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플레이씨어터 즉각반응 <GOOD DAY TODAY>

2013. 10. 23. 19:37Review

 

<GOOD DAY TODAY>

'누구의 날도 아닌, 좋은 날'

플레이씨어터 즉각반응

 

글_정진삼

 

 

1.

플레이씨어터 즉각반응의 <GOOD DAY TODAY> 는 ‘떠도는 우리의 시간’ 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에 따른 전시는 ‘flow city’ 라는 제목이다. 공통적으로 ‘흘러감’ ‘지나감’ 이라는 의미를 표방한다. 부유하는 주체는 누구인가?(혹은 무엇인가) 도시가 움직일 리는 없으니, 떠도는 것은 사람이리라. 실상 부제보다 더 궁금한 것은 ‘좋은날’ ‘오늘날’ 이라는 제목이다. 반어인지, 권유인지 짐작이 어려운 이 당찬 선언 앞에서 머뭇거리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모두에게도 좋은 날이 과연 언제였나. 그런 날이 있었나. 좋은날은 누구의 것일까.

정시가 되자 배우들이 관객들을 전시장으로 초대한다. 두 줄의 긴 레인이 무대 중앙에 펼쳐져 있다. 패션쇼 런웨이를 닮은 바깥쪽 바(bar) 위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와인잔이 즐비하다. 관객들을 인도하던 바텐더가 중앙 스테이지로 와인잔을 하나씩 옮기며 관객들에게 말걸기를 시도한다. 그녀의 주변으로 "오늘은 좋은날" 을 구호처럼 외치며 활달하게 움직이는 두 명의 여성 무용수가 있다.(이들은 마치 여행사가이드 같다) 무대 뒤편에는 말쑥한 정장차림의 두 명의 DJ들이 연신 쿵쿵거리는 박자의 몽환적인 사운드를 들려준다.

여기까지가 도시의 세련된 느낌을 이룬다면 이와는 정반대의 파트가 있다. 일렬로 선 안쪽 네 개의 테이블 위에는 문래동 철공소 거리에서 주워 온 것 같은 부품들, '버려진 사물' 들이 빼곡하게 널려져 있다. 그리고 중요인물이 '등장' 한다. 정확하게는 ‘탄생’ 이라고 해야겠다. 양수가 터지며 아기가 나오듯, 물이 담긴 비닐이 찢어지며 모습을 드러낸 반라의 남성. 문래동 현지기술자 이영조다.(존칭은 생략하겠다) 태어나자마자 몸을 닦고, 작업복을 주섬주섬 입고, 현란하고 역동적인 장내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묵묵히 다음 테이블로 월경한다. 그가 수행하는 것은 테이블 위에 놓인 재료들을 재배치하는 작업. 그의 섬세한 손끝에서 그 쓰레기들은 설치미술작품이 되어 다시, 태어난다. (재미있게도 이 작품은 오늘 공연에 의해 내일 전시가 만들어지는 전복적인 형식을 갖고 있다)

이처럼 서로 대비되는 공간과 인물 설정은 관객들에게 중층적인 장소성을 가진 도시의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지금 여기는 작업장인 동시에 판매장이다. 작품이 만들어지는 곳이며, 상품이 유통되는 곳이다.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면, 헌 것은 슬쩍 버려지는 곳이기도 하다) 공연 장소가 문래동인지라, 동네의 장소적 맥락도 얼추 끼어든다. 이곳 또한 공업지역과 예술가지역이 혼재된 장소로 작품/제품으로 태어난 존재가 상품으로 의미와 성격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장소가 아닌가. 도시체계의 일면을 압축한 듯한 장면이 반복해서 눈앞에 펼쳐지면, 관객들은 '장소' 에 대한 바텐더의 질문을 곱씹게 된다. 도시공간의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문래동의 주인은 누구인가. 상품의 요란법석한 흐름 속에서 우리가 삶을 사는(living) 것인가, 삶이 우리를 사는(buying) 것인가, 하는 질문들이 파편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2.

끊임없이 바텐더의 입에서는 사람들의 역사가 읊조려진다. 첫 번째로 공연자들의 사사로운 개인사이다. 그에 이어 철거민들의 역사, 재개발 이주민의 역사, 배회하는 도시민의 이야기가 서서히 속도를 높여 전달된다. 그녀는 중간중간 한국의 근대사를 말해줌으로써, 미시사와 거시사의 교차증언을 수행하기도 했다. 인상적인 장면은 중립적인 상태의 진행자로 타인의 사연을 전달하던 바텐더가 배우인 자기고백으로 넘어오는 장면이다. “왜죠?” “왜 여길 떠돌고 있죠?” “저는 사라질까요?” “저는 잊혀질까요?” 자신이 던진 진지한 질문에, 곧바로 까르르 웃어대는 모습이 외려 그녀의 공허함과 환멸감을 강조하여 드러낸다.

