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베이비 돌 스파>, <변신하지 않음>'원전의 무력화와 흐릿한 서사, 수행성이 극대화된 공연들'

2016. 8. 24. 09:10Review

 

<베이비 돌 스파>, <변신하지 않음>

: '원전의 무력화와 흐릿한 서사, 수행성이 극대화된 공연들'

2016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

 

 

글_김민관

 

 

 

이지현, <베이비 돌 스파>

 

하나, (기존의) 연극은 텅 빈 극장 안에 있었다. 극장은 채워지고 비워지며 바다처럼 밀려갔다 쓸려간다. 이곳은 현실에 덧씌워지는 가상이 아니라 가상 자체가 탄생한다. 나는 '거기'를 본다. '거기'를 보는 '여기'(='나')란 때론 없을 수도 있지만 어떤 때는 너무 명백하다!

둘, 극장이란 공동의 임시 체류 공간을 벗어나고, 때로 스크린에 연극이 체현된다. 가령 이런 것이 있다. '현실 이미지에 중첩되는 가상 이미지', 원래 현실에 대한 설명 방식으로 기능하던 증강현실은, 곧 실재와 가상의 위치를 전도한다. 포켓몬 고는 화면 안에서 포켓몬이 위치한 가상의 레이어를 현실 배경에 앞세운다. 포켓몬이란 이미지-배우의 일시적인 장소 특정적 현현은 화면에 빠진 내 시선을 놔두고/가두고 '거기'로부터 신체는 이탈한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여기', 이미지는 '거기'에 있다.

셋, '여기'를 벗어나 '거기'로 향하는 것은 가능한가. '요정'(이라고 소개하는 아티스트 이지현)을 따라 가상의 공간('이곳은 일본 해안가')이 상정되는 <베이비 돌 스파>에서, 이지현은 월드컵경기장 너머를 해안가로 명명하며 단 하나의 현실을 만든다. 나는 이제 (놀랍게도) '거기'에 있다. '거기'로부터 '여기'를 다시 보기 시작한다. 나는 바깥에서 안을 보는 게 아니라, 안에서부터 밖을 볼 수 있다. 극의 바깥에 있는 게 아닌, 현실이 극으로 펼쳐진다. 내 앞엔 요정이 있고, 나는 신기하게도 요정을 만나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요정과 인간의 관계를 예사롭게 지켜볼 뿐이다.

 

 

 

요정은 제안한다, 떠오르는 한 사람을 인형으로 만들자고. 나는 누군가를 생각하고 결코 그와 닮을 수 없지만, 결코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은 될 수 없는 인형을 만든다. 그를 그로부터 만난다. 그를 이제 미니 욕조에 담가 신문지를 찢어 만든 물에 씻기고, 신문지를 찢어 손으로 뭉쳐 거품을 뿌려준다. 인형은 결코 그와 같은 크기가 아니지만, 나는 인형으로부터 그를 만진다. 가녀린 목으로 인해 머리가 뒤로 젖혀지며 꺾이는 목을 황급하게 감싸쥐고 머리를 올려준다. 인형은 놀랍게도 말이 없고, 그는 내가 떠올린 이미지로부터 다만 신체만을 내게 허락할 뿐이다. 신문지는 생명과 물질의 매체가 된다. 예약을 통해 일 대 일로 진행되는 퍼포먼스는─곧 개방된 형식이 아니라 사전 예약을 통해서만 장소 특정적인 접속이 허용된다─, 역할 놀이를 한다는 점에서는 어린 시절 소꿉놀이와 비슷하지만 레디메이드 사용을 가급적 줄이고, 인형('자신이 돌연 생각한 사람')을 실제 제작하고 그에 생명을 불어넣는 극을 가정한다는 점에서는, 대상으로 존재를 전유하며 원격의 접촉을 통해 누군가에 가닿는다는, 염원이 깃든 일종의 원시적인 형태의 주술적 미디어에 유사하다.

