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상상만발극장의 <비상사태>-당신 앞에 놓인 세 가지 선택지, 당신은 무엇에 내기를 걸 것인가?

2010. 9. 13. 18:17Review



상상만발극장의 <비상사태>
당신 앞에 놓인 세 가지 선택지, 당신은 무엇에 내기를 걸 것인가?




글_ 정영감






극은 여자(부인)의 대사, ‘괜찮아?’로 열리고 ‘그렇지 않으면 우린 끝난 거야’로 닫힌다. 인물들은 질문과 단정 사이에 가로놓여 있다. 두 대사는 ‘괜찮지 않으면, 우린 끝난 거야’라는 한 대사로 엉겨 붙어 남자(남편)와 소년(아들)을 옥죈다. ‘안전(安全)’에 대한 여자의 욕망이 질문을 조건으로, 단정을 단죄로 뒤집는다. 극은 별다른 사건이 없음에도, 혹은 그러한 이유로, 이야기의 뼈를 추리기 어렵지만, 드라마터그의 해설을 바닥에 두고 여자의 ‘불안(不安)’을 따라가 보자.





 

남자는 그 동안 대가로 치러야만 했던 무한경쟁과 자원(인력) 감시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허무감에 빠진다. 여자는 남자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여자 입장에서 볼 때 남자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이 이상향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공동체 외부(철책 밖) 사람들이 자신들 가족의 자리를 빼앗고야 말 것이라는 공포에 시달린다.

 




공포-불안은 구체적이다. 그것은, 남자가 환멸과 허무에 짓눌려 ‘아무것도 즐기지 않고’ 회사에 대해 ‘고마운 줄 모른다면’, 이 공동체 너머 ‘경찰들이 제멋대로 미쳐 날뛰는’, ‘쇼핑을 하다 강간을 당하는’, ‘방송국 카메라’가 미치는 못하는 곳으로 내쫓길 것이라는 사실에 닿아 있다. 여자는 무수한 질문을 통해 남자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끊임없이 호명한다. 여자의 목소리는 양재기를 손톱으로 긁을 때처럼 깔끄럽다. 이 호명에 대한 남자의 답이 ‘여기 이건, 이건 사는 거야?’라는 되물음이라는 건, 남자가 안전에 대해 느끼는 환멸/허무에 비추어 볼 때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극 전체가 철저하게 계급적 상황을 전제한다는면에서, 저 가진 자들의 불안과 환멸은 보편적이지 않다. 저들 또한 나름의 어려움을 가진다는 이해는 기만적이지 않은가. 그 이해를 위해 어두운 극장에 앉아 무대를 응시할 관객이 어디에 있는가. 철책을 모든 관계의 단절을 드러내는 부분-환유로 읽고, 그 외연을 확장해 볼 필요가 있다. 여자와 남자의 단절이 드러나는 장면은 그래서 중요하다.









여자 
달라진 게 없는 거야?

남자  없어.

여자  난 그냥, 당신이 뭔가…

남자  괜찮아, 걱정하지마.

         (여자에게 키스한다)

여자  이상해.

남자  뭐가?

여자  달라.

남자  뭐?

여자  당신 같지 않아, 뭔가… 달라… 모르겠어, 근데…

남자  아니라니까.

여자  당신 안에서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어. 그런데 그게 뭐지?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내 남편은 어디 있지?
          어디
있는 거야, 찾을 수가 없어…



 



여자는 남자 안의 무언가가 변했음을 깨닫는다. 그 무엇은 남자를 ‘그 남자’로 만드는 무엇이며, 그 무엇이 바뀐 남자는 ‘그 남자’가 아니다. 그 남자가 아닌 남자는 여자를 철책 바깥으로 내몬다. 여자에게 철책 밖의 삶은 ‘더 이상 사는 게 아닌 삶’이다. 여자는 남자의 변화를 철책 바깥세상의 침입으로 간주한다. 여자는 남자 안에서 변해버린 것들을 거세하거나, 남자로 하여금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라고 종용한다. 이는 정확히 ‘안전’으로 되돌아가는 일이며, 남자에겐 환멸의 시간으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남자는 다만 자신의 입술을 포개어 여자의 말을 막을 뿐이다.















