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춘풍의 처> 그리고 <무한도전>

2010. 2. 25. 20:17Review


[리뷰] <춘풍의 처> 그리고 <무한도전>


 
0. 동시상연




국립극장 달오름 극장에서 <분장실>과 <춘풍의 처> 연극이 동시상연을 하고 있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오태석 연출과 극단 목화의 작품 두 편이라니, 쌍수를 들고 환영할만한 일이다. 허나 일부 관객들의 표
정은 슬슬 지친 기색. 최근 공연장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잦은 표정 중에 하나는 바로 ‘귀가에 대한 열
망’ 을 담은, 고민하는 관객의 얼굴이다. 첫 번째 공연이 끝났다. ‘인터미션’ 에 관객들은 과거에는 상상
도 할 수 없었던 임파서블한 ‘미션’ 을 행한다. 앞의 세 줄이 사라졌다. 사라진 세줄 덕에 오태석의 작품 <춘풍의 처>는 더욱 더 확실하게 보였다.

앞 공연은 체홉의 <갈매기>를 공연하고 있는 여배우와 그 연극의 분장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대 뒤
이야기를 다룬 시미즈 쿠니오 작, 오태석 연출의 <분장실>. 연극하는 산(生) 자들과 연극을 못해 안달
하는 죽은(死) 자들의 애환이 코믹하게 그려진 작품이었다.(지난 인디언밥 리뷰 참고) 이번에 다룰 공
연은 동시 상연의 다음 편, <춘풍의 처>다. 관객 ‘탈주’ 의 단편적 현상으로 서두를 열었으나, 딴(?)편적
인 의문은 멈추지 않는다. 결국 무모한 해석이 필요했고, 며칠 전 TV에서 본 프로그램 <무한도전>이 떠
올랐다.


1. 놀이에 대한 질문



우리는 왜 놀아야 하는가. 혹은 우리는 왜 놀지 못했는가? 우리가 연극을 보는 것은 일종의 놀이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국립극장의 달오름 극장에서 오태석의 연극을 보는가? 오태석의 연극이라니, 바람직하다 못해, 탁월하다. 재미있는 작품이 드문 한국연극계에 큰 맘 먹고 진입한 관객
들에겐 썩 괜찮은 선택임이 분명. 하지만 오태석도, 목화도, 동시 상연도, 국립극장도 관객들의 ‘귀가’
는 막을 수 없다. 동시상연에서 오는 관극의 기쁨은 두 배가 되어야겠으나, 초조함이 배가 되었나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분장실>도 <춘풍의 처>도 나쁠 리 없다. 의미도 재미도 여전히 충만하다.

우리는 왜 TV프로그램 <무한도전>을 보는가? 이러한 질문으로 다시 바꿔보면, 놀아야 하는 이유에 대
해서는 보다 명확해 진다. <무한도전>을 통해 재미와 웃음과 감동을 느낀다는 대답 속에는 ‘놀이’ 의 핵
심이 담겨있다. 현대사회를 사는 관객들에게 ‘월화수목금’ 의 일상은 비관적이고, 고통스러운 에너지가 축적되는 시간이다. 말 그대로 스트레스가 ‘쌓인다’. 다행히도 토요일의 <무한도전>은 일상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단번에 해소시킨다. 주말 예능 프로그램의 변치 않는 사명은 바로 그런 것이다. 음악프로그램
에서 나오는 ‘걸 그룹’ 도, 야생 버라이어티의 ‘시골’ 도 시청자들의 부정적 에너지의 해소에 기여한다.
단지 ‘보는 것’ 만으로도, 쾌락을 줄 수 있으니, 다행스런 일이다. 현대인에게 ‘보는 것’은 ‘노는 것’이며,
모니터를 보며 커뮤니티 게시판에 댓글을 다는 행위는 ‘참여’ 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의 활력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해소하는 것을 넘어, 긍정적인 힘과 가능성을
선사한다는 특장점이 있다.
별걸 다 도전하는, 희극적인 캐릭터들은 어떤 텍스트가 주어져도 놀
이 이상으로, 의미 이상으로 나아간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기대이상으로 잘 놀고, 뒤통수를 칠
만큼 기획과는 멀어진다. 그런 와중에 그들이 놀다 지나간 자리에서 ‘발견된’ 의미들은 은근히 신선하
다. 여행보다도, 연애보다도 TV시청이 낫다. 참으로, 대단하다. 아차, 본 리뷰는 <춘풍의 처>에 대한 것
이었다.