매끈한 포즈로, 부속들을 쓱쓱 닦아내는 동작으로, 그리고 하이톤의 '오늘은 좋은날~' 을 날리며 관객들을 유혹해 나가는 두 명의 가이드와 느릿느릿 전진하는 장인, 그리고 계속해서 말을 쏟아내며 와인을 채우는 바텐더. 다원적인 실험의 양상과 도시적인 분업이 교묘하게 한 몸을 이룬 이 장면은 사이키델릭한 사운드에 맞춰 더욱 요란하게 전달되었다. 따라서 바텐더의 말은 집중해서 귀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다. 공연의 분위기는 활기를 띄어가지만, 관객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복잡한/억눌린 심리상태는 혼란스럽게 응축되어가는 셈이다.

결국 관객들이 함께 와인잔을 돌리며 건배를 외칠 때, 파티는 절정에 이르지만 곧, 잔을 깨버리는 바텐더에 의해 흥겨움은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순간의 정적은 다시 장내를 가득 채운 사운드 스케이프에 의해 휩쓸려가고 만다. 관객들은 시각, 청각, 미각 등 다양한 감각에 몸을 맡기면서도, 공연의 메시지에 도달하기 위해 집중력을 잃지 말아야 했다.

최종적으로 전시장의 레일에 달린 갈고리는 장인이 만들어낸 첫 번째 테이블의 조형물을 부수어버린다. 잔인한 도시의 철거주의에 의해 산산조각난 예술품. 그리고 먼 곳을 응시하던 장인은 이내 쓰러지고야 만다. 그의 탄생과 전진, 그리고 정지와 죽음은 다시 예술/인간/상품이 태어나면서 사라지는 과정을 일러주었다. 그 가여운 세상살이가 측은함과 숙연함을 더해주었다.

 

 

3.

<GOOD DAY TODAY>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버려진 것, 다 쓴 것, 수명을 다한 것들을 주워서 새롭게 배치하는 ‘아르테 포베라’ 식의 전략과 이를 수행하는 '예술가의 예술가' 이다. 부연하자면, 아르테 포베라는 ‘기술화 세계에 반대하며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시적(詩的) 언급을 성취하고자 하는 미술’ 을 지칭한다. 보잘 것 없는 재료들을 오히려 작품의 핵심질료로 내세움으로써, 산업화 사회에서의 '예술'의 위치를 점검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동원된 배우가 '이영조' 다. 대체로 '예술가의 예술가' 들이 한없는 평범함과 순박함으로 관객들을 무장해제하는 데 반하여, 그는 비범함으로 관객들을 긴장시킨다. 그 자신이 이주/이산의 역사를 겪어낸 인물이자, 40년간을 목공을 연마해온 장인으로써 공연의 중심적 오브제이자 의미로 작동하고 있다. 그는 아르테 포베라의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냄으로써, 간단한 배열행위가 미적인 가치로 재맥락화됨을 관객들에게 일깨워주었다. 산업화, 도시화, 상품화의 과정에서 누락된 사물들이 스스로 의미가 되고,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점은 이 작품의 숨겨진 메시지일 것이다.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맥락에서 두 명의 여성무용수들도 어눌한 한국어 발음과 의도적으로 분절된 동작을 통해 국가와 자본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모습처럼 느껴졌다.(이들은 연변에서 온 배우들이다) 마치 기계처럼, 혹은 부품처럼 표정 없이 연기하는 이들의 모습은 인격과 개성을 배제당하고 살아가야하는 한국사회의 마이너리티, 이주노동자의 삶을 명시한다. 바텐더도 마찬가지다. 배우의 자기고백은 예술천대의 사회에서 마이너리티로 주변화된 감정노동자의 애환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작품의 배우들은 모두 ‘전시(상품화)’ 를 위해 도구화된 인물이자, 그로 인한 디아스포라를 몸소 겪어내고 있는 인물로 설정되었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마이너리티와 디아스포라의 개념을 동시대인으로 확장 적용시킨다. 상품화된 도시사회에서는 우리 모두가 소외와 상실을 겪고 있는 떠돌이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4.

작품에서 말하고자 두 가지의 큰 메시지, '코리안(한국인의) 디아스포라' 와 '상품화된 삶' 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이전까지의 디아스포라가 국가의 지배와 식민의 결과로써 국경을 넘었다면, 지금의 디아스포라는 상품의 지배와 확장의 결과로써 인간이 어디로든 (팔려)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앞선 디아스포라 상황이 근대적 추진의 '결과' 로 야기된 것이라면, 지금의 도시적 디아스포라는 현대 사회문제의 '원인' 으로써 진행되고 있는 현상이다. 허나 이 작품은 이러한 역사적, 인과적, 장소적 맥락을 꼼꼼하게 다스리지는 않는다.

