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NOW무용단 <안팎>

2009. 11. 5. 12:15Review

 

NOW무용단 

<안팎>


- 시(詩)

 나의 엄마가 나의 곁에서 조을 적에 나는 나의 엄마가 되고

또 나는 나의 엄마가 되고 그런데도 나의 엄마는 나의 엄마대로 나의 엄마인데

어쩌자고 나는 자꾸 나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가 되니

나는 왜 나의 엄마를 껑충 뛰어 넘어야 하는지

나는 왜 드디어 나와 나의 엄마와 나의 엄마의 엄마와 나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냐.



1. 안이 밖이 되고 안팎이 되는 이야기

 한국 NOW무용단 <안팎>은 초연 이후 2005년 ‘올해의 예술상’ 을 수상하고, 2006년 서울국제 공연예술제 국내초청작으로 상연되었다. 올해 12회를 맞은 2009 SIDANCE 축제의 국내작품으로 재공연되었다. 5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 진가는 유효하다. 한국무용을 전공하고 유학을 다녀온 안무가 손인영은 NOW 무용단을 이끌면서, 현대적인 안무와 한국적인 미학 오브제를 섞어, 간결하고 세련된 댄스씨어터를 시도한다. <안팎>은 젊은 여자 무용수들만으로 이루어진 공연으로, ‘딸’의 시선으로 엄마와 엄마의 엄마를 기웃거리고, 갸웃거리는 몸짓을 담아 내었다.




2. 엄마의 엄마, 딸의 딸

 엄마와 엄마의 엄마, 그리고 나는 띠/피로 엮어져 있다. 엄마의 이야기를 하자면 스토리는 한도 없고, 개인적인 끝이 될 수밖에 없을 터. <안팎>도 그러한 ‘개인’적인 체험으로부터 시작된다. 다소 센티멘털한 구석도 없잖아 있지만, 우리 모두는 한편으로 방황하는 딸들이며, 걱정하는 어머니다. 이 땅의 ‘모녀(母女)’들의 왁자한 분위기, 넘쳐나는 에너지, 내면적인 속풀이 등을 신체적으로 풀어낸다. 여성과 어머니, 딸들 이라는 소재가 이미 빈번하고 상투적임에도, <안팎>공연의 감수성은 무겁지 않고 오히려 산뜻/다양하다. 이는 '신체' 언어 외에도 적극적으로 사용된 공연 오브제들 때문이리라.

 먼저 <안팎>으로 명명된 제목 때문인지 ‘공간’ 에 대한 쓰임새는 다부지다. 빈공간이지만 빛으로 쪼갠 여러 개의 구역은, 경계는 있지만 벽은 없는 그녀들의 삶을 보여준다. 딸의 입장에서는 참 지긋지긋할수도 있겠다. 문을 통과하면 다른 문이 있고 그 문을 통과하면 또 다른 문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 엄마가 있고, 엄마가 통과한 곳에도 엄마가 있다. 엄마의 엄마가 통과한 곳에는 딸의 딸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 공간을 창출해 내기도 한다. 2층 공간에서 1층으로 물을 떨어뜨려주기도 하고, 원통을 굴려가지고 나와서는 그 위에 위태롭게 서서 몸짓을 이어나가기도 한다. 좁은 원통 위에서 허리를 크게 숙여 몸을 낮추는 모습은 실로 인상적이다. 10여명의 무용수들이 좁은 공간을 디디고 서서 응집된 몸짓을 보여주었다. 좁기에 그 움직임은 절실했고, 또 여럿이 같은 동작을 행했기에 더욱 강렬했다. 삶의 무게에 눌리기도 하지만, 그 좁은 기반을 딛고 스스로 몸을 쳐드는 ‘홀로서기’ 를 엿보기도 했다.

 여성(딸)의 몸부림은 의외로 과격하고 솔직하다. 숨 막히고 괴로운 것이다. 그러나 주변의 사람들은 그녀를 놔두지 않는다. 어린시절 열을 내리기 위해 엄마가 이마에 올려주던 물수건은 오히려 그녀를 숨막히게 만드는 오브제가 된다. 2층에서 떠내려주는 물은 그녀의 얼굴을 감싼 천을 적시며, 꼼짝 못하게 양팔을 붙잡아 놓은 상태로 ‘곤란’한 호흡의 감각을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이시킨다. 위태위태하고, 숨막히고, 벗어날 수 없는 감정이 여실히 반복되어 드러난다. 이른바, 애증(愛憎)의 관계이다. <안팎>은 서로 사랑하지만, 동시에 미워하는 역설적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다.

 할머니들의 마음씨 좋은 웃음과 수다는 바닥에 깔린다. 그 위에 문자가 아닌, 원형의 부드러운 상징기호가 붓으로 새겨진다. 빈 공간에 영상과 몸과 기호가 중첩된다. 엄마들의 말소리위에 딸들의 몸소리가 얹어진다. 이처럼 춤의 이미지성과 연극성/ 유희성과의 결합에  가수 한영애의 ‘봄날은 간다’ 등, 익숙한 가요를 편곡한 음악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이러한 조화를 통해 춤의 움직임과 서정성 속에 묻힌 삶의 기억은, 아련하게 아프고, 지지리도 짙게 형상화된다.

