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법과 함께 춤추는 몸들 <혜화동1번지 2021가을페스티벌 “법rule”>
법과 함께 춤추는 몸들
<혜화동1번지 7기동인 2021가을페스티벌 “법rule”>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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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하나. 지난 2021년 12월 31일, 국회 본회의에서 청소년 참정권을 보장하기 위해 피선거권연령의 기준을 만 25세 이상에서 만18세 이상으로 낮추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비록 실질적 청소년 참정권의 보장을 위해 정당법, 민법 등의 추가 개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지만, 이로써 선거권은 부여받았으나 피선거권을 보장받지 못해 실질적인 참정권에 커다란 제약을 받고 있던 18세부터 24세까지의 시민들이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열리게 되었다.
이야기 둘. 대법원은 2021년 8월 19일 판결 1) 을 통해 약 20년 전 발생한 성폭력 범죄 피해생존자이며 ‘체육계 미투 1호’로 체육계 성폭력 문제를 고발한 테니스 코치 김 씨가 민사소송으로 제기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의 청구권이 소멸시효 기간 경과로 소멸하였다는 가해자 측의 항변을 기각하고 손해배상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이 판결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적극적인 권리 보호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이고 이례적인 판례 2) 로 남게 되었는데, 이번 판결 이전까지 재판부는 민법 766조에 의해 규정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 기간인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3년’ 혹은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10년’의 계산 시작일 즉 기산점을 ‘성폭력 사건 발생일’(피해자가 미성년자일 경우 성인이 된 날)로만 보아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족이나 지인으로부터 피해를 겪어 피해 사실을 즉시 호소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특히 아동기에 피해를 겪는 경우 성년이 된 후에도 긴 시간이 지나고서야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는 일이 잦은 성폭력 피해의 특성상 가해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했을 때에는 이미 소멸시효 기간이 지난 뒤라 피해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구제조차 불가능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본 사안에서 2심 재판부는 성폭력 범죄에 의한 손해의 발생 시점을 피해자가 PTSD 진단을 받아 비로소 손해가 현실화된 2016년 6월경으로 봄으로써 ‘마지막 범죄가 2002년 8월이므로 손해배상채권의 소멸시효 기간이 지났다’는 가해자 측의 소멸시효 항변 3) 을 배척했고, 대법원은 가해자 측의 상고를 기각하면서 배상을 명령한 원심을 확정하며 판례에 성범죄로 인한 손해의 발생을 판단할 때 성폭력 피해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판단하여야 함을 명시하였다.
이야기 셋. 원칙적으로 사인(私人)은 법령상의 근거 없이 국가의 사무를 수행할 수 없으므로, 사인이 국가의 사무를 처리하게 되더라도 그 과정에서 지출한 비용을 국가에 청구할 수 없다. 그러나 2007년 12월 태안 앞바다에서 발생한 기름유출 사건에서 해경을 도와 방제작업을 한 회사의 방제비용 청구에 대해 법원은 ‘사무 처리의 긴급성’ 등을 이유로 들어 국가의 사무에 대한 사인의 개입이 정당하다고 판단 4), 사인의 국가 사무 처리와 그에 따른 비용 청구를 예외적으로 긍정하였다.
법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앞선 예화들에서,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문자로써 드러나는 ‘법률law’이 아니다. 이 이야기들 속에서 드러나는 바 법률은 정치적 결정에 따라 탄생하며 그 탄생 과정에서 어떤 사회 규범을 담지하게 되는데, 만약 그 법률에 담긴 규범이 다른 사회 규범과 충돌한다면 법률은 기존과는 다른 논리와 결합하도록 인도되며 때로는 법률이 ‘예외적 상황’이라는 말로 무력화되기도 한다. 그 자체로 문자들의 집합일 뿐인 법률은 스스로 이 모든 과정을 해내지 못한다. 법률의 배후에는 법률을 탄생케 하는 힘, 그리고 법률을 둘러싼 해석의 갈래를 조정하는, 때로는 법률 적용의 ‘불가피한 예외’를 선언하여 어떤 결단을 관철하는 힘이 있다. 법조문과 일련의 논리를 표시하는 문자의 바깥, 문자와 문자 사이의 여백에서 바탕색으로 위장하고서 글자들의 배치를 조율하는 힘. 이것이 바로 주권자의 ‘통치rule’이다.
