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세계관이 형식이 될 때 - 서울변방연극제

2013. 10. 25. 13:52Review

 

세계관이 형식이 될 때

2013 15회 변방연극제 사건일지-과거의 미래

: <숙자이야기>, <우리는 난파선을 타고 유리바다를 떠돌았다>, <갈바리노>를 중심으로

 

글_ 전강희 

영화 <왕의 남자>에서 광대들이 왕 앞에서도 현실을 풍자하는 모습을 보며, 저 시대의 예술가들의 삶은 세상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세상에 온 몸으로 맞서며 자신의 예술관을 펼쳐나가는 예술가들의 모습은 브라운관에서도 가끔 볼 수 있다. 오로지 순수 예술만을 부르짖는 예술가들이라도 그들의 삶은 거대 권력과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 비극적인 시대를 살았던 예술가들이라면 직면할 수밖에 없는 삶이었을 것이다.

비극적인 역사가 희극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이때에,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미학을 현실이 더 나아지는 것에 보태려 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행보를 보이는 무리는 시인들과 인디밴드들이다. 9306시에 쌍용자동차 희생자 분향소가 있는 대한문 앞에서 철학자 알랭 바디우와 시인 고은, 진은영 등이 참여한 <, Protestry "Occupy with Poems">와 강정마을 문학천막안의 김소연, 심보선, 신해욱 시인, 그리고 명동 재개발 현장에서 임민욱 작가와 협업하여 <국제호출주파수>라는 곡을 완성한 밴드 무키무키만만수를 예로 들 수 있다. 이들 행위가 작품이라고 칭하기에는 퍼포먼스라는 장르적 특성상 정교한 미학적 형식이 약하다는 오해를 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소 헐거워 보일지라도 이들이 취한 방법론을 통해서 드러나는 세계관은 관객/참여자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는 것에 성공했다. 예술이 타인의 일을 나의 일로, 공공의 일로 확장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연극계도 작년을 기점으로 사회 참여적인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고 있다. 재능교육사태와 국가보안법을 주제로 다룬 혜화동 1번지 페스티벌과 한국근현대사 100년을 재조명하는 ‘100 페스티벌’, 최근 있었던 국립극단의 몇몇 공연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야기가 무대를 넘어 관객석까지 도달할 수 있었는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물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작품도 있었지만, 많은 수의 작품이 현실과 재현 사이의 거리를 리얼하게 담아내지 못했다. 이는 미적인 것을 표현해내는 형식보다 세계관을 담아내는 형식이 취약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든다.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타인에 관한 것이지만, 결국 무대에 드러내고 싶은 욕망의 대상은 예술가 자신이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이 사이의 불일치가 사회적인 주제를 다루는 연극과 그렇지 않은 연극이 차별화되는 지점을 없애버렸다. 이런 이유로 정치극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최근 몇몇 연극들이 의도한 만큼의 반향이나 연대를 불러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른 예술분야와 일대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연극계에도 앞서 예로 들었던 예술가들만큼 관심과 박수를 받아야하는 단체가 있다. 바로 올해로 15회를 맞은 서울변방연극제이다.

제15회 서울변방연극제 포스터

변방연극제가 공연을 통해 현실을 대하는 태도는 그것자체로 변방만의 형식이 되고 있다. 15회 연극제는 국가자본’, 이것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작품을 중심으로 기획을 시작했다고 한다. 올해 주제는 사건일지: 과거의 미래이다. 변방연극제는 연극제가 한국현대사의 공통공간을 횡단하는 잊혀지고, 숨겨지고, 사라진역사와 개인을 연결하는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숙고하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공연은 <숙자이야기>, <우리는 난파선을 타고 유리바다를 떠돌았다>, <갈바리노>이다.

세 공연 모두 등장인물들의 사적인 이야기가 현대사라는 공적인 이야기와 고통스럽게 맞닿아있다. 이들은 실제 사건의 주인공이거나 가족이다. ‘숙자’, ‘한종선’, ‘갈바리노라는 실명이 거론된다. 무대 위에 이름의 주인이, 또는 가까운 관련자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연출자는 이들이 타인의 언어가 아닌 자신의 육성으로 관객에게 말을 건넬 수 있도록 무대를 내어주었다. 대중의 입맛에 맞도록 세련되게 가공된 고통이 아닌 실제 인물 속에 육화된 고통은, 무대 위 인물을 대상화할 수 있는 공간적 거리도, 심리적 거리도 주지 않는다. 관객은 그들의 고통을 지켜보고, 흡수하여, 각자의 속도로 체화해 나간다.

