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제0회 어린이연극축제연습 <천사동심파괴>
지인으로부터 다짜고짜 공연예매 링크가 도착했다. <천사동심파괴> 라니. 자고로 동심이란 지켜져야 하는 것이거늘. ‘제0회 어린이연극축제연습’의 타이틀이었다. SNS에 접속 후 ‘천사동심파괴’를 검색했다. 몇 가지 피드가 눈에 띄었다. 공개된 포스터에는 잔뜩 성나 보이는 날개 달린 토끼가 꽉 쥔 주먹으로 당근을 두 동강 내고, 그 옆엔 벌레 먹은 듯 듬성듬성 구멍 난 잎사귀 한 장을 들고 있는 개구리가 황망한 표정으로 눈물을 떨구며 앉아있었다. 강렬한 색감까지 더해져 긴장감이 돌았다. ‘힙하다!’라고 생각했다.
축제를 만든 사람들은 ‘칠더하기’ 라는 팀이었다. 그 팀의 계정으로 들어가 가장 첫 번째 피드를 읽었다. 칠더하기 7+ 는 어린이 연극을 연구하고 어린이를 위한 새로운 공연예술축제를 준비하는 창작자들의 신생 모임이에요.
(중략)
우리는 어린이 극장에서 ‘그들만을 위한’ 세계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행복한 해피엔딩이 아니라, 불행할 수도 있는 ‘진행 중’인 세계에 관심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어떤 것을 어린이도 생각하지요. 슬픔과 미움, 처절한 현실과 공포, 외로움과 소외를요. 외면하거나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았던 세계들이요. 그동안 어린이 연극이 다루지 않거나 숨겨온 세상은 없을까요?
다시, 지금 오늘의 어린이 연극이 필요해요.
한 줄기 빛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내가 찾아 헤매던 어린이 공연을 만난 것이다.
축제는 나흘간 진행됐다. 어린이만을 위한 축제가 아니었다. 양육자를 위한 양육자 포럼연극, 어린이 연극을 만들고 싶은 창작자들을 위한 <어린이 연극 수다회>를 시작으로, 어린이 당사자가 직접 창작자로 참여한 <안 착한 어린이희곡 낭독회 3편>, 그리고 가족 참여형 포럼연극 <이게 다 가족 때문이야>까지, 총 7회에 걸친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었다. 그중 내가 아이가 함께 보기 위해 예약한 공연은 어린이희곡 낭독회 중 <죽었니? 살았니?>라는 작품과 마지막 날 진행된 가족극장 <이게 다 가족 때문이야> 이렇게 2편이었다.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9살 아이와 대중교통을 갈아타며 왕복 세 시간이 넘게 소요되는 거리를 이틀 연속 다녀갔다. 고단했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오히려 양육자 포럼연극과 어린이 연극 창작자 수다회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쉬웠다. 감사하게도 ‘칠더하기’ 계정 프로필 링크에 수다회 때 참석한 창작자들 간의 대화 내용이 상세히 기록돼있었다. 현장감이 살아있는 글을 꼼꼼히 읽으며 어린이 연극에 관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음은 물론이고, 나 또한 양육자이자 창작자로서 어린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부푼 꿈에 가슴이 설레었다.
배우로 활동하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육아에 매진했다. 어린이 공연을 본격적으로 찾아보기 시작한 건 아이가 다섯 살이 되면서부터였다. 이야기에 곧잘 몰입하는 아이와 배우를 했던 엄마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생활로는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와 볼 수 있는 공연을 탐색한 결과 가장 대중적이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연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나는 어린이들에게 인기 있는 유명 그림책을 각색해 무대화한 공연이었고, 또 하나는 역시 어린이들에게 인기 있는 유명 만화 캐릭터가 등장하는 공연이었다. 그 둘은 대중성과 상업성이 결합한 양대 산맥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처음 관람했던 공연은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우리 아빠가 최고야>를 각색한 뮤지컬이었다. 이미 책으로 접했던 이야기가 무대 위에서 입체적으로 펼쳐지자 아이는 신기하고 재밌어했다. 하지만 그 ‘신기함’과 ‘재미’가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림책을 각색한 공연을 몇 편 더 관람한 후 아이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다시 보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고, 만화 캐릭터가 등장하는 뮤지컬을 봤을 땐 과도한 사운드와 현란한 조명으로 예민한 감각이 혹사당한 채 힘겨운 관람을 마치고 돌아왔다. 어린이 공연예술계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어린이의 신체적, 정서적 감각을 섬세하게 배려한 공연은 없나?
