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보따리] 2010 서울연극제 ‘미래야 솟아라!’ "아직 못 다한 이야기, 궁시렁궁시렁..”

2010. 6. 17. 23:58Feature




‘미래야 솟아라!’
아직 못 다한 이야기 “궁시렁궁시렁...”


기록: 아아시
정리/글: 매버릭





프롤로그
“‘솔직’에 대한 부담이 조금 되긴 하지만 믿거니, 하며...”


총 6회에 걸친 <2010 서울연극제> ‘미래야 솟아라’ 공연 리뷰 연재가 모두 끝났습니다. 미리 약속했던 뒤풀이 수다를 공개할 차례네요.
우리가 만난 건 지난 5월 29일 토요일 오후 6시. 이런 저런 먹을거리와 함께 조촐한 수다 파티를 열었습니다.

이번 ‘미래야 솟아라’ 연재에 참여한 필자들(조원석, 정진삼, 아데모모)과 인디언밥 편집진(매버릭, 아아시), 그리고 서울프린지네트워크 대표(오성화)가 함께 자리를 했습니다. 참고로 3명의 필자는 각각 2편씩의 작품을 관람하고 리뷰를 실었고 아아시는 3편을, 매버릭과 오성화 대표는 6편의 전 공연을 관람했습니다.

우리는 작품에 대한 못 다한 이야기를 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미래야 솟아라’ 기획이 갖는 의미에 대해, 수상 결과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수다를 떨었습니다.

먼저 서울연극제가 설명하고 있는 내용을 잠시 빌자면, ‘미래야 솟아라’는 “실험, 대안, 미래적인 연극 언어”를 모색하고 “한국연극의 미래를 가늠”한다는 취지로 올해 처음 신설된 프로그램입니다. 여기에 맞는 작품들을 공모하여 선정한 후 하루씩 공연을 한 다음 시상을 했습니다. 참고로 수상 결과는 <무브먼트 당당-떠나는 사람들>이 작품상을, <극단 화-나비효과24>의 이자순 연출가가 연출상을, <극단 인-잃어버린 시간들을 위하여>의 김송이 배우가 연기상을 받았습니다.

인디언밥이, 선정된 여섯 작품을 모두 다루게 된 것은 개별 작품 하나하나를 넘어서 서울연극제의 이러한 새로운 기획에 대한 관심 때문입니다. “미래 연극 개발 프로젝트”를 표방하고 있는 ‘미래야 솟아라’에 선정된 작품들을 통해 연극의 미래를 우리 스스로 고민해 보는 작은 기회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잠시 필자 소개를 하자면, 극작과 연출을 하는 정진삼과 철학을 공부하고 소설을 쓰는 조원석은 꾸준히 인디언밥에서 활동을 해오던 분들이고요. 연극 연출을 하는 아데모모(박선희)는 이번 기획을 통해 새로 결합한 필자입니다. 정진삼은 ‘홀맨’과 ‘떠나는 사람들’을, 아데모모는 ‘나비효과24’와 ‘세 마녀 이야기’를, 조원석은 ‘잃어버린 시간들’과 ‘하이! 스마트 월드!’를 보고 리뷰를 올렸습니다.

작품에 대해 나눴던 우리의 뒷이야기를 거의 가감 없이 중계하려다 보니 ‘솔직’에 대한 부담이 조금 되긴 하지만...믿거니, 하며 수다 보따리를 풀겠습니다. 괜찮죠?



홀맨
“근데 그게 좀 지나간 실험예술 같은 인상이었어요.”


정진삼: 관객을 객석에 앉히지 않고 무대 바닥에 쿠션을 다섯줄 정도 깔아서 앉혔어요. 무대는 공간에 큰 비닐을 놓아 분할하였고요. 공간 사용이 그러해서 공간을 보여주는 것에 대한 기대를 했었지만, 글쎄요. 그리고 디지털 퍼포먼스에서 보여줄 수 있는 장치는 다 나왔어요. 영상, 소리, 블랙아웃 시키는 조명기 등등. 좀 난해했어요. 여타 아방가르드나 실험예술이 그러하듯, 무슨 얘기하나 싶었고요. 과학자 역할의 나이 든 분이 의자를 들며 무중력 상태를 표현하는 장면까진 좋았죠. 분할된 공간에서 이쪽 여자는 몸으로 괴로워하고, 저쪽 여자는 분절된 언어를 한 시간 반 동안 계속 이야기 했어요. 영상이 그 양쪽에 다 있었고.

