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동행(同行)의 윤리학 - <아름다운 동행> A팀 공연

 

동행(同行)의 윤리학

<아름다운 동행> A팀 공연

재능교육 해고노동자와 대학로 연극인이 함께하는 단만극 페스티벌

 

글_정진삼

 

극장 밖을 서성대기

이 연극은 냉정한 현실에 대한 열정적 반항으로부터 태어났습니다. 알고 보니 동정과 연민의 대상은 무대 위가 아니라 극장 밖에도 있더군요. 비정규직이자 사장님이었던 것은 연극인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혜화동 고개에 위치한 ‘재능교육’ 본사. 그리고 그 앞에서 투쟁하던 해고노동자. 그들도 연극인들과 참 비슷합니다. 적은 수의 사람들 앞에서 목소리를 내고, 변치 않는 세상을 향해 변화의 꿈을 꾼다는 것. 차이가 있다면, 연극인은 박수세례를 받고, 그들은 주먹세례를 받지요. 그리하여, 뒤늦은 동행임을 고백한 연극인들이 미안해하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니까, 잠시 역할 좀 바꾸자고요.

처음부터 동행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연극 동네에서 벌어진 ‘남의 일’ 이었고, 괜한 참견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알아차렸겠지요. 그들이 나와 다르지 않음을. 남의 일은 어느덧 연극의 문제가 되었고, 축제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모였고, 뜻을 합했고, 공부를 했고, 공연을 약속했지요. 작품으로, 연기로, 연습 진행으로, 연극적 재능들이 한데 모였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함께걷기’ 축제가 이제 막 첫 발을 내딛으려는 찰나,

노동자들은 박수와 격려 대신 골고다 행을 택했습니다. 엄동설한에 성당 꼭대기에 올라간 이들은 얼핏, 십자가를 지고 있는 예수님 같습니다. 모든 현실은 초-연극적이므로, 가끔은 극장 말고, 성당 위의 사람들을, 천막 안의 노동자들을, 길거리의 해고자들을 찾아가는 게 나을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칩니다. 그 와중에 가장 늦게 어슬렁거리며 도착하는 ‘비평’ 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괴감이 듭니다만. 공연은 계속되어야 하므로... 아직은 축제의 열기가 식지 않았으므로... 유감을 표하는 대신 마감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극장 안을 기웃거리기

작품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과정' 을 되짚기로 합니다. SNS 상에서 ‘아름다운 동행’ 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알음알음 중개되는 연극의 연습과정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전해주기도 했었구요. 서로 다른 개성과 방식으로 연극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신기했고, 그 열정이 부럽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야간급행열차를 타고 질주하는 프로덕션에 대한 염려가 되기도 했습니다. 완성도는 그렇다쳐도, 무엇보다 이런 식의 제작방식은 그간의 대학로-스러움과는 큰 차이가 있었으니까요.

아다시피 '아름다운 동행' 은 국가를 통한 지원금이 아닌 관객으로부터 비롯된 모금, 지지자 서명이 관객 계발이 되는 홍보 방식, 그리고 상당수 재능기부로 이루어지는 역할 분담으로 이뤄졌습니다. 선택과 집중이 만들어낸 요상한 서바이벌식 경쟁 구도가 아니라, 연대와 다양성이 가져온 공동생존의 방식을 도모한 것입니다. (솔직히 걱정보다는 비로소 오프 대학로의 정체성이 자리잡은 듯 안도가 됩니다)

공연은 A팀 4개 꼭지와 B팀 3개 꼭지의 칠색조의 매력을 발산합니다. 제작진도 알찹니다. 재작년부터 은근 재밌는 사고를 치고 있는 혜화동 1번지 5기 동인 연출가들과 젊은 극단의 연출가들 그리고 신춘문예에서 발굴된 신진작가들, 연극동네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인기작가들이 뭉쳤습니다. 그들이 믿고 택한 이들이니 배우들의 연기 또한 보증할만하겠지요. 평균연령 대략 서른(셋)즈음에. 40살도 젊은 창작자로 해주는 연극계 나이를 생각해보면 아름다운 동행의 라인업은 대략 청소년 대표팀급이라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한편으로 이러한 전격전이 가능했던 건 패배감과 자괴감에서 빨리 벗어나려는, 젊은 예술가들의 드높은 기상(혹은 놀이에 대한 갈망)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주제 특정적 공연이긴 하지만 모노드라마, 2인극, 판소리, 정극, 인형극(?) 등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선보입니다. 재능교육 사태를 두고 사측으로 대변되는 기득권 사회에 목청을 높이는 방식이거나, 혹은 노동자측으로 여겨지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따스한 시선과 위로를 전해주기, 그리고 우화적으로 재능교육 사태를 우회하여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사측이라고 해서 무조건 악마인 것은 아니며, 노동자라고 해서 언제나 불쌍한 것만은 아닐 터. 내막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 꼼꼼하게 사건을 기록한 프로그램 북을 읽어보니 - 사태의 본질은 특수계층 노동자를 배려하지 못하는 구시대적 법해석과 이를 악용하는 관용 없는 회사측의 태도에 있음을 알 수 있었지요.

