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프로젝트 이리 <단 하루>

단 하루-프로젝트 이리
전화벨이 울린다.



새벽, 잠 못들고 뒤척이던 몇시간이 마치 영원과 같은 힘을 갖고 아내와 남편, 그 둘에게 다가온다.

사건은 생각지 못하게 맞은 쓰리쿠션 마냥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다. 이른 새벽, 잘못 걸려온 전화에 깬 한 여자와 한 남자, 다르게 말하면 아내와 남편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아내의 꿈에서부터 시작되는 수다에 남편은 짜증을 내고 어느새 날이 밝아온다. 이런 저런 대화가 이어지던 중 아내는 생명유지장치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내가 죽게 될 상황이라면, 당신이 내 생명유지장치의 스위치를 꺼줬으면 좋겠어. 약속해줄래?’, ‘당신이 그런 상황이라면,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을까?’

울고, 화내고 하는 사이에 날이 밝고 그들은 대화를 멈추고 출근한다. 해결되지 않은 대화와 하룻밤 사이의 온갖 감정의 홍수 속에 버둥거리며, 시간은 서서히 다시 만날 저녁시간을 향해간다.

그들이 곤경에 빠지는 것은 자신에게는 중요하지만 남에게는 보잘것없는, 혹은 남에게는 중요하지만 자신에겐 보잘것없는 일들로 이뤄진다. 그리고 그 곤경 속에서, 이들은 그 보잘것없는 문제에 사로잡혀 그 속에 깊이 파묻힌다. 뭣보다 그 문제가 명쾌하게 해결이 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 문제에 대한 그들 나름의 대답은 그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일 뿐, 타자와 만나서 생기는 외부적인 사건에 대한 해결이나 이해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이런 순간들이 의미를 갖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 자신에게 내재적으로 잠재해 있던 문제를 표면화하여 만난다는 것이다.



남자의 경우 아내에 대한 무심함, 그러니까 아내의 꿈을 하잘 것 없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에는, 자신은 아내와 다르게 이성적이며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고 여기는 마음이 들어있고, 이러한 마음은 ‘단 하루’의 사건을 낳는 내재적인 이유가 된다.

이런 남자의 태도는 극 중 여러 형태로 표현이 되는데, 예를 들면 심장 결석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아내에게 ‘무식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그렇다. (물론, 안좋은 분위기를 느끼고 급히 ‘너’가 무식하다에서 ‘우리’가 무식하다로 바꾸지만) 이와 더불어 끊임없이 아내의 생각을 부질없다 여기는 혼잣말과 태도에서도 볼 수 있다. 그때에도 자신은 아내와 다르게 사태를 직시하고 명쾌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는 모습이 보인다. 출근용 양복으로 보아 아마 남자는 ‘회사’에 다니는 샐러리맨일 것이고, 그의 태도로 보아 부하직원들을 ‘아내’처럼 우습게 대하고 자신은 그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사건을 냉정히 바라보고 해결해낼 수 있다 여길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는 그와 사고방식이 다른 아내-정장을 입지 않는 감성적인 아내를 이해할 수 없고, 동감할 수도 없고, 그렇기에 아내의 문제, 아니 이제는 아내와 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가 해결할 수 있는 범주에 들어있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고심해보고, 고민해본다. ‘그의’ 입장에서. ‘아내의 반응’을 고려하고 자신의 태도를 고려하고 그 대답이 불러올 파장을 고려하는 그의 대답은, 아내가 제기하는 문제 지점을 끝까지 파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 둘은 그렇게 접점을 찾지 못하고 명쾌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다. 이에 깊어지는 것은 ‘벽’이다. 그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벽. 아내는 남편에게 이러한 벽을 느끼고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이제는 그런 이야기 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것은 남편에게 화가 난 것도 아니고 상처를 받은 것도 아니다. 분명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관계에서도 서로에겐 닿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 그것을 온몸으로 느꼈을 따름일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아무 해결책도 갖지 못하고 그저, 같이 있을 뿐이다. 남자는 이런 결론에 이른다. ‘네가 진정 원한다면 생명유지장치의 스위치를 꺼 주겠다. 그러나 내가 그런 상황일 때 생명유지장치를 끄지 말라. 난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남자에게는 살아가는 것만이 중요하다. 그는 죽음을 모른다.