조원석:
심철종 연출의 예전 작품, ‘젠’이랑 비슷하네요. 비닐 두고 양쪽에서 보는 것이죠?
아데모모
: 의도적으로 단절시킨 것일까요?
정진삼: 단절로 느끼지는 못했고요. 일부러 불편하게 하기 위해 단절시킨 건 아닌 듯해요. 그저 답답하단 느낌이었어요.




정진삼:
대사할 때 음절 고저(高低)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 됐어요. 근데 그게 좀 지나간 실험예술 같은 인상이었어요. 언어 해체라던가 그런. 관객 심정으로 얘기하자면 흥미를 끌만한 것이 별로 없었어요. 다만, 과학자 연기가 코미디는 아닌데 능청스럽게 웃기는 부분이 독특했고, 그 요소가 관객으로부터 가장 호응이 컸어요.

오성화:
전 심철종 연출의 작품은 종종 난해하단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요. 이번에는 처음으로 그런 작품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새로운 시도’, ‘완결성’, ‘감동’이란 측면에서 보면 별로 만족스럽진 못했죠.

정진삼:
실험예술에서는 순간순간의 좋은 부분을 찾게 되는데요. ‘홀맨’은 공간분할은 좋았지만 동원된 디지털 기기나 언어 해체에 대해선 큰 틀이 있는 건가, 싶었어요.

매버릭:
‘홀맨’의 실험이 어렵거나 괴롭진 않았어요. 오히려 그래서 허무한 감도 있었죠. 실험예술이라 표방하는 작품에 임하는 ‘좀 힘들겠지’ 하는 각오에 반해 좀 심심했다, 랄까. 그렇다고 정극과는 다른 감각적인 체험도 별로 없었고요.

조원석:
얘기를 듣다보니 실험극을 연극이라고 할만한, 굳이 다른 장르가 아니라 그것이 연극이게 만드는 요소가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정진삼: 아주 기본적인 것 아닐까요? 배우도 있고 무대도 있고 준비과정에서는 텍스트도 있을 테니.

조원석:
실험극을 보다보면 내용을 실험 하는 게 거의 드물지 않나요. 내용이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이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철학이든, 그것을 먼저 찾고 그 형식을 찾기 위한 실험을 해야 한다고 보는데, 지금 실험극들을 보면 형식을 위한 실험을 하고 있는 듯해요.

매버릭: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쯤에서 마지막 작품과 함께 연계해서 이어가면 어떨까 싶어요.



하이! 스마트월드
“실험이라는 것을 형식적인 것에서만 찾았던 건 아닐까요?”


조원석: ‘
하이, 스마트월드’. 스마트폰을 소재로 한 건데요. 내용은 그리 새롭진 않아요. 사람들이 평소 흔히 가지고 있는 욕망들, 텔레비전에서 보던 것과 같은 그런 장면들을 끊임없이 보여주죠. 그리고 ‘실험 맨’으로 보이는 4명의 등장인물들은 스마트 폰의 아바타나 가상캐릭터가 아닐까 싶었어요. 공연 내내 들리는 목소리는 디지털 가상 세계의 인물인 듯해요. 이들은 보여주기만 하고 재연만 하죠. 그 이상은 없어요. 인간의 탐욕과 살아가는 모습. 글에는 분석과 소통이라고 되어있는데, 단지 재연이었어요.

실험이라는 것을 형식적인 것에서만 찾았던 건 아닐까요? 심사위원도 보는 사람도 형식에서만 실험성을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형식에 맞는 새로운 내용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희곡을 쓰는 사람들이 새로운 내용을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장르에 대한 거라든지. 현상을 재연하기 위한 실험은 이제 더 이상 새롭지 않죠.

정진삼:
주변에 스마트폰 쓰는 사람 보면 심심하진 않겠더라고요. 연극이 시공간의 압축을 보여주는 건데, 굳이 연극을 보지 않아도 아이폰 하나 있으면 그게 가능하잖아요. 스마트폰이 연극의 라이벌이 된 것 같아요. 그런 개념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네요. 아까 이야기 하셨듯이 발상은 놀랍지만 내용이....

아데모모
: 도대체 스마트 폰이 어쨌다는 거죠?

조원석: 똑똑하대요. 스마트 월드. 세상은 똑똑해지고 있는데, 똑똑한 세상에서, 아바타에 투영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죠. 세상의 악을 보여주고. 비판을 하고는 있어요. 억지로 추측을 할 수는 있지만, 연극 자체는 단지 재연에 불과했어요. 지금 시대에 스마트 폰이 소재이기 때문에 트렌디한 소재로서 따온 것이지, 스마트 폰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가지고 만든 건 아니었어요.

