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14 공장의 불빛-극장집회 “예술 하는 투쟁 하는 예술”

2014. 8. 19. 22:15Review

 

제16회 서울변방연극제

예술 하는 투쟁 하는 예술”

<2014 공장의 불빛-극장집회>

 

글_권기예

 

공장의 불빛(79) 녹화 영상 화면 (출처: http://blog.naver.com/mtfestival/220049614343)

 

70년대 노동탄압의 대표적 사례인 ‘동일방직 사건’을 모티프로 연극과 음악, 굿과 뮤지컬을 혼용한 김민기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78)”은 이듬해 ‘한두레’에 의해 공연되었고 이후 정재일의 리메이크 앨범 “공장의 불빛(04)”으로 재조명 되고 또다시 이번 제 16회 서울 변방연극제에서 7월 16,17일 양일간 오후 8시에 김민정X무브먼트 당당의 <2014 공장의 불빛-극장집회>로 만나 볼 수 있었다.

 

공장의 불빛(04) 리메이크 앨범(출처: http://blog.daum.net/pilgrimfortruth/213)

 

나는 공장의 불빛 중 정재일의 작업을 가장 먼저 접했다. 우연히 접하게 된 그의 사운드는 섹시했다. 처음엔 이 곡이 원곡인 줄 알고 “흩어지면 죽는다”던 투쟁가가 이렇게 세련될 수도 있어? 하며 그 신선함에 몇 번이고 다시 들었다. 가사가 옛것 같긴 했지만 노동자의 처지를 이해하는 노래는 ‘사계’ 밖에 없는 줄 알았더니 이런 노래도 있구나 하며 새로운 세상을 만난 듯 했다. 후에 김민기 아저씨의 원곡을 접하게 되었고 이 분의 노래라서 아픈 데를 가만히 짚어내는 가사가 나올 수 있었구나 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정재일의 공장의 불빛을 압도적인 맛(?)으로 들었다면,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은 어쩐지 귀엽고 다정한 맛(?)으로 듣는다. 가끔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섬뜩한 가사에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두 곡을 부분부분 비교하며 듣는 나름의 재미도 있다. 특히 정재일의 앨범 ‘야근’ 부분에서 옥이의 목소리는 내 주변의 구체적인 누군가를 떠올리며 탄식 하게 할 만큼 낭창낭창함이 압권이다. 원곡과 리메이크 곡에 대한 관심과 이전의 작업들과는 어떤 다른 맛?이 있을지 어떤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감으로 공연장을 찾았다.

 

공장의 불빛(78) 원본 테이프(출처: http://blog.daum.net/pilgrimfortruth/213)

 

공장의 불빛을 실연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두근거리는 일이었으나. 원곡의 가사를 찬찬히 읽어보면 예나 지금이나 현실에서 별반 변한 것이 없다. 옛 문화를 회상하는 것이 아닌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 참 아프다. 이런 아픔이 공연을 비장하게 만들었거나 비쟝하게 만든 것 같기도 하다.

  

<2014 공장의 불빛-극장집회> 공연사진 (사진제공_2014 서울변방연극제)

 

-공간연출

문화역 서울 284 RTO 공연장의 특성상 폐(廢)공장 같은 내부를 연출하고 있었다. 관객석은 문화제에 참석하면 쉬이 볼 수 있는 - 막걸리 냄새 섞인 사용감이 확연한 몇 번이고 말아뒀다 폈다한 흔적이 역력한 은박 포장재의 대체물로 - 사용감 없는 은박 포장재가 깔려 있었다. 그 뒤 연기자 대기석에는 구호들이 적힌 피켓들이 바닥에 깔려있는 침낭을 살짝 가리며 세워져 있고 벽에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무대 뒤에 보이는 영상에는 <공장의 불빛> 초연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원본 영상에 네온 색감을 살짝 덧입혀 상당히 마음에 드는 이미지가 되었다. 두고두고 다시 보고 싶은 영상이다.

 

관객석과 연기자 대기석 사진_권기예

 

극장 집회는 예전의 <공장의 불빛>과 최근 우리의 현실에서 일어났던, 혹은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삽입하여 성실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극전반의 흐름이 섬세하게 연결되지는 않았다. 원곡 또는 극에서 느껴지는 뭉클하게(마음의 힘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무언가를 자연스럽게 느낄 수가 없었다.

