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丙소사이어티, <저한테 왜 그러세요> - 병의 죄를 사하노라

2014. 12. 10. 09:27Review

 

병의 죄를 사하노라

 

글_김연재

 

 

관객과 소통하기. 연극을 만들 때 매번 고심하는 부분이다. 관객과 어떤 방식으로 소통할 것인가? 그들과 어디서 만나야 할까? 얼만큼 거리를 두어야 할까? 어떤 공간에서 만나야 하려는 이야기와 잘 부합할 수 있을까? 관객과 어디서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에 대한 고민은 마치 데이트를 앞두고 상대방과 어디서 식사를 하고 무슨 얘기를 할까 고민하는 것과 똑같다.

지난 2월 서울연극센터에서 열린 아오병잉페스티벌에서 ()소사이어티를 처음 만났다. 당시 페스티벌 측에서 마련한 무대는 간소했다. 연극센터 로비에 가림막과 검정색 천으로 극장공간을 표시했다. 소음과 빛은 차단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공간이었다. 사방으로 둘러싼 천막이 여기는 극장이라는 꿈같은 공간이에요를 말해주지만 공연 중에 뒤에서는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11월에 다시 찾은 병소사이어티만의 무대도 일반 극장공간과는 달랐다. 봉천동 주택가에 위치한 무보증월삼십이라는 극장은 새까만 공간이 아닌 새하얀 공간이었다. 공간 전체를 하얀색 페인트로 칠해 놓았다. 빛이 차단되는 지하공간이었지만 일반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조명은 없었다. 오퍼레이터가 있는 공간은 검은 천으로 가려 오퍼석과 무대공간을 구분했다. 소소하게 모인 관객들과 소소한 일상을 풀어나가는 병소사이어티. 극장에서 공연하기 어려운 여건 때문에 공연을 멈추기보다는 어떤 공간이든 가리지 않고 관객과 만나려고 한다. 봉천동은 주로 사회초년생들이 머무르는 곳이라고 한다. 봉천동을 터전으로 마련한 이유에 병들의 집회장소로 적절하다는 점도 포함되었을까.

딸깍거리는 버튼 소리와 함께 암전이 되니 새로운 막이 시작됩니다라는 신호 같았다. 네모낳고 하얀 공간을 대각선으로 나누어 한 쪽을 무대, 다른 한 쪽을 객석으로 사용했다. 객석은 박스로 마련해놓았다. 무대는 요가 매트 세 장을 간신히 깔 만한 협소한 공간이었다. 객석과 무대 간격이 매우 가까우니 집회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무리 속에 섞여서 이런 일도 있잖아정도의 시연을 보이는 배우들. 병들을 위한 토론의 장이 되었다.

2월 공연에서 달라진 점은 연출자가 막과 막 사이에 등장하여 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줬다는 것이다. ‘()소사이어티가 말하고자 하는 이라는 존재를 정의하고, ‘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극단의 주인이신 을 소개하면서 극단의 정체성을 밝히는 연극이었다고 느껴진다.

 

1막이 시작하기 전에 분쟁 광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불편한 커피의 진실처럼, 생활 필수품이 되어버린 핸드폰이나 노트북 배터리의 원료가 되는 광물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고 노동력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우리가 핸드폰이나 노트북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배터리 재료를 생산해내기 위해 인권을 유린당하는 사람이 생겨나지 않는다. 하지만 불편한 진실을 알아도 들은 핸드폰을 버리지 못한다. 핸드폰으로 그들의 소식을 들을 뿐이다. 우리의 편의와 인권이 맞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는 병. 평범한 병들은 자신들도 사회구조 안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말하지 못한다. 말한다 하더라도 수용되지 않는다. 자신이 쓰는 핸드폰 때문에 자신 같은 외국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알고도 계속 쓴다. 그리고 계속 참는다. 참 병스럽다.

1막은 강의실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이다. 흔한 강의실 의자가 아니라 등받이 뒷면에 책상이 달려있는 일체형 도구 때문에 갈등이 발생한다. 의자에 앉아 조금이라도 뒤척이면 뒷사람의 책상이 흔들린다. 소심한 여학생 효은이는 앞에 앉은 경석이가 움직일 때마다 화가 난다. 하지만 화를 분출하지 못한다. 아주 조심스럽게 죄송한데요를 붙이며 말을 꺼낸다. ‘배려를 해주세요’ ‘(배려해야) 서로 좋잖아요?’라며 앞 사람에게 자신의 불편을 이해시키고 움직이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부탁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건 앞에 앉은 경석이 못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강의실 시설이 학생들의 불편을 감안하지 않고 의자에 붙은 책상을 만든 잘못이다. 그런데도 학교 측에 항의하기보다는 앞 사람에게 분노한다. 앞에 앉은 사람도 자신과 같이 학교시설을 바꿀 만한 힘은 없다. SNS에서 본 대한민국이 싸움장이 됐다는 만평이 떠오른다.

