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2. 4. 17:34ㆍReview
2017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젊은 공연예술 창작자
인큐베이팅 쇼케이스에 대한 소고
글_전강희
우분투 <도시기록프로젝트 /분실물 보관소에서의 연설>
1.
‘연극이 예술이 되려 하고, 예술이 연극이 되려 한다.’, 『프랑스 시노그라퍼 1975-2015』의 한 꼭지에서 읽은 구절이다. 70년대부터 현재까지, 프랑스 무대미술가들의 작업을 정리한 책으로, 인용구는 70, 8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던 무대미술가 중 한 명이 했던 말이다. 그 당시에는 연극이 예술로 받아들여지는 분야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fine art를 미술로 옮겼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가게 만든 구절이었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오늘날 자주 듣게 되는 ‘이 작품이 연극이야? 공연이야? 정체가 모호한 작품 지원을 왜 이 장르에서 해야 하지?’ 등등 여러 말들이 떠올랐다.
동료 몇 명의 얼굴도 떠올랐다. 자신의 그림을 3차원의 공간으로 옮겨보고 싶다는 시각예술작가와 배우가 한 명도 나오지 않는 연극 무대를 선보이겠다는 무대미술가와 소리만으로 연극적인 공간을 탄생시켜보겠다는 전자음악가가 생각났다. 또한, 몇 년째 주목받는 신인 작가이지만, 장르가 분명하지 않은 작업을 계속 이어오고 있는 이유로 다음 단계로 도약할 기회를 찾을 수 없는 몇몇 이름들이 떠올랐다.
자신의 본래 영역을 빠져나오려는, 혹은 확장 시키려는 예술가들을 보면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꼭 들어맞는 비유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 감독의 일화다. 영화 <아바타(Avatar)>를 만들 때, 이미 시나리오를 완성해 놓고, 이야기가 영화로 구축될 수 있을 만큼 기술이 발전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역시 예술가의 통찰력은 미래를 견인하는구나, 라고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예술가의 감식안까지 들지 않더라도, 장르를 확장 시키려는 예술가들이 늘어나게 된 경향에 대한 실마리는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다. 예술가들이 사용하는 매체는 그 시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예로부터 공연이 올라가는 무대는 당대 사회를 선도하는 매체를 직접 사용해보고 실험해보는 장소였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디지털 매체의 발달로 실재가 무한대로 확장되고 변용되는 오늘날, 예술의 장르적 경계를 순수하게 지켜내고자 하는 욕망이 오히려 실현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예술은 작품을 통해 다루고자 하는 주제가 사회를 직접 반영하는 내용이건 아니건 간에 어떤 식으로든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인큐베이팅 과정에 참여를 원했던 예술가들도 이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비록 다섯팀만이 쇼케이스를 올릴 수 있었지만, 지원한 팀의 대부분이 ‘무엇이’하고 싶은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다만 ‘어떻게’라는 방법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기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떻게’는 예술가뿐만이 아니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이들과 파트너쉽을 갖고 함께 풀어나가야 하는 숙제이기도 하다. 2017년은 앞으로 펼쳐진 여정의 초입에서 ‘어떻게’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상훈 <웜홀>
2. 매체에 대해서
하나의 담론으로 현실을 재구성하여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이 가능했던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 공연예술은 텍스트가 품고 있는 이야기 자체만으로 관객에게 다가가는 장르에 머무를 수 없는 분야가 되고 있다. 모방과 재현 담론이 설 자리를 잃어가면서 공연은 다른 표현 양식에 주목하고 있다.
인큐베이팅 쇼케이스에 올랐던 공연들은 언어로 재현된 텍스트와 몸, 음성, 공간, 시간을 결합하거나 혹은 대체하여 무대를 꾸려나가고자 했다. 언어적 텍스트와 결합을 시도한 공연으로 이상훈의 <웜홀>과 최원준의 <나의 리상국 理想國>이 있다. 텍스트와 대등해지거나, 대체하고자 하는 전략을 선택한 공연으로는 임철민의 <야광>, 우분투(UBUNTU)의 <도시기록프로젝트/분실물 보관소에서의 연설>, 언해피서킷(Unhappy Circuit)의 <Music of Memories>가 있다.
