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아이로 되돌아가는 길을 걷고 있는 여행자, 마임이스트 '이태건'의 <혼자 떠나는 여행>

2010. 9. 9. 21:55Review


아이로 되돌아가는 길을 걷고 있는 여행자
마임이스트 '이태건'의 <혼자 떠나는 여행>


글_이현수
사진_삐삐롱스타킹





1. 마임

 

마임(mime)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미모스(mimos)에서 유래하며 '흉내'를 뜻한다.

 

어린아이가 흉내 내는 몸짓을 하면 어른들은 그걸 보며 즐거워한다.

엄마 흉내, 이웃집 할아버지 흉내, 텔레비전 속 코미디언 흉내, 강아지 흉내, 공룡 흉내...

 

어른이 흉내 내는 몸짓을 하면 사람들은 실제와 얼마나 닮았는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다. ‘우와~ 진짜 같다.’ 혹은 ‘에이~ 하나도 안 비슷해’ 하면서...

 

왜 아이의 흉내와 어른의 흉내는 다른 대접을 받고 있나. 그 이유가 궁금하다.

 

마임 공연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입이 헤벌쭉 벌어지고 겨드랑이가 간질간질 한 느낌이 든다.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듯이 하나하나 만들었다가 허물어지게 하는 그 마술에

나도 모르게 어린아이가 되는 것일까. 혹은 어린아이가 되었다는 착각에 스스로 빠져 보는 것일까.

 






2. 여정 : 되돌아가기

 

이태건의 <혼자 떠나는 여행>, 그 여행에 잠시 동행 했다. 여행은 정해진 것 없이 발 길 닿는 대로 이리 저리 가는 것이겠지만 또 한편으론 자신도 모르게 어떤 흐름을 만들어 가며 진행 중인 것인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면...

 

다섯 개의 에피소드는 개별적인 이야기들이지만 이 여행의 흐름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각각의 에피소드에 흐르고 있는 것을 나름대로 ‘되돌아가기’라고 이름 붙여 보았다. 이 이름이 어떤 에피소드에는 딱 들어맞는 건 아닌 것도 같다. 하지만 하나의 흐름을 찾고 싶은 욕구가 나로 하여금 억지 춘향도 마다않게 하고 있다.










1) 어느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 : 순수한 사랑으로 되돌아가기

 

새소리가 들리면 두 손이 반짝이며 새의 날개 짓을 한다. 그리고 마임이스트는 소년이 되었다가 소녀가 되었다가 왔다 갔다 한다. 마치 혼자서 소꿉놀이를 하는 아이 같다. 소년은 소녀를 생각하며 꽃 모자를 만들고 징검다리를 놓는다.







소녀를 기쁘게 해주려는 소년의 사랑은 댓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사랑이다. 하지만 소녀는 오해를 하고 소년의 뺨에 상처를 남긴다. 소년의 상처받은 마음과 달리 관객은 경쾌하게 웃고 있다. 한 사람이 두 사람의 역할을 하니까 더 재밌다. 암전.

 

어둠 속에서 소년은 웃었을까, 울었을까. 최후엔 웃었을 것 같다. 소년의 사랑은 순수한 사랑이기에.











2) 비행 : 꿈으로 되돌아가기
 



늙은 연구자는 흰 가운을 입고 있고 한 마리의 개를 키우고 있다. 자신의 실험 결과를 개 에게 시도해 본 결과가 성공적이다. 실험 용액을 먹인 개가 창문 너머로 날아간 것이다. 이제는 연구자 자신이 실험 용액을 마신다. 하늘을 난다. 팔은 날개가 되고 무대는 창공이 된다. 하얀 종이비행기 같기도 하다. 새도 만나고 개도 만나고 전투 비행사도 만난다. 즐거운 비행을 하던 중 비행사의 총에 맞아 추락. 꿈에서 깨어난다. 꿈을 꾸었던 것일까? 하늘을 나는 꿈. 현실로 돌아왔다. 허탈한 마음에 개에게 다시 실험 용액을 먹여 개를 날려본다. 개는 창문 아래로 추락. 실험은 실패 했나? 터덜터덜 뒤돌아 가는 연구자의 뒷모습. 극이 끝나려는 순간, 갑자기 연구자는 다시 객석을 돌아본다. 앗! 옷에 구멍이 뚫려있다! 총알의 흔적! 그리고 암전.





