 없어’ 한탄하는 시대지만은 이때만 해도 길고양이를 도둑(훔친 것도 없는데!)고양이로 불렀고 체리필터의 <낭만 고양이>가 노래하는 ‘고양이 정서’가 보편의 이미지였단 걸 생각해 보면 이맘때 검은 고양이는 사뭇 선구적인 마스코트가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2005년 프린지에서는 럭스의 공연을 했습니다. 럭스가 프린지 참여 아티스트로 확정되고 난 뒤 지상파 음악방송에서 문제의 성기노출 사고가 일어났는데, 프린지는 가장 중시하는 가치인 자유참가의 원칙대로, 럭스가 참여의사를 밝힘에 따라 공연을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그해 인디밴드는 다시 지상파 음악방송에서 볼 수 없었고 한동안 인디음악 씬 자체가 열병을 앓았습니다. 그간 저는 2005년을 서브컬처의 해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일본문화가 적극 유입되면서 만화, 쟈니즈, 비주얼락 등이 인기를 얻었던 해. 지금은 한두 세대 전 얘기가 된 이른바 ‘원(피스)나(투로)블(리치)’이 소년점프에 연재 중이었고, 아라시와 킨키 키즈가 건재한 가운데 칸쟈니8이라는 샛별이 등장했습니다. 신촌 기차역 주변에서 롤리타 양복과 고스룩 차림의 사람들이 세이클럽 아이디를 주고받았고 양재 시민의 숲에서 기모노를 입은 캐릭터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들을 두고 찬반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MMORPG가 유행했고 다음카페에서 친구를 사귀던 때이기도 했지요. 여기에 얼마 전 <여중생A>를 보면서 럭스를 소환하게 됐습니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을 좋아하는 주인공 미래와 아이돌 스티커를 모으는 미래의 반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동슈501이 재패한 무대에 홍대 클럽에서 공연을 하던 이들이 함께 섰던 것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동일한 축에 놓인 여러 겹의 세계, 그중에서도 저와 친밀했던 시공간을 겹쳐보는 일은 꽤 찡하고도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2011년 포스터에 등장한 무용가는 제주도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2012년 포스터에 등장한 사람들 중 몇은 그맘때 친구가 되어서 5년이 지난 지금도 얼굴을 보는데요, 각자 손으로 몸으로 자기의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프린지를 참여한 젊은(이라는 말도 참 상대적이지만) 예술가들은, 프린지가 자신들을 청춘으로 뭉뚱그려 호명하지 않고 예술가로 대해주는 일이 감동적이었다고 합니다. 앞서 적은 것처럼 저는 2012년 인디스트여서 그해 기억은 여러 갈래로 선명하게 나 있습니다. 당시 합정에 있던 프린지 사무실, 처음 갔을 때 찾아오는 길이 어떻게 설명되어 있었는지도 기억이 납니다, 지하철에서 나와 자이언트 자전거를 옆에 끼고 골목으로 들어가라고 적혀 있었어요, 축제통신원이라 다른 팀 인디스트보다 먼저 로고송을 들을 수 있었던 것, 프로그램북 맨 앞 캘린더를 펼쳐놓고 각자 어떤 공연을 보고 리뷰를 쓸지 나눴던 일―목소리 큰 사람이 선점하는 방식이었는데 첫만남답게 조금 쭈뼛거리다가 금세 아주 시끄러운 팀이 됐습니다―, 양심선언하건대 금강산도 식후경보다는 염불보단 잿밥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먹는 걸 좋아하던 팀원들끼리 각자 지급되는 식권을 모아서 메뉴판 ‘요리류’ 코너의 음식을 주문하던 것, 어느 공연장과 가까운 어느 식당은 삼겹살이 있고 또 어디와 가까운 어디엔 물회가 있고, 어디어디는 여럿이서 가면 홀에 커튼도 쳐 준다더라 하던 시시콜콜한 것도 떠올라요. 왔을 때 한 번, 가기 전 한 번 적어도 두 번은 프린지클럽에서 맥주를 마셨고 다같이 좋은 공연을 본 날에는 발개진 뺨으로 옥상에 올라가 여름밤 바람을 쐬면서 한참이고 조잘거리곤 했습니다. 그해 프린지에는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비서실장과 함께 출현하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환멸의 눈빛을 보내는 가운데에도 이러저러한 언론보도용 요청을 죄 무시할 수 없어서 꾸역꾸역 길을 터 주었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지금으로선 그때 그 후보가 대통령이 됐다가 탄핵이 됐다가 수감이 되기도 했고, 매년 프린지를 가장 짤막하게 요약했을 때 기록될 만한 에피소드의 양이 정해져 있기에 2012년을 위한 이야기로 이 사건이 발탁된 것입니다만, 솔직히 막상 그 당시엔 이 일이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기억이란 것이 상대적이고 기록이란 것이 선택적임을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이었지요.

