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14 산울림 고전극장 <롤리타> - 무너진 남성의 위계

2014. 3. 5. 22:28Review

 

무너진 남성의 위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극단 작은신화 / 연출 정승현

 

글_이윤식

 

작품에 대해 말하기 전, 저와 이 공연을 같이 보기로 했던 동생에 대해 말씀 드려야겠네요. 썸녀냐고요? 글쎄요, 그냥 ‘아는 동생’이라고 해둡시다. 공연시작 30분 전까지 그 동생과 연락이 안 되는 겁니다. 초조했죠. 30분 전에 연락이 와서는 미안하다며, 이제 출발했다는 겁니다. 미리 공연시간을 알려줬음에도 꼭 이렇게 촉박하게 와야 하는지 짜증이 나기도 하고, 저와의 약속에 대해 무신경한 태도에 화도 났죠. 동생에겐 티켓은 매표소에 맡겨 놨으니 찾아서 들어오라고 카톡을 보냈습니다. 공연시작과 함께 핸드폰은 껐습니다. 공연이 시작됐습니다.

 

 

험버트 - 가부장적 남성의 추락

조금은 의기소침한 상태여서인지 <롤리타>에 나오는 험버트 박사에 몰입하게 되더군요. 제멋대로인 여자에게 휘둘리는 것 같아서요. 가부장적 위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점도 비슷하고요. 험버트는 철저히 가부장적 인물입니다. 부유한 아버지 밑에서 어머니 없이 자란 성장환경 탓이 클 것입니다. 험버트 험버트라는 그의 이름부터 얼마나 남성중심적입니까. 극중엔 이름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이름이 성(姓)과 똑같습니다. 험버트는 부계(父系)에서 물려받은 성을 또 다시 이름으로 지을 만큼 남성중심적인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 없이 자란 롤리타는 험버트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지녔습니다. 롤리타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 샬로트 헤이즈 부인인데, 대개 모녀관계는 부자관계처럼 수직적이지는 않나 봅니다. 시도 때도 없이 다투고, 험버트라는 한 남자를 두고 애정의 라이벌 구도(적어도 육체적으로는)를 형성할 정도로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이 소녀에게 남성은 의존의 대상이 아니라 호기심의 대상입니다.

서로 다른 성장환경은 험버트와 롤리타가 전혀 다른 애정관을 갖게 된 배경이 됩니다. 험버트는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사랑을 지향합니다. 유년시절 그는 첫사랑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합니다. 20여년 후 롤리타에게서 첫사랑과 같은 감정을 느낀 후엔, 이 소녀와도 그런 관계를 갖기 원하죠. 그런데 험버트의 사랑은 상대방을 혼자 소유한다는 가부장적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어쩌면 그가 헤이즈 부인으로 만족했다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헤이즈는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는 집안 가장 역할을 해왔지만 한편으론 ‘집안일을 결정해줄 남자’를 필요로 하는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롤리타는 부모세대와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녀는 남녀관계를 ‘게임’으로 여깁니다. 여름 캠프에서 조숙한 이성으로부터 이 ‘게임’을 배웠고, 험버트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를 유혹하고 거리낌없이 이 게임을 즐깁니다. 이 소녀는 가부장 전통에서 자유로운 셈이죠. 롤리타에 대한 험버트의 사랑은 이 지점부터 비극으로 나아갑니다. 관객들은 험버트와 롤리타가 사랑을 속삭이는 것보다 싸우는 것을 더 많이 보게 됩니다. 험버트의 집착에 지친 롤리타가 “아저씨가 원하는 건 내 몸이잖아요”라고 항변하자, 그는 “나는 네 모든 것을 원해. 어떻게 네 몸과 영혼을 따로 생각할 수 있겠어?”라고 되받아 칩니다. 롤리타에 대한 짝사랑은 결코 순탄하지 않습니다. 독점욕에 사로잡힌 그는 물리적, 경제적 수단을 이용하여 이 소녀를 통제합니다.

전통적 기준으로 보면 험버트는 롤리타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험버트는 성인 남성이고, 롤리타는어린 여성이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둘의 관계에서 정작 상처받는 것은 험버트입니다. 가부장적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소녀에게 이런 전통적 위계는 통하지 않습니다. 험버트는 그녀를 ‘숭배’하지만, 외간 남자와 쉽게 어울리는 모습에 애만 태우고 그녀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전전긍긍합니다.

롤리타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퀼티는 험버트와는 전혀 다른 남자입니다. 롤리타를 육체적으로 온전히 독점하고자 하는 험버트와 달리, 성불구인 퀼티에겐 애초에 그런 집착이란 없습니다. 롤리타처럼 그 역시 남성중심적 전통에서 자유롭습니다. 프랑스 문학 교수와 TV드라마 작가라는 직업은 이 둘의 차이를 극명하게 나타내죠. 요즘 표현을 사용한다면 전통적 ‘한국 남자’와 ‘초식남’ 정도라고 할 수 있겠네요.

