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서울독립영화제 2014 <이로 인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

2014. 12. 13. 10:04Review

 

우리는 단지 받아들이면 된다

<이로 인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 안건형 감독

서울독립영화제 2014

 

글_K

 

 

가끔 내가 속한 공간을 좌표로 나누는 상상을 한다. 좌표 한 칸의 크기는 공책 한 권만할 때도 있고, 1평, 10평만할 때도 있다. 보통은 시야가 확보되는 범위 내에서 ‘좌표 한 칸’의 기준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작은 질문을 던진다. 여기서 어떤 사람도 죽지 않은 칸이 있을까? 수천 수만 년의 역사를 거쳐온 이 땅에서, 아무도 죽지 않았던 공간이 수학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어떤 공간에 가든 나는 죽음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죽음은 특정한 공간에 서사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사건이므로, 죽음을 파악하는 작업은 곧 공간을 파악하는 단초가 된다. 하지만 나는 이 명제가 역도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수시로 내가 있는 공간의 좌표를 그려내며 죽음을 유추하는 나의 경우엔, 공간을 파악 하는 작업이 죽음을 파악하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죽음과 공간은 어떤 상관관계에 놓여 있는가? 죽음이 인이며 공간이 과인가? 아니면 그 반대도 성립하는가?

일반적으로 죽음과 공간을 엮어 사유하는 사람들은, 특정한 공간에서 자살하거나 피살당한 사람들의 역사를 떠올리곤 한다. 그것은 역사가 인간을 중심으로 전유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음과 공간에 대한 연구가 ‘인간의 죽음’ 이라는 사건을 매개로 작동하는 키워드인 것에 반해, 전혀 다른 차원에서 죽음과 공간을 탐색하는 영화가 있다. <이로 인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2014, 안건형)은 공간의, 공간에 의한, 공간 자체의 죽음에 대해 보여주는 영화다. <이로 인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는 홍제천의 과거와 현재를 횡단하며, 홍제천 일대의 변형 과정을 상기시킨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말소되고 망각된 기억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이렇게 공간을 둘러싸고 망각되는 기억은 공간과 죽음의 유비 관계를 성립시킨다.

<이로 인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에서 재미있는 것은 홍제천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영화는 1시간 가량의 러닝타임 내내 문장, 영상, 사진, 그림만을 반복해서 보여줄 뿐이다. 이러한 문장과 영상과 사진과 그림의 나열은 기존의 극영화나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물론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무너뜨린 형식의 영화들이 등장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나, 이 영화는 흔한 트랜스적 범주에 속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서 아방가르드한 느낌을 초장부터 마구 풍기는, 파괴적이고 해체적인 느낌의 영화도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매우 체계적인 느낌을 준다. 홍제천 일대의 장소들—홍제천, 세검정, 탕춘대, 혼지문, 신영상가, 유진상가 등—을 몇 곳 고른 다음, 그곳에 관련된 과거와 현재의 기록들을 깔끔하게 나열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학술 논문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로 인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는 논문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지도 않는다.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논문의 의의를 밝히고 순서를 소개하는 부분이 빠지기 때문이다. 논문의 필수 요소인 국문초록과 서론, 목차는 이 영화에서 부재한다. 또한 이 영화가 제시하는 문장과 영상들은, 일반 논문처럼 서론에서 제기한 질문이 결론에서 마무리되는, 논리적 분석의 형태를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다. 단지 직렬적이거나 병렬적으로 과거와 현재의 홍제천에 관한 기록을 횡단하기만 할 뿐이다.

영상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각주 역시 일반적인 논문의 쓰임과 다르다. 논문에서 각주란 독자가 특정 문장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을 때 참고하여 찾아보기 위한 용도로 기재된다. 하지만 <이로 인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에서 특정한 문헌 발췌에 대한 각주는 화면에 단 몇 초 정도 나타날 뿐이다. 사진이나 그림 출처 역시 영화가 끝나고 단 몇 초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프리젠테이션의 형식을 연상시킨다. 특이점이 있다면 발제문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 프리젠테이션이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이 영화의 각주란 관객의 학구열을 배려하기 위함이 아니라 제작 과정에서 저작권 문제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감독의 윤리적 장치에 가깝다. 물론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모든 다큐멘터리나 뉴스 역시 비슷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기성의 다큐멘터리나 뉴스에 비해 유독 학술논문같은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각주에 대한 논의는 유의미하다. 논문의 각주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필자의 지향점을 드러내는 기표인데, 이 영화에서 그러한 기표들은 언제나 일정한 몇 초가 흐르면 휘발된다.

