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밥 12월 레터] 새해를 기다리며

2015. 12. 24. 15:10Letter

 

새해를 기다리며

 

글쓰기의 특성상, 대개 무언가를 수행하는 주체는 인격을 가진 생명체로 파악됩니다. 대체로 이들은 문장에서 주어(主語) 역할을 맡습니다. 그러나 예술적 글쓰기에서는 인격(人格)이 아니라 물격(物格)도 주어가 될 수 있습니다. 주로 예술작품이나, 작품이 구현된 공간이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작품은- " 이나 "극장은(무대는)- " 이라는 문장이 성립되는 것이지요. 최근에는 수행성을 핵심으로 하는 작품들이 늘면서, 목적어에 머물렀던 "관객들"도 주어의 위치에서 자신의 감각행위를 적극적으로 피력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어역할을 하는 이들(예술가, 작품, 관객)은 예술의 과정에 참여하여 완성시키는 적극적인 주체역할을 해왔던 것이지요.

 

▲한국공연예술센터에 의해 공연을 방해/검열받은 세명의 젊은 연극연출가들. 시위에 앞서

 

한해를 돌이켜보니, 예술을 설명하는 글에서 ‘특이한’ 주체들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를테면 “국가가~, 정부는~, 위원회는~, 시(市)는~” 이나 “CJ는~, 양현석은~ ” 등으로 시작하는 문장이지요. 바로 ‘국가’ 와 ‘기업’ 이 예술적 글쓰기의 주어로 등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어에 연결된 서술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별/검열하다, 혹은 강제 집행/방해하다. 이로써 이들은 염치(廉恥)를 파하고, 과묵(寡黙)을 버렸습니다. 예술보다는 야만과 가까운 행태로 창조(경제/정치)적인 (억압)주체로 등극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예술가와 예술작품은 국가와 자본에 의해 피동과 수동의 형태로 변형되어, 목적어의 위치로 전락하였습니다. 아까 언급했던 관객들도 황당한 주어들의 출현에 예술-사유적 주체에서 문화상품의 소비주체로 격하되었지요. 예술의 주체성과 독립성을 고민하는 인디언밥의 입장에선 절망스러운 한해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아주 힘들고 괴로워야 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예감과 그래도 나름 버텨내고 있다는 실감이 교차하는, 그런 느낌의 절망이랄까요. 지속-감당-가능한 절망으로 내성이 생긴 듯한 난감한 기분입니다.

 

▲젊은 미술작가들과 관객과의 직접만남 <굿-즈>, 스스로 작품(거지)이 된 작가 김동규의 뒷모습 

 

한줌의 희망도 있었습니다. (인과관계가 좀 애매하긴 하지만) 국립과 기업의 전시장과 공연장이 그 기능을 못하자, 여기저기, 지하실과 작업실에 불이 밝혀지며 문이 열렸고, 작품이 걸렸고 토론이 벌어졌습니다.(물론, 열린 숫자만큼 닫힌 게 함정) 죽어도 만나주지 않던 짝사랑의 상대 예술가들이 연락처와 이름을 물어왔습니다. 아우라가 넘쳐흘러 감히 소유할 수 없었던 예술가의 작품을 맞대면의 방식으로 혹은 ‘1+1’ 의 끼워팔기 방식으로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절망의 시공간에선 모두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을미(乙未)년의 교훈이었지요. (물론, 현실 친구보다는 페친이 더 많은 게 함정)

다가올 새해는 뻔뻔하게 등장한 주체들이 더더욱 기승을 부리겠지요. 인디언밥은 그들의 악랄한 갑(甲)질을 주시하면서 을(乙)과 병(丙)으로 전락한 예술가들의 분전을 기록하겠습니다. 더불어 이 지난하고 절망적인 싸움에서 지치지 않게 체력을 비축하겠습니다. 동료들을 더 불러보겠습니다.

한해 보내주신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올해 새로 발굴된 필자들의 활약도 기대해주시고, 인디언밥을 새로 알게 된 독자님들께도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아프거나 죽지않고, 새해를 잘 감당하겠습니다.

 

 2015년 12월

인디언밥 편집위원

정진삼

 

 

▲12월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게된 대안공간, 극단 성북동 비둘기의 연극 실험실 일상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