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끓는 소리들과 가동하는 현장 <닻올림 연주회_147>
끓는 소리들과 가동하는 현장
<닻올림 연주회 147_Massimo Magee / 모토코 / 한재석> 리뷰
글_윤태균
2010년 이후 한국 전자음악계의 모든 흐름들을 이 지면에서 한 데 엮어내는 것은 분명 큰 무리이다. 그렇기에 나는 여기서 몇몇의 현상들만을 엮어 한국 실험/전자음악 현장으로 맥락짓고, 이 미약한 단문의 말미에는 실험/전자음악의 형식과 감상을 서술하고자 한다.
‘씬’이라 통칭되는 예술에서의 현장은 사람, 공간, 관계, 작업, 기관, 조직이 서로 얽혀 각자를 침범하는 느슨한 경계 내부로 정의된다. 각 요소들은 서로에게 우위를 가지지 않지만, 현장의 여러 궤도를 가능케 하는 강력한 중력장들을 거론할 수는 있다. 2010년 이후 한국의 실험/전자음악 현장의 중력장들은 기관과 공간이다. 물론 이전부터 지속된 산발적인 행사들과 공연들에 실험/전자음악 작업들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이 사건들은 응집되는 현장을 형성하기 보다는 기성의 장르적 경계- 미술, 대중음악-에 실험/전자음악을 포섭하려는 시도였다. 적어도 2010년 이전 한국에서의 실험/전자음악은 서로에게 공유될 수 있는 작업 과정과 형식을 두고 작업과 작업, 사람과 사람을 관계짓기보다는, 기성 장르의 형식적 연장으로 이해된 것이다. 이러한 국면은 위사(WeSA)와 제로원(ZERO1NE) 등의 조직화된 기관들과 자생적으로 등장한 물리적 공간들에 의해 결정화된다.
앞서 언급한 기관들에 후술한 물리적 공간들은 지역적으로, 국지적으로 필요에 의해 발생했다. 그리고 주 관객층과 작업자들의 성향이 분화됨에 따라 공간의 특성과 위치는 각자의 맥락을 가지게 된다. IDM-테크노-하우스로 연계되는 레이빙 음악들은 춤을 출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을 필요로 하기에 이태원과 합정 등지로 이주하여 지역적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반면 몸의 춤을 필수로 요구하지 않는 실험/전자음악들은 점유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을 요청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은 (비)물리적 플랫폼과 산포된 공간들에서 현장을 구성했다. 물리적으로는 집합되지 않지만, 이들의 공동체적 네트워크와 산발적 교류는 여전히 그들을 하나의 현장으로 범주지을 수 있도록 한다. 이들 작업자들이 각각 음악 레지던시와 미술 레지던시에 입주하여 활동함에도 실험/전자음악이라는 영역을 자신들의 본래적 현장으로 여기는 이유도 이러하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고 분산되어 보이는 이 느슨한 현장에도 물리 법칙은 작동한다. 작업과 작업자들을 잡아당기고 운동할 수 있게 하는 중력이 분명 작용한다. 이 중력은 거점의 역할을 수행하며 자신의 주위에 궤도를 형성한다. 앞서 언급한 몇 개의 기관들도 그러하고, 오랜 시간동안 중력을 행사하며 자신의 물리적 공간에 수 많은 작업의 역사를 축조한 플랫폼도 그러하다. 상수동에 위치한 ‘닻올림’도 축적된 작업의 언어들을 통해 중력을 갖는다. 닻올림은 2000년대 후반부터 실험음악과 즉흥음악 연주회를 개최해 왔다. 당시 공동에 불과했던 현장으로 미루어 보아, 닻올림의 공간은 작업자들에게 미약하지만 중요한 중력장으로 여겨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작업실에 갇혀 있던 작업자들과 그 부산물들은 확산될 거점을 필요로 했고 닻올림이 그 네트워크의 정거장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7월 7일, 오랜만에 방문한 닻올림은 내가 기억하던 그 곳과 별 다른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강력한 자기장으로 현장의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7월 7일의 닻올림은 마시모 매기(Massimo Magee), 모토코, 한재석의 라이브로 채워졌다.
