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엄마의 육아일기] 주야연출, 나모엄마와의 인터뷰 - 1

2012. 7. 30. 11:22Feature

예술가 엄마의 육아일기 1부

 

뛰다가 나무를 만나기까지

 

말_이주야(공연창작집단 뛰다 연출, 나모엄마)

정리_정진삼(인디언밥 편집자)

 

그간 뛰다의 큰 작업들을 맡아왔던 이주야 연출님은 “화천텃밭 예술축제”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었을까 궁금했습니다. 뛰다의 식구들이 축제 무대에 오르거나, 혹은 무대를 지원하고 공연을 관람할 때, 이주야 연출님은 조용히 뛰다의 사무실을 지키고, 뛰다의 아기들을 보살피고 있었답니다. 열정적으로 공연을 만들어내던 시절을 지나 이젠 묵묵히 공간을 살필 줄 아는 엄마의 섬세함이 느껴집니다.

인디언밥은 7월에 육아휴직을 마치고 출근한 지 막 한 달이 된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이주야 연출 혹은 나모 엄마를 만났습니다. 본 인터뷰는 7월 14일, 축제가 열리고 있는 화천예술텃밭의 야외 카페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비는 오다 그치기를 반복하고 있고, 옆 제작소에서는 목공작업이 한창이고, 속속들이 축제 방문객들이 도착하는 어수선함과 분주함 속에서, 이주야 연출 혹은 나모 엄마는 차근차근 뛰다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예술가 엄마의 육아일기는 2부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예정인데요, 1부는 엄마가 될 생각이 없었던 예술가의 창작 이야기입니다.

  

▲ 2004년 <또채비 놀음놀이>(대본 작지선, 연출 이주야) 공연사진

 

뛰다의 시작

- 이주야 연출님이 ‘뛰다’ 에서 어떤 생각으로 ‘뛰기’ 시작했는지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게요. 뛰다를 창단했을 때 다섯 명이었어요. 처음에 우리팀이 목표로 삼았던 기준, 공식적으로 세운 기준이 뭐냐면 - 첫째, 찾아가는 연극을 하겠다, 였어요. 우린 극장 안에 들어갈 꿈을 못 꾸었어요. 돈이 많이 드니까. 또 누가 우리에게 공연장을 빌려주지 않으니까. 기존 극장만 극장이냐, 극장 대관하는 거 하지 않는다, 우린 찾아가고, 우리 선에서 할 수 있는 대로 공연장을 만든다, 그럼 지금은 야외밖에 없다. 생각했었죠.

둘째, 자연친화적인 공연을 하겠다. 왜 그런 생각을 했나면... 우리가 연극원에서 공연을 했잖아요. 1학년 때부터 공연을 많이 만들었어요. 1학년 때 수업 듣는 거 말고도 연극원 안에서 연극 동아리를 만들어서 각자 활동했으니까. 연극원인데 연극동아리를 만들었어요? 네 (웃음) 그런데 연극원에서 만들어진 무대세트나 소품들이 쓰고 나서 버려지는 게 보기 안 좋은 거에요. 우리가 얼마나 의미있는 작업을 하길래 이렇게 함부로 할까? 그런 의문이 들었죠. 그래서 우리가 동아리 활동할 때 어떻게 했냐면, (그전에는 요섭이 형네 팀이 따로 있고 내 팀이 따로 있었어요.) 그러면 극장에 있는 걸 활용해서 하자, 돈 들이지 말고 하자... 그게 창단할 때 ‘될 수 있으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들을 찾아보자’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죠. 그때는 좀 막연하긴 했지만.

셋째는 우리가 하고 싶은 연극을 해보자. 우리가 하고 싶은 게 뭘까, 생각했죠. 지금도 그렇듯이 하고 싶은 게 많잖아요. 뭔지는 모르겠는데... 흔히 이야기하는 정극은 아닌 거 같고...(웃음) 그때 한창 관심을 가졌던 것이 오브제들, 인형들, 가면들, 소리, 빛 등 이었죠.

이렇게 세가지가 목표였어요. 이것들은 표방하는 목표였고, 내부적으로는 ‘공동창작을 하자, 각자 영역이 있지만, 모든 영역을 함께 하자, 그래서 우리가 얼마를 벌든 n분의 1로 나누자’ 하는 생각을 했어요.