2. 누가 21세기 시청자/관객들을 구원할 것인가?



연극인 ‘오태석’ 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지난 십 몇 년간 꾸준히, 그리고 유행처럼 한국연극계의 화두였
다. 그도 그럴 것이 해석하면 할수록, 재미있는 텍스트이고, 신기한 공연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태석의 작품은 해석 가능의 지점, 지평을 열어갈수록 더욱 신명나고 재미있다. 알고 나면 더욱 재미있을 여지
가 크게 존재한다. 초기 <무한도전>시절 누구보다 그 프로그램의 코드에 누구보다 빨리 적응했던 매니
아들처럼 말이다.

오태석 연극의 관객들은 전통의 양식에서 비롯된 공연의 축제성과 현대성을 실감하고, 즐기
고, 해석하고, 부추긴다. 보는 자(관객)가 아는 자(식자)이며, 아는 자가 즐기는 자(참여자)다.
(그간 오태석에 대한 연구는 실로 넘친다) 광범위한 시도의 실체를 한 두 줄로 규명하기란 어렵지만, <
춘풍의 처>의 경우 ‘전통’ 을 극장의 무대로 들여와 두루 무난하게 교통하며 살던 옛 삶의 방식을 재현
하려 한다. 미학의 양식은 옛것에 기대지만, 정신은 전위적이다. 현재의 시각에서 시사성을 획득하려는 시도도 유효하다.

도대체 어디? 어떻게? 그게 뭐? 라고 반문하는 관객들도 있을 것이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대신, 개인적인 소감으로 풀이과정을 밝혀본다.
<춘풍의 처>나 <무한도전>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공통적으로 가진 ‘재미화’ 와 ‘의미화’ 의 과정에 있을 것이다.
실은 둘 다 전개 과정이 흥
미진진하다. 성긴(loose) 텍스트, 알듯말듯한 주제, 황당한 캐릭터들. 그 와중에 연출의 의도는 명료하
다. 나름의 독특한 표현 어법(sauce)으로 관객들의 의식/무의식에서 기인한 ‘소재(source)’ 들을 버무
리는 것. <무한도전>에서 보여준 비인기 종목 혹은 무관심의 영역에 대한 추적은, 잘 들여다보면 시청
자들의 의식/무의식을 공략하고 있다. 과거 인기분야였다가 버림받은 현재적 현상, 너무 대단하거나
사소해서, 관심을 둘 수 없었던 분야, 혹은 한국 사회의 병리적 현상에 대한 노골적 불만 표출 등등. 이
를 소재로 삼아 헤집어 놓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다.

토요일 저녁마다 본방사수를 외치며 TV 앞으로 모여 앉았던 무도폐인들은 최소한, <무한도전> 한편을
웃고 즐김으로써, 과거의 진부함을 떨쳐버릴 수 있다. 진행과정 내내 찌질하고, 처절하고, ‘hot’ 한 관문
을 함께 겪고 나서 획득하는 것은 상황에 대한 ‘거리두기’, 진정한 ‘cool’ 이다. ‘현상’ 에 대한 진솔한(진
솔하다고 믿게 되는) 풀이에 동참하고 나면, 이를 극복할 수도 있고, 재미를 붙여볼 수도 있고, 웃고 마
는 수도 있다. 알고 보니 별 의미가 없더라, 하는 결론도 괜찮다. 신화가 사라지고, 누명이 벗겨지고, 다
양한 모습으로 비춰질수록, 대중들은 개별적인 자기 취향을 발전시킬 수 있다. 무도의 김태호PD가 말
하고자 하는 바는 그런 것이리라. 결국에 TV든 공연장이든 가장 소중한 관객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다.
지금까지, 오태석의 <춘풍의 처>를 설명하기 위한 선(先)개념이었다. 뱀보다, 뱀의 발을 더 크게 그렸
다.