여자는 어떤 사람일까. 죽음에 이르러가는 이들을 옆에서 본 사람이다. 그녀의 할머니는 관절염을 심하게 앓아 손가락 하나 굽히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 천천히 죽어갔고, 할아버지 또한 그 모든 것을 잊고-손녀조차 잊고 요양원에서 죽어갔다. 그녀에게 죽음과, 죽음에 이르는 ‘질병’은 마음 깊은 곳의 각인이다. 그녀는 죽음을, 아니 죽음 자체보다는 죽음에 이르는 질병과 몸의 상태가 낳는 고통이나 사회적 상황에 대해 두려워한다. 그녀가 가까이서 겪었고 고통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의 몸이 좋지 않은 것, 자신의 몸이 좋지 않은 것에 대해 강박적으로 걱정을 한다. 그러나 그녀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실제적인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한다. 머리가 아픈 것이 의학적 측면에서 왜 아픈지도 모르고 그저 티브이나 신문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똑같이 뱉을 뿐이다. 애꿎은 담배를 욕하면서 몸이 아픈 것이 담배 탓이라 돌려도 보고 담배를 끊어야 한다고 이야기도 하지만, 정작 그녀는 피던 담배를 계속 핀다.

그들은 자신의 사고방식에 갇혀있다는 것과 그렇기에 서로와 연관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서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서로를 완전히 공감할 수 없고, 그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구체적 방법을 갖고 있지도 않지만,
그러나
같이 살아가고, 서로를 귀히 여긴다.

이것이 산다는 것의 미스테리이자
산다는 것
그 습관의 힘이 갖는 놀라운 기적이다.

어찌됐든, ‘단 하루’의 사건이 잘못 걸려온 전화한통에서 시작해 황당하게 벌어지지만, 그 문제는 그들 사이에 내재적으로 담겨있었고, 그 문제는 쉬이 해결되지 않았으나, 그들은 살아간다. 별것 없는 일상을, 여덟시에는 출근하고 돌아오면 같이 잠드는, 그런 삶을 말이다. 잠자다 이빨을 갈고, 이빨 가는 소리에 짜증을 내고, 마우스가드를 해보고, 그걸 귀찮아해서 다시 이빨을 가는, 그런 현실적인, 현실적이어서 더 연극같은 삶을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특히 남편이 이날, 수많은 일상 중 오늘인 ‘단 하루’를 겪으면서 아무런 변화도 없이 지나갔던 것은 아니다. 계속해서 잘못 걸려온 전화에 대해서도 그냥 귀찮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모르는 어떤 사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하루 전에는 관심조차 없었고 그저 미친사람 취급하던 전화 속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또다시 전화가 온다. 무관심과 덮어두고 내던 짜증을 치워보니, 그 사람은 술취한 것도, 미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고, 그 사람도 어떤 사정을 갖고 있을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결할지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러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것, 그것이 그가 아내와의 하루를 보내면서 얻게 된 소득이자 변화이다.

비록 그는 여전히 죽음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사람에게는 전화를 잘못걸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 서로가 다르다는 것은,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그 벽을 느끼는 것은, 서로의 다름에 좌절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있음을 인정하고도 또 하루를 살아갈 힘을 갖는 것이다.

비관적이라면 비관적인 결론이다. 사건이 해결된 것도 아니고 서로의 벽을 허물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솔직하다. 희망사항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는 모습을 그렸기 때문에. 그리고 그 솔직함 속에, 사람들 사이에는 벽이 있다는 그 비관적인 솔직함 속에서도 다른 이와 같이 부대끼며 또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관적인, 솔직한, 해피엔딩이다.

프로젝트 이리 <단 하루>

연극 70min 8.17(월) 20:30 카페 수카라
각색/연출 이범 | 배우 신윤숙 김태문

작품은 한 부부의 새벽 몇 시간을 다룸으로써 일상적인 이야기 안에 잠재한 생의 어두운 이면을 희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나와 아내는 새벽 세시 잘못 걸려온 전화 때문에 깨어난다. 다시 잠들고 싶은데 갑자기 아내가 자신의 꿈 얘기를 하기 시작한다. 난 자고 싶다. 그러나 결국 밤을 새고 만다.

<프로젝트 이리>는 새로운 무대 언어를 탐구하기 위해 모인 젊은 예술가 집단이다.
http://club.cyworld.com/projectyri

글 | 개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