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제16회 정동진독립영화제 "당신에게, 정동진에서"

2014. 8. 14. 00:40Review

 

당신에게, 정동진에서

- 제16회 정동진독립영화제 ‘별이 지는 하늘, 영화가 뜨는 바다’ -

 

글_유햅쌀

#1. 태풍 ‘나크리’

기상청은 일주일 내내 태풍 ‘나크리’의 북상소식만을 전했습니다. ‘나크리’는 캄보디아에서 피어나는 꽃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 꽃의 얼굴을 모릅니다. 꽃, 얼굴 모를 꽃, 꽃 이름을 가진 태풍, 비켜가는 바람, 그리고, 얼굴 모를 당신에게.

당신은 모를 테지요. 태풍, 한여름을 알리는 드센 바람, 그것이 나를 불안에 떨게 했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버텨줘요.’ 속으로 얼마나 바라고 바랐는지. 버틴다는 것, 그것은 언젠가는 만날 당신에 대한 어떤 기다림이나, 미래의 좋은 일을 조심스레 점쳐보는 설렘과 같은 그런 속성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말이지 눈앞의 현실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 와장창 깨어져 버릴 위태로운 것임을, 극미한 작용과 반작용의 힘으로 겨우겨우 버티는 저기 저 콘크리트에 피어난 이름 모를 풀 같은 것임을, 아직 없는 당신은 알는지.

태풍은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그렇게 정동진으로 출발하고 말았습니다.

 

▲제16회 정동진 독립영화제 공식 포스터

 

#2. 정동진

처음으로 정동진에 갔던 날을 기억합니다. SBS 드라마 <모래시계>를 전국적으로 재방송했던 해, 그해 여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차는 너무나도 느렸고, 여름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푹푹 더웠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낭만을 이 바닷가에 심어놓고는, 더는 낭만을 낭만답게 지켜가지 못했습니다. 그때, 그 여름, 기차에서 내렸을 때 눈앞에 펼쳐진 요상스러운 풍광에, 어린 낭만은 사뭇 당황했고, 바다는 사르륵 울고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몇 번 나는 정동진에 갔었습니다. 바다는 여전히 슬퍼 보였습니다. 오직 허울만 남은 괴상한 모래시계, 바글바글하게 들어찬 사람들이 두 손 모아 비는 새해소망, 꽉 들어찬 모텔들, 항로를 잃고 육지 위로 우뚝 올라온 크루즈 선, 나는 그런 것들이 미웠습니다.

그리고 2014년 8월, 나는 다시 정동진으로 떠나왔습니다. 본격 휴가철에 도로는 사정없이 막혔고 강릉 터미널의 습기는 대단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흐르는 땀, 옷이 가득 머금은 습기, 이런 것들이 몹시 찝찝해 영화제 가기를 주저했던 그 날,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카메라 따위에 담기지도 않는 진실로 아름답고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쌍무지개를 보았습니다. 그것이 나를 정말이지 기쁘게 했습니다. 그것은 길 잃은 여행자에게만 보이는 사랑스러운 선물이 아니라 서울 사는 사람들에게도 보였던 유독 아름다운 올해 여름 날씨의 한 자락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지만 말입니다.

청량한 소녀의 마음으로 나는, 파아랗고 드넓은 바다를 지나, 정동진에서 ‘우산살소녀’를 만났습니다. 등에 커다란 가방을 메고 어딘가로 씩씩하게 걸어가는 ‘우산살소녀’를 보신 적이 있다면, 당신은 한 번이라도 ‘정동진독립영화제’의 포스터가 붙어 있는 어딘가를 스쳐 갔을 것입니다. 요즘 초등학교 운동장들은 정말 좁디좁아서 도대체 저곳에서 축구라도 할 수 있나 싶지만, 우산살소녀가 반기는 ‘정동진 초등학교’ 운동장은 동해의 그것만큼이나 무척 드넓었습니다. 이날은 태풍을 예감하는 얇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지만, 사람들은 따뜻했고 모든 것이 평화로운 여름밤, 정동진독립영화제의 이튿날이었습니다.

