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죽지않아! 굿모닝 줄리엣> 욤팔이의 일기

2010. 5. 17. 19:25Review



 

<죽지않아! 굿모닝 줄리엣>
Good morning Juliet, Good night Desdemona


욤팔이의 일기




글| 욤 프로젝트




 드디어 고대하던 날이 오고야 말았다. 내가 좋아하는 K선배와 대학로에 연극을 보러 가기로 한 날이 바로 오늘인 것이다. 사실 K선배는 내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직 모른다. 아니 어쩌면 알지도 모르지. 그동안 몇 번이나 문득 눈이 마주쳤을 때, 내 얼굴이 빨개졌다는 걸 들켰을까.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걸까? 아니다. 선배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시크하면서도 솔직하고 얼굴도 너무너무 잘생긴 K선배. 비록 업무상의 일로 같이 연극을 보게 되었지만 뭐 그럼 어때? 이번에야 말로 내 매력을 선배에게 한껏 뽐낼 절호의 기회다. 아침부터 기합을 잔뜩 넣고 대학로로 향했다.



 저기 선배가 보인다. 벽에 기대어 햇살을 받으며 눈을 지그시 감고 미소를 짓고 있는 선배의 모습. 아아 눈이 부셔. 마치 패션 화보 같아. 그 모습 그대로 내 눈에 박아버리고 싶어 멍하니 쳐다보고 서있는데, 선배가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오, 왔어?“



 초콜릿같이 부드럽고 달콤한 음성에 녹아버릴 것만 같은 마음을 가까스로 숨기고 평소대로 꾸벅 인사를 하곤 극장 쪽으로 총총 발걸음을 옮겼다. 대학로 예술극장 4관 (구 동그라미극장)은 골목을 조금 후벼 들어가서야 찾을 수 있었다. 한적한 골목을 둘이서 걸어가는데 내 심장 소리가 선배에게 들리지는 않을는지 너무 걱정이 되어 잠근 옷섶을 더 꽉 여몄다.




 극장 안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얏호. 소극장이라 좌석도 좁고, 선배와 꼭 붙어 앉아 두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 나의 마음 울렁울렁 두근두근 쿵쿵 이로구나. 나의 허벅지와 선배의 허벅지- 비록 두 겹의 바지가 가운데 있다하더라도, 그래도, 전해지는 그 체온! -가 애매하게 닿아있어 온 정신이 그 쪽 신경에 집중된 상태에서 공연은 시작되었다.






 이 연극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점은 배우가 다 남자라는 점이었다. 주인공 세 명이 모두 여자여서 선배가 잘빠진 여배우에게 반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는데 그 역할들을 모두 남자들이 맡아주었다. 아마 작가가 희곡을 쓸 때부터 이런 캐스팅을 의도했던 듯 여장 남자임을 이용한 재밌는 장면들이 많았다. 사실 그간 여장 남자를 보고 재미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코미디프로에 나오는 과장된 여장 남자들, 장기자랑 시간에 꼭 나오는 여장 남자 미인 선발대회 같은 건 정말 역겨워. 콧소리를 내면서 호들갑을 떨어서 여성 캐릭터를 희화하고, 과도한 뽕에 진한 화장으로 여성의 신체를 희화하는 건 참 못된 개그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공연은 그렇지 않아 좋았다. 작은 연극에서 한 명이 여러 역할을 맡는 것처럼 그저 여자 역할을 맡은 것 같은 남자들의 자연스럽게 보이는 연기가 편했다. 아마도 배우들이 저 캐릭터들 찾으려고 참 고생했을 것 같아. 재밌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여장 남자. 만약 개콘의 황마담 같은 캐릭터들이 줄줄이 나왔다면 짜증과 분노로 선배고 뭐고 안보이고 성질 나왔을지도 몰라. 휴우 다행.



 짝사랑 해온 남자이자, 자신이 뒷바라지 다 해준 교수가 어린 여자와 함께 떠난 후 남겨진 루저 분위기의 여자 콘스탄스. 나이도 많고 얼굴도 별론데 자신감도 없고, 이뤄놓은 것도 없고. 믿는 건 오로지 셰익스피어 비극이 희극일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파고드는 연구 하나인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무시당하고 있다. 아 너무 슬퍼. 난 왠지 모르게 그녀에게 감 정 이입되어 (니가 어때서!) 살짝 눈물이 나려고 하는데, 선배의 옆모습을 훔쳐보니 박장대소를 하고 있네. 완벽한 그에게서도 한 가지 섭섭한 점이 발견되는구나. 혹시 선배 눈에도 내가 저렇게 비춰지는 것은 아닐까. 콘스탄스를 떠나간 교수처럼, 이 사람... 내가 여자로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