결국 롤리타는 퀼티를 따라 도망가고 험버트의 사랑은 실패합니다. 3년 후, 또래 남자의 아내가 돼 버린 롤리타로부터 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받으면서 그 간 모든 정황을 알게 된 험버트는 퀼티를 찾아가 죽입니다. 그의 여정을 따라가니 피곤하기 그지 없습니다. ‘한국남자’로서 그에게 몰입이 되기 때문이겠죠.

 

 

롤리타– 무대에 선 성인 여배우

사실 공연 <롤리타>를 보고 싶었던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롤리타 콤플렉스’의 어원인 이 작품의 내용 자체가 궁금한 것이 하나라면, 이것을 어떤 식으로 공연예술로 표현했을까 하는 호기심이 다른 하나였습니다. 미성년자와의 성관계가 죄악시 되고, 아동 성범죄에 대해선 특히 민감한 사회 분위기에서 이런 작품이 어떻게 연극화 될 지가 무척 궁금했거든요. 물론 소설 <롤리타>가 이미 영화화된 바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은교> 같이 이야기 흐름 상 미성년자와의 성관계가 들어간 영화도 제작되었지만, 그것을 무대에서 어떤 식으로 표현할 지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더라구요.

저의 호기심은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아쉬움으로 바뀌었습니다. 낭독극이라니요! 너무도 쉬운 표현방법이라 맥이 풀렸습니다. 물론 이 공연에서 에로틱한 시각적 묘사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배우가 연기를 위해 옷을 벗어도 ‘누드연극’이라고 호들갑 떠는 우리나라에서 이 작품은 언론에 크게 회자되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민감한 장면을 어떤 식으로 풀어내는가 하는 연출에 대한 궁금증이 컸던 만큼, 이 작품이 낭독극이란 것을 알았을 땐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더군요. 성적 장면 표현에 상관없이 연출가는 처음부터 다른 목적으로 낭독극의 형태를 고안한 것인지 모르지만, 저는 왠지 낚인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롤리타 역을 맡은 그다지 앳돼 보이지 않는 성인 여성 배우를 보면서 12살의 소녀를 떠올리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내용이 민감할 수 있다 보니 캐스팅에 고민이 많았을 것 같네요. 실제 어린 배우를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여배우를 어리게 연출하는 것도 관객들을 불편하게 할 수 있죠. 이런저런 고민 끝에 평범한 20대 여성의 모습으로 롤리타를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막상 그래 놓고 보니 여배우를 보며 롤리타를 떠올리기 어려웠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배우의 모습을 완전히 무시하기 어렵잖아요. 어쩌면 남성 배우가 연기한 유년 시절 험버트의 첫사랑 소녀가 더 상상이 쉬웠는지 모르겠네요.

 

 

공연 중에는 아쉬움을 가지고 관람했지만, 영화 <롤리타>(1962)를 보면서 낭독극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영화에서는 원작이 갖는 분위기는 사라지고 서사 중심으로 작품이 전개됐기 때문입니다. 감독 스탠리 큐브릭이 원래 원작 의도를 살리기 보다는 자신의 시선으로 해석을 많이 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원작의 분위기가 사라진 것은 그보다는 매체의 성격 탓이 컸습니다. 이 공연도 일반적 연극 형식이었다면 원작이 갖는 섬세한 언어 표현이 서사의 흐름에 묻히기 쉬웠겠죠. 그러나 이 작품은 낭독 형식이었기 때문에 배우가 읽어주는 글에서 섬세한 문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80분이라는 짧은 공연 시간에 500페이지에 가까운 원작을 온전히 표현하는 것은 애초에 이 공연의 목적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배우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문장을 듣다 보면 ‘언젠 한번 원작을 읽어봐야겠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 거장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롤리타>(1962)중 한 장면

 

공연이 끝나고 주변을 둘러보니 역시 ‘동생’은 극장에 없었습니다. ‘삐쳐서 가버린 건가?’ 핸드폰을 켜니 전화를 했더군요. 조금은 미안한 마음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너무 늦어 극장에 안 들여보내줘서, 근처 옷가게에서 쇼핑을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무대 밖의 ‘롤리타’와 만났습니다. 아, 참고로 이 동생은 성인 여성입니다. 험버트 박사가 롤리타를 데리고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먹여주고 재워줬듯이, 저는 ‘동생’과 홍대 앞과 연남동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밥 사주고 차를 사주었네요. 험버트의 짝사랑이 애처로워 지는 것은 왜일까요.

 

 

 

*사진제공_월간 스토리씨

 필자_이윤식.

 소개_연대백수 오오오오~ 연대백수 오오오오~. 성대 나와 연대 앞에 사는 1인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