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잉여와 잔여의 경계에서 : 아오병잉 페스티벌, <김토일 개막공연>, <어린아이의 처방전>

2014. 3. 2. 23:31Review

 

잉여와 잔여의 경계에서 

<아오병잉 페스티벌: 김토일 개막식 공연, 어린아이의 처방전>

                                                                                                 글_K

 

 기의와 방향을 상실해버린 동시대의 대학로

한국에서 연극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일종의 메카로서 찾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은 단연 대학로일 것이다. 영화판에 충무로가 존재하고 야구판에 잠실구장이 존재하듯, 대학로는 연극판의 명실상부한 성지로 활약해 왔다. 혜화역에 당도한 사람은 누구나, 숨은그림찾기 마냥 구석구석에 즐비한 소극장과 바람에 흩날리는 연극 포스터들을 목격한다. 하늘이 어둑해질 무렵이 되면 그러한 소극장의 작은 문턱 앞에 사오십 명은 되어 보이는 젊은이들이 곧 상연될 연극을 기다리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학로는 거대자본과의 밀착, 상업연극의 활성화로 인해, 본래의 대학로라는 기표가 함의하던 실험극과 작가주의적인 정신이 상당히 결여된, ‘기의 없는 기표로 전락한 감이 있다. 대학로는 여전히 연극판에서 가장 유명한 공간임이 분명하나, 그러한 공간의 공간성에 대한 사유는 부재한 상태다. 수많은 연극 포스터들은 낭만과 청춘와 자유를 노골적으로 외치며 연극에 생소한 온갖 관객들을 끌어당긴다. 하지만 실제의 연극 상황은 그리 낭만적이지도, 자유롭지도 않다. 언제나 문제가 되어온 연극인들의 빈곤과 생계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연극의 근간 자체가 퇴색되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의 근간은 희곡이다. 희곡은 잔여를 동력으로 하는 글이다. 다시 말해, 연극의 핵심 동력은 관객에게 남는 여운과 잔여 그 자체인 것이다. 좋은 연극은 관객을 설득하려 들지 않고,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리하여 관객을 누구보다도 능동적인 주체로 만든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 연극에서 잔여를 발견하긴 어렵다. 작금의 연극은 뼈 있는 풍자가 깃들어진 희극 대신 개그콘서트 류의 즉흥적 개그만을 내세우고, 본인의 몸과 언어에 대해 깊이 사유하는 배우 대신 스타성이 강한 배우만을 내세운다. 관객을 성찰로 이끌기 보다는 관객의 눈물을 짜내려 하고, 그들의 말초신경에만 집착한다. 그래서 오늘날의 대학로에는 여백이 없다. 그렇다. 우리는 여백을 허용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여백을 허용하지 않는 시대란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시대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작금의 연극계에 일어나고 있는 여백 부재 현상은 자본주의의 변형이다. 오직 쓸모 있고, 돈이 되고, 타자의 시선을 끌 수 있는 것들만이 예술의 공간 안에 존재할 수 있다. 자본은 그러한 온갖 친자본적인 오브제들을 끌어모아 모든 예술의 공란으로 침투시킨다. 잔여니 사유니 하는 것들은 단번에 타자의 관심을 모으기 힘들다. 따라서 그런 것들은 예술의 저변으로 추방당한다. ‘잉여-예술이란 어떤 의미에서 이 시대에서 추방당한 오브제들을 끌어모으는 작업일 것이다. <아오병잉 페스티벌>은 그렇게, 잉여의 기표가 될 만한 것들을 모으고 모아 시작하였다.

 

 

 

여백의 이야기로 대학로의 공간성을 전유하다, 김토일의 아오병잉 개막공연

214일 저녁, 대학로 서울연극센터에서는 <아오병잉 페스티벌>의 개막공연인 싱어송라이터 김토일의 무대가 올려졌다. 싱어송라이터 김토일.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어딘가 익숙하다. ‘김토일이라는 이름은 금토일을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토요일과 일요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대부분의 이들에게 토요일과 일요일은 노동을 하지 않는 날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와 생산을 최우선적인 가치로 두기 때문에 토요일과 일요일에 절대 여백을 남겨두지 않는다. 토요일은 토요일대로, 일요일은 일요일대로 거리의 술집과 상점은 포화 상태가 된다. 생산이 최고이 미덕인 이 사회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불금이니 불토니 하는 유행어들은 실은 주말을 빈둥거리며보내는 것에 대한 공포에서 등장한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모순이 존재한다. 주말에 생산적으로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960년대 이만희 감독의 영화 <휴일>에서는 이러한 휴일의 모순이 잘 드러난다. 남자와 여자는 일주일 내내 일을 하기 때문에 휴일에만 서로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돈이 없기 때문에 휴일에 만나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들은 비자발적 잉여상태가 된다. 한창 경제발전의 서막이었던 1960년대, 남자와 여자는 세상의 흐름과는 다르게 잉여상태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 본인들의 휴일을 견뎌내지 못하다. 결국 영화는 여자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맺는다.