- 뛰다는 공동창작, 공동분배, 공동의사결정을 한다는 것이 매우 특이했습니다. 어찌보면 그게 참 대단하기도 해요.

대단한 게 아니라 우리한테는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조건이었어요. 졸업동기들이었고, 다들 고만고만한 애들이 모여 작업을 할 때라서... 우리 팀 성향이 누가 한명이 뭘 한다고 다 따라가는 게 아니구요 (웃음) 다들 고집 있고 그래서 자기 색깔들이 분명하고... 우리팀 의사결정은 누군가가 화두를 던지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자-주의에요. 그것들에 대해서 설득을 당하거나, 설득을 하거나... 그런데 나중에는 단원이 많아지면서 좀 힘들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요즘은 만장일치는 안하고 있답니다. (웃음)

만장일치의 장점은 팀 내에서 그만큼 논의를 많이 한다는 거에요. 에너지가 소진되기도 하는데 생각을 그 만큼 많이 하기도 하고, 서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고. 그렇게 생각하고 대화하는 과정이 지금까지도 창단멤버가 서로를 믿고, 지금은 뭘 하더라도 끝까지 하게 되는 힘이죠.

누군가는 “뛰다는 유기적이다” 이런 말을 했어요. 포지션에 상관없이 비어있는 일들을 메꾸는 점을 보이니까. 우리도 모르게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진화해 왔더라구요. 물론 그게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어요.

- 그렇다면 “뛰다” 는 너무 느리지 않나요? 이름도 ‘뛰다’ 이고, 다들 뛰어난 사람들이 모였는데, 의기투합해서 작품 빨리 만들고, 빨리 올리면 좋지 않을까요? 뛰다는 어떻게 많은 의견들을 안고 가는지, 도대체 어떤 경험을 했길래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공연을 만든 첫 작품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극장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에요. 처음 작업은 <상자 속 한 여름밤의 꿈> 이에요. 어른들은 위한 인형극이에요.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을 인형극으로 만든 거죠. 인형이 주인공들이에요. 연인들과 직공들은 20-30cm 의 작은 인형들, 그리고 정령들은 2-3 미터의 인형들, 그리고 조종자들이 해설을 하며 진행하는 공연이었죠.

첫 작품은 한 달 만에 만든 작품이에요. 우리가 졸업하자마자 연습실을 800만원짜리를 얻어서... (웃음) 왜냐면 졸업하면 갈 때가 없잖아요. (웃음) 그래서 첫날부터 출근해서 연습을 했어요. 뭐든 만들자... 그래서 거기서 한달 만에 뚝딱 만든 것이지요.

 

▲ 2001년 <상자 속 한 여름밤의 꿈>(원작 셰익스피어, 각색 박지선, 연출 이주야)

 

어떻게 할까? 공연 해야지. 어디서 할까? 생각하다가 중계동 근린공원으로 가서 무작정 공연을 했어요. (웃음)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 아직까지 잊지 못할 사건인데... 4월이라 굉장히 추웠어요. 저희가 있지도 않는 것을 모아다가, 전기선도 뽑아오고, 그렇게 야외 공연을 하고 있는데, 관객들이 한 두명이 모이더니 공연을 보시는 거예요. 공연이 끝나고 우리도 나름대로 이렇게 공연할 수는 있겠다, 생각을 했죠. 그런데 어떤 꼬마애가 오더니, 봉투를 내미는 거예요. 아빠가 너무 잘봤다고 우리에게 주라고 봉투를 전해주고 간 거예요. 이게 뭐야? 했더니 거기에 5만원이 들어있었죠.

- 엄청난 돈이네요.

엄청난 돈이죠. 우리는 시연회 겸 우리를 체크해 보기 위한 작업이었는데... 맨땅에 헤딩하는 그런 작업이었는데... 뭣도 모를 가슴 벅찬 감동이 생기는 거예요. 아, 이런 감동 때문에 하는 거구나, 아, 그럼 우리가 그냥 하지 말고 공연 끝나고 모자를 돌려보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죠. (웃음) 그분께 매우 고맙게 여기고 있어요. 이름도 모르는 꼬마의 따뜻한 손길을 기억하고요.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된 힘이지요.

