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독자리뷰]연희단거리패<햄릿>“이것이 이것이니 그 나머지는 할 말이 없습니다.”

2010. 4. 29. 12:51Review


*이 글은 인디언밥에서 진행했던 연극<햄릿> 프리뷰+깜짝이벤트에 당첨되신 독자 중 요클라 (yocla14) 님이 보내오신 리뷰입니다. -편집자 주



“이것이 이것이니 그 나머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이윤택과 연희단거리패의
<햄릿>



|요클라







  누군가를 초대해서 함께 금요일 저녁에 토월극장에서 연희단거리패의 <햄릿>을 보았다. 연극이 끝나고 나서 차를 한잔 마시러 들어간 곳. 친구는 나에게 네가 표를 산거냐고 물었고, 나는 아차 하면서 이마를 탁 쳤다. 글빚이 있구나. 큰일이야.


  
- 게다가 그 글을 써야하는 곳이, 인디언밥이라면? 이곳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꼈던 경탄 - 난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을까, 자연스러운 척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을까. 지금까지 항상 해온 텍스트쟁이 탈을 좀 벗고 무엇을 볼 수는 있을까. 자유로운 글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자유로운 ‘시선’조차 나에겐 닿을 수 없는 꿈나라 이야기.


  
지금 나의 곁에는 신정옥이 옮긴 햄릿(전예원, 2004)이 놓여있다. 요 쪼끄만 주머니판 책 한권이 아까 무대에서 일어난 그 모든 꿈들이 태어난 곳이란 말인가? 아까의 놀음들은 그 자체로 삶보다도 더 크고 두려운 것들이었는데. 어쨌든 다시 연극 생각을 해보려니, 내가 할 줄 아는 건, 내가 방금 봐온 것들을 언어로 바꾸고, 다시 그것들의 앞과 뒤를 재고 무게를 달아서 무엇이 버려지고 무엇은 살아남았고를 알아내어, 이것은 저것을 말하고 있으니 따라서 그것이 곧 그것이라 말하는 것. 더 자유롭고, 더 기발한 방식으로 글을 써보고 싶었거늘··· 가만 이건 글이 끝난 다음에 해야 할 말이다. 우선 되는대로 시작해보자.





再序

 

그래도 좀 애매하니, ‘도히’의 글을 길잡이 삼아서 말을 시작해보자. ‘어떻게 잘 차렸는가’를 생각해보자는 것. 거기에 하나의 글을 더 얹어본다. “관객들은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마음 졸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견된 사건을 주인공이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느슨하고 수평적인 이야기 구조는 그렇게 관객의 시야에서 물러나고, 대신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개성적인 모습으로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각주:1]


 셰익스피어의 ‘주인공’에 대한 글은, 그를 해석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고민과 잇닿아 있다. 우리는 극의 서사에만 익숙한 것이 아니라, 그 극을 해석한 수많은 또다른 공연들과 영상텍스트들이 범람하는 시대에 태어났다. -새로운 것을 꿈꾸는 이들의 불행은 그들이 너무 늦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셰익스피어의 텍스트는 ‘해석’되고 있다기보다 창작의 ‘빌미’가 되고 있다는 느낌마저 받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햄릿은 하나의 세계가 된다. 그 속의 인물들 뿐 아니라, 그들이 내뱉는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얻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이제 그 순간의 조각들을 주워 담으면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다시 햄릿이라는 ‘텍스트’에 -버릇을 못고치고! - 돌아간다. 무엇이 살아남고 무엇이 떨어져나갔는가의 문제는, 도대체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놀음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며 무엇을 숨기고자 하는지에 대해서 어쩌면 가장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이기에. 바로 그 지점에서 역동적인 대화는 시작된다.