어린 시절에는 치타도 되고 로봇도 되고 인형도 될 수 있었다. 내가 달리면 나는 치타의 속도로 달리는 중이다. 내가 로봇 박사에게 수술을 받으면 나는 로봇이 될 수 있다. 다만 로봇 박사가 국내에 없을 뿐. 인형은 말을 하고 나는 그 인형과 대화하는 또 다른 인형이다. 인형이 나와 같은 생명을 갖고 있다.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꿈. 그 꿈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어른의 현실로 조금씩 들어온다. 꿈깨기. 그리고 어른의 현실을 살아가면서 다시 꿈을 꾼다.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려는 꿈. 현실로 되돌아 왔지만 꿈에서 깬 현실은 이전과 똑같은 현실이 아니다. 그때부터는 늘 꿈과 함께 일 것이다. 꿈꾸기.




 

 




3) 가면을 만드는 사람 : 휴식으로 되돌아가기

 

의자에 앉아 양 손에는 정과 끌을 들고 가면을 조각하는 사람. 정성스럽게 나무의 결을 따라 표정을 만들어가고 있다. 완성된 가면을 얼굴에 써 보는 몸짓. 웃는 표정으로 고정된 마임이스트의 얼굴. 가면을 벗고 다음 가면을 만든다. 나무의 저항이 느껴지는 조각가의 몸짓. 쉬지 않고 열심히 만든다. 우는 표정의 가면을 만들고 그 다음엔 험상궂은 표정의 가면을 만든다. 가면을 바꿔 써 가면서 춤도 추고 슬퍼하기도 하고 장군처럼 칼을 뽑아들기도 한다. 즐거워하는 사람.












그리고 웃는 가면을 계속 쓰고 움직인다. 너무 오랫동안 웃는 가면만 쓰고 있었던 것일까. 가면을 벗고 싶어도 벗을 수가 없다. 벗겨지질 않는다.








이때부터 마임이스트의 얼굴은 완전한 이중이 된다. 가면의 표정은 웃고 있지만 그 표정 아래 무수한 다른 표정들이 왔다가 사라진다. 그 모습이 기묘하다. 웃는다고 해야 할까 운다고 해야 할까. 비극이라 해야 할까 희극이라 해야 할까. 고통스러운 몸짓, 끝내 결심을 한다. 가면을 만드는 사람은 정과 끌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내리친다. 가면을 만드는 사람은 가면을 부순다.









사람은 타인 앞에서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가운데 가끔은 가면을 벗고 휴식을 취하고 싶다. 휴식을 취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만이라도 가면을 벗고 쉬고 싶다.

 

마음은 얼굴에 표정을 만든다. 표정은 자연스러울 때 보기 좋다. 자연스러운 표정은 가면의 휴식과 같다. 웃는 마음에는 웃는 표정, 찡그린 마음에는 찡그린 표정. 표정表情은 겉으로 드러나는 마음. 물속에 던진 돌이 물의 표면에 동심원의 물결을 만들 듯이 표정은 밖으로부터 던져진 무언가에 의해 만들어진다. 밖은 자연처럼 계속 변하고 있다. 자연의 흐름처럼 표정이 자연스럽게 흐를 수 없다면 사람은 어떻게 될까. 굳어갈 것이다. 웃는 가면을 쓴 사람의 표정이 웃고 있지만 점차 굳어간 것처럼.

죽음, 편안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가면을 벗고 무표정으로 되돌아갔다. 그제야 표정이 마음과 일치한다. 이제는 쉴 수 있다.

 








4) 습관 : 최초의 습관으로 되돌아가기

 

이태건 씨는 수맥을 찾을 때 쓰는 엘로드를 들고 물을 찾고 있다. 엘로드가 물을 찾았다. 효과가 있다. 그래서 이태건 씨는 엘로드를 믿고 엘로드에게 묻기 시작한다. 여기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고. 이태건 씨를 가리키는 엘로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역시 이태건 자신을 가리킨다. 관객 앞에서 공연을 하고 있기에 지금 이 순간 행복한 마임이스트, 그러나 언제 관객이 외면할지 몰라 두렵고 불행한 사람, 이태건 씨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사람,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혼자 놀게 되었고 또 그러다 보니 사물과 대화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렇다면 이러한 습성은 왜 생긴 것일까? 엘로드에게 묻자 엘로드는 엄마를 가리킨다. 심리학 상담에서 트라우마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 문제점을 극복하는 방식과 비슷하달까. 습관의 원인을 찾아서 질문을 던지는 사람, 그리고 엘로드의 대답. 엄마의 사랑이 일관되지 않아서 혼란스러웠던 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받고 싶어 엄마의 눈치를 보기 시작 했다고 한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눈들로부터 자유로워도 좋다고 엘로드는 이태건 씨를 위로한다.