그 다음 작업은 경인 미술관에서 하게 되었어요. 배우들은 연습할 동안 연출들은 시간이 남잖아요. 그래서 연출이 기획서를 쓰고, 들고 가서 그래서 하게 해달라고 졸랐는데... 물론 이렇게 막 해도 될까, 하는 걱정이 있었는데 거기서 공간을 주시더라구요.

- 뛰다의 시작은 극장 공간이 전혀 아니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네, 그렇죠. 극장에 들어갈 생각도 못했고... 우리가 당시에 기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래서 어쩌면 야외에서 공연하고 이런 것들이 우리들에게는 더 쉬운 것이었는지도 몰라요. 일단은 저지르자, 안되는 것을 다른 사람의 힘이나 외부의 자본이나 이런 것들을 빌리지 말고 있는 것에서만 시작하자, 우리 힘으로 해보자, 하는 생각이 강했을 때죠.

경인 미술관에서 공연을 하고 거기서 공연을 본 분들이 또 누군가를 연결해주셨어요. 그래서 다음 작품은 어떻게 만들어졌냐면 (웃음) 순회공연을 다니고 있는데 경인미술관 공연을 통해 우리를 알게 된 분이 제작비를 대줄테니 양평에서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 그런 제의가 들어온 거예요. 거기에 맞게 만든 것이 <하륵이야기> 였죠. (웃음) 어른과 아이가 같이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보자 해서 <하륵이야기>가 태어나게 된 것이고, 그건 양평의 야외 공간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죠.

 

▲ 2001년 <하륵이야기>(작/연출 배요섭, 조명디자인 이주야)

 

그리고는 그만하려고 했어요. 그 당시 우리 모토가 한번 한 것은 다시 리바이벌하지 않는다, 였는데 (웃음) 그런데 또 극장공연을 지원해주겠다, 하는 분이 나타난 거죠. 그 분은 뛰다의 은인으로 지금까지 고맙게 여기는 분이세요. 그분께서 자기가 기획을 하고, 극장을 대관해주겠다, 해서 <하륵이야기>가 극장에 들어간 게 된 거지요. 그러면서 외부 홍보를 통해 뛰다가 갑자기 공개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지요. 우린 아직도 우리가 ‘언더’ 라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그때부터 뛰다는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어요.

- 은인들이 많은 팀이네요. 뛰다의 인연들이 정말 대단해요.

처음부터 의도해서 모든 일들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인연의, 인연의 끈을 물고, 물고 해서 여기까지 이어진 게 된 거지요. 우리가 가진 조건에서 출발을 하고, 그 조건 하에서 뭔가를 하면 거기서 길이 생기는구나, 하는 경험이 있어요. 우리가 아직도 겁이 없는 편인데 젊었을 때를 그렇게 지나왔던 것이 그 이유지요. 조금만 더 하면 길이 생기는 걸 체험했기 때문에, 조금만 더 견디면 길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뛰다가 우리 자신과 함께 커온 거잖아요.

- 2000년대 한국연극을 살펴보면 “목화”, “미추”, “연희단거리패” 등의 기성 극단들이 은연중에 생태연극, 환경연극 등을 선보였어요. 그런 공연들이 잘되기도 했구요. 뛰다는 처음부터 자연친화, 환경연극 등으로 주목을 받았었지요. 어떻게 그런 흐름들을 알고 있었는지, 그런 입장을 어떻게 취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그것을 꼭 해야겠다, 하고 기치로 내민 것이 아니었어요. 뛰다가 가진 조건들이 그랬지요. 사실은 돈도 없고... 우리가 대단한 게 아니라 당시에 가진 조건들이 가난했으니까 (웃음) 예를 들어, 첫 작품은 인형들의 재료가 골판지였어요. 골판지에 거적을 붙이고 지우개 손발이 달린 사람 인형. 상자도 우리가 만들고. 조명기도 만들었어요. 디머까지 만들었어요. 콘센트를 돌렸다 뺐다 해서 채널 열 개짜리로 운용할 수 있는 걸로 만들고... (웃음) 음향은 집에 있는 오디오 데크를 들고 다니고 그랬죠. 그걸로 야외에서 공연하고 그랬죠.