우리는 모를 리 없습니다. 최근 노회찬 의원 판결에서도 그러하듯 법(法)은 강자의 논리에 편승할 수 있으며, 그러한 해석과 판결로 인해 약자는 일거에 사지(死地)로 내몰릴 수 있음을. 결국 이것은 법제도를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의 의지, 다시 말해 의지의 사람들을 모으는 취지로 나아가야 하겠지요. 아마도 이것이 젊은 연극인들이 혜화동1번지에 모여, ‘연극’ 을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극장 안으로 들어오기

아기 예수님이라도 태어날 것 같은 누추한 공간입니다. 젊은이, 대학로, 연극, 가난함이 연상되는 덧대고 기워서 세운 세트가 눈에 들어옵니다. 시각적으로 ‘열세’ 지만, 그간 어깨에 졌던 아름다움에 대한 ‘위세’ 를 다 내려놓고, 가장 '그지같은' 연극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서로의 부채의식을 건드리는 공연이기에, 미안함과 불편함으로 앉아있을 관객들을 위하여 가벼운 미소는 패쓰하고, 대박 웃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첫 타자가 오플린이니까요.

 

 

1. 한밤의 천막극장 - 천막극장으로 들어가기

작가 오세혁의 미덕은 명쾌함에 있습니다. 쉬운 걸 어렵게 돌려 말하는 것이 386 연극선배들의 특징이었다면, 후배 오세혁 작가의 글쓰기는 어려운 걸 쉽게 만들지요. 그리하여 마르크스의 혁명론이 설파되기도 전에 천막이 먼저 설치되고, 그람시의 연대와 공동체적 가치를 딱히 설명할 것도 없이 혼자 묵던 투쟁천막에 직장 동료가 찾아옴으로써 연대가 시작됩니다.

죽일 년, 빌어먹을 년이라고 속삭이는 공포스런 유령이 천막 밖을 떠돌 때, 두 언니들은 그제야 스스로를 지켜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이 선택한 것은 바로 이야기. 길고긴 투쟁의 밤을 예견하듯, 천일야화의 1일차가 시작됩니다. 이상주의가 아니라 이상형을 논하며, 자신을 힘들게 한 회사가 아니라 아이들을 추억하면서.

현실세계의 두려움을 상상세계로의 모험으로 극복하려는 두 여성 동지들의 솔직하고 꾸밈없는 이야기들이 들려옵니다. 그리하여 천막은 잠수함이 되었다가, 분식점이 되었다가, 놀이터가 되었다가, 마술극장이 되지요. 관객들은 이러한 환상의 시공간에 초대를 받아 함께하면 덜 무섭고, 덜 외롭고, 더 재미있다는 소박한 진리를 함께 체험합니다.

작가의 명쾌함을 풍성하게 살려주는 건 김한내 연출의 공간구성입니다. 연출은 널빤지와 천막 쪼가리만으로 관객들에게 바다 속과 하늘 위를 상상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투쟁연극 전문배우 이정미와 <달나라 연속극>에서 열연하고 돌아온 배우 배선희가 호흡을 맞추고, 걸판의 남자 배우들이 개성 넘치는 코러스와 앙상블을 보여주었습니다.

형제애로 뭉친 위계적인 집단질서와는 다르게, 자매애적 공동체의 특성은 누구도 차별하거나 억압하지 않고도, 심오한 연대를 이뤄낸다는 데 있다고 합니다. 천막 바깥의 공포에 쫄지 않고 상상과 긍정의 힘으로 맞선 여성 동지들의 모습이 믿음직스럽습니다.

 

 

2. 다시 오적(五賊) - 반(反)지하 되기

실로 의미심장한 패러디입니다. 군부독재와 재벌, 언론과 정치의 추악한 유착에 대해 아름다운 독설로 꾸짖어내던 시인이 어느덧 커밍아웃을 해버린 이 마당에, 우린에겐 金지하가 아니라 反지하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대중들의 마음을 헤아리듯, 대학로의 인기작가 김은성이 2013년판 오적(五賊)을 만들어냈습니다. '다시쓰기' 의 재능과 이야기의 축조력을 살려 <다시 오적>이라는 제목의 판소리 한마당을 선보인 것이지요.