최원준과 임철민은 주로 영상작업을 하는 작가이고, 이상훈은 무용을, 언해피서킷은 전자음악을 주요 매체로 삼는 작가이다. 우분투는 안무가 김봉수를 중심으로, 배우 김도연, 사운드 아티스트 정강현, 영상 디자이너 김갑래, 기획자 이화영이 모여 만든 팀이다. 이들이 결합을 시도한 매체들은 자신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주요 매체를 보조하거나 대등한 구성요소로서 자리매김한다. 거의 모든 작업의 공통적인 목표는 매체들의 상호침투를 실험하는 방향으로 설정되었다. 비록 도달하기 쉬운 목표치는 아니었으나 작품이 어느 방향을 보며 나아가고 있는지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 매체에서 다른 매체로 파고드는 것, 그 사이에서 변형이 일어나는 것을 연극학자 파트리스 파비스(Patrice Pavis)는 ‘재매체화(remediation)’라고 명명한다. 그는 매체이론가 제이(Jay)와 그루진(Grusin)의 말을 언급하며 자신의 관점을 뒷받침한다.
“매체란 재매체화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매체의 기술, 형식, 사회적 의미 등을 사용하며, 실제의 이름하에 그것들을 견주어보거나 개조하기를 시도한다.”(제이)
“재매체화는, 새로운 디지털 매체에 있어 진정으로 새로운 점이란 앞선 매체들, 즉 텔레비전, 영화, 사진, 그림 그리고 인쇄 등으로부터 그것이 무언가를 빌려오고 오마주하고 비판하고 새롭게 한 정도에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그루진)
“재매체화는 20세기 말의 두 가지 대조적인 시각적 양식 또는 매체화의 논리를 식별해 준다. 첫 번째는 ‘투명한 즉각성(transparent immediacy)’으로, 이때 매체의 목적은 매체화의 흔적을 지우거나 제거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초매체성(hypermediacy)’으로, 이때 매체는 매체화의 흔적을 증대시키거나 분명하게 만든다.”(그루진)
재매체화(새로운 매체화, 또는 병폐나 곤경에 대한 ‘구제책’도 될 수 있는)에 대한 이 같은 이론에 따르면, 매체는 기존의 것들을 (넘어서기보다) 흡수하는 경향을 보이며, 새로운 도구―새로운 필요들에 적응함으로써 한순간 시장을 지배하는―를 제안해 준다. 1
쇼케이스에서 선보인 공연들은 ‘Inter-’와 ‘trans-’ 사이를 오가는 매체의 상호침투 방식을 고민한 결과 탄생했다. 공연의 전통적인 규약을 다시 정립하는 것, 혹은 다시 쓰는 것에 대해서 생각할 여지를 열어주는 공연들이었다.
임철민 <야광>
3. 극장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극장은 퍼포먼스 공간인 무대와 관객 공간인 객석이 분리된 장소이다. 관객은 무대 위 재현된 시공간 속에서 만들어진 극적 현실에 감정을 이입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야기의 어느 지점에서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무대를 따라가다 보면, 혹은 옆자리에 앉아있는 관객 반응을 살피다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극장은 관객이 느끼는 감정의 강도와 형식까지도 조율할 수 있는 힘을 품고 있는 공간이다.
어떤 예술가들에게 극장은 다양한 방식으로 교차하는 매체들을 풀어내기에 구속력이 강한 공간이다. 프로시니엄이나 블랙박스 무대의 물리적인 한계 속으로 자신의 작품을 구속하지 않고자 한다. 전통적인 극장 문법에 지배당하지 않고 공간을 새롭게 재구성하기 위해, 극장 측과 협상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때때로 협상 과정 자체가 작품을 준비하는 큰 줄기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극장이라는 공간 자체도 하나의 커다란 매체로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은 극장 자체를 매체로 삼아 일정 시간 동안 거주하며 흥미로운 작업을 진행해 나갈 가능성이 충만한 곳이다. 여러 크기로 변형 가능한 극장이나 높낮이가 다양한 로비 공간처럼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이 많은 곳이다. 좀 더 적극적인 활용을 충분히 기대해 볼 수 있는 공간이라서 쇼케이스의 형식 면에서 아쉬운 점이 있었다.
