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뛰다 <바후차라마타>"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2014. 4. 12. 13:26Review

 

극단 뛰다 <바후차라마타>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남산예술센터

 

글_김해진

 

‘신(神)께서 주신 내 성별을 바꿀 수 없었다. 그래서 내 몸을 바꾸었다.’

공연을 보고 하룻밤을 자고 났더니 배우가 외쳤던 위의 내용이 떠올랐다. 인도의 어느 트렌스젠더의 목소리였다. 그것을 극단 뛰다의 배우가 무대에서 되살려냈다. 몸의 생식기가 성별을 결정짓지 않는 성소수자의 입장이 어떤 발견처럼 마음에 와 닿았다. 순간이었지만 몸 아닌 것보다는 몸을 바꾸는 것이 자신을 더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방식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게는 어떤 신선한 발견처럼 느껴졌다.

 

 

관객들은 30분 전에 여유롭게 입장할 수 있었다. 30분 전이라. 배우들이 여유롭게 이미 준비돼 있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무대에는 15개의 의자가 놓여 있고 바닥에는 격자무늬로 흰색 테이핑이 되어 있다. 정면 2층에는 악사들의 공간이 마련돼 있고 그 위에 제목이 투사돼 있다. 공연 중에 자막이 저기에 쏘일 모양이었다.

공연은 배요섭 연출이 은근슬쩍 무대에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연출은 관객 몇 명에게 마이크를 전하며 몇 가지 질문을 한다. ‘본인이 남자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내를 사랑하시나요. 혹시 여고를 다니셨나요. 학교에서 인기가 많은 여학생이었나요.’ 성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는지를 묻는 가벼운 몸풀기용 질문이랄까. 그러다 이내 객석에 앉아있던 한 남자가 무대에 나가 말하기 시작하면서 공연이 시작되었다. 객석에 섞여 앉아있었던 여러 명의 배우들이 자신 있게 일어나 무대로 나가기 시작했다. 몇몇은 인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바후차라마타(Bahuchara Mata)’는 인도의 성소수자 히즈라들이 섬기는 신으로 남성과 여성 그 가운데의 신성함을 상징한다고 한다. 극단 뛰다는 많은 신들을 섬기는 나라 인도에서 머물며 이 공연을 준비했다고 했다. 배요섭 연출은 공연 중간에 자주 연습과정과 또 과정 속에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담히 이야기한다. 공연의 중간 즈음에는 ‘남자, 여자, 여자 같은 남자, 남자 같은 여자, 여자 같은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 여자 같은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남자 같은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 남자 같은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맞는지 모르겠다. 헷갈린다.) 등의 구분을 쭉 말하는데 그 다양한 경우의 수가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관객들은 이런 많은 경우의 수가 있다는 것에, 또 연출이 그 경우들을 공부하고 있다는 것에 반응하며 감탄사를 내기도 했다. 이를테면 공연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 여자들이 아이크림을 네 번째 손가락으로 톡톡톡 바르는 것처럼 자신은 그렇게 못한다며 웃는 트렌스젠더 앤디.

• 남자의 몸을 가졌지만 여자인 이와 여자의 몸을 가졌지만 남자인 두 사람이 무용 수업에서 몸의 감각만으로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그럼 이런 경우는 남자 같은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 같은 남자...인 건가? 여자 같은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 같은 여자...인 건가? 말장난 같으니 그만 하자.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인데 남성호르몬이 남자보다 더 많이 나오는 이. 여자로서 살고 싶지만 그러질 못해 괴로워한다. 어릴 적 엄마가 예쁜 속옷을 사주셨던 기억을 가지고 있고 그때를 그리워한다.

• 인도에서 간성으로 태어나 히즈라 공동체에 들어갔으나 성폭행을 당했다며 절규하는 이.

• 트렌스젠더, 혹은 간성으로서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매춘을 해야 하는 현실을 이야기하는 이. 구걸은 싫다고 했다.

• 가족들에게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인정받기까지 긴 시간과 고통을 감내했던 이.

 

 

이밖에도 여러 이야기들이 더 있었다. 평소에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배우들이 실제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배우들의 목소리와 몸짓으로 고백하고 있었다. 연기이자 고백이었는데 모든 소리들이 합쳐져서 고음의 노래가 되는 듯이 느껴지던 때도 있었다.

배요섭 연출은 성의 여러 가지 형태에 대해 과학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살피기도 했다. 눈 뒤의 세포, 호르몬, 생식기의 유무, 유전자, 교육 여부 등을 언급했다. 물론 답은 없었고 학문이 현상을 범주화하는 것이 부질없고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은연중에 표현하고 있다고 나는 받아들였다.