소리는 단순히 비언어적, 추상적 파편이 아니다. 소리는 항상 의미로 가득 차있고 정치적이다. 도시의 소리는 경제적이고 도시학적이며 기술적인 사회의 양상들을 반영하며 미디어 디바이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들은 현실의 바르트적 신화를 환영적으로 전달한다. 마시모 매기의 소리 파편들은 이 정치적 소리 파편들을 한 데 뒤섞는다. 기괴하면서 추상적으로 콜라주된 소리들은 기괴하리만치 얼기설기 매달려 있다. 소리들의 배치로 뭉쳐진 음악은 그 재료들을 적나라하게 전달하기 보다는 마치 유령을 가리키듯 공허한 근원만을 지시한다. 우리는 내내 우리의 몸과 고막을 자극하는 저 환멸나는 도시와 미디어의 소리들을 잠시나마 잊으려 하지만 마시모 매기는 부재로서 이 소리들을 더 강하게 지목한다.
음악은 배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촉매와 음원을 설정하여 파동을 일정한 위상에 잡아두는 것이다. 그렇기에 음악은 항상 의도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연주자와 작곡가에게 이 잡아둠은 항상 불확정적이다. 전자음악에서, 제너레이티브(generative)는 이러한 자율적 생성을 강조한다. 한재석과 모토코의 음악에서 매개변수(parameter)는 작곡가/연주자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이버네틱스 내에 설정된 자신의 알고리즘 내에서, 자율적으로 요동친다. 그렇다면 이 음악은 컴퓨터의 음악일까 인간의 음악일까? 사실 이 질문은 이미 구태한 것이 되었는데, 우리는 이미 어떤 창작에서든 우연적 요소를 위하든, 새로운 질감을 위하든 무작위성을 가능케 하는 테크놀로지적 방법론을 우리의 창작을 위한 신체로서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이제 붓을 든 사람들이 아니라 붓을 쥐어주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사실 사운드를 다루는 작업자들은 그 비가시적 특성의 작업으로 인해 타 현장의 작업자들보다 협업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체현과 감응을 위한 최적의 감각으로서 청각은, 촉각적 스펙타클을 원하는 작업들에 필수적으로 요청되기 때문이다. 이제 사운드 작업이 부재하는 미술관은 찾기가 힘들고, 비주얼 작업이 부재하는 공연장 또한 찾기 힘들다. 아직 잔여하는 작업의 확장성은 사운드라는 재료 혹은 매체가 나아갈 방향을 열어젖힌다. 이 넓은 방향들에서 실험/전자음악의 현장은 제약보다 가능성이 많은 곳으로 이주하려 한다. 가동하는 현장은 쉬지않고 달려가서 어느새 자신이 어디쯤 와있는지 길을 잃을 때도 있지만, 그 본원적 작업의 흥미와 테크놀로지적 충동들은 작업자들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끌 것이라 믿는다. 작업자들이 궤도를 벗어나지 않게 잡아주는 닻올림과 같은 소중한 중력들이 잔존하는 이상은.
필자소개
윤태균( 독립 큐레이터/ 비평가)
예술과 감각 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비평적 태도를 실천적으로 다루기 위해 전시를 기획한다. 주로 담론이 형식으로 나타날 수 있는 지점, 물질이 서사로 주조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기획한 전시로는 ‹디지털 나르코시스›(2020), ‹당신은 단절이 두렵나요?›(2021), ‹아웃 오브 크로스헤어›(2022) 등이 있다. 제도와 자금의 제약이 없는 큐레토리얼 실천을 위해 공간 “팩션(Faction)”의 공동 디렉터로 활동중이며, 한국의 전자음악가를 소개하는 정기 프로그램 ‹플라스틱 밤부›를 운영중이다. ‘2022 대안공간 루프 기획 전시 공모’ 프로그램에 선정 되었다.
공연소개
<닻올림 연주회_147> Massimo Magee / 모토코 / 한재석 일시 : 2022년 7월 7일(목) 오후 8시
장소 : 공간 '닻올림' 협찬 : 서울문화재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