오성화:
저 같은 경우는 거기에 스마트 폰이 아니라 뭐가 있어도 상관이 없었어요. 자기를 설명하는 제목과 연결성을 찾기는 어려웠죠.

매버릭:
저는 스마트폰이 지금 시대에서 가지고 있는 힘이나 여러 가지 요소들이 단순하지 않다고 보거든요. 제가 보기에 이 연극은 형식 자체도 가볍다고 생각했어요. 형식은 아주 단순해요. 두 개의 영상이 다큐멘터리처럼 양쪽에서 끊임없이 나와요. 오히려 여기서 배우들의 역할은 뭐지, 라는 의심이 들었어요. 저는 배우라는 것이 무대에서는 중심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여기서는 배우가 소리와 영상에 묻혀 버리고 말아요. 도저히 배우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어요. 작품 소개를 보면 마임이라고, 몸짓이라고 해놨는데. 인간의 몸짓이 이 공연에서는 소외당한 듯 보여요.




조원석:
내용을 전달해야 하고 관객들이 이해할 만한 전개방식이나 내용의 구조를 만들어 줘야 하는데 그냥 보여만 준다는 거죠. 처음부터 끝까지 기복이 없고 갈등이 없어요. 오히려 강한 지옥만 앞에 있죠. 연극이 미래를 제시해 준다? 근데 연기는 안하고 말만 한다? 곤란하죠.

정진삼:
스마트폰, 신체극, 종교개념 등 막연히 이질적인 조합에서 나오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 선정을 할 때 이런 부분들에 심사위원들이 혹, 한 것은 아닐까요.

아데모모:
맥락이 통하는 이야기인 줄은 모르겠는데, 저는 실험극이라고 하면 당연히 형식에 대한 실험이라고 생각했어요. 내용에 대한 실험이 뭘까요? 작품을 하려고 할 때 남들이 하려는 것 안하고 싶지만 해보면 뻔한 것이 나오게 돼요.

조원석:
실험이라는 게, 이거 한번 해보고 저거 한번 해보자는 것이잖아요. 우리는 형식에 대해선 굉장히 과감한데, 기존의 도덕과 관습에 대한 생각을 확 바꾸진 못해요. 보다 더 나은, 자기가 생각하는 대안에 대해 말이에요. 예를 들면 ‘결혼제도 없애자’ 뭐, 이런 거라든지.

정진삼:
내용에 대한 실험은 있는데, 책임을 못 지는 것 같아요. 잘 만들어진 작품은 내용과 형식적 실험이 같이 가는 것 아닌가요? ‘홀맨’도 다 보고 나서는 ‘역시나 외계인은 상종하면 안 되겠네’ 라는 메시지가 남는 거예요. 전에 없는 메시지가 남으면 좋겠는데 옛날 메시지가 또 다시 반복되는 거죠.



나비효과 24
“그렇지만 나는 되게 오래된 이야기를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데모모:
내가 봤던 ‘나비효과 24’는 신문지 콜라주의 느낌이 들었어요. 정치 경제면이 아니라 사회면. 마치 일간지 만물상 코너에 있는 걸 가지고 온 것 같은 느낌? 그게 나쁠 건 없지만 재현적인 느낌에 불과했어요. 노숙자, 나영이, 성범죄 등 우리 아픈 구석들 말이에요. 왜 제목을 나비효과라고 했을까? 성추행이라는 사건이 돌고 돌아오는데, 마지막엔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나요. 지하철 직원과 지하철에서 죽으려는 사람이 위로를 하는 약간의 희망을 암시하면서요.

왜 연출상을 받았는지는 이해가 가요. 깔끔하게 끝나서요. 그렇지만 나는 되게 오래된 이야기를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 표지에 나무에 올라가는 벌레들의 이미지가 있어요. 그거랑 같은 이미지가 크게 남았어요. 현대인들의 방황과 고독에 대한 이야기는 알겠는데요. 영화 ‘나비효과’는 재밌게 봤었거든요. 하지만 이 연극을 봤을 때 이게 왜 미래, 일까 싶었어요.

정진삼:
암울한 미래로군요.

매버릭
: 제목이 나비효과니까 거기에 걸맞은 좀 더 자극을 줄만한 장치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나비효과라는 것을 생각 안하면 그냥 단순한 하나의 드라마처럼 느껴지거든요.