경석은 효은이 불편을 호소하자 자리를 바꿔준다. 경석은 필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효은이 움직여도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효은이는 경석을 배려하는 마음이 지나쳐서 자신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양해를 구하고 사과를 한다. 강의시간 내내 효은이의 부탁과 사과를 받은 경석은 힘들다. 왜 가만히 놔두지 않는거냐고.

1막이 끝나고 연출자는 존죄론을 이야기해 주었다. 원죄론을 패러디하여 우리의 존재 자체가 죄가 되는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앞에 앉은 경석이처럼 가만히 있어도 남을 배려지 못하는 나쁜 사람이 된다. 그리고 효은에게 이런저런 터치를 받으며 강의시간 내내 시달려야 한다. 병들이 고달픈 삶을 사는 것은 존재 자체가 죄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이길래 존재를 존죄로 만드는 걸까.

2막은 발레 입시 학원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청테이프를 바닥에 네모로 붙여놓고 학원공간을 표시했다. 한 명이 양팔을 벌리면 딱 맞는 공간에서 두 사람이 발레를 배운다. 수강생을 위한 공간이 아닌 인간이 공간에 맞춰야한다. 좁은 공간 때문에 수강생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 참다 못한 학생들은 공간이 좁아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불만을 토로하지만 선생님은 못난 목수가 연장 탓을 하는 것이라며 학생들을 나무란다. 물리적인 문제를 정신력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라는 말이다. ‘정신승리라는 말이 웃길 수 있는 이유는 전혀 말을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현실과의 괴리감이 클수록 웃음도 커진다. 허무맹랑한 알 때문에 웃음까지 나온다. 경쟁체제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도태된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며 본인 능력이 부족하므로 낙오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긴다. 셋째를 뜻하는 이 병상에 드러누우면 이 된다. 작은 공간에서 치고 박으며 병든 우리들, 그리고 병()든 사회를 보여주고 있는걸까?

줄곧 전환음악으로 크라잉넛의 <비둘기야>가 사용됐다. 2막이 끝나고 희생양이 되는 비둘기에 대해서 얘기를 해주었다. 비둘기는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해서 제물로 바쳐졌다. 인간이 죄를 씻고자 잔인하게 비둘기를 죽인다. 인간의 벌을 비둘기에게 떠넘긴다. 이득을 취하기 위해 죄를 짓고 벌은 떠넘기는 인간을 용서해야 하나. 비겁한 인간들. 그리고 불쌍한 병. 전환음이 섬뜩하게 들린다. 병들의 노래였다니, 비둘기의 울부짖음이었다니. 우리는 누군가의 제물이 되고 있다. 누구를 위한 희생양일까!

3막에서는 다시 도구를 가지고 나온다. 강사는 요가 매트를 사용하고 수련생들은 뽁뽁이(포장용 에어캡) 위에서 요가를 한다. 선생님은 착해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수련생들은 부정한 마음 때문에 움직일 때마다 부정한 소리가 난다. 에어캡이라는 도구로 갈등이 발생하지만 다른 막과는 달리 일방적으로 수강생이 혼난다.

아쉬운 점은 2월 공연보다 에어캡 크기가 커서 움직임이 산만했다는 것이다. 작은 에어캡을 썼을 때에는 조금만 움직여도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는 이미 에어캡이 많이 터져버려서 배우들이 일부러 에어캡을 터뜨리는 움직임이 많이 보였다. 산만한 움직임은 요가 수강생끼리 서로를 원망하는 관계를 잘 드러내지 못했다. 적절한 소품이 병들이 핍박받는 구조를 보여주고, 갈등의 주요원인이 되는 연극이기에 소품선택에 신경을 써야 한다.

 

 

공연 시작 전에 가장 기대했던 점은 의 생존 방식이었다. 연출자가 처음에 나와서 갑도 을도 아닌 으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는데, 그냥 보여주고 끝냈다. 뭔가 아쉽다. ‘그래서?’라는 질문을 맞받아칠 수 있는 강력한 네 번째 플롯이 나오길 바란다. ‘의 자아성찰극을 시작한 -소사이어티’. 끊임없이 공연을 올리면서 병들이 살아가는 소사이어티를 구축하고 나아가 갑을소사이어티를 잠식시켜주길 바란다. 근데 을 만나면 둘은 친하려나?

 

* 사진제공: 병소사이어티

** 블로그: bjung330.tistory.com

필자_김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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