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3. 10. 11:27ㆍReview
찬란한 시간의 미로
<시적극장>
신승렬, 박승순
글_김신록
<시적극장>의 탄생
<시적극장>은 신승렬과 박승순이 함께 공간구성 및 연출을 맡은 일종의 ‘설치극장’으로, 보광동 안쪽에 낯설게 자리 잡은 프로젝트 박스 시야에서 ‘극장 안에 놓인 극장’이라는 컨셉하에 첫 선을 보였다. 2017년 1월부터 우란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1년 여 동안 탐구된 이 작품은, 신승렬과 박승순 모두에게 기존의 무대 디자이너, 사운드 디자이너에게 요구되는 작업 방식을 회의하고 전복하는 시도가 된 듯하다.
크리에이터스 레터에서 신승렬은 ‘커다란 관습이 지배하는 극장 권력에서 우리가 해방될 수 있을까? 무대 너머 공간을 상상만으로 존재하게 만들 수 있을까?’라고 질문한다. 그는 ‘극이 진행되는 배경으로서의 무대’라는 익숙한 관습을 넘어, 심지어 ‘설치 미술로서 이 공간을 바라봐 주세요’라는 즉물적인 요구를 넘어, ‘무대 너머의 공간을 어떻게 존재하게 할까’를 고민한다. 관객이 만나는 것이 실물이 아닌 실물 너머의 공간이 될 수는 없을까. 이는 마치 연기의 오랜 화두인 ‘배우가 달을 볼 때 관객이 바라보는 것이 배우가 아니라 달이 되도록 할 수는 없을까’를 고민하는 ‘보이지 않는 배우’라는 용어를 떠올리게 한다. 배우가 서 있지만 정작 관객이 보는 것은 배우 너머의 그 무엇, 배우가 만나고 있는 세계 그 자체일 수는 없을까.
크리에이터스 레터에서 박승순은 ‘이번 작업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음악가로서, 사운드 디자이너로서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아니다. 잘 완성된 음악보다는, 관객의 머릿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연주되는 소리에 대해 상상했다. 무대미술과 마찬가지로 음악이나 사운드도 공간을 다루는 예술이다. 그러다 보니 ’공간성‘에 집중하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적었다. 그는 스스로 완결되는 음악을 내려놓고, 공간과 함께 생성하고 변주되는 음악, 관객의 머릿속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음악을 고민한 듯하다.
기존의 방식, 알고 있는 방식을 회의하고 전복하기 위해 긴 시간 공을 들인 시적극장은 2월 22일에서 25일까지 총 4일 동안 극장 안에 놓여 있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시적극장>, 찬란한 시간의 미로
극장 안으로 들어가면, 9x4 미터 넓이의 2층으로 된 큰 건물 한 채가 눈앞을 가로막고 서있다. 건물에는 두 개의 출입구가 있고, 건물 옆 좁은 무대 잔여공간을 돌아서 객석 쪽으로 가면 기존 객석 의자들은 모두 접힌 채 낯선 의자 여덟 개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객석에 마주한 건물 면은 1, 2층에 각 2개씩 4개의 큰 아크릴 창이 나 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조명 너머로 건물 안을 응시하고 있으면, 그 안에 놓인 사물을, 그 사물 사이를 움직이는 관객을 볼 수 있다. 무대 안팎, 극장 안팎을 끊임없이 변주되는 소리공간이 채우고 있고, 여기에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빛과 어둠이 더해진다. 이와같이 <시적극장>은 여러 미세 입자들의 조합으로 계속 새롭게 열리고 닫히는 미로 같은 공간을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대 위에 세워진 시적극장 안에서, 가림막으로 얼기설기 공간이 나눠지고 시시각각으로 빛이 변하고 안팎에서 끊임없이 소리가 밀려들고 향냄새가 진동하는 작은 방 한 견에서, 거기 덩그러니 놓인 의자 위에서 한참을 앉아있었다. 근래에 이렇게 편안한 적이 있어나 싶을 만큼, 몸과 마음이 사슬에서 풀려난 듯 노곤해 졌다. 의자가 그곳에 놓여있듯 나도 그곳에 놓여있었다. 소리와 빛과 향과 바람이 투명한 내 몸을 관통해 지나갔다. 일상에, 할 일에, 스트레스에 붙들려있던 정신과 마음과 몸의 경계가 열리면서 나는 끝없이 새로이 연결되는 ‘시간의 미로’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의 기억 속 공간이 지금의 소리와 섞이고, 아크릴 창으로 스며드는 빛이 또 다른 공간의 나와 만나는 환상. 시적극장에서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연결되는 순차적인 시간이 아닌, 동시적으로 발생하고 때론 평행하게 연결되고, 때로는 겹치고 투사되고 반복되고 전복되는 보르헤스적인 시간이다. 시적극장에서 열리고 닫히는 시간의 미로는 내밀한 나의 기억 속으로, 정서 안으로, 몸의 감각으로 끝없이 변주되며 이어지고 뻗어나갔다.