나는 극단 뛰다가 긴 시간 동안 조사하고 공부하고 사람들과 교류하고 친해진 과정을 보고 있었다. 워크숍 공연 같기도 했고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연구서적을 펼치는 것 같기도 했다. 열린 형태인 동시에 미완성처럼 보이기도 했다. 배요섭 연출은 공연을 준비하던 어느 날 ‘지금 뭘 말하고 싶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연출은 공연의 일부가 되어(혹은 공연을 이끌며) 준비 중에 막혔던 지점까지도 솔직히 이야기한다. 그 얘기를 들려준 건 관객들을 무대 안쪽으로 이동시킨 후였다.

연출이 관객들에게 무대로 자리를 옮기길 청한 것은 관객들이 공연을 만든 사람들의 입장 혹은 더 나아가 성소수자들의 입장에 놓였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배우들이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입장이 되어 연기를 통해 그 삶을 살아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는 보는 위치만 바뀌었을 뿐 무대와 관객의 구분은 여전해 보였다. 한번 엉덩이를 떼었다 붙였기 때문인 건지 신화적인 움직임이 주를 이루는 이후의 공연은 다소 길게 느껴졌다.

 

 

공연 안으로 들여온 관객과의 대화 역시 관객의 적극적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져서 내 경우에는, 어쩐지 무대 한켠에 앉아 자신의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듯한 어느 연구원의 설문조사 대상자가 된 것 같아 예민해지기도 했다.

공연을 이러한 형식으로 만들었다는 데 어쩌겠나 싶으면서도, 어쩌면 극단 뛰다가 전하고 싶어하는(싶어할 지도 모르는) ‘인간 개별의 성 정체성이 삶과 관계를 이루는 여러 가지 방식’은 하나의 집중된 이야기 안으로 침잠해 들어갔을 때 관객과 더 긴밀히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의 소망은 그러했다.

그러나 나와는 다르게 몇몇의 관객들은 사려 깊고 열린 태도로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자신들의 의견을 이야기했다. 들으면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 여성 관객은 남자와 성관계를 맺는 것이 싫더란다. 근데 여자는 더 싫더란다.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게이나 레즈비언들 사이에서 오히려 이성애자인 자신이 인정받지 못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냥 서로 그런 구분 없이 서로를 배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기독교 신학을 공부했다는 한 남성 관객은 종교 안에서는 다양한 성의 형태가 ‘틀린’ 것으로 여겨지지만, 요새는 여러 다양한 이야기들을 접하게 되면서 자신의 주관과는 또 ‘다른’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고 말했다.

 

 

배우들은 관객들의 이야기에 화답하듯 자신들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었다.

“아직도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이야기들이다. 처음에는 트렌스젠더를 연기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어려웠다. 그건 그냥 잘 안되더라. 대신 그러한 상황에 놓여있는 어느 한 사람을 떠올리니 시작할 수 있게 됐다.”

“남자여서 자랑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또 여자여서 자랑스러울 것 같지도 않다.”

“남자냐, 여자냐, 또 다른 형태의 성정체성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싶을 때도 있다. 난 어떻게 하면 루이비똥을 가질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인데 말이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잠시 기록한 건 그것이 공연 <바후차라마타>의 일부이자 또 중요한 부분이어서다. 배우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누군가를 연기하면서 경험했을 ‘타인의 이야기’. 또 그 ‘타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관객. 그래서 이 사회 안에서 타자인 누군가가 더 이상 타자가 아니게 되는 찰나의 순간들. 이런 것들이 <바후차라마타>의 내용을 이루었다. 나는 무대쪽에 앉아 조명을 받으며 낯설고 소외된 느낌을 가지기도 했는데 이 글을 쓰면서 ‘입장(자리) 바꾸기’ 혹은 ‘그 사람이 되어보기’에 근거한 공연의 구조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공연이 빛났던 순간에 마음이 가 있다. 배우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먼 ‘저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까운 ‘이것’으로 만들어서 춤을 추거나 노래에 가깝게 목소리를 높일 때 나는 함께 즐거워졌다. 그때에는 여러 가지 구분을 말하지 않아도 굳이 자리를 옮기지 않아도 마음 속에서 경계가 사라졌다.

 

*사진제공_극단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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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_김해진 haejinwill@gmail.com

 소개_판단하기보다는 경험하기 위해 글을 쓴다. 공연비평과 희곡을 쓰고 있다. 늘 의심하고 늘 다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