 





마임 공연의 형식은 아니지만-이태건씨는 시종일관 엘로드와 대화를 하는 형식으로 이 에피소드를 구성했다.- 혼자 떠난 여정에서 만난 소중한 앎이라서 관객들과 나누고 싶었다고 한다.

 

이태건 씨의 엘로드의 결말에 내 마음의 엘로드가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며 말을 한다. 엄마의 사랑을 받기 위해,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눈치를 보던 아이가 성장하여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건 어쩌면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못 받는 것 때문에 웃고 울던 아이에서, 아이의 행복에 웃고 아이의 불행에 우는 어버이의 마음으로 자란다는 것이 아닐까. 타인과 나 사이의 화살표가 그 방향을 바꿔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러니 관객의 웃음에 행복하고 관객의 무표정에 불행한 마임이스트는 어버이의 마음으로 성장하는 과정 중에 있는 사람이 아닐까. 마임이스트는 관객을 웃게 할 이야기와 몸이 있기에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는다. 이것은 나의 엘로드가 나에게 어버이의 마음을 좀 가져보라고 채찍질 하며 알려준 앎이다. 무례한 나의 엘로드.




 






5) 인생, 그리고 회우 : 되돌아가기, 그리고 되돌아보기

 






인생 / 상의를 벗은 사람, 흡사 일꾼의 모습 같다. 끊임없이 걷고 있다. 실제론 제자리 걸음이지만 꼭 앞으로 나아가며 걷는 것처럼 보인다. 걸어가면서 만나고 헤어진다. 걷는 자에게 외부에서 무언가가 다가왔다가 멀어진다. 놀이와 배움, 성장, 사랑하는 이를 만나고 아이를 낳고 키우고... 아이가 자랄수록 걷는 자의 몸은 작아진다. 점점 바닥과 가까워져 나중엔 흙으로 되돌아간다. 인생이라는 농사를 짓던 일꾼은 자신이 발 딛고 섰던 그 곳으로 되돌아갔다. 떠나왔던 그곳으로.








 

회우 / 슬로우 모션으로 몸을 일으켜서 흙으로 빚은 조각상처럼 앉아 있다. 상체가 비스듬히 일어나면 그때부터 얼굴이 슬로우로 말을 한다. 외침일까, 분노일까, 괴로움일까, 아픔일까, 호소일까. 거울과 마주선 이가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흘리는 눈물일까. 음악도 이 뉘우침에 함께 하고 있다. 목소리가 외치고 있다. 다시 천천히 흙으로 되돌아간다. 슬로우..








걷기. 다리뿐 아니라 온 몸이 걷고 있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듯이 걸음걸음들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몸은 끊임없이 흐르면서 숨 쉬고 있다. 점차 몸에는 땀이 흐르고 힘도 들어가지만 걸어가는 길 자체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반짝인다. 걸어가면서 다가온 것들을 소중하게 대하고 떠나가는 것들을 안타깝게 보낸다. 걷기 자체가 인생이다. 걸어가서 어떤 것을 얻느냐가 목적이 아니라 걷는 과정 자체가 삶이고 소중한 한 걸음 한 걸음이다.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매 걸음마다 땀이 한 방울씩. 그러려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정직하게 걸어가야 할 텐데, 때로 우리는 거울을 보고서야 알게 된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되돌아보고 그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영정 사진을 마주 보며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 ‘회우’는 인생의 매 순간마다 있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3. 공연에 대한 아쉬움

 

네 번째 에피소드, ‘습관’에서 이태건 씨는 엘로드 와의 편안한 대화로 장면을 구성했다. 스스로도 마임 공연은 아닌 것 같다고 밝혔지만 세 번째 에피소드까지 즐겁게 보고 있던 내게 ‘습관’이라는 작품은 잘 갖고 놀던 장난감을 누군가에게 갑자기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 마임어가 입을 열어 말을 했을 뿐인데 그 행위가 내게는 환상의 세계를 파괴하는 듯 느껴졌다. 환상을 빚고 있던 마임어가 사람이 된 것이다. 그것도 외로운 사람이.