풀어 말하면 이들의 캐릭터 구성은 ‘디아스포라’ 에 가까운데, 이들의 수행은 ‘상품화에 대한 비판’ 에 가깝다. 그런 와중에 코리안 디아스포라든 혹은 도시적 디아스포라든 이를 주도했던, 제국주의, 전체주의, 민족주의, 개발중심주의 등의 비판받아야 마땅한 여러 지배 이데올로기는 사라지고 오로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만 남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도 극에서는 인간의 소외감, 상실감과 연결되면서 관객들의 정서적 동의를 구하는 것에 그치고 만다. 즉, 맥락을 견고하게 따져 물어야할 사회학적 현상들 - 도시화의 문제, 산업화의 문제, 그리고 실향의 문제 등등 - 이 너무 포괄적인 메시지 전달에 묻혀 사라지고, 이를 예술가의 자기성찰 혹은 자기수행으로 해결하려는 성급한 시도가 부각되는 것이다.

언어, 움직임, 사운드, 설치를 한데 묶어 감각적으로 풀어낸 구성에는 지지를 보내지만, 그 안에 있는 텍스트가 표피적인 주제에만 치중한 것은 아닌지, 여러 맥락을 갖고 있는 의미의 줄기를 왜 정리하지 않았는지 못내 아쉽다. 극의 말미에 갑작스레 나타난 계기일식처럼, 두 가지의 비슷하지만 다른 메시지를 포개어 읽기엔, 이를 현명한 관객들의 '즉각반응' 으로 돌리기엔, 아무래도 어려움이 있었다.

 

 

5.

장소와 오브제, 그리고 자신의 테마를 결합하여 개념을 도출하고 거기에 동참한 관객들이 의미를 도출해내는 것이 현대미술의 작업방식이라면, 우리의 다원예술들도 그 창작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정한 장소에서 맥락을 찾아내고, 기계 혹은 사물들을 결합시켜 퍼포먼스의 기반을 다지고, 거기에 '배우' 라는 현존하는 핵심 오브제를 세워 의미를 수행하게 하는 것이 동시대 젊은 다원예술가들의 공통적인 방식이리라. (이것은 독창성의 문제이기 보다는,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동일한 화두라고 봐야 할 것이다)

플레이씨어터 즉각반응의 <GOOD DAY TODAY>는 프로젝트 잠상의 <도시내시경 시리즈>, 안무가 곽고은의 <도시 미생물 프로젝트 - 판매를 위한 춤> 그리고, 크리에이티브 VaQi의 <서울연습>과 <연극의 연습>으로 이어지는 과정과 서로 닮은(듯 또 다른) 지향성을 갖고 있다. 즉, 이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캐릭터들은 모두 방황하는 예술가이자 소외된 현대인이다. 요컨대 이 작품은 하나의 예술가가 또 다른 예술가를 만드는 프로젝트이면서, 동시에 예술가가 분열적인 자기 정체성을 토로하는 윤리적인 고해이기도하다. 그리하여 그 안에서 발견되는 작품의 메시지가, 거대담론이 아니라, '나'라는 예술가에서 출발하여 우리, 현대인을 살피고 있고, 나의 아버지 세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근대를 취하여,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탈근대의 과정을 거쳐, 암울한 미래까지 보여주는 것이 오늘날의 다원예술작품들에서 대동소이하게 나타나는 모습이 된다.

오늘날 젊은 소설가들의 SF소설(science fiction)을 징후소설(symptom fiction)로도 읽어낼 수 있듯이, 동시대의 연극작가들은 현재의 불안한 징후로부터 미래를 살피는 일에 골몰하고 있다. 풀어 말하면 이들은 다양한 매체들과 해체된 메시지(언어)를 섞어 미래를 현실-적용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지금 우리의 모습을 경고하는 작업을 이어간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본주의적) 유토피아가 곧 (예술적인) 디스토피아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6.

마지막으로 공연을 되살펴 보자. 바텐더 여자가 한 말 중에는 미래의 무서운 사건을 예언하는 부분이 있다.(바텐더 : "2014년, 이영조의 부인은 암으로 죽습니다") 실상 그녀가 전했던 과거의 사건들은 미래에 대한 징조이기도 할 것이다. 무엇에 대한 징후인가. 흘러가다, 떠돌다가 생을 다해버린 디아스포라의 슬픈 운명이고, 태어나자마자 쓸모를 다해 버려지는 상품의 유통기한이다.