연극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진지함, 긴장감, 고조된 기운, 비장한 느낌을 유지하였고, 공연 중간중간 힘을 내어 투쟁하라고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도리어 그게 힘을 내야만 하는 현실을 암담하게 느끼게 한 것 같다. 특히 맨 앞좌석에서 관람해서 그런지 계속된 지나친 각성(覺醒)상태에서도 거듭 강조하는 모습을 접하다 보니 도리어 내 힘이 부친다고 해야 할까... 무대와 객석 간의 거리가 조금 더 확보 되었다면 또 달랐을 것이다. 음반의 경우 한층 걸러서 기록된 것들을 듣는 것인데 반해, 공연의 경우 상황을 직접 마주하는 것이다 보니 극적(劇的)인 표현들이 완충 없이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2014 공장의 불빛-극장집회> 공연사진 (사진제공_2014 서울변방연극제)

 

-대사와 노랫말/ 극중 인물/ 안무

물리적인 거리 차이가 아니더라도, 힘이 들었던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원곡에서는 감정의 요소가 모두 노래 안에 포함 되어있고, 거의 모든 대사는 노랫말이 되어 함께 흐른다. 반면, 이번 극은 음악의 연속선상에서 노랫말을 부르는 방법이 아니라, 노래는 끊어두고 연극으로 대사를 전달하는 장면들과 인터뷰 영상이 종종 삽입 되었다. 그 장면들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코오롱 해고자 사태, 쌍용 자동차 문제, 홍대청소노동자의 투쟁 현장 이야기와 김진숙 지도위원, 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의 글을 대역인 연기자로 재현 한 것이었다. 하나하나의 장면에 몰입할 수는 있었지만, 그 사례들이 유기적인 흐름을 만들고 있다고 보기 어려웠고 공연 전반의 흐름상 장면들의 삽입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원곡은 구체적인 사례를 언급하지 않고 노동현장에 있을법한 캐릭터를 극 중 인물로 설정하고 있다. 공연 중에 연기자들이 실제 인물을 ‘나는 누구입니다’ 하고 소개했었는데 굳이 소개 하지 않고 연기했더라도 어떤 구체적인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고, 공연 전에 나누어 주었던 진행 순서에 기록 했던 것으로 소개는 충분하지 않았을까, 이번 극이 삽입했던 장면들을 좀 더 원곡의 형식과 어울리게 녹여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반면 덩실덩실하니 탈춤이 연상되어 익살스럽고 귀여운 원극의 몸짓은 이번 공연에서 홍대 청소노동자 아주머니들을 재현하는 몸짓과 닮아있었다. 무브먼트 당당의 춤 [소외]는 여러 명의 남성안무가가 제자리에서 느린 속도로 자신의 신체부위를 지목하며 움직이다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각자가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춤이었다. 이 춤은 노동자가 각자의 근무지에서 거의 같은 동작으로 8~12시간씩 일할 때 주로 사용하고 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아파오는 각자의 신체 부위를 지목하는 듯 한 안무였는데, 공장의 불빛 초연 영상에서 봤던 ‘사이렌’ 직전과 ‘야근’에서의 공장에서 일하는 반복적인 연기자들의 몸짓(안무:채희완)을 떠올리게 했다. 

  

<2014 공장의 불빛-극장집회> 공연사진 (사진제공_2014 서울변방연극제)

 

-비장함을 흉내 내는 비쟝함

공연의 내용이 현실에 있는 구체적 실례들이다 보니, 감정적으로 작업과 현실을 구분 짓기 어려웠던 문제가 하나의 작업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날것의 현실을 그대로 마주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고된 부분이 있었다. 이런 현실과 작업의 경계가 모호한 점이 변방연극제의 취지에 부합하는 것 같다. 허나 그와는 미묘하게 다른 지점을 지적하자면, 현실이 공연이 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라 투쟁 현장을 작업화 하려 할 때 누구나 쉽게 떠올릴수 있는 일차원적인 감정으로 심각하게 묘사된 것에 대한 거부감일 것이다.

이한열 박물관에서 있었던 이택광의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 출간기념회에서 그의 20대는 시위하다 죽는 것이 꿈이었다는 발언을 들었다. 그 발언과 함께 투사(鬪士)는 어떤 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때의 태도를 비장미로 볼 수 있다며 비장함을 가장한 구태의연한 정형성이 하나의 장르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에 지지를 얻지 못한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기준이 모호하긴 해도 나는 굳이 이것을 비장(자신에게 일어난 -혹은 자신과 동일시 한- 어떤 사건에서 결단을 내린 후 행동을 취할 때 느껴지는 것: 슬프면서도 그 감정을 억눌러 씩씩하고 장하다.)과 비쟝(비장함을 가장한 것. 흉내 내는 비쟝함) 으로 구분하겠다. ‘비쟝’ 의 예시로는 이번 극장집회공연에서 관객들, 집회 참여자들로 하여금 감정을 강요하는 듯 했던 지나치게 격앙되어있었던 연기가 떠올랐다.

 

<2014 공장의 불빛-극장집회> 공연사진 (사진제공_2014 서울변방연극제)

 

 지나치게 비장한 집회와 투쟁은 죽은 자들의 넋을 온전히 기리지도 못한 채 반복되어 일어나는 사건들로 인해 역사 속에 묻혀가고 있다. 지금은 변절(?) 했지만 당시 날카로웠던 시인 김지하의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명령을 통해서인지, 원곡 ‘두어라 가자’ 부분의 “죽지는 말고 힘내”라는 가사 덕분인지 목숨을 걸며 강행해 왔던 투쟁방식은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인해 무던히 바뀌어 왔다.