 

 

 

 

<이로 인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는 분명 기존의 영화와는 다른 학술적 텍스트의 느낌을 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는 관객의 학술적 접근을 철저히 막는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문장과 영상, 문장과 그림, 문장과 사진을 반복하여 나열한다. 이것은 다분히 몽타쥬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안건형 감독의 몽타쥬는 보통의 극영화가 보여주는 몽타쥬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기존 극영화에서 몽타쥬는 결합을 통하여 서술적 의미

를 점진적으로 축적하기 위한 쇼트의 연결 과정을 의미한다. 똑같은 쇼트라고 해도 순서를 변화시킴으로써 의미가 변하는 것이다. 가령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를 촬영한 쇼트가 있다고 했을 때, 그 쇼트 앞에 활짝 웃는 여자의 이미지를 삽입하는 것과 코끼리들이 몰려오는 이미지를 삽입하는 것은 전혀 다른 효과를 낳는다. 그런 점에서 <이로 인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는 극영화가 아님에도 극영화가 제시하는 몽타쥬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로 인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에서는 홍제천, 세검정, 탕춘대, 유진상가, 신영상가 등 홍제천 일대와 관련한 장소나 역사적 건물에 대한 문헌을 발췌하거나 요약한 문헌이 순차적으로 제시된다. 보통 그 문헌은 홍제천의 역사적 맥락 과 관련되는데, 일제 강점기를 넘어 조선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레퍼런스가 인용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문장 하나하나의 다음에 삽입되는 영상은 대개 홍제천 일대의 현재를 촬영한 것이다. 세검정초등학교나 유진맨션, 내부순환도로 등 현대에 준공된 도로나 건물이 피사체로 놓인다. 이런 점이 이 영화의 몽타쥬를 만들어낸다. 만일 역사적 문헌이 부재한 상태로 현재의 세검정초등학교나 유진맨션, 내부순환도로의 영상만이 제시되었다면 그 영상은 단지 ‘홍제천의 모습’을 촬영한 것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각 영상의 앞에 몇백 년 전의 사료들이 제시되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과거로부터 가져온 사료의 문헌과 현재를 촬영한 영상의 조합은 홍제천의 과거와 현재를 횡단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분명 과거의 문헌이나 현재의 영상 하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학술적 텍스트의 느낌을 주는 이 영화가 아이러니하게도 관객의 학술적 접근을 막는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이 영화가 홍제천의 지도, 홍제천의 지형을 설명하는 그래픽, 홍제천 일대의 공간사를 다루는 연표 등 여러 이미지 장치의 활용에 소극적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는 하나의 공간이 역사를 거슬러 변형된 흔적을 다룬다. 그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문헌이 제시되고, 관객은 순차적으로 소개되는 ‘공간의 죽음’을 목도한다. 홍제천은 장의사동, 조지서동, 탕춘대, 세검정, 신영동 등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가령 지금의 세검정 초등학교 자리는 신라시대에 장의사라는 사찰이었고, 후에는 총융청이라는 관청이 된다. 장의사 앞 봉우리에는 연산군이 유흥을 즐기기 위해 지은 누대인 탕춘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이 사라지고 주택 단지의 빌라들이 늘어서 있다. 1971년에서 2008년까지는 홍제천을 복개한 위로 신영상가가 있었다. 신영상가는 5층이었고 180m로 길이가 매우 길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이 없다. 장의사나 탕춘대, 신영상가는 ‘공간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이며, 공간이 죽은 자리는 또 다른 공간을 잉태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복합적인 공간성을 가진 공간에 대해 논문을 쓸 때, 일반적인 학자라면 도표나 지도를 활용하여 가독성 있게 공간의 역사성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는 가독성과는 거리가 멀다. 세검정이나 탕춘대, 장의사와 같은 장소를 연대기 순서로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지형의 규칙대로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홍제천 일대를 잘 모르는 일반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머리가 정리되지 않는 느낌을 받기 쉽다. 탕춘대니 신영상가니 하는,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 관한 이야기들이 줄곧 제시되지만 그곳의 연대기적이고 지형적인 맥락이 머리 속에 쉽게 도식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노트북으로 영화를 볼 때처럼 중간중간 정지 버튼을 누르며 메모를 하지 않는 이상, 일반적인 관객이 이 영화의 학술적 맥락을 한번에 이해하기는 어렵다.

