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판소리만들기 자 - 판소리투나잍 신승철·김미림 <민요>

2014. 10. 16. 11:36Review

 

노래의 의미를 생각하며

-판소리투나잍 신승철·김미림 <민요>

 

글_율

 

가끔 노래가 진정으로 힘을 가지는 순간은 어떤 때일지 생각한다. 진정으로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의 성대를 통해 세상으로 터져 나오는 순간일까, 혹은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불리어져서 전해지는 순간들일까 등의 생각들을 말이다. 물론 의미 없는 생각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노래는 ‘누구에게 불리느냐’의 문제 이전에, 불리는 것 자체가 그것의 존재 의미이자 목적인 셈이니까. 하지만 ‘고음병’이라는 말이 꽤나 관습적인 표현이 되고, 오디션 프로그램이 범람하면서 시청자들 스스로가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과 못 부르는 사람을 분류하는 오늘이다. 그런 오늘들 속에서, 뭇사람들에게 널리 불리어지기만 하는 노래가 옛날과 같은 힘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오늘날, 노래가 진정으로 힘을 가지는 순간은 과연 언제일까.

 

▲ 판소리투나잍<민요>@이리카페 (출처_판소리만들기 자 페이스북 페이지)

 

판소리투나잍, <민요>

지난 10월 5일, 이리카페에서 열렸던 ‘판소리투나잍’ 공연 중 신승태와 김미림이 선보인 <민요> 공연을 보고 왔다. 공연장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듯 따뜻하고, 온화했고, 조금은 소란스러웠다. 판이 벌어지기에 좋은 분위기였다. 분위기만큼이나 말랑말랑한, 입장할 때 나눠준 쑥떡을 손 안에서 가만히 굴리며 나는 다시 한 번 노래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민요는 민중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며 퍼지고 전승되던 노래들을 통틀어서 일컫는 말이다. 그 속성 덕택에 민요는 그 형태와 형식도 무척이나 다양하며, 한 곡에 수 십여 개의 가사들이 전해져오기도 한다. 그래서 사실 ‘민요’를 장르의 이름으로 보는 것보다 민중들이 창작해낸 작품들의 군집을 범칭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렇게 작품들의 수가 많고 다채로운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또 당연한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민중들이 직접 창작하고 향유하며 전파시켰던 노래들이니까.

 

▲ 판소리투나잍<민요>@이리카페 (출처_판소리만들기 자 페이스북 페이지)

 

 다양한 노래, 다양한 목소리

민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요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통속 민요와 생활 민요라고도 불리는 토속 민요가 그것이다. 토속 민요는 일부지역에 국한되어서 전해지는, 정말로 토속적인 색채를 짙게 띠고 있는 노래들을 말하지만 통속 민요는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으며, 전문적인 예인 및 창자에 의해 불리어지는 노래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공연에서 불리어진 민요들도 모두 통속 민요였다.

‘판소리투나잍’의 <민요>공연에서는 다양한 민요들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 종류는 제비가, 제전과 같은 잡가계 노래, 그리고 노랫가락, 청춘가와 같은 경기소리, 그리고 어랑타령과 궁초댕기와 같은 함경도 민요 등으로 다양했다. 민요는 지역에 따라 창법과 표현하는 음색, 분위기 등이 다르기 때문에 그걸 비교해보면서 듣는 재미도 꽤나 쏠쏠하다.

 

▲ 판소리투나잍<민요>@이리카페 (출처_판소리만들기 자 페이스북 페이지)

 

그리고 홍보를 통해서는 신승태와 김미림만 출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공연장에는 숨겨져 있는 창자가 두 명 더 있었다. 어린 소리꾼 전지애와 이 공연에서는 장단을 맡았지만,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전통음악, 특히 경기소리를 다양한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는 명창 이희문이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 다양한 민요들을 다양한 목소리들을 빌려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 이번 공연의 매력 요소 중 하나이기도 했던 것 같다.

 

▲ 판소리투나잍<민요>@이리카페 (출처_판소리만들기 자 페이스북 페이지)

 

공간을 채우는 에너지, 민요

위에서 말했듯이 민요는 민중들이 만들었고, 민중들이 부르며 전파시켜왔던 노래를 의미한다. 하지만 통속 민요는 전문적인 창자들에 의해 불리어져 온 노래다, 라는 정의를 동시에 말했기에 ‘그럼 결국 한정적인 사람들만 불러온 노래이므로 민요가 아닐 수 있지 않은가’라는 의문을 표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 자리를 함께 했더라면 그런 의문점은 바로 풀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민요> 공연에서는 청자와 창자가 소통할 수 있었다. 무대와 객석의 구분은 희미하고, 창자는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노래하는 동안 보다 분위기를 돋울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리고 청자들은 추임새와 환호를 통해 그들의 의사를 창자에게 전달한다. 이런 창자와 청자의 쌍방향적인 소통을 통해 더 흥겨운 분위기로 이끌어 나가는 것이 가능해지고, 그 결과 판의 분위기는 더욱 즐겁고 흥겹게 전개될 수 있게 변한다.

공연자의 일방적인 공연으로 인해 공연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청자들도 무대를 구성하는 한 요소가 되는 경험은 청자에게도 잊기 힘든 경험으로 남을 가능성이 많다. 그 이유는 청자 또한 공연의 톱니바퀴가 되는 순간, 그 공연장은 단순한 ‘공연’이 아닌 ‘연희’의 공간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창자의 공연과 청자의 호응이 만나서 조응하는 순간, 그 판의 공간은 일종의 ‘에너지’로 가득 차게 된다. 이런 힘을 경험하는 일은 흔하지 않은 일이지만 동시에 잦지 않은 일이기도 하며, 국악 공연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이기도 하다. 특히 이희문 명창이 창부타령을 선보일 때, 그리고 마지막에 오봉산타령, 한강수타령, 어랑타령, 궁초댕기를 부를 때 그 에너지는 엄청났다.

 

▲ 판소리투나잍<민요>@이리카페 (출처_판소리만들기 자 페이스북 페이지)

 

그러한 에너지의 폭발을 공연 속에서 보았기 때문에, 동시에 공연 구성에 아쉬움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민요는 창자와 청자가 공명함으로써 빚어내는 힘을 최대한도로 끌어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끌어내는 데 걸림돌이 되는 점이라면 상대적으로 짧은 곡 길이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판소리의 경우 아니리와 창의 반복을 통해 비교적 긴 시간 동안 긴장과 이완의 반복을 이어가며 에너지를 형성할 수 있다.

하지만 민요는 곡 단위로 공연의 긴장의 흐름이 구성되기 때문에, 에너지가 발생할 수 있을 정도까지 도달할 즈음에 곡이 끝나버려 분위기가 금방 하강되는 등의 아쉬움이 있었다. 더욱이 위에서 장점으로 들었던 잦은 인원교체가 그 점을 더욱 부각시킨 것도 같았다. 그렇기에 다음 공연에서는 곡의 흐름을 보다 더 유기적으로 잇는 시도를 하거나, 하나의 스토리텔링으로 묶는 방법을 사용한다면 그 긴장의 흐름을 이어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서두에서 했던 고민을 문득 다시 떠올려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언젠가 또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민요> 공연을 보고 온 지금은 이런 답을 내리고 싶다. 노래는 힘을 갖고 있다. 그것이 누구에게 불러지는 것과는 관계없이, 그 자체로도 힘을 충분히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로 힘을 가지게 되는 순간은 ‘그’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같은 노래를 부르는 순간이지 않을까.

 

 필자 _ 율

 소개 _ 더 많은 것들을 읽어낼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