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존재하지 안는 그곳, 연극<연꽃정원>

2017. 12. 5. 07:05Review


존재하지 않는 그 곳

<연꽃정원> 

제작_프로젝트 스토리 포레스트 


글_최윤지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향수를 느낀 적이 있다. 내가 정말 그곳에 있을 어떤 날을 상상하며 이따금씩 눈을 감고 떠올린다. 하지만 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연극 <연꽃정원>을 보고 극장을 나서며 나는 연꽃이 활짝 핀 그곳에 누구도 끝내 설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진흙탕에 세운 연꽃정원을 상상한다. 배우들이 자꾸만 바라보던 관객석 너머 저 멀리, 갈 수 없는 그곳이 내가 눈을 감으면 떠올리는 그 어딘가와 닮아있다. 체홉의 <벚꽃동산>을 다시 탄생시킨 이 연극이 그리워하는 곳 또한 아이러니로 가득한 삶이 펼쳐지는 곳이다. 누군가가 돌아오고, 떠나고, 남는다. 이 과정에 남는 슬프고 비참한 감정들을 바라본다. 여전히 그곳은 이곳이 아니며, 영원히 그곳에 갈 수 없음을 안다. 연극 <연꽃정원>은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공간을 향수하며 비애에 젖는 인물과 그들의 삶을, 이들 모두의 모순과 부조리를 어루만진다. 



연극의 마지막,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분주하다. 이곳은 아직은 묶여있는 그린벨트, 개발을 앞둔 스러져가는 관광지다. 놀이방으로 쓰이는 무대에 열 명 남짓한 등장인물이 끊임없이 드나들며 각자의 방식으로 이곳을 떠나보낼 준비를 한다. 연꽃정원을 개발 목적으로 사들인 공인중개사 만식이 마치 무대의 처음 시작처럼 혼자 있다. 이어 두나가 들어온다. 연꽃정원의 고용인으로 일하던 두나는 이전의 촌스러운 태를 버리고 양복 차림에 안전모를 쓰고 있다. 그녀는 고사떡을 들고 있다. 막 고사가 끝나고 공사가 시작되었다. 두나는 퇴거가 몇 십분 남지 않았음을 온 집안에 소리쳐 알린다. 연꽃정원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만식이 이긴 것이다. 


만식은 시골 농부의 아들로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마을에 불어온 개발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인물이다. 그는 연꽃정원을 개발하자고 주인집 식구들을 극 중 내내 설득한다. 신애나 그녀의 동생 유훈, 별이 등이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지막까지 재개발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만식은 안주인 신애와 그녀의 수양딸 별이와도 각별한 사이인데, 어린 시절부터 한 동네에서 부잣집의 친절에 기대어 살아왔던 그는 농부였던 아버지처럼 살지 않기 위해 공인중개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연꽃정원은 기회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그래서 그는 개발이라는 변화를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주인집의 태도에 속이 터진다. 그의 연꽃정원은 더 이상 가난이 아니다. 만식은 꿈꾼다. 재개발로 인해 탈바꿈한 몇 천 평 연꽃 부지의 눈부신 미래를. 그러면서 그는 건물을 세울 때 연꽃을 일부 남긴다고 말한다. 경매에 오른 부지를 끝내 낙찰 받은 자신을 괴로워한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는다. 멈추려 하지조차 않는다. 무엇이 옳은지 모르지만, 변화하고자 하는 것만큼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 반대편에는 신애가 있다.


신애는 죽은 아들을 그리며 과외 선생인 자효를 껴안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주차장에서 시비가 붙은 관광객에게 수리비 몇 십만 원을 현금으로 덜컥 내어주기도 하며, 연꽃 정원이 마치 영원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처럼 믿고자 하는 순진한 사람이다. 그녀가 몇 번 관객석을 향하여 아들을 그리워한 때문일까, 그녀는 연꽃정원을 살아있는 생물처럼 여기는 것 같다. 만식의 말처럼 연꽃정원을 잘라내어 개발했다가는 사람의 사지를 잘라내는 것과 같은 일이 될 것이라 말하는 그녀에게서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지키려 하는 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신애는 극의 초반부에 신애와 그녀의 딸 영주, 고용인이자 비서 역할로 함께 갔던 석주와 함께 외국에서 집으로 돌아온다는 설정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그녀는 실감나지 않는 고향의 모습에 감탄하며 만나는 인물마다 왜 이렇게 늙었냐고 묻는다. 헷갈린다. 정원을 잃고 오열하는 그녀, 떠나는 그녀, 돌아오는 그녀 사이엔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가 진정으로 소유하는 공간은 어디인가? 그 모든 모순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연꽃정원에 불어 닥칠 변화를 전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외국 체류를 통해 스스로를 변화시킨 석주와 다르게 말이다. 