“나를 돌아보고, 너를 확인한 뒤, 우리 사회를 바라보다.
법과 규범(rule)을 점검함으로써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고,
법을 다시 구성함으로써 아직 마주하지 못한 정의의 자리를 모색하고자 다섯 작품을 선보입니다
(출처: 혜화동1번지 Facebook 페이지 소개글)
법치주의는 이른바 ‘Rule of law’ 즉 ‘법의 지배’로서 법 위에 군림하는 자의 ‘법에 의한 지배’ 즉 ‘Rule by law’와 구분되는 것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2021 혜화동1번지 가을페스티벌의 주제인 “법rule”에서 ‘법’과 ‘rule’이라는 단어의 조합이 가리키듯, ‘법의 지배’ 안에서도 주권 권력의 자리는 사라지지 않고 존속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영단어 ‘Law’는 독일어의 ‘Gesetz’, 프랑스어의 ‘Loi’로 번역되는 단어로 입법 절차에 의해 제정된 문자로서의 법률을 의미하지만, ‘법치국가’에 해당하는 단어인 독일어 ‘Rechtsstaat’와 프랑스어 ‘État de droit’를 보면 이 단어들 안에서 법을 의미하는 단어는 독일어 ‘Recht’와 프랑스어 ‘Droit’이다. 이 단어들은 영어의 ‘Right’로 번역되는데, (영어 ‘right’과 마찬가지로) 올바름, 권리라는 뜻과 함께 사회적 규범으로서의 법을 의미한다. 따라서 ‘법의 통치(rule of law)’에서 ‘법’은 일반적인 ‘법률(law)’이라는 의미와 ‘정당함, 권리(right)’라는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그리고 여기, 문자적 법률과 정당함이 결합하는 이 지점, 어떤 ‘정당함’의 목록을 사회를 규율할 규범으로 제시할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 안에서 주권자의 통치는 결국 숨겨왔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규범normative은 법률의 제정과 법적 판단의 기준norm(=standard)을 표지하고, 주권 권력은 그 기준의 둘레에 ‘정상성normality’의 경계를 설정할 권한을 가짐으로써 경계의 내부와 외부 모두에 대한 통치를 실현한다. 이러한 주권 권력의 통치 기술은 0set프로젝트의 〈관람모드–있는 방식〉에서 현실적이고 공포스러운 것으로 드러나는데, 관객이 폐쇄된 장애인 거주시설 ‘향유의 집’을 탐방하는 이 공연에서 관객들은 건물 구석구석 새겨져 있는 증언들, ‘정상’의 경계 바깥 인권의 사각지대로 몰아 넣어진 장애인들의 기억과 기록을 마주하고 주권적 통치의 기술이 어떻게 장애인들을 사회 바깥으로 배제하고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권리를 박탈해왔는지, 그리고 바로 그러함으로써 어떻게 ‘비장애인들의 사회’를 유지해 왔는지를 살갗으로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권 권력의 통치는 절대적이고 항거불가능한 것인가? 이 질문은 주권 권력의 통치 기술이 작동하는 내부에서부터 뒤집히기 시작한다.
주권 권력이 통치하고자 하는 영토는 어디인가? 경계는 어디 위에 그어지는가? 바로 신체이다. 주권 권력이 사회 규범으로서 어떤 ‘정당함, 권리(right)’의 목록을 작성하고자 할 때, 아직 목록화되지 않은 권리의 샘은 어디인가? 바로 몸, 육신과 정신을 포괄하는 것으로서의 신체이다. 물질적 그리고 정신적 삶을 살아가는 신체는 자연적인 권리 즉 자연권을 타고나며 대지가 그러하듯 신체는 자기만의 주권으로 무언가를 생산하고 배출하는 원천이기에 지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권 권력이 권리의 샘인 신체로부터 권리를 갈취하여 규범을 짓고 다시 그 규범으로 신체를 억압하고자 할 때, 그 재귀적인 구조는 주권 권력의 지배 방정식governing eqation에 하나 이상의 비선형non-linear 항을 추가한다. 그리고 비선형성에는 항상 ‘나비 효과’를 불러일으킬 잠재력이 포함되어 있다.