  
얀 코트가 말했듯이, “<햄릿>에는···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왜, 그리고 무엇 때문에 선택하는지 알아야 한다.”[각주:2] 내가 이윤택의 <햄릿>을 관통하는 주제로 생각한 것은 ‘자연’이다. 뜬금맞게 왜 자연인가? 나는 자연(自然)을 ‘저절로 그런 것’이라는 넓은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는 자연의 세계로 햄릿이 걸어 들어가는, 두 시간 여의 드라마. 그 과정에서 햄릿이 그토록 찾고자 하는 ‘있음(存在)’의 문제-결국 이 희곡,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그놈의 To be or not to be, that's the question에 대한 극 아닌가? - 가 말들 가운데 만개하고 말과 함께 소멸해간다.





本一

  매우 주관적인 평가라는 단서를 달아야겠지만, 이윤택의 햄릿에서 가장 주목할만했던 인물은 오필리어였다. 우선 오필리어야말로 ‘자연’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녀는 광기에 사로잡혀 사람들에게 꽃과 풀을 건넨다. -“나를 생각해달라는 뜻이에요.”라고 말하며 오필리어가 상사꽃을 레어티즈에게 건네는 그 순간 자연이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지르는 듯하다. 그녀의 죽음 역시, “마치 물에서 나서 물에서 자란 사람처럼”(4막7장) 자연 속으로 돌아감으로써 완성된다.


  
이윤택은 오필리어와 햄릿이 자각하지 못한채 서로의 몸에, 그리고 섹스에 탐닉하는 과정을 그리면서 (오필리어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햄릿에게 자신의 치마를 걷어 올린다.) 오필리어를 자연과 동일시한다. 성욕만큼 그 근원을 설명할 수 없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自然)’ 것이 있는가? 또 레어티즈와 오필리어의 대화, “햄릿 왕자께서 네게 호의를 가진 모양이다만, 그건 다 젊은 혈기의 바람이다”라고 말하는 대목, 그리고  레어티즈와 오필리어가 순진무구하게 뒹구는 모습을 보더라도, 욕망의 자연성을 유추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문제는 욕망 그 자체가 아니라 욕망의 대상과 주체는 결코 ‘그 자체로 그러하지 못하다’는데 있다. 욕망이 만나서 끊임없이 대상과 주체를 오고가는 탐닉의 장이 바로 섹스라고 한다면, 오필리어와 햄릿의 섹스는 바로 그 ‘있음’의 확인의 장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의 섹스는 사실 무대 뒤편에서 벌어지는 거트루드와 클로디어스의 섹스를 모방하고 있다. -그래서 햄릿과 오필리어의 정사는 어쩐지 유희처럼 보인다.- 그것은 햄릿의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비싸게 굴란 말이다 이것아”라는 아버지의 경고조차 무시하고 햄릿과의 사랑에 스스로를 내놓은 오필리어. 햄릿은 달뜬 상태에서 결국 오필리어에게 무자비하게 상처를 입힌다. 순진무구하게 웃고 있던 여성(자연)은 처녀성을 ‘빼앗긴다.’


  
이 장면과 대칭을 이루는, 저 유명한 “수녀원으로 가시오!” 장면.(3막1장) 이미 광기에 사로잡혀 ‘두려운 존재’가 된 햄릿의 앞에 (더 이상 그가 알아보지 못하는) 오필리어가 미끼로 놓여있다. 햄릿은 몇 번씩이나 “수녀원으로 가!”라고 오필리어에게 외친다. 나는 이 장면에서, 이윤택의 햄릿이 “내가 피리보다 불기 쉬운 줄 알고 덤벼든게냐!”(3막 2장)라고 외치고 싶어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햄릿은 힘자랑을 하고 있다. 오필리어를 물어뜯으면서 자신이 ‘있음’을 확인받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하다. ‘욕망’은 그 자체로 있을 수 있으나 ‘있음’을 설명할 수는 없다.


  
햄릿이 폴로니어스를 죽인다. 이윤택의 햄릿은 그런 다음에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도 죽인다.(햄릿이 직접 목을 졸라서, 또는 칼로 찔러 죽인다. 또 한번 셰익스피어의 원작으로부터 멀어지는 부분이다.) 햄릿은 누군가를 상처입히거나 죽일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말해, 햄릿의 존재는 ‘그 자체로 그러하지’ 못하다. 열에 들뜬 햄릿은 끊임없이 스스로의 ‘있음’을 찾기 위해서 무대를 휘젓고 다니지만, 다만 죽이고, 상처입히고, 그렇게 하면서 그 ‘있음’을 오히려 부정한다.