 

난 환상을 꿈꾸는 아이가 아닌데 왜 그렇게 실망했을까.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무대에 올린다는 것이 나름대로 새로운 시도이고 솔직한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내 맘 속의 무례한 엘로드가 또 말을 하기 시작한다. : 이태건 씨는 ‘습관’에 대한 이 발견이 소중하게 느껴져서 타인과 나누고 싶었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전하고픈 말이 있다는 것은 작품의 시작점이 된다. 그런데 작품의 씨앗이 작품으로 창조되는 과정이란 어떤 것일까. 혹시 이런 것이 아닐까. 꼭 전하고 싶은 어떤 내용이 있는데 그 마음이 너무나 간절한 나머지 차마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것. 그런 것이 예술가의 내면에서 비밀로 간직되면 그때부터는 그 비밀들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 말들은 표현이 되고 그 표현들은 작품이 된다. 그때부터는 말의 형태냐 몸짓의 형태이냐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최선의 표현을 찾는 과정이 창작의 과정일 테니까.

 

‘습관’이나 ‘회우’의 경우, 표현에 대한 아쉬움은 내용에 대한 아쉬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예술가의 철학이 작품화 되었다기 보다는 예술가 자신의 목소리,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다 보니 관객이 작품에 적극적으로 빠져 들어가지 못하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관찰자로 머물렀다는 느낌이 든다. 예술가의 철학이 작품화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가의 목소리나 감정을 그대로 무대에 올리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4. 이태건의 <혼자 떠나는 여행> : 분장실에서, 자신과의 대화

 

내가 본 마임어들은 주로 혼자였다. 여행 중에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만남이 끝나면 또다시 혼자만의 여행으로 돌아가는 여행자. 혼자 떠나는 여행은 고독하다. 때로는 외롭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여행을 하는 자의 얼굴에는 강인함 뒤로 고독이 묻어난다. 에피소드 사이사이의 분장실 장면은 그러한 여행자의 고독 혹은 외로움이 느껴진다. 물을 마시고 한 숨을 돌리면서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하고 재촉하기도 하는 마임이스트. 거울을 보면서 자신과 대화를 하는 모습은 기력이 없고 지쳐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무대로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넘치는 에너지와 밝은 표정으로 매력을 발산하는 마임이스트.

 

그때, 공연장에서 <혼자 떠나는 여행>에 잠시 동행했던 관객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마임이스트, 이태건의 여행을 보았을 것이다. 또 한편으론 무대 위에 환상을 만들었다가 허물어뜨리는 아이, 연구자, 장인의 모습에서 숨겨진 고독을 보았을 것이다. 그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마음 깊이 담아둔 비밀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고독 또는 외로움이 무대 위로 올라오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건 분장실에 숨겨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각 장면이 끝난 후 분장실 거울 앞에서 들릴 듯 말 듯 읊조리는 이태건 씨의 육성은 귀를 쫑긋 기울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숨겨진 것은 자꾸 찾아내고 싶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으니까...

 





5. 마임

 

리뷰의 형식도 되돌아가보자.

아이의 흉내와 어른의 흉내는 무엇이 다를까.

 

‘마임은 묘사 이전의 것’이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마임은 ‘순수한 몸짓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던 또 다른 이의 말이 떠오른다.

<혼자 떠나는 여행>을 보고,

그 ‘묘사 이전의 것’이란, 혹시 ‘순수한 몸짓’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아이의 흉내는 순수한 몸짓이다. 그리고 마임은, 어른의 흉내는 꿈꾸는 몸짓이다.

아이의 흉내처럼 순수한 몸짓을 꿈꾸는 몸짓.

아이의 순수한 몸짓.

불가능한 꿈이지만 그렇다고 흉내조차 못 낼 꿈은 아니다.

 

그리고 그 꿈꾸기를 지켜보는 사람 역시 잠시나마 행복한 아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행복은 어른이 된 후에야 느낄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

아이는 행복도 불행도 잊은 채 이미 무대와 하나가 되어 있을 테니까...

그리고 마임이스트는 아이로 되돌아가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 여행자가 아닐까...

 

 




이태건의 <혼자 떠나는 여행>
2010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참가작


2010.08.21-22 가톨릭청년회관 니콜라오 홀

작품의도
마임은 말이 없어서 많은 사람 등이 답답한 것, 재미없는 것, 과장된 연기 등의 선입관을 갖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좀 더 재미있고, 보기편한, 하지만 너무 가볍지만은 않은 작품을 소개하고 싶어서 만든 작품이 “혼자 떠나는 여행”이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나의 10여 년간의 마임단편 작품들 중 몇 개를 추려 옴니버스형식으로 만든 개인공연이다.
그리고 분장실을 무대 위에 두어, 각 작품들 사이에 그 곳에서 옷도 갈아입고,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데, 이는 배우의 공연할 때의 모습만이 아닌 평상시의 모습을 관객이 보고, 관객과 배우사이의 벽을 허물고 더 친근감 있게 소통하고 싶어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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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이현수.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