김토일의 네이밍이 어떤 의도였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어쨌든 그의 이름이 가져다주는 자연스러운 휴일에 대한 연상은 그의 작품 성격 또한 자연스럽게 유추하게 만든다. 그의 자작곡들은 그의 이름만큼이나 세상의 여백에 중심이 맞춰져 있다. 그의 곡 <월화수목금토일>에는 벌써 일주일이 갔네 / 투덜대다 또 일 년이 가버렸네 / 벌써 일주일이 갔네 / 나만 쏙 빼놓고 다들 신났네.” 라는 가사가 있다. 세상의 바쁜 흐름과 순환 주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잉여상태로 잔존하는 젊은이의 심경을 대변한 듯하다. 풍요로워보이는 세상 속에서 생각 외로 이상적인 행복을 쟁취하기 어려운 현실을 재치 있게 풀어낸 노래도 있다. <로맨스는 어디로 갔나>로맨스로 시작한 우리 / 정신 차려보니 이건 다큐멘터리라는 가사는 로맨스라는 것이 기대만큼 달콤하지는 않고, 의외로 무겁고 버거운 면도 있음을 알고 혼란스러워하는 젊은이의 심경을 표현한다. “멍한 표정을 하고 클럽으로 갔어 / 춤도 안 추고 주윌 둘러봤지 / 다들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끝내줬지만 / 그건 너가 아니었지.”<그건 내가 아니었지>의 가사인데, 잔잔한 멜로디와 함께 쓸쓸하고 외로운 정서를 표현한다. 이렇듯 김토일의 전체적인 노랫말은 그리 희망적이거나 밝은 편은 아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한없이 슬픈 심연을 노래하는 것도 아니다. 건조하다면 건조할 수 있고, 씁쓸하다면 씁쓸할 수 있겠다. 확실한 것은 각기 다른 모든 노래마다 김토일 특유의 여백이 섞여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노래 타입이 굉장히 독특하거나 중독성이 강해 단번에 사람들을 잡아끄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학로나 홍대 일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싱어송라이터의 스타일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오병잉 페스티벌>의 개막식에는 하필 김토일이 나왔을까?

 

김토일 공식사이트 http://dl.dropboxusercontent.com/u/64119424/gimtoil_GIMTOIL/gimtoil_ttae(2014)_EP.html

 

 

나는 그에 대한 답변을 김토일의 무대가 있었던 서울연극센터의 공간성과 맞물려 찾아보고자 한다. <아오병잉 페스티벌>은 혜화역 4번 출구에 위치한 서울연극센터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서울연극센터는 연극의 메카 대학로에서 -비록 이곳이 현재 기의 없는 기표로 전락했을지라도- 연극에 입문하고 연극 관련 자료를 찾으려는 시민들을 위해 각종 연극 포스터와 자료들을 모아두고 안내하는 기구이다. 따라서 시민들의 출입이 자유롭다. 김토일의 노래 한곡이 진행되는 단 몇분 동안 몇명의 시민들이 문을 열고 닫았고, 컴퓨터를 만지고 책을 찾기도 하고,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기존의 거의 모든 연극들이 깜깜한 암전 상태를 전제하고, 시민들의 관객 태도에 엄숙주의를 강요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맥락이었다. 물론 적지 않은 싱어송라이터들이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노래를 하는 무대가 엄숙주의와는 다소 다른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은 이전부터 있었던 현상이나, 어쨌든 김토일의 공연을 둘러싼 주변의 맥락은 기존의 대학로 연극과는 차별성을 만들어내는, <아오병잉 페스티벌>의 의의를 잘 설명하였다. ‘아오병잉병맛또는 잉여로 표상되는 모든 오브제들에 대해 고민한다. 따라서 아오병잉의 시작이었던 개막식 역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많은 평범하고 잉여로운 것들에 초점을 맞춘다. 김토일이 공중파에 자주 출연하는 인기 가수에 비해서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싱어송라이터인 것처럼, 서울연극센터를 찾아오는 시민들 역시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다. 김토일의 노래 가사가 거창하고 거대한 담론 대신 사소하고 건조한 이야기들을 하는 것처럼, 시민들의 삶 역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자만의 사소한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어울림은 서울연극센터라는 기존의 공간을 살짝 비틀고, ‘엄숙한 무대라는 기존의 개념을 살짝 비틀면서 합을 만들어낸다. 인터파크에서 인기를 끄는 유명연극처럼 거창하고 말초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보이지 않는 질서를 형성하면서 위계를 형성하는 것도 아니지만, 시민들은 김토일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세상의 많은 여백들은 김토일의 음색에 맞추어 리듬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여백의 기억들이 모여 배우 - 관람자의 관계를 전복하다, <어린아이의 처방전>

김토일의 개막공연 이후 바로 이지현의 <어린아이의 처방전>이 이어졌다. 사실 글을 쓰기 전부터 나는 이 <어린아이의 처방전>을 내가 아는 수많은 예술 장르 중 무엇으로 호명하여야 할지에 대해 굉장히 많이 고민하였는데, 그것은 <어린아이의 처방전>이 나에게 상당히 신선한 감흥을 주었기에, 이것을 단순한 기존의 공연이나 전시 분류에 맞추어 호명할 수는 없다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프로그램 책자에 써 있는 이벤트보다는 공연이라는 호명이 훨씬 낫다는 판단에 나는 <어린아이의 처방전>공연으로 분류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었다. 첫째, <어린아이의 처방전>에는 분명 배우와 관객이 존재했다. 둘째, 나는 오늘날의 수많은 공연들이 <어린아이의 처방전>에서 사소하게나마 창작 과정에서 힌트를 얻기를 바란다.