  
결국 미쳐버리고 만 오필리어. 그러나 미친 오필리어는 미친 햄릿과 만나지 못한다. 그녀는 햄릿보다는 한층 ‘그 자체로 있음’에 가까워져 있다. 그녀에게 모든 것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으며, 그녀는 온몸으로 그것을 표현하고 다닌다. 그녀는 미치고 나자 꽃들을, 그 꽃들의 이름과 뜻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직 ‘그 자체로 있음’의 세계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장례식 장면에서, 순진무구하게 노래를 부르며 꽃을 나누어준다. 그러나 앞에 놓여있는 무덤으로 들어가야 할 때, 그녀는 버티고 또 버티려 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는 겨우 ‘있음’의 무게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에 불과하다. 이제 우리는 그 ‘있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첫 번째 설명을 시도한다.





本二

  연극은 있음이 부정되면서 동시에 생성되는 시간이자 공간이다. 셰익스피어의 텍스트에서 극중극은 연극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거대한 구멍과도 같다. 탈을 쓴 인간들이 새로운 있음을 창조하고, ‘하나의 연극’을 송두리째 뒤집으면서 연극 자체의 있음을 뒤흔들어놓는다. -셰익스피어는 말년에 <템페스트>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이를 정교하게 구현한다. 등장인물이 스스로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꿈’이라고 말함으로써.


  
우선 햄릿이 극중극을 통해서 클로디어스를 부정한다는 부분에서 시작해야 할듯하다. 실제로 클로디어스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햄릿은 거꾸로 하늘을 향해서 헛칼질을 해댄다. 어쩌면 이런 부분 때문에 투르게네프는 햄릿이 “지적으로나 사색적으로나 비행동형의 전형”이라고, 콜리지는 “행동과 사색 사이에 심한 불균형에 병든 사나이”라고 말했으리라.[각주:3]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로렌스 올리비에 식의 창백한 햄릿을 위한 설명일 뿐이다. 차라리 볼테르가 말했듯이 “(등장인물들은) 식탁에서 노래를 부르고, 언쟁을 하고, 싸우고, 서로를 죽인다. 이 작품은 술 취한 야만인에게 영감을 받아 쓰여졌으리라”[각주:4]는 진단이 설득력 있다. 이 작품은 행동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혼돈으로 가득하다.


  
위에서 햄릿은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의 섹스를 모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왜 햄릿이 클로디어스를 없애야 하는지는 여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자신의 있음이 더욱 순수하고 독립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 모방의 대상은 사라져야만 한다. -이것은 수상쩍은 정신분석이 아니라, 지극히 보편적인 앎에서 비롯하는 전제이다. 그렇게 싹튼 증오는 극중극에서 폭발하게 된다.


  
우선 극중극에서 눈에 띈 것은 배우들이 쓰고 있는 가면이 동시에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면이 두 개로 나누어져 있는 것인지, 일부러 틀어서 쓴 것인지는 제대로 관찰하지 못했다. 극 속의 극이라는, 있음의 비틀어짐이 도리어 관객들에게 곧장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 배우들에게 끊임없이 지시를 내리되 그 극에는 철저한 관객으로 임하는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달리, 이윤택의 햄릿은 스스로 연희에 참가하여 그 놀음 속에서 죽음의 순간을 관찰하고, 이를 통해서 클로디어스를 상처 입히려 한다. 여기에서 햄릿이 보고 있는 것은 클로디어스가 아니라 극중극 그 자체이다. -그러니 햄릿이 극중극에 앞서 호레이쇼에게 “숙부의 표정을 주의 깊게 보아주게”라고 말하는 대사는 들어내졌다.- 그는 극중 여왕이 달콤한 맹세를 하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입맛이 쓰구나!”라고 외친다. 연극과 현실 사이에서 위태롭게 오고가는 것은 햄릿만이 아니다. 클로디어스 역시 양심의 가책으로 말미암아 연극을 보던 와중에 몸에 이상을 일으킨다. 그리고 짐승같이 울부짖는다.


