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러브스토리를 쓸 수 있을까? 작 정소정, 연출 적극

2014. 3. 4. 15:05Review

 

우리, 러브스토리를 쓸 수 있을까

<러브스토리를 쓸 수 있을까?>

작 정소정, 연출 적극

 

글_박다솔

 

여기, 자신에게 질문하는 작가가 있다. '나, 러브스토리를 쓸 수 있을까'라고. 정소정 작가의 <러브스토리를 쓸 수 있을까>는 작품 속 인물이 주인공이 아니라, 작가 스스로가 화자이면서 주인공이 되는 작품이다. 작가는 지금까지 써내려간 여러 작품들 중 <가을비>, <선물>, <뿔>, <모래섬>의 주제를 소재로 다페르튜토 스튜디오가 퍼포먼스(1부)로 풀어냈고, 하나의 작품 <홀린 날>을 영화(2부)로 보여준다. 그녀의 말들은 사랑(혹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불안하게 오간다. 사랑 얘기를 하는가 싶더니 이내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다. 그래서인지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배우는 공연 시작 전에 관객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러브스토리를 써보려고 했지만,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리고 이후에 펼쳐지는 장면들은 기괴하고 불안한 작품의 단상들에 가깝다. 그리고 묘하게 유쾌한. 과연 그녀가, 그들이, 우리가 러브스토리를 쓸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의 평범한 러브스토리를 방해하고 있는 것일까.

 

 

아프니까 청춘이다,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88만원 세대, 삼포(연애, 결혼, 출산의 포기)세대라는 덧없는 말로 쓰인 청춘(이라 쓰고 우리라고 부르는)은 시대의 암울에 갇혔다. 시대가 우리에게 우울을 요구한다. 너무 많은 죽음, 너무 많은 농성, 감당 할 수 없는 사회 구조, 진짜 같은 거짓말들이 판을 친다. 단어 그대로, 우리가 살아나가는 삶의 판을 정신없이 쳐댄다. 흔들리는 요람에서 수많은 명복을 빌다가 쉽게 잠들 수도 살아나갈 수도 없을 때,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속절없는 말에 쉽게 현혹당한다. 그러나 곧바로 알게 되는 사실. 사랑이 길을 걷다 삶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는 것. 그 때, 오래된 광고의 낡은 카피 하나를 생각해낸다.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하지만 쉽지 않다.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 믿었던 마지막 희망인 사랑도 삶에 저당 잡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맘껏 그냥 사랑하기에는, 사랑이 삶을 살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정소정 작가는 <가을비>를 통해 진실된 사랑을 방해하는 자를 살해하고, 사랑을 져버리고 삶에 실패하는 인물을 자살 시킨다. 사랑과 삶에 얽힌 다섯이 죽는다. 끝내 사랑을 이루는 사람은 없고, 사랑을 이루지 못해 죽는다. 죽어야 끝이 나는 이야기다. 적극 연출은 이 작품의 짧은 단상을 본인의 이전 작품 중 하나(원작: <유령의 집>)를 재구성 하여 보여준다. 무대를 옮겨 작은 방 안으로 관객들이 들어간다. 관객을 맞이하는 것은 찰리 채플린 가면을 쓴 사람 한 명. 경건하고 진지한 자세로 관객 중 몇을 정체모를 이 의식에 참여 시킨다. 관객 중 다섯 사람은 각각 최진실, 오드리 햅번, 김정일, 박정희, 마릴린 먼로의 가면을 쓰고 원형으로 둘러앉아 게임을 시작한다. '아이 엠 그라운드', 게임에 참여한 여섯 중 다섯이 죽어야만 끝이 나는 게임이다. 가면 속 망자는 다시 한 번 죽어야만 한다. 게임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다가 죽을 수도, 다른 사람의 이름을 잘못 불러서 죽을 수도 있고, 아무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는데도 죽을 수 있다. 자살과 타살, 우발사가 뒤섞인다. 그 날, 게임의 승자는 최진실이었다. 현실세계를 스스로 등 돌린 자가 이 게임에서 가장 살아나고자 노력했고, 그리하여 살아남았다. 죽어야 끝나는 게임은 죽어야만 끝나는 사랑 혹은 사랑하지 못해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묘하게 맞닿아 있다.