병풍이 펼쳐지고, 멍석이 깔리면 고수가 장단을 두드립니다. 배우와 소리꾼을 넘나들며 광대적 기질을 뽐내는 여배우 조아라가 중심을 잡고 키치스런 코러스로 분한 배우 박선희, 채송화가 좌우에 자리를 잡지요. 연극을 놀되 촌스럽게 놀지 말고, 광대로 놀되 촌스럽게 놀지 말렸다, 는 소리꾼의 당부가 관객에게 향합니다.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소리의 대목들이 흥미롭습니다. 작가가 시대에 맞게 재구성한 찰진 문장도 기가 막히지만, 이를 휘휘 뿜어내는 소리꾼의 가창도 탁월하지요. 기억에 남는 한두 대목을 읊어봅니다.

 

“쪼인트 한방 귀싸대기 한방에 엠비씨 노랗게 굽고 조중동 벌겋게 삶아

비비케이 지킨 사대강 녹조라떼 세상 여론 한입에 꿀꺽~"

“노사화합 모범기업 스스로 재능으로 이룬회사

엄한 뻘짓은 이제 그만 하루빨리 실천해서

우리 선생님들 전원 복직하고 골목골목 아이들 만나

스스로 학습법을 세상 널리 알려보자~“

 

정곡을 파고드는 풍자와 그 언어의 파괴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오적>은 지켜보는 관객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지는 못했습니다. 분석컨대, 풍자와 해학이 겨냥하는 대상이 지금, 여기의 극장 안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言)로 주조한 광대의 검이 기득권을 쿡 찔러야 그나마 해소가 될 텐데, 내리칠 상대 없이 허공을 가르는 그 품새가 조금은 허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편으로 관객들은 아직도 투쟁심을 고취하는 것보다는 '힐링' 을 더 원하고 있지는 않는지.

정작 큰 박수를 받은 장면은 소리 중간에 나왔던 '강남 스타일' 의 패러디 '재벌 스타일' 이었습니다. 세련된 판소리의 울림 속에서 갑자기 터져 나오는 가벼운 랩핑이 경직된 관객들의 마음을 흔들어주었지요. 억눌린 감성을 흐트러놓아 역으로 흥겨운 분위기를 이끌어낸 김수희 연출의 솜씨가 돋보였습니다. 그간 극단 미인의 작품에서 구사되었던 연출의 B급 유머장치가 제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한 바퀴를 돌아 소리꾼이 다시한번 애절하게 ‘민주주의’ 를 노래할 때, 처음에 관념어로만 들려왔던 그 단어가 살아있는 말처럼 느껴졌습니다. 민주주의, 민주주의. 백성 민에 주인 주자를 가진 그대 생각이여. 지금 우리 옆에 있는 건가요?

현실정치의 견제세력으로써 존재했던 '시인' 이 오히려 현실과 정치에 결탁하는 꼴을 보다 못해 분연히 일어난 김은성 작가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예기치 않게 관객들의 굳은 표정에도 개의치 않고, 멋스럽게 놀아준 소리꾼도 참 대단합니다. 새로이 모습을 선보인 <다시 오적>은 우리에게 성찰 없는 투쟁의 말로와 지속성없는 예술선언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문제작이라 할 수 있겠지요.

 

 

3. 이건 노래가 아니래요 - 홍대 앞으로 가기

이건 노래가 '아니에요' 가 아니라 '아니래요'. 말의 어감에서부터, 이겨‘을’의 숙명적 존재성이 드러납니다. 김‘갑’중 사장의 의사(돈)를 관객에게 전하고, 관객으로부터 받은 것(돈)을 다시 '갑' 에게 바치는 동안, 실질적인 모든 노동을 수행해낸 이겨을의 주머니는 텅 비어갑니다. 한편으로 이겨을은 예술 ‘하는’ 기쁨을 알게 되지만, 동시에 예술을 ‘유지하는’ 괴로움도 알게됩니다. 그 둘 사이를 오가는 동안 예술가 이겨을의 본질은 점점 사라져가지요. 이 작품은 김슬기 작가가 모노드라마로 구성한 홍대 앞의 서사입니다. 대학로 연극인과 닮았지만 다른 듯 한 홍대의 음악인과 재능교육의 해고 노동자 문제를 결부시켜 한편의 발랄한 음악극으로 꾸몄습니다.

홍대 앞에서 버스킹을 하는 아코디언 뮤지션 이겨을은 끊임없이 현실의 부조리함을 체험합니다. 작품의 매력은 그러한 체험이 우울함만이 아니라 ‘과도한’ 즐거움으로도 채워져 있다는 점입니다. 일견 그것은 이겨을의 독특한 개성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살펴보면 홍대 앞 거리음악가와 학습지 선생님들은 항상 웃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상대해 왔을 테지요. 이 작품은 굴욕과 억압의 순간에도 미소로 감내해야하는 서비스업 노동자들의 상황이 늘 밝은 모습만 연기하는 어릿광대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일러줍니다.

