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항구의 사랑> 각자의 빛나는 순간들을 더 마주할 수 있게 되길 바라며

 

 

각자의 빛나는 순간들을 더 마주할 수 있게 되길 바라며

 

 

극단Y <항구의 사랑> 리뷰 @신촌극장

 

글_한윤미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을 대면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고, 대부분의 연극 공연들이 연기 혹은 취소되거나 온라인으로 공연실황 중계를 하고 있는 2020년 4월 말. 신촌극장에서 연극 <항구의 사랑>을 보았다. 김세희 작가의 소설 「항구의 사랑」을 강윤지 연출이 각색 및 연출하고 극단 Y가 제작했다.

 

체온을 재고, 문진표를 작성하고, 손 소독 후 극장으로 들어갔다. 각기 색이 다른 하이힐 세 켤레와 한 켤레의 스니커즈가 무대 앞 쪽에 일렬로 거리를 두고 놓여있다. 작품에서 말하고자하는 바를 짐작하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무대와 객석을 가름하며 거리 2m 유지를 위한 기준선처럼 느껴졌다. 하우스 음악으로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가수(아이돌)들의 노래가 나왔다. H.O.T의 노래를 속으로 따라 부르며 흥겹게 작품으로 들어갔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준희(백혜경 분)를 인희(강다현 분)가 갑작스레 찾아온다. 치마를 입고 구두를 신은 준희. 큰 목소리, 터프하다고 할 수 있는 행동, 짧은 머리에 힙합바지, 워커를 신은 전과 다름없는 인희. 준희는 그런 인희와 함께 있는 것을 누가 볼까 걱정된다. 인희는 준희에게 고등학교 시절을 기억하는지 묻는다. 얼마 전 민선 선배(강서희 분)가 남자랑 같이 가는 걸 봤다, 규인(박소진 분)이랑 화해했구나, 수잔나도 남자를 만나더라, 그래서 이제 여자는 안 좋아하냐고 물었다. 준희는 내내 대화를 회피하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난다. 헤어지기 전, 인희는 준희에게 묻는다. “우리 고등학교 때 말야, 그 때 그건 다 뭐였을까.”  

ⓒ이미지 작업장_박태양

 

2000년대 초, 항구도시 목포. 준희와 규인은 둘도 없는 친구이다. 함께 BL을 소비하고, 팬픽을 돌려보며 레즈비언 커플에 대해 말하고 친밀한 스킨십을 한다. 인희는 짧은 칼머리에 피어싱, 펑퍼짐한 교복치마와 체육복바지를 함께 입는다. 규인은 남자를 흉내내는 것처럼 보이는 인희같은 애들 때문에 진짜 이반들이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한다. 

 

준희는 민선 선배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여자를 좋아할 수 없는 부류라고 생각했다. 민선을 만난 후, 준희는 무엇인지 모를 감정들을 민선에게 표현하고 민선 역시 그런 준희의 마음에 응답하며 둘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준희를 만류하는 규인과의 사이는 멀어진다. 준희는 민선과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알고 싶다. 대학생이 되면 함께 살자, 같이 유럽 여행을 가자, 토끼야 하며 자신을 예뻐해 주는 민선 선배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자, 준희는 민선에게 입을 맞춘다. 민선은 준희를 밀어낸다. 그리고 갔다. 그렇게 끝났다. 누군가에게 제대로 말해보지도 못했고, 주변에서 소문만 무성했던 이 관계를 준희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덮고 남은 청소년기를 보낸다. 

 

공연의 장면들

 

‘일반’ 여성처럼 ‘평범’해야 한다 

 성인이 된 준희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전형적인 미의 기준을 수행하도록 요구받는다. 6센치의 은색 구두로 대표되는 대학생이 아닌 ‘여대생’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외모를 가꿔야 한다. 미성숙함으로 치부되는 아이돌 가수, 팬픽 그리고 BL을 좋아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같은 여성을 좋아해서도 안 된다. 이 사회에서 “이상하지” 않고, “평범하게” 편입되기 위해 자신을 끼워 맞추고 바꿔야 한다.   