 

 

<어린아이의 처방전>은 작은 커튼으로 만든 정사각형의 방 안에서 진행되는 일종의 처방 놀이이다. 방 안에는 한 여자가 어린아이의 정신을 표방하며 앉아 있고, 관객은 <어린아이의 처방전>에 들어가기 전에 간단한 설문을 작성한다. 설문의 내용은 어떤 맛을 좋아하는가, 어디로 가보고 싶은가, 아픈 곳이 어디인가 등 굉장히 보편적인 것들이다. 여자는 관객의 설문을 토대로 대화를 이끌어내고, 관객의 무의식 저변에 있는 기억들을 함께 탐색한다. 중간중간 스티커로 된 을 처방해주는 연극적인행위 역시 잊지 않는다. 나의 경우 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묻길래, 감옥, 성매매업소, 마약 거래상 등 이 세상에서 타자화되고 있는 장소들에 가고 싶다고 대답했는데, 여자는 나를 안락한 의자에 앉히고, 레모네이드와 을 처방하고, 함께 누워 그 장소에 가자고 했다. 조명이 꺼지고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눈을 감고 내가 상상으로만 간직하고 있던 장소를 향해 기차를 탔다.

사실 <김토일의 개막식 무대>가 서울연극센터의 공간을 잘 활용하였던 것에 비하면, <어린아이의 처방전>은 공간 활용에 있어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대형 극장에서 1회 공연에 수백 관객들을 수용하는 것과 달리, 처방전 놀이에는 단 1명의 손님만이 함께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예약이 밀리면 늦게 온 손님은 처방 자체를 포기해야만 한다.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놀이인가! 1명의 손님이라도 더 끌어모으기 위해 마케팅에 여념이 없는 대부분의 연극과는 전혀 다른 노선이 아닌가! <아오병잉 페스티벌>이라는 프레임처럼, 그야말로 병맛잉여그 자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의 처방전>, 연극 본연의 성질을 건드리고, 가장 사소한 이야기들이 모여 기존 연극의 관습을 전복시킨 신선한 실험이었다. 우선 <어린아이의 처방전>주체 - 객체마냥 기존 연극에서 분리되어 있던 배우 - 관객의 경계를 허문다. 물론 현대의 포스트연극에서 이러한 시도는 이전에도 자주 있었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처방전>은 단순히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을 탈피하려는 시도에서 그치지 않고, ‘연극 - 놀이’ , ‘가상- 실재’, ‘어른-아이등 여러 의식의 경계를 함께 탈피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이러한 의식과 경계의 해체는 관객으로 하여금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무대를 <어린아이의 처방전>이 진행되는 작은 사각의 방 안에서 생생하게 구축하게끔 도와준다. 효율만을 극대화하려는 자본주의 사회는 어린아이를 주로 힘이 없고 발언권이 약한 존재로 묘사하지만, 처방전을 내려주는 <어린아이의 처방전> 속 여자아이의 말은 어떤 자기계발서나 멘토링보다도 강력한 주술이 된다. 여자아이는 관객의 의식 속 잔여와 여백들을 모두 불러내게 하고, 그 안에서 관객이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도록 도운다. 관객은 그 안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주체가 된다.

 

잉여와 잔여의 경계에서

지금까지 동시대의 대학로와 <아오병잉 페스티벌>, <김토일의 개막식 공연>, <어린아이의 처방전>에 대해 복기해보았다. 동시대의 대학로가 효율주의와 자본주의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기의 잃은 기표’, 실험정신과 창조정신이 결여된 침체된 공간으로 전락하고 있다면, <아오병잉 페스티벌>, <김토일 개막식 공연>, <어린아이의 처방전>은 그러한 침체된 공간에 새롭고 작은 물결을 일게 하는 어떤 움직임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무엇보다도 잉여스럽고’, ‘사소해보이는온갖 오브제들의 여백이 <아오병잉 페스티벌>에서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낸다. 물론 이러한 리듬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쓸모없고 잉여스러운 움직임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잉여대신 잔여라는 말로 이러한 움직임과 여백을 새로이 호명해보고 싶다. 거창하지도 않고 획기적이지도 않지만, ‘잉여로움에 대한 끝없는 사유와 고민이 우리 연극계와 대학로의 젊은이들에게 의미있는 잔여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