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동시대 작가의 숨 쉬는 방법 <자라의 호흡법>

2010. 10. 14. 11:18Review



동시대 작가의 숨 쉬는 방법

 

《자라의 호흡법》

 

이시원작, 신동인 연출, 극단 필통 작품

 


글_정진삼








올해 한국 연극계에 극작으로 등단한 이시원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그녀는 ‘중고신인’입니다. <녹차정원>이라는 작품으로 2005년 옥랑희곡상을 수상했고, <외톨이 연인> 이라는 작품이 2007년에 공연된바 있으며, 올해 <변신>이라는 작품으로 그 성취를 재차 인정받았습니다. ‘중고 신인’ 인 만큼 그녀의 내공은 만만치 않습니다. 작품 속에서는 신인다운 패기와 중고스런 노련함이 공존합니다. 그 모습은 등장부터 떠들썩했던 문학계의 소설가 박민규를 연상하게 합니다. 물론 연극판은 조용한 곳이라서 호들갑을 떠는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만.

 


학부시절 소설을 썼다는 그녀의 ‘필력’ 은 희곡에서 빛을 발하는 듯 합니다. 일방적인 개성과 고유성을 존중하는 ‘소설’ 대신, 다양한 주체가 공존해야만 하는 ‘연극’ 장르의 차이일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말’ 을 다루는 솜씨가 훌륭한데, 세상에는 그런 ‘말’ 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됩니다. 지적인 ‘수사’ 나 세련된 ‘시어’ 가 아님에도, 시시한 상황 속에서 낯선 의미들을 잡아내어, 이를 긍정하고 격려함으로써 속 깊은 대화로 공감을 사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인극 <외톨이 연인>은 동시대 청춘의 ‘미워할수 없는’ 사랑 이야기로, <변신>은 동시대 가장의 ‘미워할 수 없는’ 탈출 이야기로, <자라의 호흡법>은 동시대 여러 군상들의 ‘미워할 수 없는’ 삶의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미워할수 없는’ 이 아니라 ‘미워하면 안되는’ 이라고 일깨워주는 ‘맏언니’ 같습니다.

 


이시원의 작품은 그간 세상살이에 지친 인간과 인간 아닌 것들을 두루 다루었습니다. 대체로 ‘소외’ 가 키워드이지만, ‘소외체험’ 을 현재진행형으로 느끼고 있는 인간을 비롯 자기와 비슷한 인간, 혹은 동식물 아니면 무생물까지 그 소통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쉽게 넓어지지는 않습니다만, 끊임없이 정을 주고, 관심을 베풀고 나면 그 대상은 인물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미워할 수도, 미워지지도 않을 만큼 하찮은 존재들과 말을 섞고 나면, 그들을 ‘그들’ 로 만들어준 고유의 사연들이 툭 튀어나옵니다. 다들, 사연을 가지고 나름, 발버둥치며, 열심히 살았군요. 그걸로 됐습니다, 라는 게 작가의 심정인가 봅니다.

 


<자라의 호흡법>이라는 생뚱맞은 제목처럼, 작품엔 엉뚱한 인물들로 가득합니다. 어린이 비디오 아트를 하는 세이, 이를 응원하며 속으로 맘을 졸이는 진수, 신제품 빵을 만들기 위해 빵에게 락과 클래식을 들려주는 커플, 주변사람들에게 도움과 민폐를 적당히 끼치는 밉잖은 노숙자, 호수를 관리하며 새우깡 금지! 를 외치는 아저씨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듯한 외양 속에 감춰진 그들의 고유성과 개성은 너무나도 특이합니다. 우리 주변에 꼭 있을 법한, 그러나 너무 평범해서 아직 이야기되지 않은 그들. 이시원 작가가 포착해낸 인물들을 배우들은 절묘하게 소화해냅니다. 세이, 진수, 커플, 관리인, 노숙자, 그리고 열 여덟살에 세이를 낳고 가출한 아빠. 특히 노숙자와 아빠의 캐릭터는 가히 ‘미친 존재감’ 을 뿜어냅니다. 관객입장에서 도저히 미워할래야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세이는 불쑥 집으로 찾아온 게이인 아빠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전심전력하여 거부하지만, 핏줄은 끊어질래야 끊어지지도 지운다고 지워지지도 않습니다. 현대의 젊은 작가들이 그리는 가족극은 오히려 ‘부모’ 로부터 깨달음이 옵니다.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쪽도 기성세대 쪽입니다. 그게 현실에서 얼마나 일어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상상’ 과 ‘기대’ 속에서 부모가 될 젊은 세대들은 자식을 쉬이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문제는 사랑받기를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디 미워하지말기! 를 하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의 메마른 감수성과 소통의 한계 상황에서 하기 어려운 ‘사랑’ 대신 ‘미움’ 을 거두는 것이 새로운 교훈이 될지도 모릅니다. 서로 미워하지 말라. 네 이웃을 미워하지 말라, 부모를 미워하지 말라. 주변의 사물을 미워하지 말라. 허나 이런 딴 생각도 잠시 해 봅니다. 왜 미워하면 안될까? 용서와 화해를 안하면 안될까? 사랑도, 미움도, 용서도, 복수도 하지않으면 안될까?