- 그건 팀 내부에 공학적인 브레인을 가진 멤버들이 있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요 (웃음) 수공업적 마인드가 있는 거네요.

 

▲ 2003년 <커다란 책 속 이야기가 고슬고슬>(대본 박지선, 연출 이주야)

 

당시는 메인 디자이너들이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나머지를 우리가 다 만들었죠. 그랬더니 제작비가 적게 나온 거에요 총 제작비가 50만원 정도? 거의 의상비 정도만 나온거죠. 하긴 지금 생각해보면 디자인비도 안 드리고, 인건비도 안 넣고 그랬던 거죠. (웃음)

사람들이 경인미술관에서 나무 위에 올라가서 보시고, 모자를 돌렸는데 좋아해주시고, 관객들이 즐거워하는 모습들, 우리가 직접 만든 것들을 가지고 하는 모습을 거기 경인미술관에서 일하는 분들도 좋게 보셨나봐요.

우리가 학교를 졸업하고 온 사람들이 있어서 어쩌면 우리가 선택한 삶이잖아요.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우리가 잘 하려면, 빚을 지지 말아야 겠다, 빚을 지고 시작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있는 조건에서 만족을 구해야겠다, 생각한 거에요.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초반에는 연극과외를 함께 팀에서 하기도 하고 그랬죠. 팀의 생계를 위한 사업으로 진행했지요. 일종의 교육사업이었네요 (웃음) 그런데 이도 저도 아니어서 2년 정도 하다가 그만했어요. 우리가 없으면 없는대로 살아보자. 있는대로 해보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 젊은 팀들, 새로 생겨난 팀들은 우리가 뭘 잘하는지, 할 수 있는 게 뭔지, 하기 싫은 게 뭔지, 그걸 아는 게 매우 중요하겠네요.

생각해봤으면 해요. 왜 하고 있는지. 하기 싫은데 왜 하는지. 돈 때문이라면 할 수도 있어요. 내가 정말 돈이 없어서 먹고 살기도 힘든데... 그럼 할수도 있지요. 그러나 이걸 하자니 내 마음 아픈 게 더 크다, 내 상처가 더 크다, 내 속에서의 거북함 혹은 내 속에서의 저항감이 더 크다, 한다면... 그럼 내 마음을 병들게 까지 하면서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뭐가 더 중요한가, 내가 뭘 잘하는가, 결국은 내 안에 답이 있는데... 그걸 잘 찾아갈 수 있는 조건이 주어져 있는가, 혹은 그 조건이 뭔지 잘 알아야겠지요. 자기 조건을 잘 이용하는 게 살아남는 방법인거 같아요.

우리 팀이 '의(義)' 만 가지고 여기까지 올수는 없었어요. 지금까지 자기 욕구들을 충족하는 게 분명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이런 것을 표현하고 싶어, 이런 것들을 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충족된 거죠. 물론, 그러한 조건이 처음부터 마련되지는 않았지만, 충족시키는 방법을 찾았던 거 같아요. 작품을 통해서, 혹은 훈련을 통해서...

- 작년에 독립예술 좌담회에서 독립예술가 기획자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했는데, 거기서 나왔던 이야기 중에 기억에 남는 키워드가 ‘억압’과 ‘소외’ 였어요. 연극작업이 언제부터 그 내부에서 억압과 소외를 발생시키고 있지요. 뛰다는 그런 게 없는 것 같아요.

처음 창단부터 7년 까지는 그랬던 거 같아요. 하지만 뛰다도 후배들이 들어오고... 후배들도 저희랑 똑같은 마인드로 함께 하려고 했는데 워낙 경험이 다르고 쌓아온 게 다르니까, 그런데 똑같이 하니까 그들에게는 그게 부담이더라구요. 그만큼 책임져야 한다는 게 부담으로 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 이런 것들이 고민의 시작이 되었죠. 지금은 3년동안 풀고 있는 과정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소통하는 것, 그리고 소통 속에서 같이 자기의 욕구를, 우리의 지향을 맞추어 가는 거, 그래서 끊임없이 경계선 위를 왔다갔다 하는 것, 거기서 선택을 하는 것, 그래서 길의 족적을 남기는 것... 그게 뛰다의 모습인거 같아요. 항상 실험이에요. 항상 선택이고 (웃음)

 

▲ 2007년 <그림자 그림자>(대본 배요섭, 연출 이주야)

 

달라진 대학로? 뛰다의 결심!