 

체화된 고통을 드러내기, <숙자이야기>

개막작 <숙자이야기>20123월 기지촌 할머니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워크숍으로 출발해서 여러 차례 공연을 거쳤다. 그리고 작년에 <일곱집매>로 극화되어 연우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변방연극제에 초청되기까지 연극을 만든 사람들이 함께 한 시간이 상당하다. 연극치료와 토론연극을 주로 하는 노지향 연출다운 선택이다.

사진: 행복공장, 제공: 변방연극제

여느 연극치료와 마찬가지로 이 공연도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무대에는 두 명의 숙자가 나온다. 가난 때문에 어린 나이에 부자 집 식모가 되고, 공장에서 일하다, 남의 손에 이끌려 결국에는 기지촌으로 흘러들기까지 기억을 70살이 넘은 숙자할머니가 모두 연기해 낸다. 70살 넘은 할머니 숙자가 어린 숙자가 되어 엄마를 그리워할 때, 주인아주머니한테 야단을 맞을 때 관객이 목격하는 것은 개인의 아픔과 동시에 그 시절에는 누구나 그런 어린 아이가 될 수도 있었던 우리의 현대사다. 사실 무대에는 이름만 다르지 여러 명의 숙자가 나온다. 그녀들은 그 시절 미군에게서 외화를 벌어들이는 산업역군으로 여겨졌다. 국가는 더 체계적으로 돈벌이를 하기 위해 그녀들을 보호라는 명목 하에 관리 감독했다. 국가와 가족에게 버림받았던 상처를 이들은 공연을 통해 대면하고, 관객에게 당당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공연 첫 장면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이들은 서로 왕래하며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아니었다. 아픈 기억은 온전히 사적인 것으로 남아있었다. 워크숍을 거치며 참여자들의 기억은 공유되면서 집단적인 기억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고통을 체화한 여러 개의 몸이 동시에 발산하는 정서적 효과는 객석에 전달되어, 이 기억들을 사회가 잊지 말아야 할 공공의 것으로 확장시켰다.

사진: 최성욱, 제공: 변방연극제

여기까지가 1부의 이야기다. 연출의 의도는 성공하는 듯했다. 관객들 누구나 할머니들이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어야한다는 공동체적인 윤리가 작동하는 것 같은 환상을 집으로 가져가도 되는 듯했다. 그런데 2부 공연이 토론연극/관객참여연극 형식으로 바뀌면서 1부의 성과를 축소시켰다. 할머니와 역할놀이를 하게 된 몇몇 관객의 감상적인 행위는 오히려 폭력적이기까지 했다. 그들이 하는 충고는 따뜻한 위로로 위장하고 있었지만 할머니들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사회체계 바깥에 있는 할머니들에게 그 자체로서 몫을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도록 종용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변하지 않고, 할머니들이 기존의 질서 안으로 포섭되기를 강요할 뿐이었다. 관객석에서 우연히 무대로 올라온 한 정치가도 마찬가지다. 역시 정치인이 생각하는 정치는 국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인가 보다. 그의 출현과 발언은 일상의 정치를 국회로 돌리며, 그 의미를 퇴색시켰다. 연출가의 유연하지 못한 대처가 못내 아쉬운 공연이 되었다.

 

육성으로 말하기, <우리는 난파선을 타고 유리바다를 떠돌았다>

87년은 ‘87년 체제가 고유명사로 여겨질 만큼 민주주의 역사에 디딤돌이 되어준 사건이 일어난 해이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과 시위 중 이한열군의 사망이 학생 총궐기로 이어지면서 6월 항쟁을 낳았다. 또한 이 시기는 국가의 조력을 받는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12년간 원생 513명이 죽어나간 사실이 탈출한 이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때이기도 하다. 역설적이게도 이 과정에서 복지원 출신이라는 것이 외부에 알려진 사람들의 인생은 또 한 번 파괴되었다. 애초에 사회체제 안에 흡수되어있지 않은 이들의 죽음과 목소리는 더 가치 있고 중요한 것에 가려져 사라지게 되었다.