인큐베이팅 쇼케이스로 선보인 공연 중 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과 적극적인 공간 협상 과정을 거쳤다고 추측해 볼 팀을 찾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틀리에에서 공연을 올린 우분투의 <도시기록프로젝트/분실물 보관소에서의 연설>을 제외한 4개의 공연 모두가 무대와 객석이 분리된 일반적인 형태의 극장 공간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극장이라는 공간에 주목하여, 외적인 공간 변형은 아닐지라도 다루고자 하는 주제적인 측면에서 인터미디어적 실천을 시도한 작업으로 임철민의 <야광>이 있다. 그는 60, 70년대 남성 성소수자들이 크루징스팟(cruising spot) 2으로 이용하던 영화극장들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현상에 집중했다. 기술로 네트워크화되는 세상 속에서 인터넷과 만남 어플리케이션의 등장으로 극장은 크루징스팟으로서 유효성을 점차 상실해가고 있다. 작가는 퍼포머의 몸과 목소리, 배경 장치가 되는 다양한 요소들을 영화적인 문법으로 블랙박스 안에 배치했다. 각각의 요소들은 2차원적인 스크린에서 볼 법한 장면처럼 구성되어 극장이라는 3차원 공간 안에 배치되어 있었다. 입체적인 공간 안에서 각각의 장면들은 평면적인 질감으로 연출되었다. 임철민은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과 연극이 상연되는 극장, 두 장소의 만남을 실현하고자 했다.
아틀리에 공간에서 작업을 선보인 우분투의 경우 다루고자 했던 주제가 아시아문화전당이 위치한 ‘광주’였다는 점에서 다른 작업자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있었다. 지금은 독립영화 상영관으로만 기능하고 있지만, 8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양한 영화를 상영하며 지역민과 함께했던 ‘광주극장’과 충장로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광주천’을 중심으로 광주만의 독특한 움직임과 소리를 수집하고자 했다. 쇼케이스가 끝나고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우분투 팀원들은 광주가 다른 대도시와 구분되는 특징들을 발견하기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리서치를 기반으로 진행하는 작업의 경우, 대상이 되는 공간에 얼마나 머무르느냐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객관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인 공간(space)이 사적 체험이 일어나는 구체적인 장소(place)가 되기까지는 일정 시간이 필요하다. 인문지리학자 이푸 투안(Yi-Fu Tuan)은 공간이 장소가 되는 과정을 『공간과 장소』라는 저서를 통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공간’은 ‘장소’보다 추상적이다. 무차별적인 공간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공간을 더 잘 알게 되고 공간에 가치를 부여하게 됨에 따라 공간은 장소가 된다. 건축가들은 장소의 공간적 성질에 대해 말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공간의 입지적(장소) 성질에 대해 훌륭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공간’과 ‘장소’의 개념을 정의하려면 서로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장소의 안전(security), 안정(stability)과 구분되는 공간의 개방성, 자유, 위협을 알고 있으며 그 역 또한 알고 있다. 나아가 우리가 공간을 움직임이 일어나는 곳이라 생각한다면 장소는 정지(멈춤)이다. 움직임 속에서 정지할 때마다 입지는 장소로 변할 수 있다. 3
광주아시아문화전당에 위치한 예술극장은 민주화의 역사적 성지인 옛 도청 근교에 자리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장소성(placeness)을 이미 획득하고 있다. 즉, 예술극장은 탄생하는 순간부터 장소의 고유성과 역사성이 부여된 곳이다. 현대공연예술이 공간의 물리적인 측면에서든지, 관객이 지각하는 현상학적인 관점에서든지 무대와 객석 간의 경계를 지우려고 고군분투하는 것처럼, 예술극장 또한 광주라는 텍스트와 끊임없이 연결되고 마주하는 과정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동시대의 세련된 건축물인 예술극장과 오래된 도시인 광주가 교차지점을 축적해나가는 수행적인 접근을 거듭할 때에 관객에게 사적인 체험을 선사하는 장소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언해피서킷 <뮤직 오브 메모리즈>
4. 관객에 대해서
사운드 퍼포먼스와 미디어 퍼포먼스를 한 무대에서 동시에 수행하는 전자음악가들을 최근 몇 년 사이 심심치 않게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작곡가이자 사운드 디자이너이기도 한 이들이 미디어 아티스트이거나 자신만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소리가 장착된 애플리케이션 개발자인 경우도 있다. 스스로를 메이커라고 부르고, 관객/관람객이 소형 장치를 직접 작동시켜 소리를 골라 들을 수 있는 장식장을 만든 아티스트도 있다. 본인을 메이커로 칭한 이유는 소리 자체를 그림처럼 팔 수 있도록 도구처럼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양한 기술 매체를 수용한 이들 작업의 경계는 계속해서 확장 중이다.