 

‘당신이 말한 그 사랑은 어떤 것이었을까’ 알고 싶다 1

 중․고등학교 때, 유독 친하게 다니며 진한 스킨십을 나누는 친구들이 있었다. 공연에 나오는 준희와 규인이 하는 스킨십은 친구들끼리의 친밀함의 척도일 뿐, 준희가 민선에게 느끼는 만지고 싶다는 욕망이 들어가 있지 않다. 

민선은 모래사장에 ‘준희야 사랑해!!’를 커다랗게 썼다. 그러나 정작 준희가 입을 맞추자 밀어내고 도망갔다. 민선은 규인의 말처럼 그저 남이 나를 좋아해주는 감각이 좋아서 준희와 계속 만난 걸까. 아니면 민선의 사랑은 자주 만나고 함께 여행을 가고 같이 살고 싶지만, 성적인 끌림은 아니었던 건 아닐까. 

ⓒ이미지 작업장_박태양

 

항구의 소리

 배우들이 지문을 읽거나 여러 인물의 대사를 번갈아 말하는데, 목소리 톤과 리듬이 각기 달라 소리를 듣는 즐거움이 있었다. 공연 내내 바닷가의 파도 소리와 함께 이야기가 드나들었다. 항구의 파도 소리와 인희가 축제 때 춤을 췄던 신화의 노래 WILD EYES의 노랫말󰡒날 다시 보게 될 거야, 상상할 수 없던 나의 모습을~󰡓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사라지지 않았어. 그 때, 나도 있었어.

 배우들은 자신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에서 무대 곳곳에 있는 의자에 앉아 연기하는 다른 배우들을 본다. 성인이 된 규인이 준희에게 말한다. “그 시절, 그 때, 네 마음. 내가 알아, 내가 봤어.” 덤덤하고 길지도 않은 규인의 말은 준희에게 사회에서의 인정과 같은 무게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관계에서 미래를 꿈꾸는 것과 법으로 보장받지 못하는 권리와 사회 

 공연을 본 후, 작년 말에 보았던 연극 로테르담이 떠올랐다.2 앨리스(성수연 분)는 네가 만나는 나는 원래부터 남성이니 너는 레즈비언이었던 적이 없다고 말하는 에이드리언(김정 분)에게 자신의 성적 지향을 자각한 순간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있다. 아홉 살인 앨리스는 친구의 생일파티에 갔다가 친구의 언니를 보고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이내 알아차린다. ‘젠장, 나 여자 좋아하는구나.’ 앨리스는 아홉 살이었지만, 알았다. 고양이처럼, 타이즈를 입고 있는 저 언니가 좋다는 것을.

 

로테르담은 영국 희곡이다. 영국은 생활 동반자법과 동성 결혼이 모두 법제화되어있다. 앨리스는 아홉 살에 자신의 성적 지향과 정체성을 분명하게 인지한다. 물론 가족들의 환대를 예상할 수 없어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미루며 로테르담에 칠 년 째 머무르고 있지만, 영국으로 돌아간다면 적어도 자신이 선택한 동반자와 법적인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

 

대한민국의 성소수자에게는 동반 관계를 위한 법적․사회적 지위가 없다. 남들이 다 받는 보장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됐거나 생활 동반자법이 있어서 병원에서의 보호자로 수술 동의, 가족면회 가능, 은행에서 주택대출을 받을 때 신혼부부만큼 이자가 저렴하고 임대주택이나 청약주택에 가점이 주어졌다면, 소득공제가 가능하고, 장례를 치러줄 수 있고, 상속권이 있다면 아니면 동성결혼이 법제화되어 있었다면 어땠을까. 가시화된 성인 성소수자들이 모래알처럼 많았다면, 준희가 사랑을 느끼며 ‘이게 뭔지 모르겠어.’ 하지 않고, ‘아, 나도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하지는 않았을까.