3. 배보다 큰 배꼽, 사공들이 가는 산





줄거리 나가신다. 춘풍의 처가 천하 한량 춘풍이를 찾아나선다. 바다에서 잠시 인간 세상에 올라온 미
물형제 이지와 덕중을 만난다. 그들의 도움으로 평양감사가 되어, 대놓고 바람 피다가 옥사를 치루던
춘풍이 있는 평양감영에 까지 이른다. 본처는 서방을 꼬신 장본인인 추월이를 보자 울화가 치밀지만,
천하절색, 재주만점의 평양기생을 이기지 못한다. 결국 사경에 처한 춘풍의 처 심달래는 이지, 덕중의
도움으로 잠깐 살아나지만, 춘풍은 속절없이 심달래를 추월이로 착각하고 만다. 하는 수 없이 춘풍의
처는 추월이로 행세하면서 서방님과 마지막 정을 나누고, 서방을 꼭 닮은 자식을 누고(?), 저승으로 행
차한다.

<춘풍의 처>는 늙은 여인과 남편과 첩의 삼각관계 이야기면서, 도망간 ‘영감’ 의 추적기다. 사랑하는 사
람 앞에서 죽고, 사는 일들이 벌어지고, 남장한 재판관이 나오므로 <로미오와 줄리엣>에 <베니스의 상
인>도 연상될 듯 하지만, 거의 막장드라마에 가까운 전통판 ‘사랑과 전쟁’ 이다. 춘풍과 처, 이지와 덕
중, 아버지와 아들, 의사와 상여꾼 등등, 악사에 이르기까지, ‘심달래의 서방 찾기’ 의 과정에 끼어드는
캐릭터들도 다양하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데, 그 과정이 실로 재미있다.

춘풍의 처인 심달래 역의 이수미는 새삼 늙어버린 아줌마의 푸근한 외양을 지닌다. 하여 한스러운 신세
한탄과 몸짓에서 연민이 절로 든다. 돈 버는 재주는 타고 났는지, 복대로 찬 전대는 일천금이 훨씬 넘는
다. 그녀에게 단 하나의 결핍은 남편의 사랑이다. 그녀에겐 더 이상 마음 줄 자식도 없다. 정자나무 밑
에서 낮잠 자다가 솔방울에 맞아죽은 부부의 첫째 자식과 미꾸라지 잡다가 물에 빠져 죽은 둘째, 하도
귀여워 어르다가 경기로 풍에 걸려 죽은 셋째의 곡절이 훅, 지나간다. 이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
르겠지만, 박복한 여인의 사연은 동정 대신에 춘풍의 분노와 관객의 황당한 웃음을 부른다. 크고 뻔뻔
한 얼굴을 들이대는 춘풍으로 극단 목화를 대표하는 김병철이 특유의 너스레를 뽐내며 등장한다.

심달래에 비해 훨씬 예쁘고 젊고 화사한 추월이는 소리도 잘하고, 춤도 맛깔나게 춘다. 일년에 윤달이
끼면 아이 열셋도 낳을 수 있다는 성적 능력의 과시로 심달래는 심통이 난다. 재미있게도, 무대에 선 인
물들과 관객들은 같은 마음이다. 심달래에게 동조하면서도, 추월이와 그녀에게 환장하는 춘풍에게도
납득이 된다. 아무래도 추월의 진짜 매력은 자유 일탈의 분방함에 있는 것이다. 남편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내는 유교적 그녀 심달래와 조신과 순종이라는 가치를 나몰라라, 욕망에 충실한 자유주의자
추월은 무대 위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이춘풍전>, <별주부전>, <홍동지> 등등의 전통의 원전으로 버무린
오태석의 <춘풍의 처>는 옛 것의 가치와 의미를 따르는 대신, 심달래에게선 ‘일편단심’ 과 추월에게선 ‘자유’ 라는 사랑의 모습을 발견해낸다. 인물들 중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누구도 지루하게 만들지 않는다. 두루마기라는 권력의 옷을 걸친 심달래와 분홍치마를 걸친 성적 매력덩어리 추월을 대비시켜, 욕망을 억지로 거부하지 않는 솔직함을 보여주면서, 욕망의 인과관계가 불러오는 파국 대신 평화롭고 반성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단한번의 구타로 생명을 해치던 덕중은 병중에 있는 어미를 생각해 스스로 재물이 되고, 콩깍지가 씌여 자신을 추월로 오해해 달려드는 춘풍을 심달래는 품에 안는다. 죽었다 사는 게 참, 쉽다. 쉬우니 참 경망스러운데, 그러니 허망함은 더하다. 그제야 그녀의 이름이 일편단심 민들레나 님 가는 길에 뿌리는 진달래가 아닌 이유를 알겠다. 심달래. 봄바람이 불어 도망가는 ‘님’ 의 마음을 잡지 못해 마음 달래야만 하는 그의 마누라. 춘풍의 처.



