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를 말하다] 축제와 나

2012. 7. 19. 10:06Review

     
축제와 나

                                                                             글_이경성

 

축제와 나 1

나는 부모님의 유학으로 스위스의 바젤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작지만 오랜 역사, 그리고 학문과 예술의 도시였던 바젤에서 나에게 가장 신나는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매해 2월 경 사순절과 함께 시작되었던 ‘파스나흐트’라는 축제였다. 
파스나흐트는 일종의 봄맞이 축제였는데 월요일 새벽부터 수요일 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행되었다.  이 기간에는 형용색색, 다양한 모습으로 분장을 한 행렬대가 악기를 연주하고 거리를 활보하면서 도시 전체를 축제 분위기로 만들었다. 은색 드럼과 플룻처럼 생긴 피리, 신화나 중세시대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인물들의 탈을 쓴 이들이 거리를 거닐며 신명나는 연주를 계속했다. 아이들은 이 행렬을 곧장 쫒아 다녔다. 왜냐하면 중간 중간에 맛나는 초콜렛과 거대한 막대 사탕 같은 것을 던져 주기 때문이다. 이 행렬대가 내 앞을 지나가는 순간에는 막상 넋을 놓고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그들이 쓰고 있던 가면의 모양새들이 강렬하면서도 우스꽝스러웠고 또 어떻게 저런 가면을 쓰고 행렬하면서 연주를 지속할 수 있을 까? 신기해서 한참이고 관찰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부모님께 졸라 아이들 크기로 나온 파스나흐트 전용 드럼을 사서 그 박자와 리듬을 혼자서 열심히 연습했다. 아직도 그 리듬이 생생하다.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그 박자감과 맛 갈지는 타악 소리. 
부모님께서는 당신들께서 가지고 있던 화장도구와 내가 입던 아기용 한복으로 나를 자못 그로테스크한 아기로 분장시키고 축제의 거리로 데리고 나가셨다. 난 나의 드럼을 가지고서 내가 연습한 리듬을 행렬대가 내 앞을 지나갈 때 장단을 맞추며 같이 두드리곤 했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아이들이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분장을 하고 나와 그렇게 행렬대를 따라다녔다. 파스나흐트 축제에 특별히 먹을 수 있는 락컬리 라는 전통 과자가 있었는데 나는 항상 다른 아이들 보다 그걸 많이 받아내려고 치열하게 줄을 섰던 거 같다.  
축제가 하루 이틀 지속되면서 어느 새 가면연주 행렬대와 시민들, 아이들 모두가 하나 되어 거리를 활보하게 된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장단에 몸을 실고 환호 하며 행렬을 따라다닌다. 그리고 3일 째 되는 수요일이 지나면 모든 축제가 끝나고 다시 조용하고 바지런한 일상의 바젤로 돌아온다. 겨울의 유럽, 여느 도시가 그러하듯 바젤도 12월,1월 참 회색빛으로 우중충한데 파스나흐트 축제 기간만큼은 도시가 형용색색의 빛깔을 입게 된다. 언 25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그 꿈틀되던 색감이 강렬하게 기억되어 진다. 

  

