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자기파괴와 고립의 쓰디쓴 감수성, 병맛/잉여

2014. 4. 14. 10:31Review

 

자기파괴와 고립의 쓰디쓴 감수성, 병맛/잉여

"2014 아오병잉 페스티벌"


글_이기석 

 

중심에서 주변부로 눈을 돌려보자. 배경은 곧 뚜렷한 형상이 되고 형상은 자연스레 희미한 배경이 된다. 결국 중심과 주변이란, 보고 있는 순간에 보이는 것 외의 것들을 보지 않으려는 고집 때문에 생기는 구분이 아닐까. 그렇다면 한 순간도 시각을 고정시켜서는 이 세계의 진정한 모습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비정상을 정상화하라는 명령을 자주 듣게 듣는다. 유용/무용, 합리/비합리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가 있고, 전체가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들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는 이 편향된 시각을 강조하는 외침을 들을 때마다 경계 밖으로 내몰린 존재들의 아우성을 함께 듣는다.

  오잉 콜렉티브가 기획한 '아오병잉 페스티벌'의 성격을 한 두 단어 혹은 한 문장으로 요약하긴 힘들 것 같다. 연극, 애니메이션, 영상작업 등 다양한 형식이 섞여있고 개별 작품의 맥락과 완성도도 제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그램 북 마지막 페이지에 담긴 선언("이 시대 무용한 예술을 하자")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용함"이다. 아오병잉 작품은 어떤 목적이나 의미를 구현하여 구획된 경계 내로 진입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영역을 스스로 구축하고 다양한 양상으로 산재한다. 비록 이 작품들에는 미적가치 혹은 교환가치가 결여되어 "쓸모"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효용과 합리성에 매몰된 인식이 자명한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이렇게 '아오병잉 페스티벌'은 보이는 것 외의 것들을 보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강한 시차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지금부터 소개할 세 작가의 작품은 모두 영상 작업이다. 작가들은 SNS나 유투브에 올릴만한 짧은 영상 안에 사적인 주제들을 담아냈다. 각각의 작품은 러닝타임이 짧고 뚜렷한 주제나 완결된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공통되는 흐름이 있다. 바로 유희성이다. 작가들은 이리저리 뚝딱뚝딱 생각나는 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가지고 장난을 건다. 때로는 변태스럽게, 병맛스럽게. 보는 이의 기대는 작품이 주는 장난스러움으로 인해 한 순간 허물어지지만, 그 안에는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잉여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 안지숙, 영상, 스틸컷

 

먼저 안지숙의 <영상>을 보자. 작가는 전산실에서 컴퓨터를 하나하나 켜고 끄는 행위를 빠르게 보여준다. 어두운 공안 내에서 점멸하는 모니터는 흡사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과도 같다. 곧 화이트 보드에 마커로 네이버와 구글 검색창을 그리더니 검색어를 하나하나 써넣는다. 곧이어 작가는 자신의 고양이와 함께 세계 여행을 떠난다.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여행 사진 위에 자신과 고양이의 사진을 합성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펼쳐진다. 안지숙 작가는 애인을 갖고자 하는 욕망을 고양이를 통해 충족해 보려한다. 하지만 이 즐거운 상상도 잠시. 작가는 자신의 애인(수컷 고양이)을 중성화 시켜야 한다며 슬퍼한다.

곧이어 나오는 영상은 좀 특별하다. 작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마스터 셰프광고를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식재료들이 여러 형상으로 변화한다. 자세히 보니 인스턴트 식품인 햇반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식재료들이다. 이것들은 별안간 화투가 되었다가 김밥이 되었다 마침내 마스터 셰프에 도전하라는 문구로 변하면서 영상은 마무리된다. 원래 작가는 마스터 셰프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패러디 영상을 하나 만들게 되었는데, 프로그램 제작진 쪽에서 이를 보고 홍보 영상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이 영상이 탄생되었다.

비록 한 작가가 만든 작품이지만, 위 두 작품 사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맥락은 없다. 그저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사적인 감정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가지고 장난을 칠 뿐이다.

 

▲ 양희원, <하드락 솔로몬>, 관련 이미지


이런 패러디를 이용한 유희적인 특성은 양희원의 <하드락 솔로몬>에서도 계속된다. 작품 속 주인공은 자신의 신체를 끊임없이 단련한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 넘는 아찔한 야마카시를 하고, 도끼로 단숨에 장작을 두 조각낸다. 그러고는 뒷산(사실 미술대학 작업장으로 보이는)에서 우악스럽게 톱으로 통나무를 자르며 홀로 자신과 싸운다. 영상은 이 모든 수련을 마친 주인공이 밤거리를 쓸쓸히 걸어가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이 영상에는 스포츠 브랜드와 아웃도어 의류 광고와 같이 자기 극복의지, 모험 그리고 도전이 가득하다. 하지만 광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브랜드 로고가 없다. 작가는 이 패러디를 통해 끊임없이 단련하여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야 하는 젊은 세대의 한숨을 은유하고 있는 듯하다

 

▲ 이승재, <러브스토리>, 2011


이승재의 <러브스토리>는 보다 더 진한 병맛을 보여준다. 늦은 밤 반 지하 자취방에 손님이 찾아온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와 문을 열어주는 이 모두 인형이다. 그것도 박스와 천을 붙여 만든 인형. 이 둘은 소주를 나눠 마시며 신세를 한탄한다. 애인도 없고 내일 해야할 일도 없다. 서서히 취해가는 남과 여. 아니 남자 인형과 여자인형. 이들은 이내 정사를 벌인다. 교성이 난무하지만 박스로 만들어진 인형인지라 움직임은 어색하고 너무도 둔하다. 뜨거운 정사 뒤에는 인형들이 나누는 사랑의 밀어와 함께 작품은 끝이 난다. 이 우스꽝스러운 인형 애니메이션(?)은 욕망을 실현하고 싶은 잉여들의 사랑 갈구를 병맛스럽게 보여준다 

미술은 억압과 관습에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해왔다. 뒤샹은 1914<표준정지장치 회로>에서 미터법이라는 척도의 자명성, 합리성에 대해 반문했다. 그는 더 나아가 <>에서 레디메이드와 미술작품 사이의 위계와 경계를 무너뜨려 예술과 삶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뒤샹을 비롯한 다다이스트들의 급진성은 워홀의 산화회화 그리고 안드레 세라노의 오줌예수 같은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작품들로 이어져 예술의 범주와 사회제도에 과감히 도전했다. 그렇다면 아오병잉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오프, 병맛, 잉여 감성이라는 것은 다다에서부터 당대 미술까지 안에 담긴 공통적인 속성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시대적 배경과 매체 활용은 다르지만 말이다. 안지숙, 양희원, 이승재 작가의 작품은 다소 우스꽝스럽고 자기 파괴적으로 보이지만, 바로 그 병맛을 무기로 고정관념, 지배형식을 전복하려 한다. 마치 보란 듯이 Nike가 아닌 Nice, Guess가 아닌 Geuss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오병잉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영상 작품들이 얼마나 관람객에게 자극을 주었을지 알 수 없다. 애당초 탈숙련, 탈형식, 비논리, 무형식, 무맥락, 변태스러움. 가벼움. 조롱, 유희로 가득한 오프-병맛-잉여 작품들에서 미적쾌를 얻어가기란 무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시장에서 무용한 예술이 주는 해방감은 분명 다양한 가치들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답답한 세상에 지쳤다면 아오병잉이 생산해 내는 무용성을 즐겨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