 

이미 존재하며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을 부정하는 사회. 그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명명조차 하지 않는 사회, 청소년기에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과정이며 성인이 되면 없어진다고 해석하는 사회3 때문에 그 안에서 누군가는 자신에 대해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미리 빼앗기거나, 늦춰지거나, 알고도 모르는 척 피하거나, 인정하기를 두려워하게 되는 건 아닐까. 

 

존재 그 자체만으로 빛나는

 초등학교 때, 준희는 자신을 잘 챙겨주는 인희가 좋았다. 신체검사 날 인희의 가슴을 보고 위화감을 느끼기 전까지는. 준희는 짧은 머리에 자신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인희를 불편하면서 또 부러워한다. 이 작품에서 인희의 존재는 퀴어하다. 성인이 된 인희는 정상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하며, 어딘가에서 살고 있겠지로 귀결된다.   

규인과의 만남 이후, 준희는 인희에게 편지를 쓴다. 민선 선배를 사랑했고, 아직도 사랑한다고. 그 사람, 아름다웠고 빛이 났다고. 그리고 이제 너를 너로 기억한다고. 이 장면에서 조명이 점차 밝아지며 준희를 환하게 비춘다. 민선도, 민선이 빛났다고 말하는 준희도, 그 말을 들을 거라 생각되는 인희도 모두 눈부시게 빛나는 듯 했다.

ⓒ이미지 작업장_박태양

 

작품의 제작 환경에 대하여

 극단 Y는 이전 작업들에서 연극계의 제작환경에 대한 문제인식을 보이는 <그냥 청소하는 것도 필모그래피가 되나요>4를 공연했고, <가부장 없이 연극하기(화학작용4)>5를 통해 위계 없는 작업환경 만들기를 실험했다. 또한 극단 내부의 권리장전6을 만들어, 함께 작업하는 이들이 안전하게 느끼며 각자의 예술성을 발휘할 수 있는 제작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공연은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작업 과정이나 관극 후 흔히 일어나는 오류 중 하나는 ‘그래서 저 배우는 당사자인가?’ 하며 개인의 정체성에 더 집중하는 것이다. 작업 과정에서 이런 부분을 어떻게 접근하였는지, 또한 민감한 장면(동성 친구들끼리의 밀접한 신체 접촉과 키스하는 장면)을 연습할 때 어떤 안전장치와 사전 약속들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연습 전 ‘인물을 분석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의 탐구를 위한 질문과, 개인을 향한 사적인 호기심을 구분하여 질문합니다.’등의 세부조항7을 담은 약속문을 공유했고, 민감한(Intimate) 장면을 구성할 때, 세세하게 동작이 쓰여 있는 원작 소설을 참고했으며, ‘신체에 어떤 방식으로 접촉한다.’는 방식의 언어를 사용하고, 손의 위치나 각 부분의 포지션 등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약속하여 장면을 표현했다고 한다. 

 

 코로나 19 시대의 관극 경험은 현장감과 공연에 대한 갈증을 충족시켜 주었다. 사운드와 배우들의 에너지 넘침과 밝음이 좋았다. 각 캐릭터가 배우들과 찰떡같이 잘 맞아서 작품에 나오는 이름을 한 번에 외웠다. 목포의 바다, 파도소리에 지나간 사람들이 떠올랐다. 동경, 만남, 멀리 있는 사람까지. 

준희, 인희, 규인, 민선 그리고 세희, 윤지, 서희, 다현, 소진, 혜경, 유진, 목소, 수림, 태양, 예지. 이들이 빛나게 살았으면 좋겠다. 배우들이 의자에 앉아 다른 배우들을 바라보는 그 따뜻한 눈빛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춤추는 장면이 적어도 세 번은 나오며, 모두들 춤에 진심이다.

항구의 사랑. 만나서 반가웠고, 곧 다시 만나게 되길 바란다.    