아데모모:
마지막에 인상적이었던 게, 배우가 벽을 미친 듯이 밟고 올라가서 뛰어 내려요. 그걸 미친 듯이 몇 번을 하는데 나는 그게 너무 강렬해서 다른 움직임을 하고 있는 배우들은 안보이고 그거 밖에 안보였거든요. 그 움직임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나 싶더라고요. 다른 배우를 다 죽여 버리는 느낌이 들고. 나중에 느낀 건, 그래 공연이 무슨 교훈을 줘야 하나, 내가 왜 저 만든 사람에 대해 불평을 하는 건가, 나도 작품을 하는 사람이라 질투를 하는 걸까. 하며 반성을 했어요.

정진삼:
여기서 뭔가 세련되고 잘 만드는 것을 기대 하는 건 아니잖아요. 이런 걸 접어두고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공연 자체가 엄청 실험적인 것도 아니고. 나는 실험적인 것을 볼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데도 말이에요. 근데 내가 마음을 열었는데 거기서 너무 열연(?)을 해버리면 내가 너무 긴장감이 풀렸나, 하고 다시 조이게 돼요.

매버릭:
고백하자면, 나는 이 작품이 재미가 없었어요. 하지만 보고 나서 내 스스로 반성을 했어요. 이런 작품에 대해서 내가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애정을 가져야 하는 거는 아닐까, 하는 반성. 물론 머리로 하는 반성이긴 했지만요.


오성화:
나비효과를 보고 제일 궁금했던 건 연출의 나이었어요. 그거에 따라서 내 평가가 달라질 수 있었어요. 나는 사실 젊은 사람이길 기대 했거든요. 젊은 사람이 저런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힘은 다르지 않나 싶어서요.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별로 없는데 공연 자체를 아우르는 힘이 있어서. 젊은 사람이길 바랬어요.

매버릭:
내가 반성한건 그 부분을 전제하고 반성한 거예요. 배우들도 어려 보이고.. 사실 마지막에 원석 씨와 봤었던 스마트 월드의 텍스트에 대한 아쉬움과 나비효과에 대한 아쉬움이 비슷한 지점이 있어요. 깊이 들어가지 않고 여기저기서 나온 명언들, 똑똑한 사람들이 이미 분석 끝내고 잘 다듬어 놓은 표현들을 짜깁기한 것 같은 정형화된 대사들 말이에요. 왠지 오그라드는 느낌이랄까. ‘내 언어’를 찾으려는 고민과 깊이가 아쉬웠다는 거죠.

오성화
: 그건 작가 역할의 미진한 부분을 연출이 커버했다고 생각해요.

아데모모
: 하지만 연출이 대사에 대한 부분에 책임이 없을 순 없죠. 글고 저는 연출이 나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 했는데요. 시사성에 대한 부분,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고발처럼 느껴져서 나보다는 세상에 대해 참여의식이 있구나 하고 반성했어요.

매버릭:
날 것 그대로 사회에 대해 비판하고 관심을 가지는 영역은 연극 말고도 수많은 다른 미디어에서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봐요. 참여의식은 연극에서도 물론 중요한 부분이겠지만 무대를 통해 전달될 때 연극은 예술가의 성찰을 거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관객이 굳이 다른 것이 아닌 연극을 보는 이유에 대한 고민과도 연결되는 이야기고요.



세 마녀 이야기
“이렇게 공기를 무겁게 하는 모습들이 힘들었어요.”


아데모모: 저는 ‘세 마녀 이야기’. 그게 좀 많이 힘들었거든요. 사실 맥베스 하면 ‘세 마녀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세 마녀들이 다 늙은 거예요. 딱 봤을 때의 이미지로는 무대에 세 파트가 있고 각각 마녀들의 공간이 있어요. 그들은 마치 신화처럼 노래를 해요. 각각의 목소리도 다르고 또 굉장히 잘하니까 처음엔 재밌다, 했어요. 마녀들이 변신하는 장면도 좋았고요. 치마가 전투복으로 바뀌거든요. 세 마녀가 돌아가면서 모든 역할을 하니까요.

정진삼:
이야기를 들어보니 맥베스가 안 나왔었다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매버릭: 전 목소리만 나오던가 그림자로 등장한다던가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했어요.
아데모모: 존재감이 좀...
매버릭: 연기 측면에서도 마녀들에게 밀리는 느낌?
아데모모: 셰익스피어 극, 하면 떠오르는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는 식의 연기방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쓰더라고요. 정말 이거는 내가 대학 다닐 때 봤던 셰익스피어 극이었어요.
조원석: 굉장히 실험적이네요. 요새 하지 않고 있는 걸 하고 있으니...(웃음)
정진삼: 요새는 굉장히 열심히 한다고 인정해 주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아요.
매버릭: 특히 연극을 많이 보는 사람들 같은 경우, 과도한 열심, 은 솔직히 부담이 돼요.