인형을 매달아 놓는 곳은 해안가를 바라보는 문틀이다. 곧 마법적 언어를 통해 해안가를 펼쳐지게 했던 첫 번째 명명 이후, 시선은 마지막에 이르러서 역시 월드컵경기장 바깥을 향하게 한다. 거기엔 잔잔한 파도와 모래사장, 한적한 분위기가 단지 감지되는 것 외에 어떤 스펙터클도 형성하지 못한다. 곧 장소를 세계로, 인형을 존재로 치환하는 관객의 공모를 통해서 그것은 감각되며 완성되는 것이다. 왜 이곳은 해안가이며 그는 요정인지에 대한 물음은 오직 적절함의 정도에서만 이야기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경계를 그리며 안과 밖의 공간을 만드는 격자로 된 철문, 곧 '저 너머의 세계'를 보는 시선의 위치를 허용하는 장소로부터 '해안가'의 명명 이후, 하얀 백사장의 알레고리로 치환되는 하얀 바닥은, 그러한 장소적 재명명을 허용한다. 또한 거주의 장소가 아닌 체험을 위한 일시적 집단의 정체성을 갖는 월드컵경기장에서 그리고 축제로의 연장된 세계에서 만나는 존재의 정체성은 사실 온전히 규정될 수 없는 부분으로, 요정은 그런 현실로부터 발생한다.

 

 

 

 

매머드머메이드, <변신하지 않음>

 

1인 프로덕션, 매머드머메이드의 김은한은 연기를 양식화하여 보여준다. 그것은 자신의 생래적 몸짓과 발성에서 연장된 것이지만, 이는 '연기하고 있음'을 자기 지시적인 언급에서 드러내는 한편, 의도적으로 동작들을 분절시키고 고체화시킴으로써 보여준다. 전자의 측면에서 이 공연은 자신의 이야기에 이어서 카프카의 『변신』이란 고전을 자신의 방식으로 독파하는 해설적 소개이며 아무것도 없음의 무대를 가시화하며 그 자체로 충족시키는 방식을 가져간다. 가령 액자를 걸려고 했으나 자신의 동생이 깨뜨려 없다는 당황스러운 상황을 원작의 서사와 자연스레 인접시키며 현재의 아무것도 없음의 이전 상태로 공간의 상상적 층위를 넓혀간다. 이는 그가 평소 관심을 가진 미술관의 도슨트와 같은 전략이 그렇게 공간 자체에 상상적 오브제들을 위치시키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측면에서 이 공연은 역시 프린지페스티벌에서 상연된 전 작인 <왕은 죽어가다>(2015)와는 차이를 갖는데, 곧 전 작의 재현적 서사를 축소하지만 역할 되기가 아닌 스스로를 역할로 만드는 자기 소구적 방식의 측면에서 그러한데, 스스로를 연기하지만 그것을 다시 역할로 둚으로써 극은 전() 작의 '비극적'에서 '희비극적'이 된다.

이 작품의 제목은 가령 카프카의 『변신』을 표면적으로는 한 번 부정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는 원작에 대한 부정이라는 거창한 저항이 아닌, 현실 차원에서의 변주되는 스펙터클 그 아무것도 취하지 않는 가운데 다만 그 자신의 신체 움직임이 변신

 

의 말단에 순간적으로 가닿는 극사실주의적 연기 양식을 통한 원작의 일부분적 전용을 통한 패러디 전략에 가깝다. 곧 원작은 더 이상 어떤 의미도 띠지 못한다. 또는 변신 자체를 변신하지 않음이라는 미소한 변신의 차원에서 갈음하면서 원작의 무게를 버텨나간다는 점에서 회피 혹은 부인에 가깝다. 이는 원작의 맥락과 동떨어진 현실 자체의 거리를 상정하며 동시에 인정하는 전략이다.

원작의 이념 대신 오로지 배우의 연기에 대한 집중으로 소급시키는, 미세한 변신(하지 않음)의 연기는 수행성만을 띤다. 동시에 거창한 연극 배우의 원상에 전 작의 '죽어가는 왕으로서 역할의 일회성, 곧 죽음을 맛보는 비극의 숭고한 영도로부터 그가 차라리 역할이 아닌 배우로서 거주하는 가운데(그는 '왕'을 연기하며 '배우'가 된다. 그리고 그 서사는 '죽어가는 왕'이라는 역할의 완성이 아닌, 그것을 연기하며 사라지는 배우의 존립 자체에 가까워진다.) 제도권의 기성 연극 혹은 연극사로부터의 저항 대신 그것을 부인한 것과 같이, 그는 오직 이곳에 거주하며 관객에게 스스로를 바라보게 하며 배우 자체의 탄생과 일회적 현존 곧 죽음을 각인시키려 한다.