연기도 연기지만, 능청스럽게 리코더로 어려운 행진곡을 불어 제끼고, 맛보기만 할 줄 알았던 아코디언 연주도 능히 해내는 이지혜 배우의 음악적 재능도 놀랍습니다. 그녀가 관객에게 던지는 '구걸' 드립이나, 사장님에게 향하는 들릴듯 말듯 (다들리는) 혼잣말 연기도 잔망스러움을 더했습니다.

중반까지 이어진 웃음 초토화에 비해 뒷부분은 살짝 아쉽습니다. 홍대 인디음악가의 사정과 재능교육사태의 현실, 그리고 우화 같은 연극의 속사정이 조금씩 겹치면서, 그 지탄과 비탄의 대상이 구체성을 잃은 듯 했지요. 하지만 서로 다른 상황에서 비롯된 아픔들을 모조리 수렴하여 처연하게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이겨을의 모습은 진정 감동적이었습니다. 올해의 연극 여우주연상은 벌써 2월에 후보를 낸 듯합니다.

부새롬 연출은 전작 <로풍찬 유랑극단>에서 미리 학습된 ‘광대’ 의 가능성을 살려, 작은 프로덕션으로도 큰 성과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자매애적 연대의 합작품이 앞으로 마로니에 공원이나 혹은 아르코 극장에서 다시 설 수 있는 날이 오기를 희망합니다.

 

 

4. 혜화동 로타리 - 암울한 미래를 걷기

앞선 세 작품의 발랄함을 깨기에 적합했습니다. 과거의 투쟁 흔적들을 표백하는 남자. 그 자국들 앞에서 불안해하는 여자. 얼핏 부부로 보이는 둘 사이에 모호한 긴장이 흐릅니다.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둘 사이에 무슨 큰 일이 벌어졌던 것 같기도 합니다. 실상 <혜화동 로타리>는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지 구체적인 정보를 전해주지 않습니다. 관객들은 둘의 불안한 관계와 심리적으로 예민한 여자의 반응을 통해 어떤 사건이 벌어졌음을 유추할 뿐이지요. 따라서 이를 채워넣는 것은 어쩌면 관객의 몫입니다. 그리하여 그 사건은 재능교육 해고자들이 농성을 시작한 첫 순간일수도 있고, 폭력 진압으로 짓밟혀버린 순간일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투쟁에서 패배하고 연대가 깨지고 난 후 일수도 있지요.

이처럼 이 작품은 도래하게 될 미래에 대해 아주 냉혹하고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패배할거야. 그들은 사라질거야. 그들은 잊혀질거야. 그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거야. 이러한 가정들이 존재하는 극적 현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앞선 세 작품이 한줌의 희망과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웃음으로 잘될 ‘가능성’ 을 이야기했지만, 이 작품은 한숨과 절규로 안될 ‘가능성’ 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작품을 맡은 이양구 연출은 관객들에게 직접적인 지시보다는 상상을 통해 재능교육 문제와 만나기를 바랬고, 그러한 대본을 김윤희 작가로부터 얻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처음 볼 때와는 다르게 깊은 울림을 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연극이 할 일은 어떤 문제에 대해 감상적인 접근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기도 해야겠지만, 한편으로는 그 불안함과 불편함의 순간들을 잊지 않도록 예술적 형식으로 담아내고 기록하는 것. 그제야 내가 있는 ‘이 현실’ 이 문제가 별로 해결되어 있지 않는 ‘그 현실’ 임을 새삼 자각하게 됩니다. 내가 앉은 좌석 오른편 저 너머, 극장 밖에는 아직도 십자가 달린 옥상에서 ‘사람’ 들이 부르짖고 있으니까요.

 

극장 밖으로 나오기

사람을 섬기는 연극 동네에서 버젓이 노동자를 탄압하고 폭력을 일삼은 회사측의 행위는 오히려 연극인을 우습게 본 처사이니, 어쩌면 이 축제는 ‘아름다운 응징’ 이 되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행’ 을 차분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꾸며준 젊은 연극인들의 선택에 박수를 보냅니다. 모쪼록 이런 식의 결합이 앞으로도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물론, 축제의 첫 발을 함께 내딛은 우리 관객들도 책임감과 지속성에 대한 부담을 나누어 안고가야겠지요.

이명박 시대를 살았던 연극은 언어를 쓰는 예술 중에서 가장 나중에 투쟁의 대열에 합류하였습니다. 워낙에 늦어서인지 이젠 박근혜 시대의 선두주자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을 정도가 되었지요. 기왕에 이렇게 된 것이라면,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고 상상하고 연대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러한 동행의 대열에서 처지지 않도록, 비평을 쓰는 젊은이도 조금은 힘을 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