한 공연/전시에 동원되는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관객 또한 작품과 소통하기 위해 어떤 감각을 극대화해서 사용할 것인지 고민해야 하는 순간에 직면하게 되었다. 집중하는 감각이 무엇이냐에 따라 관객이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신호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방식에 차이가 생긴다. 예술가가 발산하는 하나의 의미가 관객에게 가닿는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개의 의미로 새롭게 생산된다.
전자음악가이자 미디어 아티스트인 언해피서킷의 <Music of Memories>가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알고리즘을 통해 생성되는 사운드는 단순하게 시작된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언급한 것처럼 퍼포먼스의 첫 부분에서 일정하게 들리는 단일음의 근원은 전신 기호 모르스 부호를 연상시킨다. ‘점과 선’으로 표현되는 전신 기호가 ‘0과 1’로 이루어진 컴퓨터 이진법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을 발견하고 작업을 만들어 나갔다.
단순한 소리는 프로그래밍된 알고리즘을 통해 점차 복잡한 양상으로 변모한다. 동시에 스크린 화면에는 모르스 부호를 상징하는 닷이 컬러로, 실사 이미지로 모습을 바뀌가며 나타난다. 유원준 4은 이러한 흐름을 ‘해체 → 바코드 → 컬러 → 픽셀 → 닷 → 휴지 → 처음’으로 분석해 내며 컴퓨터와 인간사가 진화해 가는 과정을 유추해 내었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저자 월터 옹((Water J. Ong)에 따르면 시각이 공간을 분리하여 보게 만든다면 청각은 공간을 통합하는 감각이다. <Music of Memories>는 매체 속성이 형식에 그대로 반영되는 지점이 흥미로운 공연이었다. 분리와 통합을 오가며, 혹은 둘 중 하나를 따라 관극을 이어나갔다.
무대가 매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무언가를 지각하는 장소가 되기 위해서 기술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무대에는 퍼포머와 텍스트가 있다. <웜홀(Worm Hole)>에는 ‘무용수 이상훈과 연극배우 박세기의 몸과 목소리,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발췌한 텍스트, 무대 세트 전면에 비치는 미디어파사드’라는 존재감 강한 매체가 있다. 세 가지 모두 층위가 다른 매체이다. 물질성이 강한 배우의 몸이 미디어파사드와 만나면 비물질성을 띠게 된다. 텍스트는 퍼포머의 목소리로 옮겨질 때 강한 물성을 지닌 요소로서 무대에 존재한다. 매체들은 각자의 전략을 차용하며 재매개하고 있다. 오래된 매체라고 할 수 있는 퍼포머의 몸과 텍스트는 공연 안에 재배치되었다. 이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과 더 나아가서는 몸 상태도 재배치된다. 무대와 객석이 분리되어있는 전통적인 블랙박스에서 공연이 진행되지만, 적극적인 관객으로서 새롭게 지각하는 법을 스스로 찾아내기를 포기하는 순간 공연은 길을 잃고 만다.
매체실험이 강한 공연일수록 관객의 자리가 불안정해 보일 수 있다. 연극학자 이경미는 자신의 논문에서 2011년 LG아트센터에서 있었던 하이네 괴벨스(Heiner Goebbels)의 공연 <그 집에 들어갔지만 들어가지 않았다>와 2006년 독일에서 올라간 크리슈토프 슈링엔지프(Christoph Schlingensief)의 <제 7구역(Area 7)>을 예로 들며 다음 논지를 펼치고 있다.
이들 무대 위의 이미지들은 말 그대로 “재현의 강박”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견주어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나레이션도 딱히 없고, 무엇이라 비판을 시도할 근거도 찾을 수 없다. 관객은 당연히 뭔가 빠진 듯한, 뭔가 결핍되어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 이런 공연에 참여한 오늘날의 관객은 유례가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보고 있지만 정작 무엇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는 “형편없는 목격자”에 가깝다. ...