안전 속에서 여자의 삶은 여자 자신의 말처럼 ‘살아 있는 삶’인가. 아름다운 풍경이 모니터 위에 펼쳐지고, 바다의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오고, 영상장치에 삶 전체가 기록되며, 아무런 결론이 나지 않는 시의회에 참관하고, 매일 보안검색대를 통과해야 하는 삶-그것은 ‘죽이고 불안한 기쁨을 느끼느니 / 죽임을 당하는 게 더 편한 법’이라고 읊조린 멕베스 부인이 바라던 삶과 같지 않은가. 안전이라는 무덤 속 적막강산의 삶 아닌가. 이미 죽은 채 사는 삶, ‘더 이상 사는 게 아닌 삶’ 아닌가. 여자의 안전 속에 삶은 없다. 지침에 따르는 삶, 수치로 환원되는 삶은 곧 자동인형의 삶이다.


이러한 여자의 죽은-삶에 균열을 만드는 것이 남자의 환멸이고 무능이다. 이는 죽은-삶에 대한 산 자의 반응일 따름이지만, 남자는 제 몸을 움직여 살아 있는 삶을 찾지 않는다. 소년이, 자신과 극단에 있는 여자가 아니라 형용사(形容詞)의 질감으로 부유하는 남자와 대립하는 이유는, 소년이 가지고 있는 동사(動詞)로서의 힘 때문이다. 소년은 여자의 질문과 요구에 답하지 않고, 실재의 바다와 석양,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려 한다. 소년 안의 그 무엇은 거세되지 않으며, 그 무엇을 통해 소년은 자신을 재구성한다.














하여, 당신과의 단절 앞에 선 관객-나에게 세 가지 선택지가 놓인다. 지금의 당신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당신으로 거세해 수락하려는 여자-나를 긍정할 것인가. 벽 앞에 주저앉아 환멸을 곱씹는 남자-나를 긍정할 것인가. 단절이 제공하는 상징가치를 모두 벗어버리려는 소년-나의 행위를 긍정할 것인가. 당신 안의,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은, 당신을 당신으로 구성하는 중핵이다. 그것이 제거될 때, 당신은 이미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나다.


나는 소년 쪽에 내기를 걸겠다.









상상만발극장 <비상사태>
2010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참가작
0826-0828
산울림 소극장

팔크 리히터 원작
박해성 작/연출









줄거리

작품 속에 등장하는 40대 부부는 자신들의 꿈을 이루고자 열심히 일해왔다. 이들은 치열한 경쟁을 물리치고 기업이 운영하는 폐쇄적 공동체 속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고 현재 거기서 안전한 삶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천국같은 삶에 미세하지만 치명적인 균열이 감지되기 시작한다. 남편은 쳇바퀴 도는 듯한 삶, 돈버는 기계 같은 삶에 지친 나머지 점차 무기력해져 간다.
아내는 남편이 일자리를 잃고 이곳을 떠나야 할 지도 모른다는 위협과 아들인 소년이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철조망을 넘어 저 바깥 세계로 영영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미쳐간다. 극 중 바깥에서는 파도소리가 간간이 울려 퍼진다. 파도소리는 철조망을 넘어 올라 가려는 사람들이 총에 맞아 지르는 비명을 은폐하려는 것처럼 들린다. 긴장과 불안이 극도로 고조되면서 안전했던 거주지는 디스토피아로 변한다. 이제 그 누구도 신뢰할 수 없다. 심지어 가족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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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만발극장은 연출가 박해성을 중심으로 몇명의 젊은 디자이너와 연극학자, 작가, 배우 등이 뜻을 모아 2008년에 만든 극단입니다. 장르와 문화의 경계에서 상상과 표현이 구현되는 '공간의 극장성'에 기반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관객과 창작자가 만나 '극장'을 만들어갑니다.

2009년 8월, 9-10월 <십이분의 일> : 서울프린지 참가작, 프로젝트빅보이 선정작
2009년 11월 <타이터스> : 제4회 CJ영페스티벌 연극부문 우수창작상 수상작
2010년 8월 <비상사태> : 서울프린지 참가작
2010년 9-10월 (예정) <아이에게 말하세요> : 서울연극올림픽 국내부문 새개념연출가부문 참가작


"극장은 세상입니다.
세상에는 관객과 배우가 있습니다.
배우는 말을 하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합니다.
관객은 바라보기도 하고 귀기울이기도 합니다.
상상만발극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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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영감.
다리를 재미나게 떠는 신기술을 가진 '책 읽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