4. 발 달린 도마뱀으로 뱀을 설명하기





공연에서 확인한 오태석 특유의 연극적 코드는 ‘감정 처리의 뜨악함’ 이다. 인물들이 해대는 말
과 행동에, 객석의 분위기나 마음이 착착 맞지 않아 서먹하지만, 왠지 관객들의 입가엔 미소가 그득하
다. 분명히 캐릭터들은 슬픈 사연을 쏟아내고 있지만, 그 상황이 너무나도 코믹한 것이다. 반대로 캐릭
터들은 몸 개그를 하고 있는데, 애처롭기 그지없다. 이를테면, <춘풍의 처>에서 사람이 죽는 방식은 ‘단
한번의 구타’. 박치기로 단번에 상대를 제압하는 덕중은 사람을 저승으로 보내놓고, 아차, 실수였음을
고한다. 죽었다 하더라도, 엉터리 봉사가 경을 외우면 다시 이승으로 넘어온다. 그런 방식으로 여럿이
죽었다 살아나고, 무대는 난장판이 되며, 막판에는 결국 춘풍의 처와 덕중은 영영 저승행이다. 이런 황
당을 어찌 감당하랴. 보란 듯이 아픔의 순간을 엉뚱한 상황으로 풀어내는 작품의 기지가 감탄스럽다.

오태석 연극의 무대 위 인물의 통증은 특유의 무통(無痛)의 표현으로 드러난다. 목숨이 끊어지고, 자식
을 출산하는 그 아픔의 과정은 인물의 넉살로 희화화된다. 여섯 개의 손가락을 지닌 심달래가 자신의
손가락을 스스로 끊어 서방을 구하려는 의지 표현의 장면은 역시나 자학개그에 이어진 유난스런 슬랩
스틱의 장면으로 표현된다. 고통의 연극적 재현은 통증의 끔찍함이 아닌 ‘무감각’ 한 것으로 환기되는
것이다. 이처럼 오태석의 작품에서 유달리 뻔뻔하게 등장하는 사회적 약자들과 신체적 불구들은 관객
들의 동정을 원치 않는다.
다만, 그들의 병신놀음의 과정을 따라 웃다보면 끝에는 언제나 반성적 사유의 종착점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엉망진창인 인과관계. 뭔가 어긋난 듯한 진행이자 결말이면서도, 그 비논리와 감정의 무질서가
지향하는 나름의 정연함. <춘풍의 처>를 보고나서 <무한도전>을 떠올렸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을까. 두 프로그램 모두 해체적인 작품으로, 각각의 장르를 실험하여 관객과 시청자들을 참여시킨다. 또한 무
대 저편의 관중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등장인물의 생각을 말보다는 몸으로 보여주는 격한 퍼포먼스를
펼친다. 일상의 억압과 모순적 현상에 대한 저항은 갈등을 빚고, 그 와중에 웃음이 터진다는 점이 특이
하다.
특별히 더 이상하면 이상할수록, 의미도 강해진다. 놀이를 가장한 저항을 함께 하며, 선동과 성토의 장으로 등 떠밀려 서게 되는 장치들로 인해 관객들은 어느새 동참하고 만다. 그런 점에서 오태
석의 작품은 지난 세기에서 일종의 <무한도전>이었던 셈이다. 뒷 선 것으로 앞 엣 것을 비교하다니 참으로 별꼴이다.



