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느닷없음’에 관한 느닷없지 않은 보고서 <불신의 힘>

2016. 7. 23. 10:34Review

 

‘느닷없음’에 관한 느닷없지 않은 보고서

<불신의 힘>

프로젝트 그룹 쌍시옷 / 송정안 연출

 

글_권혜린

 

6월 9일부터 10월 30일까지 연우소극장에서 20주 기획으로 진행되는 대장정 ‘권리장전權利長戰)2016-검열각하’ 시리즈의 제목에서, ‘검열’이라는 단어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을 주었다. 당연히, 검열은 처음 듣는 단어가 아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지금 보는 것은 낯설다. 그것도 연극을 대상으로 검열이 버젓이 이루어졌다고 하니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검열을 한다는 것은, 검열의 주체가 검열의 대상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자만한다는 것을 뜻한다. 평가의 잣대는 (주체에게는) 매우 분명하며, 그 잣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은 개인이 아닌 사회의 이익을 위해 삭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 공연이 삭제되면 과연 사회가 이익을 보게 될까? 여기에서부터 ‘불신’은 시작된다.

특히 연극 <불신의 힘>에서 다룬 팝업 씨어터 사태는 끊임없는 불안을 통해 자기 검열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공적인 기관을 매개로 하므로 공연이 실현되는 조건까지 뒤흔들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러한 기관을 ‘믿고’ 공연을 준비했지만 결국 검열이라는 이름 아래 ‘불신’의 힘을 강조하게 된 뜨거운 작품이 지금, 2016년에 <불신의 힘>이라는 이름으로 공연되었다.

 

 

 

 

소환된 공연

 

공연이 시작하자, 마치 노래를 부를 것처럼 배우가 등장해 마이크를 잡는다. 배우만큼 눈에 띄는 것은 무대의 왼쪽에 있는 패널이다. 그 패널에는 작년 가을에 공연될 예정이었던 <불신의 힘>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다. 2015년 10월 24~25일 5시에 아르코 앞마당에서 ‘팝업 씨어터 15분 연극’으로 꾸며질 예정이었던 <불신의 힘>은 작년에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났다는 ‘가정’을 통해 2016년에 소환된다. 이렇게 ‘일어나지 않은 공연’과 ‘일어났어야 할 공연’의 간극을 메우는 시도는 15분의 공연을 총 55분의 공연 안에 고스란히 담으면서 이루어진다.

마이크를 든 배우는 전도사로서, 기독교를 전파하기 시작한다. 이 짧지만 강렬한 15분의 공연에서는 전도사와 박수무당의 대결이 두드러진다. 전도사는 기도와 찬양과 간증과 방언을 하면서 북한과의 전쟁을 예언하고, 땅굴과 피난을 이야기한다. 반면 박수무당은 전도사와 대립하면서 자신을 마귀와 질병 취급하는 전도사에게 지하에는 북한의 땅굴이 있는 것이 아니라 4호선이 지나간다고 일침을 놓는다.

이렇게 겉보기에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독교와 무속 신앙에는 공통점이 있다. ‘믿음의 힘’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불신은 곧 지옥이며, 무속 신앙에서도 장군님에 대한 믿음은 중요하다. 게다가 종교는 검열의 대상이 아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만 중요할 뿐 그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 혹은 이익이 되는지, 되지 않는지는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제목이 ‘불신(不信)의 힘’일까? 전도사와 박수무당의 굳건한 ‘믿음’은 겉보기에는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제목은 ‘믿음의 힘’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공연에서는 그러한 믿음을 비틀고 있다. 전도사에게 절대적인 믿음이 박수무당에게 가면 허무맹랑한 것이 되고 박수무당의 믿음이 전도사에게 가면 사이비가 되는 것처럼, 믿음은 바깥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면 곧바로 ‘적’에 대한 불신이 된다. 그렇다면 이 공연은 자신의 굳건한 믿음 이면에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 크게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반면 ‘불신’의 힘이 커질 때 상대방을 잘 볼 수 있고, 결국 자기 자신도 잘 들여다볼 수 있다. 상대방은 곧 자신의 거울이 되는 것이다. ‘북한’이라는 동일한 대상에 대해 땅굴/4호선으로 각각 다르게 번역하는 것처럼 믿음의 종류와 대상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다. 이는 그만큼 맹목적인 믿음이 얼마나 약한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반면 불신은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그 너머의 것을 보게 한다. 물론 이 역시 맹목적인, 이유 없는 불신이 아니라 ‘이유 있는’ 불신일 때 가능할 것이다.