 

이 밖에도 틈틈 포스터에 슬로건이 있는 해도 있고 없는 해도 있다는 것, 자유예술제에서 프린지로 정식 명칭이 바뀌면서 ing를 강조한 fringe라는 표기가 쓰였다는 것, ‘상암’이라는 지명이 치마를 두른 듯한 모양의 바위에서 유래했다는데 이제 보니 2015년 포스터에서 월드컵경기장 지붕이 마치 치마처럼 ‘프린지’ 표지석을 두르고 있더라는 것, 몇몇 해의 로고송은 마치 지금 다시 불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적확한 가사로 쓰였다는 것을 찾아내면서 새삼 즐거웠습니다. 과거를 대책 없이 낭만화할 순 없지만 몇몇 값지고 아름다운 것들이 기억회로에 새겨진다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이었습니다.

장기간 열리는 축제에 대한 기억은 사람마다 특히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길목에서 우연히 목격한 사람과 몇 달을 매달린 사람의 감상이 같을 수 없을 거고, 소극장 공연을 본 사람과 거리에서의 즉흥 퍼포먼스를 본 사람의 감상이 같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카이브 전시를 거치며 서로 쪼개진 기억을 거둬 모았고, 앞으로 쌓게 될 기억의 파편을 상상했습니다.

 

 

 

올해 쌓은 추억은 소리였습니다. 월드컵경기장 안에서 축제의 소리를 듣는 것. 축구 경기나 콘서트가 있을 때 외엔 좀처럼 경기장 안에 들어갈 일이 없습니다. 프린지에 올 때도 잔디밭 안에서 공연하는 경우는 그다지 없으니까 그저 원형의 복도를 돌고는 했지요. 왠지 이때는 경기장 안을, 가로지르지 못하더라도 통과하고 싶어서 관중석으로 들어갔습니다. 랜선이 연결된 기자석, 치킨존이나 스카이펍 같은 특별석, 사무실로도 쓰이는 스카이박스를 스쳐 지나가기도 앉아 보기도 했습니다. 아주 작게, 자진모리 장단에 맞춰 둥둥거리는 타악기 소리와 간헐적인 추임새가 들렸고, 타임테이블 맨 끝의 공연을 마친 인디스트들이 서로를 부르는 소리와 피로가 타박타박 묻어나는 발걸음 소리도 들렸습니다. 폐막일에는 인적이 드문 통로에 가져다놓은 바퀴 달린 벤치에 누웠습니다. 오징어잡이 배를 기다리는 항구처럼 밝은 조명을 매단 입구에서부터 둥그런 트랙을 따라 혼곤한 여름밤의, 지치지만 개운한, 시원하고도 섭섭한 기운이 바람을 타고 전해졌습니다. 몇 년이 지나면 올해의 프린지는 제20회 서울프린지페스티벌 공식기록으로 남을 텐데.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처럼 누가 이 자그마한 소리들과 속살거리는 이야기를 수집하러 다녀준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만 하다가 또 터벅터벅 집에 왔습니다. 당장 필요 없지만 품이 많이 드는 일은 자꾸만 미뤄지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무 살 프린지를 치루며 다시 생각한 것은, 역시 요정 대모님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술봉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호박을 마차로, 생쥐를 마부로 바꿔주는 존재란 없고 그저 야근하는 스태프와 손이 많이 가는 일을 자진해 나눠 맡는 자원활동가가 있을 뿐이지요. 축제를 겪을 때마다 번번이 느끼지만 좋은 준비란 겉으로 그 흔적이 잘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일 때가 많아서 겉에서 보았을 땐 티가 나지 않곤 합니다. 하는 사람들도 알아달라고 하지 않고 보는 사람들도 박수를 전할 시간이 마땅치 않지요.

 

아카이브전의 맨 끝 공간엔 역대 프린지가 오래된 앨범과 새로 인화해 벽에 전시해둔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전시해설의 마지막 순서는 거기서 가장 힘들어 보이고 가장 행복해 보이는, 가장 분주해 보이고 가장 무료해 보이는, 가장 많이 웃고 또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짚는 것이었습니다. 똑같은 티셔츠를 입고 공연 시간을 소리 높여 외치며 종종걸음을 걷는 사람들, 인디스트들을요. 전시해설 보조를 위해 함께해주던 인디스트가 그 순간 조금쯤 유쾌했으면 하고 내심 바랐습니다. 사실 그것이 가장 큰 목표였는데, 과연 마음의 티끌이나마 전해졌을지 모르겠습니다. 내년 내후년에 그가 기억할 프린지의 모습도 많이 궁금합니다. 우리의 시간은 어떻게 기억되고 어떻게 재현될까요?

2017년 8월 26일

인디언밥 필자

김 송 요

 

▲2017년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을 만든 인디스트의 이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