축제와 나2 

베이징 올림픽이 한 창이던 2008년 여름, 난 대학을 갓 졸업하고 당시 진행되고 있던 하이 서울 페스티발의 무대감독으로 일하고 있었다. 지금은 작고하신 당시 예술감독 로저 린드 선생을 도와 한강 둔치에서 진행되던 대형 인형극 및 서커스 쇼 등을 진행하는 역할이었다. 날씨도 날씨였지만 매일 수 만 인파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크고 작은 사안들을 처리해야 했던 그 일은 나의 땀과 피를 마르게 했다. TV에서는 전 세계의 축제인 올림픽으로 모두들 들떠있는 모습이 쉬지 않고 비춰 졌지만 정작 난 어디에도 장단 맞추며 즐길 상황이 되지 못했다. 아마 그렇게 지쳐가던 상황에 지금의 변방예술제 임인자 감독(당시 사무총장)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요지인 즉 슨, 내가 상반기에 학교에서 마지막으로 쓰고 연출했던 ‘더 드림 오브 산쵸’를 가을에 열릴 변방연극제에 초청하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감사했고 그래서 꼭 하고 싶다고 바로 답을 드렸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서울변방연극제는 1999년, 기관에 의해서가 아닌 서울 공연예술가들의 독립적인 모임으로 시작되었고(나는 이러한 시작배경이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2008년 그 해, 11회 째를 맞이하고 있었다. 6명의 연출가들에 의해 대학로 일대와 홍대 주변에서 다양한 성격의 공연들이 준비되고 있었다. 나는 공연의 특성상 건물의 외벽과 뜰이 필요했고 협의를 거쳐 현재 대학로 예술가의 집으로 사용되고 있는, 당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건물의 뒷 정원을 공연장소로 선택할 수 있었다. 그 때는 잘 몰랐지만 초자인 나에게 연극제 사무국은 많은 배려와 일대일 상담(?)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사실 상 그 때부터 예술감독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임인자 사무총장은 단순히 행정적, 기술적인 일처리만을 위해 예술가를 만나지 않았다. 그녀는 예술가의 표면적 작업뿐 만 아니라 진심으로 그 이면의 의미와 과정에 대해서 질문해 주었고 함께 그 고민을 발전시켜 나가는 파트너의 역할을 해주었다. 그래서 난 그 때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모든 연극제에서는 이러한 식으로 작업해 나가는 줄 알고 있었다. 

아직도 크게 감사하고 있는 부분은 연극제가 모두 끝나고 사무국으로부터 받은 영상과 사진, 그리고 매회 공연 관객들의 설문을 일목요연하게 데이터화 하여 나눠준 귀중한 자료들에 대한 것이다. 대개 연극제들이 일정이 끝나면 자체결산을 하느라 바쁜데 겨우 2~3명의 인력을 가지고서 매우 세심하게 작업자 한 명 한 명의 아카이빙 자료를 만들어 준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처음으로 나의 작업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근거를 선물 받은 것이었다. 
이런 저런 작지만 밀도 있는 교류가 가능했던 건 변방연극제 스태프가 열정을 다해 일해 준 덕택이겠지만 또 하나는 연극제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한 명 한 명 만날 수 있는 규모. 스태프와의 관계뿐 만 아니라 내 옆에서 누가 공연하는지 알 수 있고 서로 인사할 수 있는 스케일에서 그런 교류들이 생겨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시 전체가 들썩이는 전체로써의 축제보다는 마을단위의 소규모 잔치와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서 다발적으로 벌어지는 형태가 더 흥겹고 진한 시간을 열어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 보면 참 미숙하기 그지없는 작업을 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난 연극제 측으로부터 단순한 결과에 대한 평가보다는 그 안의 가능성과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서 많은 피드백을 받았다. 그래서 작업자로써 변방연극제에서 공연하게 된 것의 가장 큰 축복이라면 그것은 다음 작업을 이어 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는 것이라 하겠다. 
나를 키워준 또 하나의 축제를 만난 셈이었다.