0set프로젝트의 〈관람모드–있는 방식〉이 수많은 폭압의 기록과 함께 증언하는바, 장애인 거주시설 ‘향유의 집’은 한규선 씨를 비롯한 ‘마로니에 8인’이 끝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외칠 자유를 억압하지 못했고, ‘장애인 탈시설 운동’의 첫걸음을 떼는 것을 가로막지 못했다. 이는 단지 억압의 크기가 운 좋게 작았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그 무지막지한 억압 속에 그 억압의 세기만큼 단단한 비선형성이라는 틈이, 결코 다 억압될 수 없는 생명력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향유의 집’을 함께 찾은 관객들은 거기에서 폭력의 상흔들과 함께 장애인 탈시설 운동의 활동가들을, 해방을 향한 의지를 틔워낸 사람들을 또한 만나게 된다.
주권이 차지하고자 하는 영토는 살아 움직이는 몸이고, 규범이 설정하는 경계선 역시 몸 위에, 몸들 위에 그어진다. 관절을 따라 휘어지고 비틀어지며 생명력으로 약동하는 몸은 만남을 따라 배치되고, 관계망으로 연결된 다양한 몸들이 만들어낸 영토는 단단한 대지가 아닌 파도가 치는 바다처럼 출렁이며 5) 규범의 폭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계를 넘나드는 몸들을 연신 생산해낸다. 그렇게 규범은 풍랑에 흔들리는 깃대처럼 불안한 지경에 처한다.
규범의 폭력을 넘어서는 몸이란 단지 살갗 아래의 신체뿐만 아니라 그 신체의 말단에 접속하는 감각적인 연장들을 포괄한다. 남한의 첩보기관 요원들과 밀수를 위해 국경을 넘나드는 여자, 그리고 오랜 인연을 찾아 북한에 방문하고자 하는 의사가 등장하는 프로젝트그룹 쌍시옷의 〈비타민 P〉에서, 등장인물들은 남한과 북한 사이의 강력한 정치적 대립이라는 현실 속에서 상대편을 적대하고 속이고 또 멀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데, 서로를 적대하게 만드는 국가 정체성은 그들에게 감정을 다스릴 것을 요구하지만 바로 그러한 명령은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다스려야 할 감정이 있음을 의미한다. 마치 화장실의 칸막이 사이를 구불거리며 타고 넘어가는 담배 연기처럼, 만남을 겪은 감각은 연결됨의 욕망 그리고 그리움의 감성을 만들어낸다. 첩보기관의 팀장과 밀수꾼 여자는 그 모든 매정함과 속임수, 자기 정체성에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화장실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담배 연기를 나눈다.
주권 권력이 법률의 제정을 통해 생동하는 몸들의 표면에 경계선을 그릴 때, 경계를 통해 가해지는 규범의 압력은 주권 권력의 입맛에 따라 몸들을 강하게 한쪽으로 몰아가지만, 몸들이 단지 그 압력에 붙들려 신음하지만은 않는다. 주권자가 설정하는 배제와 포함의 경계선은 몸들의 넘나듦을 완전히 가로막지 못하고, 그렇게 주권에 저항하고 순응하는 복수의 몸들은 주권자의 경계설정을 동요케 함으로써 그 견고한 법률을 두드리고 충동질한다. 그렇게 주권 권력의 통치 아래에서 몸과 법은 하나의 안무를 자아낸다. 마치 댄스 스포츠처럼, 물론 스포츠처럼 ‘페어’하지는 않아서 공정하지도 않고 유혈과 폭력 그리고 오열로 점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유니폼 색깔처럼 이편과 저편이 쉽게 딱 나뉘는 것도 아니지만, 몸과 법은 법의 리드에 따라 스텝을 맞추고 동작을 펼쳐낸다.
그러나 법에 따라 정해진 스텝과 동작은 때로, 자주 몸의 떨림, 관절의 비틀림과 살의 탄력을 담아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제 몸이 저항한다. 저항하는 몸은 자신의 생산적 역량을 주권 권력의 통치 영역 바깥으로 뿜어내기 때문에 이어서 주권 권력이 움직여 새로운 경계선을 설정하지만, 뒤늦게 그어지든 선제적으로 그어지든 경계선은 이내 다시 출렁이고 끈적거리는 몸에 잠식될 운명에 처해 있다. 따라서 이내 그 경계는 흐릿해지고 그 틈으로 또다시 어떤 몸이 탈선을 일으킨다. 이렇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안무 속에서 법률은 몸이 만들어내는 박자에 취해 단지 주권자의 분별없는 이성이 흔들리는 것 이상으로 출렁인다. 이러한 안무의 끝에는 세 가지 결말이 있다. 법이 무너진다. 몸이 무너진다. 혹은, 새로운 안무가 탄생하여 몸과 법은 다음 동작으로 자신들의 춤을 이어갈 기회를 얻는다.