 


1.원작「항구의 사랑」의 본문은 이렇게 갈무리된다. '나는 모래사장을 바라보았다. 교복을 입은 선배의 웃음 가득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그건 내가 원하던 사랑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던 사랑은 다른 사랑들을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녀의 말과 몸짓은 그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사랑에 관해서 썼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이건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제 서른이 넘은 나는 그 모래사장에서 처음으로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가 말한 사랑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2.작 존 브리튼, 번역/각색 김수아, 연출 진해정, 기획 나희경, 제작 프로젝트 이어, 2019.12.19-12.29, 나온씨어터

3.조선시대 당시 동성연애와 여학생을 바라보는 신문과 잡지의 해석 중 “여성의 ‘동성연애’는 이성과의 ‘자연스러운’ 접촉이 제한되어 있는 특수한 환경(여학교)에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관계이며, 결국 학창이 끝나고 이성애의 제한이 풀리는 것과 함께 자연스럽게 해소될 일시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친밀성과 범죄, 그리고 병리학 中> 글 박차민정, 책「원본 없는 판타지」기획 오혜진, 후마니타스

4.작 강윤지/배시현, 연출 강윤지, 주최 성폭력반대청주대연극학과졸업생모임, 주관 극단 Y, 2018.12.09, 카페 FLOCK

5.화학작용4: 오프 스테이지 편_ 우리의 연극은 그렇지 않다. 주최 화학작용4, 주관 극단 Y, 2019.5.21-6.10 무중력지대 무악재

6.작업에 앞서, 권리장전 (극단 Y/ 2019) 붙임 1.

7.공연 <항구의 사랑> 약속문(극단 Y/ 2020) 붙임 2.

붙임1.

극단Y 권리장전
극단Y_권리장전

붙임2.

극단Y <항구의 사랑> 약속문

필자소개 _ 한윤미
바람컴퍼니 창작자, 연출. 비거니즘 지향 퀴어 페미니스트.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작업환경 만들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공연소개>

극단Y <항구의 사랑>포스터

신촌극장 2020 라인업
[ 항구의 사랑 X 강윤지 ]

[공연일시] 2020년 4월 16일(목) - 4월 25일(토)
평일 20:00 . 토 16:00 . 일 16:00, 19:30
(월요일 공연없음 / 약 80분, 10회) @ 서대문구 연세로13길 17 4층 옥탑 신촌극장

[공연소개]
"그 때 우리는 우리의 기분과 의견을 세상에 알릴 가치가 있음을 의심치 않았던 것 같다."
소설 <항구의 사랑>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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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 항구도시 목포.
자신이 여자를 사랑할 수 없는 부류에 속할 것이라 믿는 준희.
'진짜'와 '가짜'가 있다고 생각하는 규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민선.
칼머리에 피어싱, 펑퍼짐한 교복치마 차림의 인희.
네 명의 인물들은 시공간을 넘어 과거의 기억을 현재로 가져온다. 
흐려지게 두고자 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던 감정, 없었던 것처럼 버려두려고 했지만 잊을 수 없었던 감정. 대학생이 된 준희는 민선선배를 기억한다. 이를 ‘사랑’이라 부르기 위해, 이것을 첫‘사랑’이라고 회상하기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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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 공연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그 엄청났던, 소녀들의 사랑하려는 욕구.
그 어떤 이름으로도 호명되지 않기 때문에,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의 파도 속에서 헤매고 치이고 상처받으면서도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었던 마음들. 그러나 그 어떤 이름으로도 호명되지 못했기 때문에 사라진 듯 묻어 두어야 했던 마음들. 무수히 많은 시공간을 넘어서, 당신의 순간들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억 속의 이야기를, 그리고 앞으로의 이야기들을.

 

원작 김세희, 각색/연출 강윤지,

출연 강서희, 강다현, 박소진, 백혜경,

조명디자이너 홍유진, 음향디자이너 목소,

오퍼레이터 이수림, 사진 박태양, 그림 강예지

제작 극단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