석주는 극의 핵심적인 진행을 이끌어가는 인물은 아니지만, 연꽃정원의 존폐여부에 대해 모든 등장인물의 제각각인 반응을 지켜보는 이 연극의 과정에서 조금 다른 반응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석주는 연꽃정원이 지긋지긋하다. 같은 고용인인 복남의 구애도, 피지도 않은 연꽃을 보러 이곳에 드나드는 관광객도, 맑은 공기조차도 모두 따분하다. 석주는 외국 생활을 동경하고, 도시 생활을 꿈꾼다. 그녀에게 귀향은 신애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석주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다. 다른 인물들이 마지못해 이 곳을 떠나거나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게 하거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선택을 하는 동안 석주는 기꺼이 길 위에 서고자 한다. 석주가 향수하는 공간은 아마 다른 인물들과는 다를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녀는 개발 혹은 보존의 이분법적 구분에서 벗어나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는 과거의 것을 꿈꾸지 않는다. 도리어 버리고자 한다. 땅에 묶인 인물들을 뒤로하고 연꽃정원을 뒤로 한 채 도시로 떠나는, 그녀의 덜컹거리는 캐리어가 사뭇 요란하다. 


마치 연꽃정원의 분신처럼 이 땅에 영원히 남는 듯한 인물이 하나 있다. 신애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며 이곳을 떠나는 모습 뒤로, 마치 모든 것이 끝난 듯한 무대 위에 처음 보는 어르신이 등장한다. 인물들이 잊을만하면 언급하던 멜빵 할아버지가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실제로 등장 한 것이다. 모두가 떠나버린 이 집, 몇 분 뒤면 허물어질 이 집의 놀이방 한 켠에 누워 그는 뭐라 알아듣기 힘든 말들을 중얼거리다가, 드디어 연꽃이 피었음을 객석에 알린다. 연극 <연꽃정원>의 결이 달라지는 순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연꽃정원의 분신처럼 갑자기 나타나는 멜빵 할아버지의 존재는 이 연극이 재현이라는 기존의 말하기 방식을 뒤집어 관객으로 하여금 갑자기 현실을 들여다보게 하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연꽃정원>이 공간에 대한 기억이라는 주제를 통해 개발 혹은 보존이라는 선택을 제시했다면, 멜빵 할아버지의 존재는 이러한 선택의 기저에 깔린 인간의 저항적이고 반항적인 면모를 드러내준다. 그 존재는 무기력일수도 있고, 두려움일수도 있고, 죽음의 흔적일수도 있다. 연꽃정원의 일면을 닮은 분신인 멜빵 할아버지는 가장 익숙한 공간인 이곳에 대한 환영을 깨뜨려 죽음 앞에 선 공간이 어떤 경계에 서 있는지를 상징하는 기억의 존재가 된다. 이러한 존재로서 멜빵 할아버지는 늙고, 무기력하고, 졸음에 겹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 남는다. 이제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연꽃 정원에 누운 그의 힘없는 모습을 바라보며 멜빵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상상한다. 인물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이곳을 대하기 때문에 너무나 다양한 공간의 향수를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에게는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누군가는 돌아오고,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는 이 공간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이곳에 연꽃이 피어있다고 한다. 인물 모두의 아이러니를 어루만지는 체홉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극장을 나서며 나는 연꽃이 활짝 핀 정원에 선 나를 상상했다. 그곳에는 비애에 젖은 위로가 있었다. 


*사진제공_프로젝트 스토리 포레스트 


 필자_최윤지

 소개_연극을 좋아하는 직장인입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읽고 쓰려 노력하지만 일과 병행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가치 있는 일이라 믿고 오늘도 다시 한 번 힘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