 

 

다음 장면인 <선물>은 작품에 등장하는 동화의 이야기다. 늘 웃는 남자가 여자에게 선물을 건넨다. 여자는 여러 번 선물을 거절하고, 자신의 선물만 건넨 뒤 사라진다. 아주 큰 선물 상자 안에는 커다란 알이 있고, 알 속에는 늙은 아기가 있다. 아기는 남자를 향해 "아빠"라 부른다. 여자가 웃는 남자에게 주고 간 것은 남자가 원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과오다. 웃는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가 건넨 비극적인 삶의 조각을 받아들이고 늙은 아기와 함께 살아간다. 웃는 남자와 늙은 아기를 연기하는 두 배우는 무대 공간이었던 갤러리에서 실제로 갤러리 밖으로 나선다. 유리문을 통해 진짜 현실 세계로 나가는 배우를 바라보는 이질감과 그 안에서 발생하는 유쾌함이 비극의 순간을 희화화 시킨다.

제4의 벽을 뚫고 현실로 진입한 배우들의 모습을 차단하면서 흰 블라인드가 창을 가린다. 그 위로 투사되는 영상은 잉그마르 베리만 감독의 영화 <산딸기>의 한 장면이다. 이 영화는 어느 노교수의 하루 여정을 담은 영화로, 죽음을 앞둔 노교수의 초현실적 꿈과 외로움을 보여준다. 이 공연에서 보여주는 4분가량의 영상은 꿈속에서 죽어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노교수의 허망하고 충격적인 표정이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는 늙어버린 교수의 모습은 정소정 작가가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삶의 허망함과 외로움의 표정을 짐작케 한다.

 

 

영화의 짧은 장면이 끝나면 거대한 뿔을 달고 한 남자가 나타난다. 유리창에 투사되는 영상은, 관객들이 앉아있는 갤러리 밖의 한낮의 모습이며 그 곳을 어슬렁거리는 거대한 뿔을 단 남자의 모습이다. 곧이어 거대한 뿔을 단 남자가 갤러리 안으로 들어온다. 영상과 현실, 그리고 환상성의 공간인 무대를 통해 '뿔'은 세계를 드나든다. 정소정 작가의 <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먹이사슬 구조의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발악하고 그곳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자는 죽게 된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도 여전히 뿔을 단 사슴의 환영으로 나타나 권력에 이용당할 뿐이다. 언젠가 사냥 당해야 하는 인간(뿔 단 사슴)은 처절하다. 이어서 배우는 <모래섬>에서 사회적 신분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가 모래가 되어버리고 마는 한 인간을 음악으로 연기한다. 벌거벗은 몸으로 밀가루와 청소기를 이용해 전자기타를 연주한다. 땅 위에 눕혀진 전자기타 위로 고운 밀가루 가루가 내려앉고 그 무게는 곧바로 음악이 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기타 위로 내려앉은 음악들을 빨아들이는 청소기와 그로 인해 소멸하는 음악소리도 생생하게 들려온다. 무언가 살아가고 사라지는 소리의 선명함을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존재의 소멸과 소강을 바라본다.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적극 연출은 정소정 작가의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주제들, 러브스토리가 진행되지 못하게 하는, 끝내 비극이 되어버리는 상황들에 대해 주목하고 아예 러브스토리를 쓰지 않고자 다짐한 것 같다. "러브스토리를 쓸 수 없을 것 같아서......"라고 솔직하게 말하던 배우의 말은 1부의 퍼포먼스를 모두 설명하고 있다.