 혼자 우울한 망상에 빠져 멍 때리고 있는데, 콰광! 굉음에 가까운 테크노 음악이 마구 울려 퍼졌다. 정신 차리고 보니 콘스탄스가 현실에서 비극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차원 이동이랄까. 그 사이 암전되면서 무대 전환도 있었고. 후에 오델로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전환 될 때, 다시 현실로 돌아올 때 등등 장면 전환에 이런 부분이 계속 등장했다. 영화 속에서 순간이동 할 때, 어둠속에서 어디론가 빨려 들어간다던지 하면서 혼돈 상태가 되는 걸 무대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귀여울 수도 있지만. 음. 에이. 촌스러! 자알 만들어진 작품에서 딱 옥의 티라고 할 만한 부분이다. 현란한 기계음의 테크노 음악 속에서 암전 안에 남겨진 관객들은 서로 좀... 뻘쭘해했달까. 공연의 활력 넘치고 재기발랄한 분위기에는 너무 안 어울리는 고루한 선곡이었다. 선배도 그 때 어색해하며 자리를 고쳐 앉은 덕에 우리 사이의 간격이 2센티나 멀어졌다고! 아쉬워. 악.
 


 그래도 고 시간만 견디면 차원을 넘나드는 콘스탄스의 여행은 갈수록 정말 재밌었다. 식스팩 갑옷을 입고 잘린 목을 장난감처럼 갖고 노는 데스데모나, 툭하면 사랑에 빠져버리는 로미오와 줄리엣들이 매 순간 번뜩이는 개그를 선보였다. 와 어쩌면 이건 원작보다 더 재밌을 수도 있겠는 걸 싶을 정도로 번역과 연출이 참 좋았다. 외국 희곡을 원작으로 한 연극들 중에 번역, 번안이 잘 된 작품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나라마다 유머 센스가 다른데다가 번역 과정에서 문어체 문장들이 그대로 구어로 쓰이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웃기려는 의도는 알겠는데 문화가 너무 달라 아무도 웃지 못 할 때, 배우와 관객 사이가 얼마나 어색해지는지. 손발이 오그라든다고요. 지난달에도 그런 연극 하나 보다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배우한테 인사 받았었지. 잘 주무시더라고. 뭐 어떡해. 후진 출판사에서 나온 외국서적 읽는 것처럼 대사 한마디 한마디들이 와 닿지를 않는걸. 그런데 이 공연에선 정말 시원하게 웃어재낄 수가 있었다. 원작의 셰익스피어 희곡 뒤집기도 재밌고, 이를 자알 살린 연출, 연기도 굳굳.




 두 시간의 공연이 끝나고 극장 밖을 나올 때에 우리 둘은 들어갈 때보다 한결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되어있었다. 함께 공연을 보면서, 선배는 뒤로 자빠지며 깔깔 웃어댔고, 나는 그런 선배의 팔뚝을 찰싹찰싹 때리며 함께 웃었다. 대학로에 왜 그렇게 개그콘서트 같은 공연들이 많은 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극 중 세 여자는 너무 자신이 없고, 너무 정열적이고, 너무 강해서 죽음에 이를 뻔 하지만 마지막에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나아간다. 살아서. 콘스탄스처럼 묵묵했던 내 사랑, 줄리엣과 데스데모나처럼 후련하게 타올라 볼까나. 선배! 오늘 맥주 한잔 할까요? (꺄아)




 


죽지않아! 굿모닝 줄리엣

극단 표현과 상상
2010 4/19~4/25
대학로 예술극장 4관


퀸스대학의 조교수인 콘스탄스는 셰익스피어가 비극을 쓸 때 도용했다고 알려진 작자미상의 두 희극의 원본으로 추정되는 필사본을 연구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학계에서 무시당하고 있지만 그녀의 학문적인 호기심은 열정적이다. 이를 이용하여 나이트 교수는 수년간 그녀에게 자신의 논문을 대필하게 시키고, 교수를 사랑하는 콘스탄스는 묵묵히 그 일을 해왔다. 그러나 나이트 교수는 종신교수가 되어 그녀의 도움을 빌지 않게되자 젊은 여행생과 옥스퍼드로 떠나버린다. 콘스탄스는 충격속에서도 <오델로>와 <로미오와 줄리엣>에 광대가 등장했다면 이 작품들이 비극이 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추정을 하면서 자신이 연구하는 필사본의 작가가 바로 광대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 순간 콘스탄스는 필사본에 적힌 글을 해독하면서 오델로의 성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극단 표현과 상상은 1997년 이미지연극을 표방하며 연극 석박사 출신들 중심으로 창단하여 현재까지 다양한 극형식을 진지하게 모색해오고 있는 극단체이다. 화술언어를 배제한 비언어 연극으로 <그림쓰기>, <사랑하는 사랑하지 않는>, 이미지 중심의 상징성 강한 연극인 <사랑의 기원>, <체어> 여성주의 관점의 이미지극인 <발소리>, <메디아 왈츠>등이 대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