최근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이 사건을 환기시키는 이가 있다. 한종선이다. 그는 <우리는 난파선을 타고 유리바다를 떠돌았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공연은 관객이 자리에 착석하기 전부터 스크린 위에 영상을 투사하고 있다. 80년대에 제작되었던 ‘형제복지원대한 거짓 방송영상이다. 공연의 큰 틀은 연출가 장지연이 그와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촬영한 다큐멘터리, 복지원 사건을 극화한 유리바다’, 한종선이 9살때부터 4년간 겪었던 형제복지원의 기억을 관객에게 직접 들려주는 것으로 구성된다. 극의 전반부에서는 실제 인물의 이야기를 인터뷰형식으로 담아낸 다큐멘터리와 원생들의 복지원 생활과 탈출까지 과정을 허구적으로 구성하여 만든 연극이 번갈아 진행된다. 결이 전혀 다른 두 개의 범주가 동화와 이화를 반복한다. 다큐멘터리에서 연출가는 한종선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여러 차례 만남을 이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이 나누는 소소한 대화 속에 깃든 일상성은 앞서 보았던 거짓 방송의 꾸며낸 대의명분과 대조를 이루며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결국은 우리 주변임을 확인시켜준다.

사진: 최성욱, 제공: 변방연극제

공연 후반부에는 한종선이 무대에 등장한다. 객석 앞, 그의 얼굴은 스크린 속 선량하고 평범해 보이던 얼굴에 비해 낯설어 보였다. 스크린 안에 그의 결연한 눈빛까지 담아낼 수는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소리는 관객의 소리를 이끌어 내었다. 여기저기서 질문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질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의 분위기는 여전히 생생하다. 임민욱 작가가 사회참여적인 작품을 하게 된 계기를 묻는 질문에 87년 항쟁 당시 함께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라고 얘기했던 적이 있다. 삼일로 창고극장에 모인 관객들의 심정도 그랬을 것이다. 이화와 동화를 반복하게 하던 공연은 무대 위에 실재가 등장하는 순간 이화의 여지를 지워버리고 완전한 몰입의 순간으로 나아갔다. 국가가 자행하는 폭력이 마치 살갗에 닿는 것처럼 예민하게 느껴졌다. ‘유리바다에는 먼지들이 나온다. 복지원의 원생들/사회체제 속에 안착하지 못한 사람들의 표상이다. 공연은 먼지가 처음부터 먼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것도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무대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사진: 최성욱, 제공: 변방연극제

 

우리와 같은 슬픔, <갈바리노>

출처: http://mtfestival.com/?p=489

폐막작 <갈바리노>는 칠레 마푸체족 인디오인 갈리바노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연극이다. 그는 1973년 사회주의 정부의 농업연수 대상자로 선정되어 장학금을 받고 러시아로 떠났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 군사쿠테타가 일어나고 정권이 바뀌자 귀국이 어렵게 되었다. 동생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돈을 빌려 겨우 한 차례 고향을 방문하고 러시아로 돌아간 3년 후 그는 네오 나치 갱단에게 살해당한다. 귀국을 며칠 앞둔 시점이었다. 가족이 국가로부터 사망소식을 전해들은 날은 그가 처음 조국을 떠나고 30년이 지나서이다.

갈바리노는 극단 키멘(Teatro Kimen)을 이끌고 있는 연출가 파울라 곤잘레스 세겔(Paula Gonzalez Seguel)의 삼촌이다. 그녀는 극 중 갈바리노의 여동생을 연기하는 배우로도 참여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을 맡은 배우도 가족이다. 무대는 칠레 농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이 극사실적이다. 아버지는 연장을 가방에서 꺼내 테이블에 늘어놓고 물건을 수리하며, 어머니는 아직 털이 있는 닭을 손질해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딸은 어머니를 돕거나 편지를 쓴다. 정부에 오빠 소식을 묻는 편지다. 편지쓰기는 수년간 반복되고 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어머니는 저녁식사를 준비하면서 행여 아들이 돌아올까 아들의 몫까지 식탁위에 올린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처럼, 그들은 아들을 기다린다. 힘없는 개인인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편지를, 그것도 답장이 없는 편지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쓰는 것뿐이다. 변하는 것이 있다면 날이 저물어가는 것을 알려주는 빛뿐이다. 마침내 정부로부터 답이 온다. 그가 수년 전에 러시아에서 살해당했다는 간단한 내용이다. 그녀는 이제 정부에 주검을 송환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녀의 어조가 처음과 달리 분노로 가득 하다는 것이다.