 

 

 

 

영화의 이런 난해한 지점은 홍제천의 지형 특성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극대화된다. 홍제천은 사행천이었다. 사행천이란 자신의 너비와 경로를 스스로 결정하는, 수로가 바뀌는 하천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천이 마르거나 범람하는 것 자체를 그 일대의 사람들이 막을 방도가 없었다. 이때 홍수로부터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치수’ 기능을 위해 홍제천에는 하천 직강화 정책이 시행된다. 직강화란 하천을 직선화하는 거인데, 빗물을 빨리 유출해 홍수 수위를 낮

추는 것이다. 직강 공사로 성미산의 능선이 잘려 홍제천은 산을 가로질러 흐르게 되었고 양쪽 기슭에는 제방이 쌓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직강 공사가 홍제천이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과정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직강화로 인해 홍제천이 사람들의 두려움을 더 이상 증폭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시는 커져 갔고 하천은 반듯해지고 좁아졌다. 이는 어떻게 보면 홍제천이라는 ‘공간의 죽음’과 직결되는, 커다란 사건 계열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사실들을 조용히 순차적으로 나열할 뿐이다. 검은 바탕에 일관된 흰 글씨로 하천 직강화 공사에 대한 이야기가 제시되고, 현재의 홍제천 모습을 촬영한 영상만이 그 뒤를 이을 뿐이다. 사실 이러한 맥락 자체는 이렇게 글로 놓고 볼 때 그렇게 난이도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하나의 문장이 제시된 다음 몇 초 후 휘발되어버리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이로 인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의 특성상, 이렇게 조형적이고 지리적인 원리가 곁들어진 설명은, 해당 분야에 걸출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닌 이상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 영화는 지리학을 연상시키지만, 지리학적으로 절대 친절하지 않다.

이 영화는 각주를 삽입하고 문헌을 제시하는 등 온갖 ‘성의’를 보여주지만, 의외로 가장 불친절한 영화 중 하나다. 관객은 오히려 그러한 각주와 문헌으로 인해 관객은 머리 속이 다 정리되지 않은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로 인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의 불친절함이 가장 극대화되는 부분은 바로 음향이다. 이 영화에는 음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어떠한 음향 효과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모든 영상은 현재의 것인데, 소리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먼 옛날 찍은 사진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영상의 미장센 역시 비슷한 맥락에 놓인다. 영상에 등장하는 현재의 세검정초등학교나 홍제천, 유진맨션의 모습에는 대부분 별다른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는다. 카메라는 정지한 상태로 공간을 촬영하기 때문에, 어떤 영상들은 마치 사진을 보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종종 영상이 영상처럼 보이는 순간도 있다. 그러한 경우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흐르는 물이 영상에 담길 때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자동차나 자전거, 사람이 지나가는 모습이 영상에 담길 때다. 이 영화에서 모든 공간은 죽어 있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물과 사람만은 죽지 않고 그대로 흐른다. 이러한 운동성은 영화의 말미에서 더욱 부각된다. 영화의 후반부에는 유난히 빨리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많이 담긴다. 사람들은 홍제천 구석구석을 지나다니며 자전거를 타거나 조깅을 한다. 영화는 초반부터 유지한 차분한 리듬을 유지하면서도 그들을 천천히 클로즈업한다.