오성화:
나는 그 공연 좋았어요. 캐릭터들의 변화를 보는 게 흥미로웠어요. 그게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되니까 지루한 감은 있었지만.

아데모모:
작품소개를 보면 ‘기존의 작품들이 맥베스의 죄의식과 야망과 파멸을 중심주제로 다루어 왔다면 저희는 맥베스와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초자연적인 운명과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라고 되어있는데, 나는 이게 기존의 작품들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요.
오성화: 다른 해석을 했다고요? 그건 잘 모르겠네요. 창작극도 아니고.
아데모모: 연출은 재해석 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매버릭:
배우들은 빡빡하게 무대를 끌어가는 연출의 의도를 엄청나게 소화한 것 같아요.
아데모모:
저는 가까이 봐서 더 잘 알았는데요. 중간에 실수가 있었어요. 왕관이 내려오는 부분이 있는데. 그 끈 끝의 클립 같은 게 여배우에게 걸렸어요. 그 다음 동작을 하는데 끈이 감긴 거예요. 다른 공연에서 만약 그랬다면 끈을 뺄 수가 있을 텐데, 이 작품의 경우 한 시라도 팽팽한 긴장을 풀 수 없으니, 그 끈을 못 빼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또 맥베스가 샌들을 신고 나왔는데 끈이 풀려서 또 신발을 끌고 다니고요. 이렇게 공기를 무겁게 하는 모습들이 힘들었어요.
정진삼: 관객이 숨을 쉬어도 모자란 판국에, 숨도 못 쉬게 하다니.
아데모모: 그날 좀 체할 뻔 했던 것도 같아요.
매버릭: 끝나고 나오면서 ‘예술을 왜 이렇게 목숨 걸고 할까’ 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떠나는 사람들
“미래 연극상이라면 관객과 무대의 벽을 허물 수 있는 그런 것이 조건이 되는 걸까요?”


정진삼:
당당은 2005년에 본 적이 있어요. 첫인상은 굉장히 허술하다, 너무 열렸다, 퍼포먼스 위주다, 라는 느낌이었죠. 관심은 쭉 있었는데 이번에 그들의 작품을 제대로 봤어요. 한마디로 좋았습니다. 시종일관 흥미를 불러일으켜주고요.

전쟁에 대한 이야기도 이렇게 상큼발랄 할 수 있구나, 라는 점에 가장 의미를 부여하고 싶네요. 전쟁에 대해 울고 짜고도 아닌, 반공도 전우애도 아닌, 우애를 강조 하다가도 우애의 허상을 뒤바꿔서 보여주는 식의 반전과 반전의 연속이었어요.

처음엔 엄숙하게 시커먼 옷을 입고 피난을 가다가, 진지하게 결혼을 하고, 소박하게 먹을 것을 나눠먹는데, 당당이 왜 저러지? 노선을 바꿨나? 했어요.

무대엔 전문배우도 있고 아닌 배우도 섞여 있어 어색하기도 해요. 벼랑이나 개울을 건너는 시늉을 하는 장면에, 잘하는 사람은 잘하고 못하는 사람은 못하기도 해요. 그러다 갑자기 옷을 벗고 알록달록한 옷이 나와요. 요만큼 놀았는데 이만큼 더 놀고, 이만큼 놀다가 스카밴드 킹스턴루디스카가 들어오니 더 놀고.

가장 좋았던 건 무대에서 놀자고 하면 보통 관객들이 마음의 문을 닫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 봤어요. 억지로 춤추는 관객은 한명도 없더라고요. 한 두 명이 아니라 밴드까지 무대 위에 40명 정도가 있는데, 그렇게 확 노는 게 좋았어요. 연출이 탁월하다고 느꼈죠. 그렇게 놀고 나머지 20분은 전쟁에 대한 감각적인 움직임과 장면을 은유로 보여줘요. 밴드도 입장하는 게 인과관계에 의해 들어오는 게 아니라 갑자기, 노래가 있어야겠지요? 하며 들어왔어요.