  
가짜로 만들어진 있음이 지독하게도 진짜 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는 것. “무엇이 ‘있음’이란 말인가?”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 ‘광기’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햄릿은 광기를 가장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미친 것인가? 이윤택의 햄릿이 어떤가를 아는가는 그리 어렵지 않다- 모든 면에서 그는 확실히 미쳐있다!





本三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가자. 관객들에게 그대로 노출된 무대에서 누군가 -사실 그가 햄릿이라는 추측은 금방 할 수 있다. - 가 책을 읽고 있다. 그는 바이올린을 집어 들고 가느다란 가락을 연주한다. 갑자기, 포틴브라스가 등장하여 그를 넘어 무대 뒤로 진출한다. 그들이 지나간 곳에서 장례행렬이 나와 선왕을 시체를 구덩이 속에 묻는다. 이상의 모든 장면들은 극도로 무용적인 몸짓으로 이루어진다.


  
사실 햄릿의 시작은 파수꾼 버나도의 저 유명한 “거기 누구 없소?”라는 대사다. 이윤택의 연출에서 파수꾼들끼리의 수군거림, 호레이쇼의 의심, 그리고 망령의 등장은 송두리째 없어지고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의 결혼, 그리고 이를 심술궂게 바라보는 햄릿의 독백이 있고서야 비로소 대사가 등장한다.


  
선왕의 망령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는 과연 관객이 그 극에 대해서 얼마나 몰입할 수 있느냐의 문제와 같다. 이윤택은 이를 통해 ‘망령’을 햄릿의 존재 깊숙한 곳에 있는 광기의 근원으로 해석한다. 셰익스피어의 망령은 호레이쇼와 파수꾼들에게는 모습만을 드러냈지만 햄릿에게는 복수를 부르짖고(1막 4장), 거트루드의 눈에는 아예 나타나지도 않게 한다(3막 4장).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망령이 “내가 허해지고 울화증이 생긴 틈을 틈타 (악마가) 그 마수를 뻗치려는 수작일지도 모른다”(2막 2장)며 망령을 의심하기도 한다.


  
반면 이윤택의 망령은 우선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폴로니어스를 찌르고 나서 허덕이던 햄릿이 거트루드의 품에 안길 때, 망령은 마치 성가족상을 연상케하듯이 이들을 감싸 안는다. “복수를 해다오!”라는 망령의 부르짖음은 무대 앞쪽에 설치된 마이크에 햄릿이 소리를 질러서 거대한 소음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구현된다. 결국 망령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서 복수를 부르짖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햄릿의 내면에 있는 광기의 모습이다.


  
이 연극에서 우리가 자주 듣게 되는 것은 분절된 말이 아닌 짐승과도 같은 울부짖는 소리다. 이 소음들은 언어로 쌓여 올려 진 합리적이고 단일한 ‘있음’을 방해한다. 처음부터 이 희곡에서 자신의 있음을 끝까지 지켜내는 등장인물은 호레이쇼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그는 끝까지 살아남는다. 햄릿이 말한다. “자넨 꼭 살아남아 사실대로 내 입장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밝혀주게.”(5막2장)-


  
“오로지 미쳤다는 것만이 진실이다.”라는 햄릿의 말은 나에게는 이윤택의 <햄릿> 전체를 요약하는 말이다. 미쳤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있음’이다. 광기는 차라리 어떤 힘이다. 그것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것이 남기는 흔적들 속에서 온갖 억측, 그것이 상궤로부터 이탈한 이유를 부여하려는 견강부회들만을 생산해내는 것이다. 광기라는 있음은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다. 우리는 “호두껍질 속에 갇혀있어도 무한한 우주를 지배하는 왕”(2막 2장)이 아니던가.