법을 향한 투쟁, 법을 수정하고 새로이 만들고자 하는 투쟁은 바로 이 몸과 법의 안무를 창조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법이 소수자와 약자의 권리를 보장하도록 만들기 위해 사회 운동은 거리로, 광장으로 나간다. 광장에는 몸들이 있다. 단지 인간의 생리적 육신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날카롭게 그어진 경계를 뛰어넘어 흘러넘칠 수 있는 감각의 장이 드리워져 있다. 거기에서 몸들은 법이 알지 못하는 관계를 맺고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낸다. 그 새로운 몸들의 연합이 꿈틀거리며 내디뎌가는 스텝을 따라, 법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 해본 적 없었던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이러한 법과 몸의 안무는 주권 권력의 역사에 곧이곧대로 기록되지 않는다. 엘리펀트룸의 〈만나면 좋은 친구〉에서, 관객과 배우들은 모두 둥글게 둘러앉고 가운데 쌓인 브라운관 텔레비전은 기업들의 광고와 한국 근현대사의 사건들을 담은 뉴스 화면을 비춘다. 마치 그 텔레비전 화면 속 영상들이 이 세상의 수많은 것들을 비추면서도 그 영상을 만들고 송출하기 위해 착취당한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만큼은 비춰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주권의 역사는 주권 권력의 정신만을 기록할 뿐이어서, 정작 그와 함께 춤을 췄던 신체는 소외된다. 그렇다면 신체는, 신체의 역사는 어디에서 찾아질 수 있는가?
몸은 구획을 넘어 흘러넘치고 경계를 넘나든다. 전달, 교통함은 몸의 권능이며 탐사, 초대, 만남은 몸의 일이다. 그리고 연극은 만남으로 인해 성사된다. 연극 안에서 신체는 연출적 언어와 뒤섞이고 각본과 배우의 몸이, 현실과 상상이 마주치며 한바탕 안무를 펼쳐낸다. 그래서 ‘연극-하기’란 종종 법에 신체를 들이박는 일이다. 그 충돌에 휘말려 휘청이는 법과 거기에 재차 따라붙는 몸의 안무를 추적한 끝에 연극은 법과의 춤에서 넘어지거나 혹은 넘어지지 않고 끝내 미지의 세계로 미완의 한 발을 내디딘 어떤 몸을 기억하게 된다. 다만 연극이 몸을 기억하는 방식은 주권 권력의 역사가 그러하듯 제본된 책에 정돈된 언어를 남기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 기억은 연극이 시작되고 무대에 참여한 몸들이 맞닿는 매 순간, 시시각각 변화하는 몸의 떨림 안에서 되살아나고 신체는 바로 그 가운데에서 자신의 역사적 계보를 찾아낸다.
국가와 가부장제라는 강력한 규범적 구조를 뒤흔드는 상상을 풀어놓는 쌍시옷프로젝트의 〈비타민 P〉와 쿵짝프로젝트의 〈그 나쁜 선악과는 어떤 XX가 따먹었을까〉(이하 〈그 나쁜 선악과〉)가 몸에 관한 어떤 진실을 전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연극이 보여주는 신체의 뒤얽힘에서부터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어떤 몸에 관한 기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비타민 P〉가 어떤 규범을 넘어서 만남으로 이끌리는 몸의 감각을 말한다면, 〈그 나쁜 선악과〉는 여성을 예속하는 가부장제의 폭압 아래에서, 신체에 억압을 가하는 규범 앞에서 억눌렀던 분노의 감각을 되살린다. 수천 년간 쌓여온 가부장제의 역사에 맞서 판타지적 상상과 통쾌한 액션을 내세우는 〈그 나쁜 선악과〉가 뿜어내는 에너지는, 설령 문자로 쓰인 역사와 비교했을 때는 허구일지 몰라도,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가부장제의 부조리 앞에서 다 때려치우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눌러왔던 이들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사실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적 분노’에 공감하면서, 관객은 가부장제의 역사에 대한 건조한 서술이 담아내지 못한 또 다른 수많은 몸의 역사를 분명한 사실로 체험한다.