 물리적으로 상상해 보자면, 나는 엄마의 밑에서 나왔다. 그리고 엄마 역시 엄마의 엄마의 밑에서 나왔다. ‘빛’, ‘층’, ‘물’ 의 기호를 감각적으로 빚어낸 솜씨도 놀랍지만, 자유소극장 바닥과 벽을 사용, 너비감/높이감이 실감나에 ‘三代’의 모습을 꼴라쥬로 시각화한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나는 엄마의 안에서 나왔고, 엄마도 엄마의 안에서 나왔다. 안에서 밖으로 나온 존재는 그 안을 그리워 하면서도, 그 밖과 다른 존재로 살 수밖에 없다. 그 밖은 늘 어딘가에서 나를  보는 존재다. 그 시선이 지겹기도 하지만, 언젠가 나 역시도 또 다른 ‘밖’ 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소리의 근원

위에서 주절거린 시(이상李箱 의 시(詩) <오감도>의 변주)에서는, 아버지를 엄마로 바꾸었을 뿐인데도, 기성에 대한 기존의 관념이 전복되는 쾌감이 돌아온다. 엄마의 엄마는 왜 저렇게 엄마와 똑같을까? 나도 그러한가. 할머니의 잔소리를 듣다보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잔소리다. 엄마가 할머니에게 잔소리하는 것을 보고, 할머니에게 잔소리 하지 말라고 나는 엄마에게 잔소리를 한다. 그 잔소리는 내가 소시적에 너무나도 싫어했던 엄마의 잔소리다. (나는 딸은 아니지만) 그리하여 잔소리의 대물림은 달성되었고, 나는 한편으로 좌절하면서, 한편으로 체념하고, 한편으로 잔소리의 근원을 그리워한다.  

 ‘엄마’ 라는 단어는 엄마 ‘노릇을 하는 것’과 그렇기에 ‘조는 것’ - 정도로 소생(疏生)한다. 그러할지라도 어찌할 도리는 없다. ‘엄마’ 라는 잠재된 단어는 딸의 잘록한 허리에 둘러있다. 허리에 둘러진 ‘띠’ 는 손녀를 업은 할머니의 굽은 허리에 여전히 달라붙어 있을 테다. 먼 훗날에 잘록한 허리가 펑퍼짐해지고 굽어질 무렵, 딸의 딸을 업게 되면 그 순간 ‘딸’ 이라는 단어도 소생할 것이다.


 공연의 클라이막스는 허리를 구부린 채 다듬이 방망이를 지팡이처럼 짚은 무용수들이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하나씩 자리 고 앉아서 두드리기 시작한다. 내리치기 시작한다. 그 장면에서는 어떤 사유도 의심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무용이라기 보다는 일상의 재현이다. ‘두드림’ 은 1차적인 물리적 ‘행위’와 맞부딪치는 ‘소리’ 정도에 불과한데도, 묘하게 역사적인 맥락과 진솔한 몸짓이 어우러져 감동을 이끌어 낸다. 기워입은 색동옷의 젊은 여인네들이 두드려대는 파열 행위는 안과 밖의 경계에 균열을 내고, 그 음(音)으로 이어진 띠를 명징하게 이미지화한다. 

4. 시작始作을 권勸하며

 무용공연에의 난해함을 돌파하는 방법은 ‘시’ 를 찾는 일이다. 시는 일종의 개념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현대 무용은 응축된 미와 의미를 이미지화하여, 몸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언어’ 를 통해 표현하는 시와 많이 닮았다.  


 어떤 공연은 모두 이러한 시적인 상상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바로 그 개념을 찾는 것! (그러니까 더 큰 난제는 평소에 시를 많이 알고 있어야 할 것)이 관건(關鍵)이다. 혹은 시를 찾아내는 일에 실패한다면, 기존에 알고 있는 시를 바꾸거나 새롭게 시를 써보는 것도 좋은 관극 방법이다.


 영상에서 하얀 바닥에 붓글씨로 알수 없는 기호들을 만들듯, 공연을 보면서 상상할 수도 없는 자기만의 무대에 시를 써보는 것은 어떨까. 바람직하게도(?) 공연이 끝나면 시 한편이 남는다. 이번의 시제는 <안팎>이었다.


 올해 작고하신 연극평론가인 (고)한상철 선생님께서는 말년에 언어로 충만한 연극보다는 몸의 말인 무용 공연을 즐겨 보러 다니셨다고 한다. 한편의 이야기를 ‘시청(視聽)’ 하러 가는 것도 좋다. 이미지-쇼(show) 를 체현하러 가는 것도 좋겠다. 덧붙이자면, 시를 한편 쓰는 기분으로 무용 공연을 청(請)하러 하는 것은 또 어떨까? 공연 예술 축제로 가득한 가을. 도처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좋은 무용공연은 너무나도 많다. 시를 달성(達成)하고 난 홀가분은 , 서사와 이미지, 쇼에서의 아쉬움 혹은 배반감보다는 덜하지 않을까. 시작(詩作)하는 마음으로 무용공연을 여러분께 권(勸)하는 바 이다.


NOW무용단 <안팎>

몸으로 풀어낸 여성 3대 이야기
안무가 손인영의 ‘닮음과 다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의 보고서
<안팎>은 안무가 손인영의 기억 속 조각난 파편들을 통해 여성 3代, 할머니와 어머니, 딸을 관통하는 이어짐과 닮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안’과 ‘밖’이라는 개별성이 연음법칙에 따라 “팎”이 되는 것은 <안팎>의 주제를 상당히 효과적으로 드러내준다. ‘밖’은 ‘밖’이지만, ‘안’과 붙으면 ‘팎’이 되어 완전한 ‘밖’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뫼비우스 띠처럼 ‘밖’이 ‘안’과 더불어 있는 경우이다. ‘안팎’은 母에 대한 끝없는 부정을 통하여 확인하게 되는 ‘닮음’에 대한 이야기이며, 닮음을 통하여 면면하게 이어지는 끈끈한 역사성에 대한 순수한 보고서다.

10월 20일 (화) 8pm,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http://www.nowdance.org/

글 | 정진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