本四


  
그러나 이것이 끝인가?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죽어나자빠진 시체들은 즐비하지만, 햄릿은 결국 ‘있음’과 ‘있지 않음’의 사이에서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한 상태이다. 무엇보다 만약 이 세상이 그저 그렇게 있는 것뿐인가? 광기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쳤다는 것은 어떤 부딪침 속에서 드러나는 것. 삐걱대는 자신을 바라보는 햄릿의 두려움 속에서 비로소 “To be, or not to be, that's the question.”이라는 고백이 흘러나온다.


  
단순히 광기를 확인하는 데에서 그칠 수는 없다. “광기가 다른 절대적 기준에 대한 상대적 의미로밖에 정의될 수 없”[각주:5]다는 것을 보편적 전제로 보고 이야기를 계속 진행해 간다면, 이윤택의 햄릿은 그 ‘미쳐있음’을 통해서 우선 자신의 있음을 확인하고, 거울처럼 다른 있음들을 반박하고 뒤흔든다. 그는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며,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소외된다. 저 엘시노어 성을 보라. 이윤택은 극의 초반에 궁정인들이 입고 있는 검은 상복 안에 숨어있던 화려한 잔치의 옷을 통해 “장례식은 기쁘게/결혼식은 슬프게” 치른다는 모순된 공간, 그곳에 팽배해있는 어떤 불길한 흥분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그 끝에 놓인 자신이 죽인 형을 묻은 동생과 형수의 키스. 포틴브라스의 존재는 어떤가. “한가닥 명예만이 걸린 쥐꼬리만한 한뼘의 땅”(4막 4장)을 위해서 목적없는 전쟁을 감행하는 포틴브라스는 끝까지 정체를 드러나지 않는 욕망의 화신이다.


  
결국 햄릿의 광기는 그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마치 망망대해에 떠있는 섬처럼, 그 어떠한 힘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앞서 햄릿이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있음을 증명한다고 한 바 있다. 이윤택이 연출한 마지막 결투 씬은 햄릿의 마지막 절망적 몸짓이자 그를 둘러싼 세계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붕괴하는 순간과도 같다. 결투에 앞서 호레이쇼에게 자신감을 드러내는 셰익스피어판 햄릿의 대사는 사라진다. 대신 끊임없이 저신에게 도전하는 햄릿을 말끔하게 없애버리려는 듯이 클로디어스의 내기가 전해지고, 햄릿이 무대 안의 또다른 무대 -검술장- 에 올라 레어티즈를 상대한다. 또 한번 햄릿은 아비의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이 어두운 욕망은 거트루드를 죽이고, 레어티즈를 죽이고 마침내 햄릿까지 죽이고 만다. 처음에 햄릿이 도살될 무대가 어느덧 모두의 죽음의 무대가 된다. 최후의 파국에 이른 것이다.





本五


  그러나 이러한 파국이 오기 직전, 어쩌면 이윤택의 가장 중요한 성취라고도 할 수 있는 오필리어의 매장장면이 등장한다. “이 장면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가장 우리가 자신있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라고 그가 단언했을만큼, 이 장면의 메아리는 작지 않다.


  
묘지기와 햄릿이 수다스런 선문답을 나눈다. 묘지기의 궤변 속에서 오필리어의 죽음은, 죽었다는 사실만 남을 뿐, 일체의 복잡다단한 뜻들은 잃어버린다. 죽음은 ‘그 자체(自然)’다. -리플렛은 이 선문답을 두고 “동양적 사고로 삶과 죽음을 재해석하는 장”이라고 하지만, 이 장면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원텍스트를 충실하고도 감칠맛나게 챙김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이는 분명 미덕이다.