2부는 작가의 작품 중 <홀린 날>을 영화화하여 상영한다.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퍼포먼스가 작품들의 주제와 짧은 단상들을 나열하여 이어가는 작업이었다면, 이 영화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죽음과 외로움의 정서를 전면에 드러낸다. 불륜남인 구경과 내연남인 정희, 구경의 아내인 태린과 연애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대식, 이 네 사람의 러브스토리다. 산기슭에서 외롭게 구경을 기다리던 정희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해 보이는 대식을 발견하고 우연히 듣게 된 그의 소원인 '연애 해보기'에 기꺼이 동참하며 외로움을 함께 나눈다. 대식은 구경이 불륜의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채용하여 동행한 남자다. 그리고 구경의 행적을 의심하던 태린이 남편을 미행하여 이곳에 찾아오지만 불륜의 심증만 있을 뿐 결정적 증거를 찾지 못한다. 다만, 어느 곳에서든 남편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만 받을 뿐이다. 결국 구경과 태린은 재회하고, 사랑을 쟁취하지 못한 구경과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는 태린이 격정적인 정사를 나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바라보는 정희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자신의 허망한 사랑을 비관한다. 대식은 이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네 사람 모두 공허한 사랑을 경험한다. 누구 하나 행복하지 못한 상태로 이 극은 끝을 향한다. 어떻게 하면, 네 사람 모두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극이 결말에 이를 때, 작가는 관객들에게 여러 선택지를 내민다. '어떻게 하면 모두가 행복한 러브스토리를 쓸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우발적인 사고로 인한 정희의 죽음, 자신의 사랑을 비관한 정희의 자살, 사랑에 실패한 대식의 자살, 서로의 외로움을 감싸는 정희와 대식. 이 여러 가지의 선택지 중 어떤 것이 러브스토리를 완성할 수 있을까. 결국 이 이야기는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사랑하고픈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 외로운 사람들이 사랑을 이루지 못했을 때, 선뜻 죽음이라는 선택지를 안긴다. 존재의 외로움을 채우는 사랑을 찾지 못했을 때, 삶을 지속시킬 수 있는 다른 이유가 없다는 듯이. 그래서 작가는 이 네 가지의 결말 중 어느 것 하나 확정적으로 관객들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관객에게 선택을 맡기며, 이 네 가지의 이야기 외에도 여러 상상을 할 수 있길, 그래서 행복한 러브스토리를 완성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이야기 한다.

꽤 엉성한 영화 연출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을 통해 확연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작가야말로 이 작품이 평범한 러브스토리가 되기를 가장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자꾸만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가 평범한 러브스토리를 꿈 꿀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하여. 존재의 외로움이 현재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에 관하여. 우리가 원하지 않더라도 품에 안게 되는 시대의 우울에 대하여. 그래서 작가는 다음 작품에서 '삼포세대(연애, 결혼, 출산의 포기)의 사랑 이야기를 적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묻는 것이다. "나, 러브스토리를 쓸 수 있을까"라고. 그래서 작가는 사랑을 얘기하면서 동시에 죽음을 얘기한다. 진짜 사랑을 할 수 없는 시대에, 차라리 죽음을 맞게 하는 것이다. 사랑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얘기하며 동시에 삶이 버거워 사랑할 수 없는 우리의 자화상을 그린다.

 

 

이 공연은 애초에 렉쳐 퍼포먼스와 인터렉티브 퍼포먼스가 결합된 공연이라 밝혔다. 그러나 공연은 <가을비>를 제외하고는 렉쳐에 가깝지도, 인터렉티브하지도 않다. 강연은 없고, 관객들과 접촉하지 않는다. 보여주는 장면들을 고스란히 바라볼 뿐. 작가는 <홀린 날>의 결말을 관객들과의 대화를 통해 결정하려고 했었지만, 여러 선택지를 보여주고 관객 스스로 결말을 결정 하는게 나을 것이라 판단했다고 말한다. 렉쳐와 인터렉티브라는 개념적인 말에 대한 잘못된 사용이 오히려 공연 자체를 퇴색되게 만들었음에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작가가 작품을 통해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 것, 청춘의 사랑과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이 작품들 전체를 관통한다. 사랑과 삶이 절대 분리될 수 없기에 자신이 러브스토리를 쓸 수 있겠냐는 작가의 질문은 곧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이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

러브스토리를 쓰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질문은 우리에게 향한다. 우리, 러브스토리를 쓸 수 있을까? 그리고 질문하며 소망하게 되는 것이다. 러브스토리를 쓸 수 있게 되기를. 죽지 않으면서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사진제공=안진수)

 필자_박다솔

 소개_예술경영을 공부했고, 공연 기획을 하고 있다. 혼자 읽고 혼자 쓰다가 누군가에게 그 즐거움을 들켰다. 들켰는데 기뻤다. 아름답고 쓸쓸한 것들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