 

▲제16회 정동진 독립영화제 축제 마스코트 "우산살 소녀"  (출처_축제 홈페이지)

 

플라스틱 의자에 옹기종기 앉아, 투명 모기장에, 텐트에, 풀밭에 누워 어둠을 암전 삼아 커다란 천막 스크린에 프로젝터가 뿜어대는 영화를 보고 사랑을 확인하고, 수다를 떨고, 다시 영화를 보고, 깔깔 웃기도 하다가 울기도 하고, 뒹굴고, 그렇게 함께 영화를 보는 초등학교이자 축제의 공간이자 영화관인 곳이 바로 ‘정동진 초등학교’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당신에게, 우리 정동진독립영화제에 함께 가보자, 고, 그렇게 하자고 청해봅니다. 돌고 돌아 내뱉은 이 길고 지루한 제안에 당신이 응답해 주실는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제16회 정동진 독립영화제, 스크린을 향해 이미지를 투사하는 영사기 (사진=유햅쌀)

 

#3. <이름들>

올해 나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지겹다고 써댔습니다. 혼자인 나는 누군가와 같이한다는 감각을 잊은 지 오래였습니다. 울지도 못했습니다. 메마르고 무뚝뚝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어떻게든 누가 나를 바늘로 콕하고 찔러주기를, 아니면 마음속 수도꼭지라도 돌려주기를, 버튼이라도 눌러주기를, 제발 좀 어떻게 좀 해주기를 바라고 바라면서, 나는 무재미, 그것이 나의 전부인 것 마냥, 나는 권태롭고 재미없는 인간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딱 한 번 무너져 내린 순간이 있다고 당신께 고백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내가 굳이 정동진에 가야 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보았을지, 보았다면 좋았을 텐데, 작년에 <이름들>이라는 아주 짧고 담담한 영화 한 편을 나는 보았습니다. 나는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배경으로 흘러가는 시를 들으면서,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내색할 줄을 모르는 재미없는 나는 영화에 나오는 시인 현철이 쓴 그 이름들을 들으면서, ‘누나/ 나는 무서워’라는 아주 짧고 일상적인 시구에 그대로 펑펑 쏟아내고 말았습니다. 젊은 시인 현철이 부르는 명사의 이름들, 버틴다는 것, 버틴다는 것, 버틴다는 것. 무엇을 위해 버티는지 정제된 언어로 잘 설명할 수 없는 나는, 무언가가 하고 싶어서 이렇게 차곡차곡 쌓인 내 앞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나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말, 그 말을 뱉어내는 영화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시인 현철을 다시 만나기 위해, 정동진독립영화제가 열리는 정동진으로 떠나 온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정동진에서 다시 <이름들>을 조금은 특별하게 만났습니다. 영화 <이름들>을 만들 때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는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쓴 박준 시인과 함께 말입니다. 영화가 끝난 후 그는 나지막한 시인의 목소리로 자신의 시집 <환절기>를 읽어주었고, 영화는 반짝였습니다.

 

 ▲제16회 정동진 독립영화제, 영화가 시작하기 전 오프닝 영상 (사진=유햅쌀)

 

그 날 나는 <이름들> 말고도 사랑스러운 영화를 여럿 만났습니다. 윤가은 감독의 <콩나물>과, 김진유 감독의 <높이뛰기>, 박영주 감독의 <소녀 배달부> 같은 작품은 동심의 세계를 그린다는 것, 어른의 눈으로는 이해 불가능한 세계를 바라보는 다른 시선에 대해 그린다는 것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스크린에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영화였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멋진 선배가 나오는 <9월이 지나면>도, <어젯밤에 연희가 날 더듬은 것 같은데>나 <씨름> 같은 때로는 귀엽고 때로는 역동적인 애니메이션도 함께 보니 더욱 즐거운 영화였습니다.

특히, 오는 8월 21일에 개봉하는 우문기 감독의 <족구왕>은 ‘영화를 본다는 어떤 행위’에 관하여 깊게 생각하게 해 주는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코미디성장만화의 흐름과 모양새를 두루 갖춘, 슈퍼 복학생 히어로가 출몰하는, 정말이지 사랑스럽고 시종일관 즐거운 영화 <족구왕>은 어쩌면 함께 본다는 것만으로도 서사의 결여나 캐릭터의 부족한 층위를 메워주는 영화입니다. 복학생이 오그라들지만 ‘킹왕짱 멋찐’ 멘트를 사랑하는 여주인공 안나에게 날려댈 때의 그 설렘과 떨림, 복학생이 하늘 높이 공을 차올릴 때의 짜릿함, 족구에는 쓸모없을 것 같았던 캐릭터 미래가 헤딩을 날릴 때의 통쾌함, 그런 것들은 어두컴컴하고 조용한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를 볼 때에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옆에 있는 사람과 같이 웃고 떠들고 박수쳐야만 나올 수 있는 함께 한다는 마음을 담은 사랑스러운 감각들이기에, 나는 정동진에서 이 영화를 함께 본 것을 정말 사랑스러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싶습니다.