  
꽃을 뿌리며 나온 오필리어가 무덤 앞에 섰을 때, 그녀가 그 앞에서 죽음을 거부하면서 몸부림칠 때, 결국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오필리어. 그녀에게 흙이 뿌려지고 그렇게 가라앉을 때···. 그 이미지 자체의 강렬함과 함께, 죽음과 삶 사이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의 갈등, 그리고 그를 데려가는 죽음의 모습은 그 자체로 너무나 아름다웠다. 마치 눈물에 젖은 눈으로 사랑하는 이를 보내는 순간처럼, 그렇게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엘시노어 성은 죽음 앞에 쉽사리 으깨어지는, 하나의 ‘호두껍질’이다. <햄릿>은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뿐이다. 선왕이 죽은 다음 곧장 거트루드와 클로디어스는 진한 키스를 나누면서 생명과 생명을 추동하는 욕망을 확인하지만, 결국 거트루드도, 클로디어스도 죽는다. 폴로니어스도, 레어티즈도, 로덴크란츠며 길덴스턴도, 오필리어도, 마침내 햄릿도 죽는다. 엘시노어 성의 모두가 죽는다. 이 안에는 무한한 공간이 펼쳐져있지만, 동시에 이 안에서 움직이고 있던 인물들이 죽을 때, 마치 발할라가 무너지듯 엘시노어 성도 무너져 내린다. 죽음 앞에서 그 어떤 것도 무사할 수 없다는 이 ‘스스로 그러한 사실’ 앞에서 어찌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은 얼마나 절망적인 진단인가. 어쨌든 이렇게 끝이다. 관객들은 극이 끝났다는 기쁨(!)에 손이 부서져라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별안간 흰 천이 이 시체더미들을 덮는다. 살아남은 호레이쇼가 무당이 되어 소리를 하며 엘시노어 성의 죽음들을 전별한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하나씩 묻혀가던 무덤에서 한명씩 죽음들이 기어나온다. 쩔렁대는 방울소리, 진동하는 향내음. -죽음의 너머가 이토록 감각적일 수 있다는 데에서 나는 다시 감탄했다.- 그리고 벌거벗은 햄릿이 관객을 천천히 돌아볼 때, 삶의 너머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있음’의 눈동자가 우리와 마주한다. 우리가 그토록 규명하려고 했던, 오로지 대상이었던 ‘그 자체로 있음(自然)’이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며, 그리하여 있음을 규명하려던 것들이 모두, 말이라는 거추장스런 몸, 훌훌 털어버린다···. “남은 것은 침묵 뿐이로다···.”(5막2장)






  때는 담쟁이덩굴에 바람이 불지 않고, 빈청 뜰에는 바야흐로 밤이 다가오는데, 때마침 달그림자가 연못 복판에 단정히 임하였다. 대사는 고개 숙여 조용히 이 정경을 바라보더니 왕에게 하는 말이 “이것이 이것이니 그 나머지는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2010 / 4 / 13 (화) - 2010 / 4 / 18 (일)
월극장
연희단거리패
대본구성, 연출 : 이윤택  / 번역 : 이채경
연극안무 : Kate Flatt & 양승희 / 의상디자인 : 정경희
무대디자인 : 안지만 / 무대제작 : 김경수 / 조명디지인 : 조인곤

출연 : 지현준, 이승헌, 김소희, 차서린, 김미숙, 오동식, 정영미, 서승현, 조화영, 배보람




필자: 요클라 (트위터 ID @yocla14)

자기 소개하는 순간이 가장 난감하고 힘든 사람. 활자중독증. 언제부턴가 근원을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떨며 글쓰기를 시작. 노트 속에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공화국이 하나, 아무도 죽지 못하는 희곡이 두 편, 빨랫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세 개의 음표,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고 채워져 나가는 ‘잠언’들. 관심 있는 이들은 부디 구원해 주시길. (무엇을?)











  1. 이윤택 「동서양을 관통하는 셰익피어 영화-맥베스」, 진중권, 듀나, 이윤택 외 『필름 셰익스피어』, 씨네 21, 2005, p.43 [본문으로]
  2. 아르베르트 노벨스,「셰익스피어-햄릿」,『클라시커50-연극』인성기 역, 해냄, 2003, p.59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3. 이상은 셰익스피어, 『햄릿』, 신정옥 역, 전예원세계문학선, 2004.의 뒤표지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4. 프랑수아 라로크, 『셰익스피어-비극의 연금술사』, 이종인 역, 2001, p.162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5. 이인성, 『축제를 향한 희극』, 문학과지성사, 1992, p.33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