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시간과 공간-'난 사랑할 수 없어!'

살아있는 시간과 공간-'난 사랑할 수 없어!'
  • 조원석
  • 조회수 557 / 2008.12.18

 “난 사랑할 수 없어!”의 리뷰 - 살아있는 시간과 공간


강화정씨가 연출한 공연을 보고 논리적으로 리뷰를 쓴다는 것이 가능할까? 단순히 공연에 대한 묘사만으로 공연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공연의 느낌을 전달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공연에 대한 이런 묘사를 해보자.  (사건은 있는데 줄거리가 없어요.  대사는 있는데 관객에게 정확히 전달되지는 않아요. 가끔 무전기에다 뭐라고 하는데 그 무전을 받는 사람은 없어요. 일곱 명의 배우들이 나와요. 전설의 무사, 애증의 여인, 괴팍한 우주의 존재, 이상한 얼굴의 여자, 가수. 그리고 연극 바깥에서 또는 안에서 설치미술을 하는 사람. 그리고 팸플릿에도 나오지 않는 여자. 이렇게 일곱 명인데 팸플릿을 보지 않으면 누가 누구인지 절대 알 수 없어요. 죽은 여자가 되살아나기도 하고, 가수는 노래를 부르지 않아요. 무대는 정말 환상적이에요. 헌옷들이 널려있는 우주의 어느 별 같아요. )

 직접 공연을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수수께끼처럼 들리지 않을까?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직접 공연을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공연을 직접 보라는 말은 리뷰를 쓰고 있는 이 순간 가장 무책임한 말일 것이다. 그래서 공연을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공연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새로운 형식의 리뷰가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새로운 형식이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난 사랑할 수 없어!’의 비논리적인 구조를 그대로 답습해 보는 것이다. 물론 이 새로운 시도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리뷰> 

“난 사랑할 수 없어!”라는 제목이 이상하다. 뭔가가 빠졌다. 목적어가 없다. 목적이 없다. 방향이 없다. “난 누구를 사랑할 수 없어!”이거나, “난 누구와 사랑할 수 없어!”여야 한다. 대상이 없다. 이름이 없다. 전설의 무사도 이름이 없다. 애증의 연인도 이름이 없다. 괴팍한 우주의 존재도 이름이 없다. 이상한 얼굴의 여자도 이름이 없다. 가수도 이름이 없다. 이름이 없으니까 누가 누구에게 말을 거는 건지 희미하다.

 만일 사랑 자체를 할 수 없어 한 말이라면 “난 사랑을 할 수 없어!”라고 해야 한다. 결국 “난 사랑할 수 없어!”라는 문장은 그 문장처럼 정말 사랑할 수가 없다. 대상이 없는데 어떻게 사랑을 할 수가 있는가?

그러므로 “난 사랑할 수 없어!”라는 문장은 참이다.


이곳은 非문장이 참이 되는 세상이다. 문법에 어긋나도, 법에 어긋나도 참이 되는 세상.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이다. 이것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을까? 지금, 2008년은 기계론(‘메커니즘’)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가?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은 믿지 못하는 세상. 사랑조차도 호르몬으로 설명하려는 세상. 웃음의 법칙, 눈물의 법칙, 연예의 법칙, 머피의 법칙. 우연조차도 법칙으로 설명하려는 세상. 이 법칙의 세상에서 법칙대로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 非문장을 견딜 수 있을까? 견딜 수 없다고! 그렇다면 다른 식으로 묻자. 법칙에 따라 산다면 견딜 수 있을까?

 죽음의 법칙을 누가 거역할 수 있을까? 죽음은 너무나도 분명한 법칙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법칙은 견딜 수 있는가? 법칙에 따라 사는 당신, 이 메커니즘에 익숙한 당신이라면 죽음의 법칙을 다른 법칙들처럼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공연의 첫머리에 가수가 중얼거린다. “죽을 수 있는가?” 이 말은 이렇게 들린다. 법칙에 따라 사는 당신, 메커니즘에 익숙한 당신은 죽음의 법칙 역시도 법칙으로 여기고, 정말 편안하게 ‘죽을 수 있는가?’.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면 메커니즘을 들먹이지 말자.