드라마터그 전강희는 작품설명에서 ‘움직이고 정지하는 것은 빛과 소리만이 아니다. 방문자도 마찬가지이다. 일정 시간 공간에 머물며 움직이고 정지하기를 반복하는 동안, 건물을 탐색하는 그 시간 동안, 발견하게 되는 것은 빛과 소리에 반응하며 공간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있는 자신이다. 머무름의 시간이 ‘나’를 스스로 바라보는 시간이 된다’고 밝혔다.
사실 나는, 처음 무방비 상태로 극장에 들어섰을 때 조금 울었다. 왜 울었는지 모르겠다. 극장에 발을 들이자마자 공간을 채우고 있던 틱틱거리는 음향효과를 따라 본능적으로 고개가 돌아갔고, 고개가 돌아가자 몸이, 그 다음엔 발이 따라갔다. 순간적으로, 그러나 천천히, 어떤 소리를 따라 내 몸이 휘적~하고 한 바퀴를 돈 것이다. 그러고나니 갑자기 눈물이 막 쏟아졌다. 그동안 너무 내 힘으로, 나만의 힘으로 살아내려 했었나 싶은 생각이 든 건 한 참 후였다. 그 땐 그냥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감고, 숨을 죽이고 한동안 울었다. 다행이 극장은 어두웠고, 다른 관객들은 이미 각자의 미로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시적극장, 자기만의 우주로 떠나는 여행
관객은 일반적인 ‘체험 형 공연’에서처럼 단순히 주체로서 대상을 관찰하고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대상의 일부로서, 주체이면서 객체로서 혹은, 주체도 객체도 구별 불가능한 동등한 입자들로 존재한다. 상호 간에 동등한 빛의 입자, 소리의 입자, 기억의 입자, 몸의 입자, 감정의 입자....입자들은 내외부적인 자극과 동력에 의해 모이고 흩어지고 섞이고 분리된다. 마치 찬란한 프랙탈처럼. 그런 의미에서 <시적극장>은 무대 위에 놓인 구조물의 이름이면서, 시적극장이 놓인 극장 전체의 이름이면서, 관객 개개인의 체험에 의해 개별적으로 세워지고 허물어지는 실물 너머 세계의 이름이기도 할 것이다.
드라마터그에 의하면 <시적극장>은 ‘역사적인 기억이 서려있는 장소, 번화한 도심 한가운데, 다채로운 사람들이 오고 가는 광장, 한적한 시골 들판에 기꺼이 놓이고자’ 한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고 한다. 시적극장이 엘리스의 토끼굴처럼, 헤리 포터의 9와 3/4 승강장처럼, 낯선 곳에 홀연히 등장했다 사라지기를, 그 곳에 우연히 들른 누군가가 또 찬란한 시간의 미로를 타고 자기만의 우주를 여행하기를 기대한다.
*사진제공_우란문화재단
필자_김신록 소개_연극하는 김신록입니다. 오늘부터 잘 살아야지! |
작품소개 <시적극장>은 2017년 1월 새로운 공연 형식 개발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지원하는 시야 플랫폼: 리서치랩(SEEYA PLATFORM)에서부터 시작되어, 콘텐츠 전 과정을 지원하며 작품을 개발/무대화하는 프로그램인 시야 스튜디오(SEEYA STUDIO)를 거쳐 개발 되었습니다. 박승순과 신승렬의 협업으로, 약 1년간의 개발과정을 거쳐 이번 2월 트라이아웃을 통해 여러분들을 만나고자 합니다. '극장'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인식하고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이번 작품은, 빛과 소리로 채워진 공간 속에서 관객이 스스로 실재하는 나를 발견하고, 사유해볼 수 있길 기대합니다. CREDIT 프로듀서 김유철 공간구성 및 연출 박승순, 신승렬 드라마터그 전강희 조연출 홍유정 컨텍스트디자인 김혜림 아카이브북 디자인 맛깔손 조명디자인 노명준 조명디자인 프로그래머 황규연 조명오퍼레이터 이호정 조명스태프 김병희, 이혜지 음향감독 양수연 음향스태프 엄현종 제작감독 우준상 컴퍼니매니저 황만우 컴퍼니매니저 어시스턴트 윤해영 무대제작 온스테이지 포스터/리플렛 디자인 VISTADIA 사진 김일다 영상 소보루 필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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