1차원적으로 죽으면 윽, 하고 쓰러지는 게 하나도 없고 다 춤으로서 상황을 승화시켜서 표현했어요. 기본적으로는 피난민들이 피난을 가다 공동체를 확인하고 다 학살 되는 이야기에요. 끝까지 관객들을 슬픔에 잠기게 하진 않아요. 마지막에 곡을 하며 나오는데요. 1절, 2절, 슬프게 하다 4절에서는 다시 발랄하게 가는 식이에요.

매버릭:
마지막에 퇴장하는 장면에서 등장한 모든 배우가 자기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슬픈 표정으로 우는 연기를 하며 한 명씩 나가는데요. 소리 내지 않고 표정으로만 이야기하는 그 장면도 기억에 남아요.
정진삼: 그 장면도 이상하게 지루하지 않더라고요. 10명 넘는 배우가 그러는 게 보통은 지루 할 법 한데.
매버릭: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그 전에 이미 많이 동적으로 놀아주었기 때문에 그런 듯도 해요.
정진삼: 각각의 배우가 다 자기 캐릭터를 쌓아놓았기 때문에 동일한 반복이 아니었던 거죠. 어쨌든 관객들의 반응이 매우 좋았기 때문에 제가 칭찬만 하는 것이 좀 덜 미안하긴 하네요.


아데모모:
무브먼트 당당은 무용집단인가요?
매버릭: 무용이 중심이긴 하지만 여러 가지 요소들을 늘 함께 활용하는 팀이에요. 제가 기억하는 출발은 당당이 아니라 ‘춤추는 언니들’이라는 이름이었어요. 이번 작품은 뭐랄까.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보아왔던 여러 작품들의 종합판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새롭다 라기보다는 아, 당당이구나, 김민정이구나. 그렇게 한 예술가가, 팀을 이끌며 자기 맥락을 가져가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즐거운 일이에요.

정진삼:
옛날에 당당이 연애 얘기를 이런 식으로 했을 땐 손발이 오글거린다는 느낌이었는데 이번엔 전쟁얘기를 발랄하게 해서 좋았어요.

조원석:
나도 이 작품을 예전에 보았어요. 그때 봤을 땐, 무대 구조가 클래식하고 관객과 많이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서 공연 도중 술 먹고 그런 건 없었지만 내가 볼 때 연출에 변화를 주면서 내용도 함께 변해가면서 나아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때는 같이 놀고 싶은 느낌은 아니었어요. 신나긴 했지만 말이에요.

정진삼:
이 공연이 1회만 하는 것이라 더 그런 건 아닐까요. 다음 공연 생각 안하고 같이 술 마시고 놀고먹고 하는 게 좋았어요. 배우들도 종종 초연 때는 어쨌든 살아나는데 30번 하면 죽기 마련일 때가 있잖아요. 1회 뿐이라 작정하고 노는 느낌이랄까. 내가 현장에서 느끼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하잖아요? 2회나 3회 공연일 때도 좋으리라는 장담은 못하겠지만요.

오성화:
전 나이 든 배우들에게서 열정, 자부심 이런 게 많이 느껴져서 좋았어요. 이전 당당의 작품을 보면 완성도 측면에서 좀 아쉬움이 느껴졌었는데 이번에는 배우들도 작정하고 제대로 한번 해보겠다는 의지가 보이더군요.

아데모모:
아까 동시대성이라는 얘기가 나왔는데요. 지금 시점에서 미래 연극상이라고 하면 관객과 무대의 벽을 허물 수 있는 그런 것이 조건이 되는 걸까요? 결국 공감을 일으키는 게 연극의 핵심이라면 말이에요.
정진삼: 미래에도 공연해도 된다는 허락 같은 거라면, 그게 맞지 않을까요?



잃어버린 시간들
“그런 공통점들이 다 있는 것 같아요. 연출의 욕망이 부대끼는 거요.”


조원석:
‘잃어버린 시간들’은 원작이 있는 세 작품을 하나로 묶었어요. 세 작품을 연결 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데 말하자면 옴니버스 형식인 거예요. 원작의 줄거리는 공연에서 다 나와요. 근데 원작의 내용이 아니라 주제를 재해석하는 부분이 새로웠어요. 가족, 일상 등 서로 다른 주제인데요. 이건 제가 볼 때는 현실과 환상에 관한 혼돈을 묘사하고 재해석 한 거예요. 그래서 연출 기법 상, 등장인물들은 현실과 환상을 혼동하지요. 유리동물원의 경우 환상은 환상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해리가 되요. 분열이죠. 극 중 딸과 어머니가 같은 사람이고 하는 식으로.