연극이라는 적극적인 만남의 형식 안에서, 바깥을 향해 열려있는 무대와 객석은 다양한 몸들을 불러내고 그렇게 몸들 사이에 접촉이 이루어진다. 그 접촉은 때로는 직접, 때로는 배우의 몸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진다. 〈만나면 좋은 친구〉는 거대 방송사가 송출하는 화면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은 관객들이 얼기설기 쌓인 브라운관 더미 너머 그들과 함께 앉아있는 MBC 비정규직 노동자를 마주 보게 하고, 〈관람모드–있는 방식〉은 아예 버스를 타고 관객이 장애인 격리 시설과 그 시설의 전 생활인이자 장애인 탈시설 운동 당사자들을 만날 수 있게 주선한다.
래빗홀씨어터의 〈당신을 초대합니다〉에서, 관객은 격자처럼 배열된 객석에 앉아 헤드폰을 쓸 것을 요구받으며,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안내 방송의 지시에 따라 관객들은 오른팔 혹은 왼팔을 들어 헤드폰의 작동 상태를 확인받는다. 관객들이 이러한 지시를 따른 이유는 그것이 자신들과 연극 사이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연의 후반, 헤드폰 너머에서 객석 사이에 앉은 배우의 육성이 흘러들어올 때, 그러나 헤드폰이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을 때, 관객들은 자신의 감각을 헤드폰 너머로 뻗는다. 그렇게 헤드폰은 만남의 주선자에서 만남을 가로막는 방해자가 되고, 관객은 카프카의 〈법 앞에서〉 속 ‘시골 사람’과 다르게 하나둘 헤드폰을 벗어놓는다.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연극은 극장으로 또 한 사람을, 연극에서 쉽게 만날 수 없었던 이들을 초대한다. 그리고 관객과 만나게 한다. 그렇게 〈당신을 초대합니다〉는 법으로 재단할 수 없고 말로 다 전해질 수 없는 몸의 감성적 차원을 증언한다.
이번 2021 혜화동1번지 가을페스티벌 “법rule”은 “법과 규범을 점검”하며 사회를, “나”와 “너”의 신체가 모여있는 바로 그 사회를 함께 들여다보고 “법을 다시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구성된 이번 페스티벌 연극들은 통치하는 법과 규범 바깥으로 흘러넘칠 수밖에 없는 신체 사이의 비틀거리는 춤을 그려내었으며, 그러한 시도를 단지 연극 작품이 담고자 하는 이야기를 정함에 그치지 않고 연극이 관객을 포함한 신체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형식에까지 확장함으로써 법규범에 맞서 신체를 기억하고 보존하는 ‘연극-하기’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관객 또한 참여하게 한다.
우리가 언젠가는 주권 권력의 통치가 철저히 무너지는 해방에 도착할 수 있을까? 권력과 통치에 관한 여러 이론에 따르면 전망은 어둡고 목적지는 멀기만 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이때 우리가 딛는 발걸음은 한없이 자유로운 걸음걸이가 아니라, 주권 권력의 통치에 맞서 법과 함께 추는 춤에서 만들어지는 스텝에서 나온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춤에 익숙해져야 한다. 춤추는 법을 몸에 새기고 새로운 춤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1) 대법원 2021. 8. 19., 선고, 2019다297137, 판결.
2) (2021.08.27.). "20년 전 성폭력 사건도 배상 받을 수 있다". 여성신문.
3) 민사소송에서 소멸시효의 항변은 변론주의에 따라 당사자가 주장하여야 하며, 만약 당사자가 주장하지 않으면 법원은 소멸시효 완성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
4) 대법원 2014. 12. 11., 선고, 2012다15602, 판결.
5) 긴 세월 지각변동을 겪으며 구불구불 휘어지고 뒤집히기까지 한 지층을 보다 보면, ‘단단한 대지’라는 표현이 무색하다. 모든 물질은 자기만의 성질에 따라 굳어지거나 휘어지며,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강체solid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 물질의 생동하는 능력에서부터 몸의 생명력 또한 도출된다.
필자소개
갈피: 술과 책을 좋아하고, 연극 보고 나서 기분에 의지해 글쓰기를 좋아하는 공학도. 다양한 예술 분야에 관심을 넓혀가는 중입니다. 연극, 뮤지컬 보느라 책값도 술값도 떨어져 가서 난처해 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