이제 메커니즘은 던져버리고, 非문장의 세계로 들어가자. 법칙에 어긋난 세상. 법칙에서 어긋났지만 참 일 수도 있는 세상으로 들어가자. 이 세상에도 시간은 흐른다. 시간의 법칙. 과거, 현재, 미래로 향하는 화살표. 이 화살표가 목적어가 없는 非문장처럼 방향을 잃는다. 시간이 그 방향을 잃었다고 해서 멈춘 것은 아니다. 흐름이 꼭 화살표만 있는가? 역사의 흐름을 강물에 비유한 것은 은유일 뿐 법칙은 아니다. 흐름에는 공기의 흐름도 있다. 공기의 흐름은 바람이다. 하지만 아무도 바람이 흐른다고 상상하는 사람은 없다. 바람은 움직인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다. 방향이 없어도, 목적어가 없어도, 살아야할 목적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이유. 그 이유를 배우들이 보여준다. 아니 배우들이 곧 그 이유들이다. 그리고 그 이유들이 움직인다. 살아야할 목적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이유들이 지하철을 타고, 거리를 걷고, 커피를 마시고, 춤을 추고, 잠을 청한다. 움직이면 살아있는 것이고, 움직이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왜 움직이는가가 아니라, 움직임 자체가 이유들이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다.


“난 사랑할 수 없어!”는 非문장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非문장의 음성이다. 음성이기 때문에 이 非문장은 더 이상 非문장이 아니다. 음성은 문법에 충실하지 않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공연은 음성의 세계이다. “으으아악.” 배를 칼에 찔린 사람은 그 아픔을 어떻게 전달할까? “많이 아프다.” 얼마나? “굉장히 많이 아프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냥 “아악!” 비명을 지르는 것이 듣는 사람에게는 더 호소력이 있지 않을까? 연애편지를 쓰는 경우를 보자.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별의별 은유를 하고, 갖다 붙일 수 있는 미사여구를 찾아 사전을 찾아본다. ‘사랑한다.’라는 표현을 하기 위해 문장은 점점 늘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한 사랑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함을 느낀다.  직접 사랑하는 연인 앞에서 눈을 마주보며 “사랑한다.”라고 한마디 말을 하는 것이 부족함이 덜 하다.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파동의 떨림이 그 어떤 미사여구보다 더 호소력이 있다. 이것이 음성의 힘이다. 배우들은 문장이 되지 않는 대사를 하지만, 소통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문자의 의미를 희석시킴으로써 음성이 가진 힘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음성의 질감을 증폭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무전기다. 무전기를 통해 나오는 음성의 질감이 거칠면 거칠수록 의미 전달은 더 힘들어진다. 이 음성의 질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배우가 전설의 무사다. 고함에 가까운 대사, 음성이 너무 커서 잘 들리지 않는 의미들.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목소리가 말한다. “그는(전설의 무사)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전설이 무엇인가? 전설은 글이 아니라 음성으로 전달될 때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과거의 어느 이야기가 생생히 살아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그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음성은 음성으로 남을 수 있을까?”로 들린다. 전설이 문자로 대체되는 순간, 전설은 그 생생함을 잃고 죽어버린다.


강화정씨의 시간과 공간은 음성과 움직임이 함께 있는 시간과 공간이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시간과 공간이다. 유기체의 시간과 공간.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죽을 수도 있다. 

보충설명

* 작품명 - 난 사랑할 수 없어
* 일 시 - 2008년 12월 10일~14일
* 장 소 - 포스트 극장

* 본 작품은 강화정 연출의 '시간과 공간 3부작'의 일환이다.
1부 <(없어질)박물관의 초대>(2000년/2007년)
2부 <난 사랑할 수 없어!>(2001년/2008년)
3부 <소설 Juice>(2004년/2005년)
종결편 <1인칭 슈팅-물 속에서>(2005년/2006년)
으로 구성된 공연들은 모두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초현실적 이야기 소재와 실존감 그리고 텍스트 Text 의 허구성을 다루고 있다.

필자소개

글쓴이 조원석은 서울 271번 버스 승객, 진로 마켓 손님, 이 현수의 남편. 상추를 키우는 정원사. 구피 열아홉마리를 키우는 어부. 도장 자격증이 있는 페인트공. 시나리오 '벽에 기대다'를 50만원에 팔고 남들한테 자랑하는 사람. 주중에는 충북음성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학원 선생. "현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다가 말다가 하는 게으른 사람.

그 외에도 수많은 "나"가 있어 어떻게 소개해야 할 지 모르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