타이피스트의 경우 앞부분과 뒷부분의 공통점이 뭐냐면, 일하다 수다 떨고 ‘사랑해’라고 말하고 또 일하다 수다 떨고 ‘사랑해’, ‘좋아해’ 하고 헤어져요. 현실과 환상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사랑은 환상이 되요. 근데 사랑이 환상이 되면 안 된다, 사랑은 사랑으로 끝나야 한다, 그런 내용으로 보이기도 해요. 이해하긴 어렵지만 인물을 바꾼 건 새로워요. 세속 도시의 사랑도 마찬가지에요. 현대인들의 허무를 말하는데, 나이트에서 만나 욕망을 표출하고 나중에 사랑을 느끼자 헤어지게 되죠. 욕망은 욕망대로, 사랑은 사랑대로, 랄까. 전 개인적으로 세 이야기 중 유리동물원이 가장 나았어요.

정진삼: 얘기와 분석을 보면 좋은 작품 같은데요?
매버릭: 좋은 것까진 모르겠지만 어떻게 보면 여섯 작품 중 가장 실험적인 시도였지 않을까도 싶어요.


조원석
: 그리고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연출하는 분이 배우인데 발음이 별로 안 좋았어요. 의도된 것일까요?

오성화: 이 배우가 세 개의 극을 연결하는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요. 마치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붕 떠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주도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저는 왠지 이 사람이 정신적으로도 뭔가 혼란을 겪는 것처럼 느꼈어요.

매버릭: 전 그 배우의 안 좋은 발음은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했어요. 굳이 내가 하는 얘기를 관객인 니들이 다 알아들어야 하는 건 아니야, 뭐 이런 느낌이랄까. 그걸 하나의 설정, 스타일로 이해했어요. 무대의 중심을 잡는 역할, 이런 게 아니라 관객도 내려다보고 함께 연기하는 다른 배우도 내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불편하기도 했어요.

정진삼:
그런 공통점들이 다 있는 것 같아요. 연출의 욕망이 부대끼는 거요. ‘홀맨’도 그렇고, ‘잃어버린 시간들’도 그런 것 같고. ‘떠나는 사람들’은 좀 아닌 것 같고.



에필로그
“굉장히 모호한 단어, 미래”

조원석: 실험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워야 하는데 그 안엔 진부함이 있어요. 실험극이라는 걸 내세울 거라면 실험만 했으면 좋겠어요. 내용을 내세우는 게 아니면 충격을 줘야하지 않을까요. 연극 장르에 어떤 영향을 줄까, 기본적으로 자기가 그런 걸 하려는 생각이 있어야 한다고 봐요. 누가 왜했냐, 뭐라 물어보면 대답 할게 있어야죠. 기존의 자기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실험극의 요소를 가지고 있어서 실험극을 하는 사람이다, 라고 하는 건 잘 이해가 안돼요. 그게 자기 고정된 스타일이다, 라고 얘기하는 게 낫지, 굳이 실험극이라고 이야기 할 필욘 없지 않나요?

정진삼:
미래야 솟아라, 라는 기획 자체가 안고 있는 맹점일 듯해요. 서울연극제가 너무 구태의연해지니까 그걸 만회하기 위한 것으로도 보여요. 요구하는 게 다분히 ‘실험극’적인 부분인데요. 실험적인 부분에 대한 포커스가 아니라, 완성도에 포커스가 있었던 것 같아요. 안정된 실험이었지요. 공연 팀들은 1회밖에 기회가 없어서 그런지 꽉 짜인 느낌이었고요.

매버릭:
내 예술을 위한, 나를 위한 실험이냐, 아니면 보여주기 위한 실험이냐, 라고 했을 때 어느 정도 ‘목적’이 있는 무대일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실험을 통해 새로운 관객을 만나겠다는 건 아니었을 거라는 거죠.

아데모모:
브로드웨이와 오프브로드웨이가 있으면 반드시 오프브로드웨이가 실험적인 건 아니잖아요. 근데 서울연극제에 아직 못나가는 사람들을 위한 등용문 같은?

매버릭:
그렇게 치자면 선발한 팀들이 거기에 해당할까 싶어요. 서울연극제엔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나는 오히려 그렇게 보진 않았고요. 작업을 지속적으로 쭉 해오긴 했지만 주류에서 좀 벗어나 있는 요소들을 본 거지 않을까요.

정진삼:
섞여있는 것 같아요. 신진발굴과 실험성을 위한 것.