이런 공연을 보는 대부분의 관객은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놓치고 있다는 불안감과, 다른 한편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있다는 부담감 사이를 쉬지 않고 오간다. 5
불안정해 보이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본 것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고자 모든 감각과 경험을 동원한다. ‘나’의 입장이 더해지면서 공연과 ‘나’의 내밀한 관계가 성립된다. 공연의 이야기가 관객인 ‘나’에게서 완성이 되는 것이다. 물론 예술극장의 이번 프로그램은 쇼케이스를 선보이는 자리였기 때문에 공연을 관람하는 지각방식에 일대 변혁을 가져올 정도로 새로운 작업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그러나 다음을 위한 단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 인큐베이팅 쇼케이스 작품 중에서 기대가 컸던 작업은 최원준의 <나의 리상국 理想國>이었다. 최근 연극계에는 다큐멘터리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공연들이 많아지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주로 만드는 최원준 작가의 작업이 공연으로 무대에 오를 때 어떤 시너지가 일어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소재 또한 지금 이 시대에 다루어야만 한다는 확신이 들 만큼 시의성이 강했다. 특히 극중 주인공이자 실제 모델인 모니카와 4년 동안 관계를 이어왔다는 점에서 작품을 대하는 작가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무대에서 본 실제 작품은 처음 계획했던 것과 많은 부분이 달라졌을지라도 인상적인 미장센을 보여주었다. 스크린 속 배우와 나란히 놓인 무대 위 배우를 보면서 두 장르의 이질감을 한 번에 확인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다큐멘터리적인 접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공연이지만 배우들의 연기가 전통적인 드라마 톤이라는 점이 조금 낯설기는 했다. 하지만 인터뷰를 바탕으로 만든 텍스트가 탄탄하여 보는 재미가 있었다. 앞으로 언젠가 하게 될 본 공연의 잘 짜여진 도입 부분, 프롤로그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나의 리상국 理想國>은 많은 고민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다. 공연이 마무리될 무렵 연출가인 최원준 작가가 등장하여 공연을 중지시켰다. 배우들은 공연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끝나야 하는지 논의가 되지 않은 상태로 무대에 올랐던 것 같다. 영상매체와 연극매체의 접근 방식의 차이였을까? 연출가에게 관객은 어떤 존재였을까? 공연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쇼케이스도 일종의 공연이다. 공연장에는 관객이 있다. 관객은 공연이 완성되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이다. 최근 공연예술에서는 관객의 집단적인 경험보다 개별적인 체험이 더 중요시되고 있다. 연출가에게는 무엇이 중요했는지 궁금하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과 광주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듯하다.
최원준 <나의 리상국 理想國>
5.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젊은 공연예술 창작자 인큐베이팅 쇼케이스 다섯 작품을 반추해보니 ‘발견’과 ‘탐색’이라는 말을 떠오른다. 이 단어의 주체는 예술가, 관객, 예술극장 세 축 모두가 될 수 있다. 물론 이 중, 극장이 가장 책임감이 막중할 것이다. 다섯 개의 공연을 모두 보고나니 지각을 확장하는 공연을 올리는 것이 쇼케이스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었을까, 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이에 더해 쇼케이스가 ‘일시적인 실험’인지 ‘다음을 위한 도약대’인지, 아니면 ‘작품 지원’인지 ‘예술가 지원’인지 가이드 라인이 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겠다. 참여 아티스트와 ‘어떻게’를 찾아가는데 적절한 길잡이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아틀리에 이외의 공간을 앞으로도 계속 이용할 예정이라면, 극장 전체를 매체실험의 장소로 열어 두는 것까지 고려해 볼 수도 있겠다. 관객의 관극 방식 또한 함께 실험해 볼 여지가 생길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직 과정 중에 있는 작업을 보고 이야기 나눴던 기회가 소중하게 남는다. 어디선가 더 깊어진 완결된 작업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사진제공_아시아문화원
* 공연정보_https://www.acc.go.kr/board/schedule/performance/1804
* 각주
- 파트리스 파비스 외, 『수행성과 매체성: 21세기 인문학의 쟁점』, 푸른사상, 2011, 38쪽 [본문으로]
- 1950년대 만들어진 단어로, 원래는 청소년들이 차량을 이용해 파트너를 찾아다니는 장소를 지칭하지만 게이남성들 사이에서는 극장이나 공원, 역/터미널, 공공화장실 등 공적인 장소에서 섹스파트너를 찾는 행위를 의미한다. (작가 주) [본문으로]
- 이푸 투안, 심승희 역, 『공간과 장소』, 대윤, 2007, 19-20쪽 [본문으로]
- 미디어아트 웹진 앨리스온(http://www.aliceon.net)의 디렉터 12월 17일 4시에 공연 후 ‘관객과의 대화’의 모더레이터를 맡았다. [본문으로]
- 이경미, 「디지털 미디어 시대, 공연의 커뮤니케이션」, 드라마연국 제44호, 44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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