- 화천에는 어떻게 내려오게 되었나요?

2007년부터 대학로의 바람이 확 다른 게 느껴졌어요. 실은 당시에도 저희가 계속 공간(연습실)을 찾고는 있었거든요. 2007년도에는 팀 자체도 모색 기간이었어요. 저희가 끊임없이 창작을 해서 2006년까지 굉장히 작품을 많이 만들었어요. 그렇게 의논을 하고 새로운 업그레이드하면서도 연습을 하고 창작을 해서 1년에 2-3편씩 만들어졌으니까요. 그러다가 7년째를 맞이했구요. 예전처럼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제작을 완전히 충당하는 것도 어려워졌고, 대체로 기획공연을 하게 되는 상태가 된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하다보니까 대학로에서 우리팀이 살아남으려면 공연을 쉬지않고 계속해야 하는 그런 구조가 되어버렸죠.

우리팀이 대학로에 오래간만에 나갔어요. 그런데 하고 있는 공연들의 색깔들이 예전과는 달라졌더라구요. 그때는 뮤지컬 하나로 대학로의 분위기가 변해버렸고..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또 하나 놀란것은 진지하게 고민하던 친구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다 숨었더라구요. 팀 작업들이 없어지고, 다 개별 작업들을 하고 있고... 극단에서 훈련을 하고, 극단을 통해 공연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 별로 개인이 가서 개인을 선택을 하고, 그것은 페이에 의해 결정이 되고...

우리하고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데, 우린 또 그게 맞는 줄 알고 갔는데... 그런 점들로 인해서 우리가 낯선 이방인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대학로에 반갑게 나갔는데 어색한 거예요.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우리 모습이... 너무 울적한 마음이 들었죠. 우리가 여기서 계속 연극을 해야하나, 안 그러도 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생각했죠. 그때서부터 지방에 내려가자는 의견이 가속화되기 시작했어요.

- 연극인인데 대학로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느낌이 들어요. 뭔가 밀려난 느낌? 진지한 분위기는 있지만 그게 연극이라는 제도를 바꾸거나, 고쳐보자는 게 아니고, 개별 작업들만 열심히 하자는 분위기? 딱 그 정도의 진지함만 남아있는 것 같아요.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면서 살아남는 방법을 생각해봤어요. 그랬더니 우리의 작품 중에 인기있는 레퍼토리를 쉬지 않고 365일 돌리는 게 방법이더라구요. 그런데 우리가 이럴려고 연극하나? 이렇게 하는 것도 올바른 방법일까? 싶더라구요. 우리는 오래 작업을 하면 힘들어하거든요. 조금 했다가, 쉬었다가 다시 만드는 건 힘을 잘 받는 편인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구조에서 우리가 우리 노동의 대가로 살아남을 수는 없더라구요. 대학로에서 적응하려면 뛰다 극장을 만들어서 인기 레퍼토리만 돌리는 수 밖에 없지요. 뛰다는 새 배우를 뽑고, 그 멤버들은 공연을 하고, 우리는 새 작품을 만들고... (웃음) 그게 대안적인 의견으로 나오기도 했어요.

- 대안이 절대 아니에요.

(웃음) 그렇게 해서 얼마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앞이 안 그려지는 거에요. 그려지는 게 뭐지? 지금처럼 공연을 해서 조금 벌더라도 뭐가 있지 않을까? 그래도 연극하는 사람들은 꿈꾸는 사람들이잖아요. 꿈을 꿔야 길이 보이고... 그게 없으면 힘이 안나잖아요. 재미도 없고요... 꿈꾸는 걸로 먹고사는 사람인데 (웃음) “숨쉬고 싶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지방으로 내려가면 얼마나 힘든건지 모르지만, 일단은 숨쉬고 싶다, 하는 생각이 우선이었어요. 그래서 대학로를 벗어나 떠나자는 의견이 나왔지요. 그때는 가정을 가진 팀들도 생기고... 설득하는데 2년이 걸렸죠. 준비작업을 많이 했어요. 2-3년을 설득작업에, 장소선정에 시간을 많이 할애했지요.