더 나아가 예술가의 예술가(이것은 다원예술의 극중 극이 아닌가)는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 삼각형, 사각형, 원형부속이 서로를 지지하며 만들어낸 기하학적 설치물의 이미지는 차가운 도시건물의 외관을 떠올리게 했다. 노쇠한 재료들로 완성된 이 구조물은 수명을 다해서 비어버린 미래도시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디아스포라 건축가가 창조한 세계는 디스토피아 서울의 모습이자, 고가도로가 뒤엉켜있는 문래동의 미래다. (그리고 그것은 파괴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작품의 작품 안에서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구축된 유토피아의 이미지를 통해서, '좋은날, 오늘' 을 최종적으로 반어로써 읽어낼 수 있다. '어디에도 없는 장소' 가 눈 앞에서 일그러지듯, '언제에도 없는 시간' '아무것도 아닌 시간' 은 마냥 흘러가며 사라진다. 그래서 '오늘' 이라고 명명된 '좋은 날' 은 '누구의 것도 아닌' 날일 것이다.

 

ps. 그럼에도 불구하고, 'GOOD DAY TODAY' 의 문자적 의미가 통용되는 사람이 있다면, 극중에서 새로 태어난 장인 이영조가 아닐까. 오늘을 예술가의 생일로 가진 그야말로, '오늘은 좋은날' 의 의미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렇다고 유추가 가능한, 극 바깥의 유일한 인물이 될 것이다.

 

***사진제공_문래예술공장 (사진은 리허설 사진)

 

| 작 품 설 명 |
 <GOOD DAY TODAY>는 다원예술 프로젝트로 언어, 움직임, 사운드, 설치가 극적으로 콜라보레이션 되는 공연이자 전시작품이다. 또한 철공소와 예술이 공존하는 문래동과의 관계속에서 만들어지는 장소특정적(Site-specific) 예술에 다큐멘터리 형식을 결합하였다.
 공연과 전시는 계속하여 변해가는 도시의 단면들과 그 속에서 상품이 되어 어딘가로 떠돌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의 삶과 흔적을 담았다. 그리고, 실제로 40여년을 목수로 살아온 일반인이 삶의 이야기와 함께 실시간 설치작업을 맡았고, 연변에서 이주한 출연자들도 자신들의 이야기와 함께 공연에 참여한다. 하수민 연출은 문래동만의 시각적, 물리적, 역사적, 감각적인 요소를 재료로 사용하여 시적 극 구성, 실시간 설치미술, 사운드스케이프를 활용한 라이브디제잉, 다큐멘터리적 움직임 등을 독창적인 형식으로 디자인하여 예술장르 간 교류와 함께 융복합 공연의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자 한다.

| 기획의도 |
 코리아 디아스포라
 조선족의 디아스포라. 남한 국민의 상경. 우린 더 나은 삶을 기약하기위해 고향을 떠난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주한다. 왜 우리는 떠도는 걸까? 좀 더 커다란 자본 시장에서 더 나은 삶을 기약하고 싶은걸까? 하지만 빠르게 흘러가는 세계에 비해 늦게 도착한 느낌은 왜일까?

 Site-specific 문래
문래동의 시간과 대지는 변함없이 흐르지만 장소와 인간은 계속 바뀐다. 빠르든 느리든. 옳든 그르든. 최근엔 아티스트들과 젊은 세대들이 문래동으로 모여들고 있다. 하지만 문래동의 실제 미래는 늙은 노동을 버리고 낡은 건물을 부수는 세계의 흐름을 따라 또 다시 어딘가로 흘러갈 것이다. 머무름과 떠남이 반복되는 이 곳. 문래동은 이주의 공간이다. 최근 문래동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계의 시간 속에서 왜 우리는 늙고 낡은 이주의 공간을 방문 할까? 작가는 위의 두 질문에 답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답을 찾기위한 조그마한 단서를 발견하였다.



 | 작가소개 - 하수민 |
2009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무대미술과 예술전문사 졸업
201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Site-specific performance" 강의
2012년 제1회 융합예술공장 참여작 연극 <코러스> 작, 연출, 무대(아리랑아트홀) / 다큐멘터리 <무라> 작, 연출
2010년 연극 <스페이스 치킨 오페라> (연출 박근형) 의상디자인 / 
 연극 <떠나는 사람들> (연출 김민정) 무대디자인
2009년 연극 <사람을 찾습니다> (연출 최무성) 무대디자인


 | Staff |
ㅇ 구상/연출 : 하수민
ㅇ 출연 : 이영조, 크리스틴현정, 김봉선, 황진향, 최리안, 김준연
ㅇ 조명 : 유은경
ㅇ 무대/소품 : 김현민, 하수민
ㅇ 안무 : 김봉선
ㅇ 음악 : 최리안(Riahn), 김준연(Jena Sound)
ㅇ 조연출 : 권윤근
ㅇ 사진 : 이지락
ㅇ 인쇄디자인 : 원선우
ㅇ 기획 : 지영관, 차정훈, 조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