5. 엉덩이 붙여 보는 것이 재미 붙여 노는 것



<춘풍의 처> 공연은 한국사회의 일상적 관습인 ‘유교적 가치’ 에 대한 낯설게 보기의 의미를 지닌다. 전
통의 방식을 따르고, 지고지순한 유교적 그녀가 등장했지만, 관객들이 삼강오륜의 본령을 깨치기는 어
려울 테다. 오히려, 각각의 방식으로 전례절차의 황당함을 경험했을 것이고, 그런 와중에 사랑의 의미,
생명의 의미를 곱씹어볼 기회를 얻었을 수도 있겠다. 혹은 처음 맛보는 오태석의 미학에 열광했을 수도 있다. 물론 느끼지 못한 재미에 적잖이 실망했을 수도 있다.

지난 세기에 식자(識者)들로부터 받았던 오태석에 대한 지지는 새로운 평가를 필요로 한다. 2010년대에 이르렀으니 얼마나 유효한지, 그리고 얼마나 재미있는지에 대한 해석을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8,90
년대 불어 닥친 대중문화의 기억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없고서, <무한도전>을 즐길 수 없듯
이, 전통과 연극성, 실험적 연출가 오태석에 대한 사전 ‘인식’ 없이 관객들이 온전히 작품을 즐기기란
쉽지 않은 도전이었으리라. 그렇다 한들, 일상을 벗어나려고 찾은 극장에서, 왜 그리 서둘러 일상에 복
귀하려고 탈주를 감행했는지 관객들의 선택이 아쉽다.

오태석의 작품은 이야기 자체가 이미 완결되어 재미가 있는 드라마이기보다는 관객들이 채워
나가는 흥겨운 퍼포먼스 현장이다.
<춘풍의 처>는 TV 프로그램 <무한도전>이 그러하듯 나름의 기
발한 연상 작용을 따라가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장면이 그저 보기만 해도 신이 난다. 국립극장의 무대
나 동시상연이라는 어리둥절한 기획이 그다지 놀기 어려운 판으로 벌어진 것은 사실이나, 다행히 남은
관객들은 그 자리를 충분히 즐겼다. 역시나 우리네 전통은 연구 보전만의 대상이 아니라 즐겨야할 유희
의 대상인 게다.

이제 공연 예술은 자유로운 놀이감각의 발전이라는 점에서 대중문화 미디어인 TV예능과 어깨를 나란
히 한다. 지리멸렬한 일상의 번뇌를 넘는 방식은 주말 안방극장에서 <무한도전>을 보거나, 국립극장의 무대에서 <춘풍의 처>를 만나는 등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존재할 것이다. 재차 언급하자면, TV를 앞에 둔 소파든 공연장이든 가장 소중한 관객은 오로지 자기 자신인 것이다.


멍석 한 장에서 벌어지는 오태석 대표연극 <춘풍의 처>

1976년 오태석은 고전<이춘풍전>을 전통탈춤과 꼭두각시 놀음의 미학을 기본으로 거침없이 뒤집
고 재해석해 <춘풍의 처>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그는 “멍석 한 장 깔만한 자리면 상연이 가능
한 물건”이 되길 바랬다. 어느 덧 이 작품은 춘풍의 처의 삶과 죽음을 중심으로 온갖 인물들의 능청
맞은 이야기가 펼쳐지며 연극계와 학계의 호평을 받고 ‘오태석’하면 바로 떠오르는 작품으로 대표
레퍼토리 연극이 되었다.


또한 오태석은 이번 작품에 어느 때보다도 고유의 3.4조 4.4조의 우리운율을 가득 담았다.

2009년 <춘풍의 처>는 멍석 한 장에서 벌어지는 배우들의 익살스러운 소리와 몸짓, 오태석만의 기
발한 상상력으로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 고향의 정서와 함께 질펀한 신명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공연일시 : 2010.02.02 ~ 2010.02.07
공연장소 : 국립극장 달오름 극장
연출 : 오태석




글 ㅣ 정진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