촛불을 들고, 극 중 소개된 홍대 청소 노동자들의 투쟁가 ‘내 나이가 어때서’ 처럼 유행가의 가사를 바꿔 부르고, 춤을 추거나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활동가들이 만든 ‘강정스타일’ 과 같은 뮤직비디오, 스스로 ‘콜밴’ 이라는 밴드를 만들어 공연하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다큐멘터리 연극을 만들며 연대하는 진동젤리, 현장의 임시거처에 그림을 그리거나 걸개 그림을 제작하고 뜨개질을 해서 이어붙이는 시각예술가들, 농성장에서 삶은 계란을 전국에 나누어 가며 진행되는 코오롱 불매운동, 연대원정을 가는 희망버스 등 현실의 투쟁방식은 비장함에 유쾌함을 입었다.

물론 투쟁이 신나는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투쟁에 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비장한 상태를 강조하기 보다는 잘못된 것을 바꾸기 위해 스스로 행하는 움직임에 사실을 전달하되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의 절실함, 길어질 싸움을 견딜 만한 방식으로 바꾸어 보려는 노력이 유쾌함으로 승화된 것 일터일 것이다.

공연구성은 위와 같은 투쟁방식의 장면을 깨알같이 모아서 재현해냈음에도 불구하고, 극 전반을 관통하는 심각함, 무거운 공기, 격앙된 목소리, 과장된 행동 등이 여지없이 드러났고, 이는 어떤 관객들에게는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현실은 비장함을 내포하지만, 공연은 비장함을 강조하였다. 이런 비쟝함이 공연에 대한 인상을 좌우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이번 작품은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고, “기죽지 말고 힘내”서 투쟁하라는 원곡의 취지와는 부합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원극이 지니고 있는 형식상의 실험이나 분위기, 매력을 잘 살리지는 못했다고 생각된다.

 

<2014 공장의 불빛-극장집회> 공연사진 (사진제공_2014 서울변방연극제)

 

-예술가들이 배우는 투쟁 매뉴얼?

덧붙여 또 다른 불편한 지점도 있다. 이번 <2014 공장의 불빛- 극장집회 작품소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노동자들의 투쟁 매뉴얼을 예술가들이 다시 배우는 자리이기도 하다.”는 부분이다. 투쟁 매뉴얼을 전할 대상을 예술가로 상정한 것이 의아했다. 이미 현장에서의 비장한 투쟁방식에 유쾌함을 덧입히는데 일조하고 있는 예술가들이 공연장에서 투쟁 매뉴얼을 복습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고민 끝에 예술인 관객들이 매뉴얼을 배운다는 것이 내포하는 두 가지 의미를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이미 존재하는 투쟁방식을 참고하여 새로운 투쟁의 방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기존의 매뉴얼에서 제시된 몇 가지 고안된 방식은 결이 다른 여러 상황에 바로 적용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간 해왔던 투쟁방식을 참고 해서 쟁취에 도움이 될 만한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이 “주어진 환경을 읽고 그것을 표현”하는 예술의 방식은 각자의 지점에서 투쟁해 온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많은 이들과 연대할 수 있는 새로운 장을 마련하는 방식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을 이야기 하는 예술. 현실 알리기, 입장 동의, 마음 나누기, “자신이 좋아하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는 연대”. 무척 중요한 말이고 지속되어야 하는 실천임에 틀림없다. 여러 사람들의 실천 덕분에 노동의 현실을 이야기 하는 예술을 많이 찾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예술의 현실은 어떤가.

두 번째는 예술인들이 자신의 일에 투쟁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번 변방연극제에서 예술가 입장료는 학생보다 낮은 특가인 1만원으로 책정 되어있었다. (“입장료: 일반인 2만원/ 학생 1만 5천원/ 예술가 1만원”) 현장에서는 굳이 내가 예술가임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고마운 일이지만 어쩐지 짠...한 일만원의 입장료. 이는 예술가로 살아가는 거의 모든 이들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물론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투쟁하라는 즉각적인 연결이 아니다. 최고은법으로 시행된 예술인 복지법에 대해 꼭 필요한 제도인가 하는 여타의 논의들을 놓고 고민해야 하고, 예술인이냐 아니냐를 결정할 기준을 놓고 고민해야 한다. 재능기부라는 명목 하에 예술인의 노동은 탈취해도 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인식을 놓고도 투쟁해야 한다. 결국 사회를 향한 투쟁 매뉴얼은 예술계와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매뉴얼로는 익힐 수 없지만 거의 모든 투쟁의 중심에는 자신의 위치 지어짐과 타인이 나를 대하는 태도의 시정을 촉구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이처럼 예술인들 또한 스스로가 처해 있는 위치를 돌보아주길 바란다. 우리 조금은 비장해 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로 예술을 할 필요가 있다. 

 

 필자_권기예

 소개_미생? 천국이? <미술 생산자 모임>과 <미술 소비자 모임>에 참여. 저생산 과소비 반성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