 


거북인 척 하는 자라의 호흡법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긍정’ 과 ‘여유’ 의 방법을 일러줍니다. 무엇이 변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삶에는 대단한 것이 없고, 우열도 없고, 모두가 특별하다는 작가의 야심찬 계획이 슬쩍 엿보입니다.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신개발 빵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채는 노숙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커플의 얼토당토한 시도들이 자아냈던 ‘시시한’ 긴장은, 노숙자의 정확한 평가와 해석으로 ‘신선한’ 감동으로 바뀝니다. 한편, 세이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아빠가 걸그룹 “소녀시대” 의 춤과 노래로 진심어린 절규를 쏟아낼때, 한편으론 어이없고 황당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애틋하고 또 즐겁습니다.

 


해석불가의 어리둥절한 지점에 다다른 드라마는 오히려 상상력을 가동시키고 새로운 이해를 ‘관객으로부터’ 구하게 합니다. 아빠는 어디선가 저런 식의 게이적 삶을 살았을 것이고,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한 부녀의 방식은 각자의 퍼포먼스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점. 그리하여 참을수 없는 가벼움으로 욕을 먹는 ‘소녀시대’ 조차도 작가는 미워할 수 없게 만듭니다. 새삼 일깨워지는 것은 “그래요. 난 널 사랑해. 언제나 믿어. 꿈도 열정도 다 주고 싶어. 난 그대 소원을 이뤄주고 싶은 행운의 여신. 소원을 말해봐” 라는 그녀(들)의 주문입니다.

 


이시원 작가의 드라마는 이처럼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의 ‘화해’ 혹은 ‘미움의 중단’ 을 이끌어냅니다. 삶에 대한 사소한 통찰도 이러한 맥락의 가운데 있습니다. 새우깡은 기름에 튀겨서 물에 가라앉지 못한다는 둥, 건빵도 빵이라는 둥, 음악을 들려준 빵이 더 맛있다는 둥. 택도 없지만, 그래서 더욱 유의미해집니다. 연극성도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합니다. 단팥빵과 소라빵으로 분장해 벌이는 현대인의 프레젠테이션 퍼포먼스는 희극성을 더해주고, 극과 극 사이에 보여지는 아동 비디오 아트의 상영은 ‘별거 없는 예술의 평등함’ 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한편, 무대 위에서 먹는 '빵‘ 은 고독한 현대인을 드러내는 기호에서부터 허기를 달래주는 소중한 한끼 식사로, 삶을 위협하는 식품에서 불우한 이웃에게 행복을 전하는 오브제가 됩니다. 과연 그 노숙자는 3000개의 빵을 어디에다 썼을까요?

 


마지막에 다시 불리는 ‘소녀시대’ 의 노래는 우리를 더욱 즐겁게 합니다. ‘평범한 존재’ 되기와 ‘특별한 존재’ 되기 사이에서 인간은 타인에게 끊임없이 이해와 애정을 갈구합니다. 그러나 자신도 추스르기 어려운 이때, 우선순위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먼저일테고, 남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 다음단계일 것입니다. 세상에 던져진 존재들이 가쁜 호흡을 내쉬며 부대낄 때, 일단 자신을 돌아보고, 그 다음 주위로 눈을 돌려봅니다. 다들, 사연을 가지고 나름, 발버둥치며, 열심히 살았군요. 그러고 보니 거북이는 평생을 ‘견디는’ 존재였군요. 그걸로 됐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바뀌었냐구요? 전혀 그 렇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 안의 ‘낭만’ 과 ‘긍정’ 이라는 진부해져버린 ‘가치’ 가 새삼, 눈을 뜨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게 지금, 여기의 연극의 사명이기도 하고, 언니같은 극작가의 소명이기도 하구요. 그리하여 조심스레 외쳐봅니다. 연극만세.







자라의 호흡법
극단 필통/ 연출 신동인/ 극작 이시원
2010 0910-1003


"이제와서 밀가루를 먹으라니 아빤 나에게 말라붙은 빵 부스러기도 건넨 적 없잖아요"

주인공 세이는 함께살던 할아버지를 여의고 홀로서기를 다짐하며, 절친한 친구인 진수가 다니는 제빵회사에 입사원서를 내지만 떨어지고 만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빵캐릭터 공모에 응시하기 위해 비디오아트 작업 중 아버지(광현)가 찾아오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할아버지 손에 자란 세이는 아버지를 극도로 증오한다.

급기야 광현은 세이에게 최후의 방법을 써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