 

 ▲제16회 정동진 독립영화제에 출품/참여한 감독들과 배우들의 무대(?)인사 (사진=유햅쌀)   

 

 #4. ‘쑥불원정대’와 ‘땡그랑 동전상’

사실 처음 나는 이미 정동진에서 상영하는 영화들 중에 많은 영화들을 다른 영화제에서 만나보았기 때문에 정동진에 가지 않겠다는 어쩌면 이기적이고 설고 어설픈 판단을 내린 바 있습니다. 섣부른 판단을 뒤로하고 영화제를 찾은 나는, 올여름 다시는 없을 사랑스러운 순간들을 정동진에서 여럿 만났습니다. 당신께 내 온 마음을 담아 이 순간들을 전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정동진독립영화제는 영화제 시작 전 ‘쑥불원정대’를 조직합니다. 여름휴가의 피크에 여는 축제이니만큼, 모기들이 득실대는 여름밤에 그것도 바닷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만큼, 모기떼는 정말이지 귀찮은 무찔러야 할 대상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리하여 정동진독립영화제를 여는 강릉씨네마테끄 회원들은 모기퇴치에 그만이라는 약숙을 직접 캐어 영화제 상영공간에 어마어마한 쑥불을 피워놓고는 합니다. 쑥불의 향, 연기, 그런 것들이 관객을 지키려는 무척 강직한 시도이자 원정의 절대 목표입니다.

 

▲제16회 정동진 독립영화제 땡그랑 동전상 소개 (출처_축제 홈페이지)

 

무료 상영을 원칙으로 하는 정동진독립영화제에서는 “세계 최초(?) 현금박치기 관객상”인 ‘땡그랑 동전상’을 운영합니다. 관객들이 당일 상영작 중 마음에 드는 작품에 투표하면, 커다란 통에 가장 많은 동전이 담긴 상영작이 상을 받게 되는 수줍은 관객상입니다. 올해는 ‘땡그랑 동전상’을 시작한 이래로 역대 최고 금액을 달성했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정동진독립영화제에는 정동진의 엽서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보낼 수 있는 ‘정동진 별밤 우체국’이나 독립영화인들이 점심도시락을 직접 만들어 배식하는 ‘기분 좋은 밥상’, 바닷가에서, 정동진 초등학교 강당에서 함께 어울려 노는 ‘인디파워눈/나잇’ 등의 행사가 매해 마련되어 있습니다.

 

 ▲제16회 정동진 독립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해질녘, 정동 초등학교(사진=유햅쌀)

 

#5. 이토록 사랑스러운 여름, 그리고, 함께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함께하는 것이 몹시 서투른 사람입니다. 그간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온전히 두뇌만을 사용하는 행위이지 몸과 마음까지 동원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그렇게 믿어오기도 했습니다. 영화관에서의 예의 없는 관람 행위를 극도로 싫어하는 나는 언제부턴가 사람이 없는 조조나 심야 시간대를 이용해 영화를 보고는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영화는 혼자 보는 것이라고, 영화관에서 시끄럽게 떠들기나 하고 핸드폰을 켜는 저 예의 없는 인간들을 보라고, 영화를 보는 행위를 마치 정신만이 관여하는 경건하기 그지없는 행위로 치부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동진에서 나는 영화를 보는 다른 방법을 배웠습니다. 태초부터 축제라는 것은, 우리가 한 데 모여 한 판 즐기는 것, 함께 만나 함께 만나 무엇인가를 위반하는 것, 즐거운 난장, 일상 밖의 놀이이자 유희적 혼돈임을, 그것이 영화라는 것 앞에서 결코 숙연해지거나 경건해지거나 할 수 없는 축제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나는, 아니 우리는, 정동진에서 누워서, 앉아서, 무언가를 먹고 마시고, 나지막이 수다를 떨면서, 웃고 울고 손뼉 치며 그렇게 영화를 보았습니다. 어쩌면 이 경험은 일 년 중에 딱 한 번 유일하게 허락된 색다른 영화 관람이라는 점에서 정말로 독특하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경험일지도 모릅니다.

정동진의 사랑스러움을 지금 당신께 이렇게 두서없이 전해봅니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여름, 다음에는 꼭 당신과 함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만 총총.

정동진에서 당신께, 유햅쌀 드림.

 

 ▲제16회 정동진 독립영화제를 관람하고 있는 관객들 (출처_축제 홈페이지)

 

*사진출처_1,2,6,8 (축제 홈페이지) 3,4,5,7 (사진=유햅쌀) 

**정동진 독립영화제 홈페이지 바로가기 >>> http://www.jiff.co.kr/

*** 지난 인디언밥 "정동진 영화제" 기사 바로가기 >>>  http://indienbob.tistory.com/607

 

필자_유햅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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