 
축제와 나 3

작년 가을부터 런던에 머물게 된 이후 이곳에서 나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공간은 바로 런던의 은행가 근처의 St. Paul 성당 앞 이었다. 그 곳에서는 당시 수개월 째 London Occupy Movement가 벌어지고 있었다. 자본주의와 패권주의가 야기했던 모든 문제들을 공론화하고 방향수정을 요구하며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텐트를 치고 노숙하며 사안들을 이슈화 시켰다. 당 초 은행거리 안으로 보다 깊숙이 들어가 진을 칠 예정이었으나 공권력 투입으로 불가능해졌고 이들을 받아들인 St. Paul 성당 덕에 그 곳에서 운동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말끔한 정장을 입고 ‘출퇴근’하는 은행가들과 한 겨울에 제대로 샤워한 번 하지 못하고  천상 거지꼴을 하고 있는 이들의 ‘주거’가 공존하는 거리의 풍경은 참으로 묘했다. 이들은 텐트를 치고 그냥 죽치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City University Tent(시민텐트대학)와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이는 매일 매일 중앙 텐트에 모여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시간이었다. 여기서 누군가는 ‘누구나’이다. 런던정경대의 교수도 와서 강의를 하고 유명 패션 디자이너가 와서 생태학적 관점에서의 패션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노숙자가 자신의 삶 전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한다. 누구나에게 발언권이 있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다. 또 다른 텐트에서는 각종 캠페인 자료와 기증되는 책들, 응원의 메시지와 기부금을 받고 또 다른 텐트에서는 앞으로의 운동 방향성에 대해서 운영진들의 토론이 이뤄진다. 토론에는 역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나에게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텐트는 바로 취사 텐트였다. 이곳에서는 기부를 받은 음식재료를 가지고 매일 저녁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저녁식사가 준비된다. 여기서의 요리라는 것이 야채 수프와 식방 또는 커리 같은 비교적 조리가 간단한 음식들이지만 누구나가 들어와 무료로 음식을 먹을 수가 있고, 설거지나 쓰레기를 치우는 일로 작은 동참을 할 수 있다. 이 점령지에 세 번째로 방문한 날, 난 이 텐트에 들어가서 준비된 수프와 식빵을 배급받아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음식과 함께 여러 가지 감정들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이 점령지에서 요리되어진 따뜻한 음식을 나눠먹는 것은 끼니를 때우는 그 이상의 성스러움이 베여 있었다. 난 비록 그 운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 음식을 나눔으로써 의식적으로 동참하게 된 느낌을 받았다.

하늘이 트인 공간에서 이야기가 있고 음식이 있고 야영이 있으니 이것은 실로 도심의  축제였다. 실제로 이들은 투쟁을 하고 있었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축제의 주관자와 즐기러 오는 자가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주관자고 모두가 ‘즐기는 자’였다. 이 평등한 축제의 공간은 그래서 오히려 공연하는 배우와 관람하는 관객이 있는 극장의 공간보다는 모두가 물아지경의 일체가 되는 락 밴드 공연장을 닮아 있었다.
앙리 르페브르는 그의 저서 <공간의 생산>에서 Spatial Practice. 직역하자면 ‘공간의 연습’을 통해 시민들이 도시 공간에서의 주체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런던을 점령하라’ 운동 본부에서는 그러한 공간 연습이 매일 매일의 축제처럼 진행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축제의 공간이 나에게 흥미로웠던 이유는 이들의 슬로건과 목적 이전에 나로 하여금 내 지난 삶, 다양한 축제적 기억들을 오늘 여기로 소환시켜 주었기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놀 거리를 찾아 밖을 헤매이다가 길거리 바닥에 앉아서 시간을 때우던 어린 시절의 순간들,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과 같은 소설에 빠져있을 때 동네 공원에 가서 비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던 때, 친구들과 자전거 여행으로 땅끝마을을 향해 달려가던 중간 중간의 객지들, 그런 시간의 겹들이 그 공간을 통해 내 안에서 다시금 생동하였다. ‘공간적 연습’이란 결국 ‘공간의 소유’라는 천편일률적인 욕망을 지양하고 개, 개인, 한 명 한 명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공간을 경험할 수 있는 다채로운 통로를 생산해 내기 위함이 아닐까?
슬로바 지젝은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에서 축제를 끝난 다음을 경계해야 한다고 이야기 했지만 난 오히려 축제적 삶을 이야기하고 싶다. 삶과 축제의 이분법적인 구분을 넘어 삶 속의 축제적 순간들을 향유하고 싶다. 오늘날 그러한 ‘공간의 연습'은 ’축제‘의 또 다른 이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글_이경성

연출가, 크리에이티브 VaQi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