사진: 최성욱, 제공: 변방연극제

연극은 국가 권력이 사적인 공간 안에 어떻게 드리워져 있는가를 보여준다. 국가는 가난한 농민이고 인디오인 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견고한 체제 안에서 어떤 의미도 만들어 내지 않는 흔적처럼 사라지는 존재다. 극사실적인 무대 위의 등장인물로서 당당하게 자기 위치를 지키고 있는 이들이 실제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사실적인 양식을 차용하여 등장인물들에게 강렬한 존재감을 부여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또한 연극은 먼 나라 칠레의 현대사를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미시적인 차원에서 풀어냄으로써 거대서사가 관심을 두지 않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있다. 거대서사는 큰 맥락에서 국가 권력과 닮아 있다. 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효과적인 담론을 만들어 내는 것에만 명분을 준다. 결과적으로 소소한 것들이 주체의 자리에서 객체의 자리로 내려오게 된다. 이와 달리 미시사는 민주주의와 자리를 같이 한다. 대중의 일상적인 요구가 정치 슬로건을 바꿀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준다. 매일 똑같은 일상을 견뎌가며 아들을 기다리고, 오빠를 위해 편지를 쓴 가족들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읽어 낼 수 있다.

 

앞선 세 작품을 보며 가장 헐벗은 자가 그 시대의 가치를 체현하고 있다는 주디스 버틀러의 말이 떠올랐다. 작품 속 세상을 통해서 바라본 현실 세계는 이상하기만 하다. 변방에서 바라보는 중심은 그런 낯선 장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들이 생각하는 현실과 재현 사이의 거리, 상상과 재현 사이의 거리는 주류 연극제와 차이가 있다. 변방연극제는 두 개의 기준점 사이 거리에 예술가들이 정교하게 만들어낸 실천의 공간을 배치한다. 이곳은 관객과 만나며 공론의 장이 된다. 관객은 이 안에서 타인의 슬픔/세계 속에 참여할 것인지 아닌지 결정하는 순간을 맞게 된다. 변방연극제가 경험의 차원을 넘어 새로움 앎을 만들어 내는 연극제로서 제 위치를 앞으로 더욱 굳건히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이 글은 ITI에서 발간하는 반연간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제15회 서울변방연극제

일정
2013년 7월 3일(수)~7월 20일(토)

장소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
명동삼일로창고극장
아르코미술관 스페이스 필룩스
4호선 신용산 2번출구 앞
전자쌀롱 독각귀홀
명동예술극장 앞 사거리(야외)
갤러리팩토리
문래예술공장
서울연극센터 외

 

서울변방연극제 선언문

서울변방연극제는 동시대의 연극성을 새롭게 조망하고 질문하는 연극제입니다.
서울변방연극제는 연극과 삶의 경계에서 균열과 아름다움을 사유하는 연극제입니다.
서울변방연극제는 불가능한 것들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연극제입니다.
서울변방연극제는 이상한 것, 낯선 것, 잡것들의 미학을 추앙하는 연극제입니다.
서울변방연극제는 연극이 아닌 모든 것들의 연극제입니다.

제15회 서울변방연극제 주제

사건일지:과거의 미래

변방(邊方)은 주변부를 배제하는 중심에 대한 ‘반성’, 중심과 주변부를 재배치하는 ‘전복’, 경계를 치고 들어오는 새로운 것들에 대한 ‘경계에서의 만남과 수용’이다. 변방연극제는 동시대의 무대 미학을 추구하는 작품을 선보이며, 축제라는 프레임을 통해 현대예술의 예민한 감각과 날카로운 목소리의 놀이터가 되기를 추구하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공연예술축제이다. 올해 제15회 서울변방연극제는 ‘국가’와 ‘자본’ 그리고 그것의 ‘새로운 관계’에 대해 모색하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기획을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경제발전’ 이라는 거대한 담론 속에서 ‘숨겨진 역사’, ‘잊혀진 시간’, ‘사라진 생명’, ‘사람의 노동’에 주목한다. 이것은 연극에서 표방하는 ‘발생과 생성’으로서의 미학적 ‘사건’, 그리고 한국 현대사의 공통공간을 횡단하는 ‘잊혀지고, 숨겨지고, 사라진’ 역사와 개인을 연결하는 ‘사건’으로서의 의미성을 조망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건’을 보다 새로운 시선과 관점 그리고 연극적 환영과 재현과는 다른 미학과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사건일지 : 과거의 미래’라는 주제를 도출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