'변신하지 않음'이란 제목은, 변신이란 공연에서의 행위 자체를 지우고 있음을 의미하기보다, 원작 자체와 거리를 벌리고 있음을 의미하며('변신'=『변신』), 기존의 연기 양식 자체에 대한 답습으로부터의 의도적인 거리 두기, 부인의 전략에 닿아 있다. 한편으로 랙이 걸린 스크린처럼 동작을 지연시키고 중단시키며 분절된 동작들에 잠재된 에너지는 뭔가 과도해 보인다. 그 틈의 어떤 지점에서 관객은 당황하고 또 웃게 된다. 원작이 가진 '변신'에 대한 형이상학적 의미를 궁구하는 대신, 오로지 '변신(하지 않음)'이라는 연기 양식 자체로 원작을 벗어나며 배우의 기술로 거의 모든 것을 귀결시킨다. 그 여분으로 앞서 말한, 궁지에 몰린 자신의 상황을 흐릿한 서사로 기술한다.

 

 

 

 

p.s. <베이비 돌 스파>에서, 장소 특정적인 서사와 원본을 찾을 수 없는 동시에 희곡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희미한 역할만의 성립, 오직 이지현과 관객 두 퍼포머의 수행성으로만 점철된 시간, 그리고 그 사이에 형성되는 일시적 관계 맺음과 현실 변용은, 이지현이 가고자 하는 예술의 좌표를 복잡한 도식 아래 희미하게만 점칠 수 있게 한다. <베이비 돌 스파>와 같이 <변신하지 않음>은 '흐릿한 서사'를 간직하며 오로지 퍼포머의 수행성으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 희곡을 차용하지 않거나 또는 차용할 뿐 자신만의 스타일, 연기 양식의 측면으로 변신의 의미를 가져가는 두 공연 혹은 퍼포먼스는, 곧 내용의 온전한 전달, 원전에 대한 충실한 해석을 뛰어넘어, 지금 여기 (함께) 있음의 측면에서 생생함을 전달한다. 곧 거기가 아닌 여기. 어떤 지난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그리고 이러한 독자적인 양식의 공연은 이후 과거의 자신을 하나의 원전으로 가져가며 그것의 변주와 구축의 형식을 통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정전화해나갈 것이다. 그럼으로써 동시대의 새로운 토양이 만들어지는 것일 것이다.

 

 

*사진제공_서울프린지페스티벌

**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웹페이지 바로가기 >>> www.seoulfringefestival.net

 

 필자_김민관

 소개_공연예술 프리랜서 기자 및 자유기고가. 문화예술 분야에 전반적인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현장을 쫓아다니며 기록 중. 온라인 뉴스채널 http://artscene.co.kr 편집장

 

 

<베이비돌 스파>

작품소개

참여자는 공연자와 함께 사람 크기의 인형을 만든다. 참여자는 자신, 또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 사물에 대한 인형을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 두 사람은 인형에게 생명을 부여하기 위한 과정으로 ‘베이비 돌 스파’에서 각종 서비스를 제공한다. 마침내 인형이 살아난다!

 

아티스트 소개

참여자와 공연자가 만나 일대일로 만들어가는 공연을 하고 있다.

2014년 아오병잉페스티벌 <어린아이의 처방전>,
2015년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속삭이는 병원>(멜로이즈)을 공연했다.

출연진 & 제작진

출연진 : 이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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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신하지 않음>

 작품소개

원작에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벌레가 되어 가족을 부양할 수 없게 됩니다. "이거 변신하지 않아도 상관없잖아!"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 ‘변신’을 올리는 극단 분들은 벌레의 표현이 너무나 근사했습니다. 하지만 벌레 같은 존재가 되는데 훈련이 필요한가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벌레 같은 삶, 지나치게 움직이지 않는 공연을 만들고 싶습니다. 가망 없는 연극을 보며 기분 좋게 다녀가세요!

 

 아티스트 소개

매머드(소멸해 잊힌 것)와 머메이드(환상에 있는 것)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작은 규모로 할 수 있는 것, 이래도 되나 싶은 것, 형편없는 것에 집중하는 취미 극단입니다. 좋아하는 일 열심히 합니다.


 2015년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 참가 - 왕은 홀로 죽어가다

 

 출연진 & 제작진

출연진 : 김은한 (그레고르 잠자 외)
제작진 : 김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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