 

 

 

 

발화된 고백

 

그렇게 ‘이유 있는 불신의 힘’에 대한 부분은 남은 40분의 공연에서 ‘검열’의 사건에 대한 보고와 연출가의 자기고백을 통해 진하게 드러난다. 2015년에 팝업 씨어터 공연을 ‘안 하게’ 된 이유에 대해 자세한 보고서를 제출한 것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기획한 팝업 씨어터 공연은 카페, 로비, 공원 등에서 팝업 창처럼 ‘느닷없이’ 이루어지는 깜짝 공연을 여는 것이다. 따라서 공연이라는 ‘사건’ 역시 팝업 창처럼 나타나야 했지만, 사건은 예기치 못했던 곳에서 일어난다. ‘노스페이스’와 ‘수학여행’이라는 단어가 세월호를 연상하게 한다는 이유로 <이 아이>의 공연이 취소당한 것이다. 이는 기획 측의 ‘불신’이 반영된 사건이지만, 불신의 이유는 모호하다. <불신의 힘>의 연출자 역시 팝업 씨어터 담당자와 만나 “한숨, 눈물, 떨림”을 경험하며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대본을 제출할 것을 요구당하고, 연습실에서도 CCTV와 도청장치가 있을까 봐 공포에 떠는 것은 검열을 당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극에 나온 것처럼 ‘양심, 정의, 용기’라는 당위보다 ‘공포’라는 감정에 사로잡혔다고 말하는 연출가는 자기검열을 하고 있는 셈이다. 대본의 표현을 스스로 검열하고, 어둠 속에서 플래시 빛을 피해 도망 다니는 연출가들은 창작의 자유를 침해당한다. 창작의 자유는 유토피아, 이 세상에 없는 곳이 되는 것이다.

결국 “연극을 하는 자의 선택”으로서 연출가는 공연 하루 전에 공연을 취소하고, 공연 거절 메일을 보낸다. 그럴 때조차 솔직한 감정으로서 불안이 등장한다. 하지만 길게 쓰면 꼬투리를 잡힐까 봐 간결하게 쓴 메일은 답장도 없이 무시당한다. 공연 당일에는 공연이 취소되었다는 A4 1장짜리 안내문만 나부낀다. 검열에 대한 저항의 결과는 공연 자체가 삭제당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물론 연출가가 삭제를 요청한 것이지만, 이러한 과정을 모르는 관객 혹은 일반인들의 눈에 공연 취소는 연출가와 배우의 무책임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러한 무책임까지 감당해야 하는 것은 검열의 피해자들인데 이러한 불안까지 극에 잘 드러나 있다. 이렇게 검열에 대한 분노, 불안, 공포라는 감정이 솔직하게 발화(發火)됨으로써 발화(發話)되는 고백들은 검열을 가한 주체가 얼마나 무책임한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삭제된 것은 흔적을 남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기력함에 빠지고, 공연을 비롯한 모든 것을 놓아 버리는 것은 쉽다. 연출가는 <불신의 힘>을 통해 그러한 자신의 상태와 감정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공연을 포기한 뒤 고통스러워하던 연출가는 박수무당을 찾아간다. 그리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1년을 쉬다가 15분짜리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마저 못 하게 되어서 시위를 했고, 그러다가 검열로 공연을 만들게 되었는데 젊은 연출가로서 고민이 되었다고. 시위를 했지만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고. 그러자 박수무당은 정의로운 척하지 말라고, 각자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개입하지 말라고 말한다. 겸손하게, 순응하면서 살라고 말한다. 이때 마지막 말에 연출가는 박수무당에게 콩을 던지면서 저항한다. 박수무당에 대한 믿음으로 그를 찾아갔지만, 거기에서 오히려 ‘불신’의 힘을 발견한 것이다.

검열 사건 이후, 연극인들은 ‘모든 검열에 반대한다’는 피켓을 든다. 공연에서도 피켓을 든 영상을 상영한다. 이는 겸손하게 순응하지 않고, 극중에 나오는 단어를 빌면 ‘느닷없이’ 이루어진 검열에 분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느닷없음’에 저항하는 과정들은 느닷없이 나타나지 않는다. 사건이 일어난 지 반 년이 지난 뒤에도, 비록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연극이라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공연을 기획한 기관에서는 검열 사태와 관련해 책임질 일이 있을 때에도 보직 사퇴 등의 인사이동과 조직 개편을 통해 간단하게 없었던 일로 만들어 버린다. 제대로 된 사과도, 응답도 없이 그 사건 자체를 삭제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삭제된 것은 언제나 흔적을 남긴다. 검열의 주체가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검열을 경험한 이들은 언제나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흔적을 <불신의 힘>에서 엿볼 수 있었다. ‘공연은 이래야 한다’는 당위를 기준으로 검열을 자행하는 권력과 폭력에 맞서, ‘불신’하겠다는 흔적을 연극으로 남기겠다는 선언을 말이다. 그러한 점에서 극에서 나온 선언으로서의 질문은 지금도,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다. “불신, 이래도 안 하실 겁니까?”

 

 

▲ 팝업씨어터 검열사태로 인한 공연중지에 항의하는 모습, 공연예술센터 앞에서 피켓을 들고 있는 대학로의 연극인들 (사진참조_대학로X포럼 페이스북 페이지)

 

 

*사진제공_프로젝트 쌍시옷 

***권리장전 SNS페이지 바로가기 >>> https://www.facebook.com/project.for.right/

 

 

   필자_권혜린

   소개_작은 매처럼 책과 책 사이를 날아다니고 싶은 ‘골방 탐험가’입니다.

            http://blog.naver.com/grayhouse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