 

 

 

 

영화의 오프닝에서는 연객 허필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허필은 시, 글씨, 회화 세가지 모두에 뛰어나 ‘시서화 삼절’ 이라 불렸다. 그는 기이한 행적을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생지명’이다. 지와 명이란 죽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리기 위해 무덤에 남겨놓는 글이다. 그러니까 생지명이란 살아있는 사람의 묘지명에 해당된다. 허필의 생지명을 써준 이는 이용휴였다. 허필의 생지명은 “이로 인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로 끝난다. 하지만 영화는말한다. 허필은 죽었고 그후로 잊혀졌다고 말이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허필의 생지명 이야기는 영화가 홍제천을 담아내는 방식을 바라보는 열쇠가 된다. 허필은 살아 생전 생지명을 받아내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처음에 허필은 임희성에게 생지명을 부탁하나 임희성은 그가 이름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며 책망한다. 그러나 허필은 생지명 받기를 그만두지 않았고 결국 이용휴가 글을 지어주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허필은 잊혀졌는데, 이는 홍제천이 영화에 담기는 방식과 매우 흡사하다. 홍제천 일대는 장의사동, 조지서동, 탕춘대, 세검정, 신영동 등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그 이름들은 인근 건물명에서 따온 것이었는데, 그 건물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홍제천의 역사는 거의 잊혀졌다.

<이로 인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가 가진 미덕은 잊혀진 홍제천의 역사를 잊지 말자고 부르짖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필의 ‘생지명’과 같은 홍제천의 역사를 차분하게 열거한다. 그 차분함 때문에 마치 논문을 영상으로 보는 듯한 환각에 휩싸이지만, 이 영화는 애초에 불친절함을 기반에 깔고 있기 때문에 논문으로 성립되기 어렵다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바로 그러한 아이러니가 홍제천의 역사와 연결된다. 매 순간마다 홍제천은 이름이 있었고 각 이름들은 시대별로 그에 맞는 역할을 수행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잊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안건형은 과잉된 친절을 통해 홍제천의 망각된 공간성을 억지로 끌어올리기보다는,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며 홍제천이 기억되는 방식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이로 인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의 후반부에 언급되는 조선왕조실록의 ‘세초’ 작업과 유사하다. 세초란 왕조 실록을 편찬한 후 실록의 초고를 씻어서 글자를 지우는 일로, 기록을 남기는 일인 동시에 지우는 일이었다. 바로 세검정 밑에는 조선 시대에 세초 작업을 하던 차일암이있다. 영화의 모든 몽타쥬적인 쇼트는 일종의 세초였던 것이다.

공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죽는다. 모든 공간은 한때 홍제천이었다가, 홍제천일 것이었다가, 홍제천이 아니게 되는 과정을 반복한다. 홍제천을 세검정으로 부르든 조지서동으로 부르든 탕춘대로 부르든 신영상가로 부르든 공식은 같다. <이로 인해 그대는 죽을 것이다>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았든 이 사실을 완전히 숙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논문의 형식을 빌릴 뿐 논문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논문이 의식의 과잉이라면, 공간의 죽음을 이해하는 일은 과잉된 의식을 떨쳐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대는 죽을 것이다>는 그저 모든 공간이 죽어가는 과정을 바라볼 뿐이고, 이러한 과정 속에 불필요한 애도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엄밀히 말하면, 애도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는 것 같다. 홍제천이 그러했듯, 모든 공간의 죽음은 새로운 공간의 잉태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죽어간 공간에 대해 끊임없이 환기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공간에 속한 우리 역시 죽음을 향해 수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간 속에 있다. 공간으로 인해 우리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논문이 아니므로, 우리는 모든 과정을 증명할 의무에서 해방된다. 우리는 단지 그 사건을 받아들이면 된다. 홍제천의 물이 흘러가는 속도만큼 말이다.

 

 

*사진출처_인디포펌 홈페이지(http://www.indieforum.co.kr)

**서울독립영화제 웹페이지 바로가기 >> http://www.siff.or.kr



 작품명_이로 인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
 감독_안건형
 작품정보_2014 | Documentary | Color | HD | 63min 20s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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