- 반대가 엄청나게 많았겠네요.

어디로 가? 가면 뭐가 있어? 어떻게 살건데 뭐먹고 살건데? 누가 오라그래? (웃음) 가면 뭐 있어? 가족들은 어떻게 해? 이나마 하는 게 나은 거 아냐? 하는 의견들이 쏟아져 나왔어요 (웃음) 이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현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웃음) 지도에 콤파스를 그어놓고 “서울에서 너무 멀면 공연 못해” “이 반경 안에서 결정해” (웃음) 이렇게 논의하고 그랬어요. 어떤 방식으로, 개별적으로 할지, 같이 할지... 폐교를 달라 그럴건지, 살 건지, 어떻게 들어갈지 등등을 알아보았지요. 그래서 폐교 조사작업부터 했어요. 기존에 지역으로 들어가 있는 팀들부터 알아봤죠. 저는 예술공동체 마을을 답사하고 다녔죠. 답사한 걸 브리핑하면서 공유하고 그랬죠. 그 상이 그려지지 않을때 2-3년 준비작업을 했어요. 기간이 길었나요. 그게 최소의 시간이었죠. 나 자신을 설득하는 것도 그렇지만 가족을 설득하는 것은 어렵거든요. 결국은 못 오게 된 친구들도 생겼고... 여기서 집도 없는데 어떻게 살거야, 하는 온갖 고민과 문제가 닥쳐왔죠.

- 예전에는 화천이 물리적으로도 멀지만, 심리적으로도 먼 공간이었어요. 하지만 실제로 두어번 와보니까 무척 가깝게 느껴져요. 원래 여기를 알았던 것 같은 기분도 들고.(웃음)

놀라운 인연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화천이 우리의 마지막 순회공연의 장소였다는 거. 뛰다는 무료로 순회공연을 간다는 원칙이 있어서 2005년까지는 전국으로 공연을 다녔거든요. 그 원칙은 작품을 만들자마자 극장에 올리기 전까지, 공연장소를 우리가 찾자는 것과 관객들에게 배우들이 작품을 채우는 과정들을 보여주자는 것이에요. 그 겅험 자체를 우리가 너무 즐거워했거든요. 그들에게 처음일수 있는 연극이 바로 우리라는 게 소중한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마지막 순회공연으로 간 곳이 화천이었어요. 그때는 “어디갈까?” “화천가자”, “화천어디? ” “화천에서 작은 학교들, 제일 산골에 있는 5개 학교 꼽아봐” 그래서 결정된 곳이 여기 근처 학교들이거든요. 그리고 공연을 했지요. 그런데 여기로 다시 오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죠. 그 당시에는 너무 예쁘고, 너무 작은 마을이고, 너무 좋은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정도로 생각했던 곳인데... 그게 인연인지 몰랐던 거죠. 그냥 흘려보내도 인연은 인연인거 같아요. 길이 길을 불러요. (웃음)

-2부에서 계속

▲ 2009년 <앨리스 프로젝트> (대본/연출 배요섭, 무대/인형/가면 디자인 이주야,박혜원)

 

 예술가 엄마 이주야는

 2001년, 뜻 맞는 이들과 함께 "뛰다"를 만들다.

 "뛰다"에서 연출로 활동하다가 2010년 잠시 휴직하다.

 2011년 나모를 낳고서 엄마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다.

 2012년 나모와 함께 "뛰다"에 복귀하여 다시 출발선에 서다.

 상자 속 한여름 밤의 꿈 (2001-2003), 커다란 책 속 이야기가 고슬고슬 (2002- 2009),또채비 놀음놀이(2003-2005), 그림자 그림자 (2006) 연출하다. 앨리스 프로젝트(2009)의 가면,인형,무대,조명을 맡다. 제13회 서울어린이연극상 연출상 받다.

 

***사진 출처_1,2,4,5,6 (이주야 연출 제공) / 3 (뛰다 카탈로그(16p) 지면 재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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