오성화:
어쩌면 좀 더 단순하게 현재 상황에서 서울연극제를 주최하는 연극협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실험성을 선택했다고 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여섯 작품 모두 그렇게 새로운 건 없었어요.

정진삼:
굉장히 모호한 단어, ‘미래’.

오성화:
‘다원예술’이라고 했을 때, 유학파나 제도권 내에서 성장한 경우 말고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며 오랜 세월 버텨온 ‘다원예술’이 있다고 보는데요. 그 경우 중 하나가 김민정이죠. 이번에 ‘무브먼트 당당’이 수상해서 기분이 좋았어요.

매버릭:
또 한 측면을 보면 장르 결합인데요. 이런 복합장르의 작품을 만들고 싶다, 그래서 필요한 부문의 예술가를 찾아서 협업하는 경우도 있겠고요. 또 다른 경우는 다양한 장르의 창작자들이 이런저런 계기로 만나다가 마주치는 거죠. 작업을 하다가 얘가 얘를 소개시켜줬는데 마음이 통하는 거야, 그래서 살이 붙고. 얘는 무용한대, 또 얘는 미술한대, 어머 얘는 미디어 하네, 이러면서 다양한 창작자들이 모여 출발하는 다원예술의 특징이 있는 듯해요.
정진삼: 그런 건 좋네요. 진짜.

매버릭: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점점 빡빡하고 깔끔하기만 한 연극은 잘하냐고 물어보면 응, 잘하지 라고는 하지만 더 할 말은 없어져요. 소위 잘하기만 하는 공연을 보려고 ‘미래야 솟아라’ 라는 주제의 기획 전체를 일주일 투자해서 볼 필요는 없는 거지요. 또 기존의 유명한 극단, 연출가들이 실험을 안 하는 건 아니고요. 사실 실험이라는 게 어떤 식으로든 모든 예술가들에게는 일종의 기본적인 숙제, 같은 거 아닐까 싶어요.

아데모모:
난 실험이라는 말 자체가 족쇄 같아요. 누가 나를 단순하게 실험이라는 주제로 판단하면 할 이야기가 없어져요.
매버릭: 그나저나 나는 취향이 실험 쪽이야, 나는 실험극을 좋아해, 이런 관객이 있을까요?
정진삼: 없을걸요. 재밌고 나를 흔드는 작품을 좋아하는데, 실험이어서 실망하거나 하진 않겠죠.

매버릭:
실험적이라는 게 머리로 정확히 이해해서 느껴지는 감동이 아닌 경우요.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명확하게 설명하긴 어렵지만 감동을 주는 작품들이 간혹 있잖아요.
정진삼: 감각적으로 좋거나 그런 경우. 특히 최근엔 머리로 이해해서 좋았던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그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했겠어요.”
“혹평이든 호평이든 평이 있다는 게 그래도 좋지 않나요?”

아데모모:
이 자리가 저를 풀어준 게 있어요. 내 사이트에서는 나 혼자 이빨 까는 것처럼 쓰기도 하지만 아무데서나 그러긴 어렵잖아요. 근데 여기서도 막 까도 되는구나. 그게 좋은 것 같아요. 내가 쓴 글이 세상을 뒤흔들리는 없지만 그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했겠어요. 제가 연출한 플레이 위드 작품도 그랬지만 전 누가 내 작품을 혹평해도 별로 상관이 없거든요.

정진삼:
혹평이든 호평이든 평이 있다는 게 그래도 좋지 않나요?

아데모모: ‘
세 마녀 이야기’ 리뷰 쓸 때 저도 그런 생각 했어요. 그래서 그냥 후딱 썼는데요. ‘나비효과’ 쓸 때도 긍정적인 말이 안 나오는 거예요.

매버릭: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예술가여 펜을 들어라’ 라는 것인데요. 우리가 공연 보고 나서 다른 예술가에게 하게 되는 의례적인 인사인 ‘공연 잘 봤어’ 이런 것 말고요. 서로서로 좀 더 창작에 대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주고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이후, 흐지부지 몇몇 이야기들이 더 오갔고 어느새 날은 점점 어두웠졌습니다.
뭔가 서로 결론에 대한 습관적인 눈치를 좀 보다가...

"이 정도에서 우리 이제 그만 이야기를 끝낼까요?

어떤 결론을 내기 위한 수다는 아니었으니까요.
어쨌든, 인디언밥은 지속적으로 떠든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으니" 라며...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이것으로 <미래야 솟아라> 기획 연재를 모두 마칩니다.
오늘도 고된 창작의 삶을 땀 흘리며 살고 있을
연극인들의 미래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