‘기-승-전-계몽’으로 끝나지 않는 열린 결말의 공연은 없을까?
당사자가 발화하는 예술성이 풍부한 창작극은 없는 걸까?
공연을 검색하다 보면 화려하고 상업성 짙은 공연들 사이에 소박한 진주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공연을 발견할 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접근성에서 제외되거나, 1~2회차 공연으로 끝나기에 일정이 맞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훌륭한 그림책을 각색한 뮤지컬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인기 캐릭터가 등장하는 공연은 어떤 아이들에겐 색다른 경험을 선사하고 흥을 돋워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원작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담론은 무시한 채 흥미와 볼거리, 그리고 일방적인 교훈 제공만이 주목적이 된 듯한 현재의 대중 공연들은 원작의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공허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입체낭독극 <죽을래? 살래?>에서는 앳된 얼굴의 단발머리 어린이가 동그란 러그 위에 앉아 오늘 자살을 결심했다고 말한다. 어린이의 입에서 직접 ‘자살’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담담하고 경쾌한 목소리로 선풍기를 틀어놓고 잠을 자다 죽겠다며 자꾸만 웅크리고 누울 때, 우스우면서도 가슴이 미어졌고, 처음 본 그 아이를 안아 일으켜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엄마가 일하러 가고 혼자 남은 집에 어른들이 찾아온다. 소독원, 중식 배달원, 심지어 코로나바이러스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아빠까지. 아이가 마음을 돌릴 수 있도록 그들이 큰 도움이 돼주길 내심 바랐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현실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늦은 밤 엄마가 일터에서 돌아오고, 어린이는 다행히 선풍기 바람에 죽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는 어린이들에게 “생명은 소중하고, 자살은 나쁜 겁니다.”라는 교훈을 들이밀지 않는다. 어른들에게 “애들이 자살 같은 걸 생각하지 않도록 사랑으로 보살펴야 합니다.”라며 주장하지도 않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혹시 아이가 외롭고 쓸쓸해서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까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고, 9살 딸아이는 하늘나라에 간 아빠를 만나러 가고 싶었던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국내에서 한 해에 40.5%나 되는 14세 미만 자살률을 떨어뜨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무거운 마음으로 고민했고, 아이는 주인공 언니가 포켓몬 중에서도 잉어킹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었다.
포럼연극 <이게 다 가족 때문이야>는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돼지책>을 활용했다. 사건 해결을 위해 모인 탐정단이 관객과 함께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구성한 교육연극연구소 프락시스의 공연이었다. 과중한 살림 업무로 집을 나간 엄마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가족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찾아보는 과정엔 모두가 왁자지껄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느라 배우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림책의 결말은 엄마가 맡았던 집안일을 식구들이 분담하고 엄마가 자동차 정비를 하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장면에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이 공연에선 더 나아가, 과연 일을 분담하는 것만으로 충분한지, 상황이 바뀌고 난 후 다른 가족 구성원의 마음은 어떨지 함께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여기서도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일방적인 교훈 따윈 없다. 단지 끊임없이 질문을 제기할 뿐이다. 어린이들은 자신을 포함한 가족 구성원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공연 초반 장난기를 주체 못하고 다소 소란스러웠던 한 아이는 후반부엔 온전히 몰입하여 모든 일이 자기 잘못 같다며 울먹이는 동생 역할의 배우에게 사뭇 의젓한 태도로 “네 잘못이 아니야.”라며 진심을 담아 위로했다.
미취학 아동부터 초등 고학년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된 어린이들은 무대 위에서 ‘연기’하지 않았다. 그 순간의 ‘삶’을 살고 있었다. 교육연극의 힘이었다.
형식이 전혀 다른 어린이 공연을 하나의 공연장에서 아이와 함께 이틀에 걸쳐 관람할 수 있었던 건 상당히 신선한 경험이었다. 어린이 공연의 다양성이 고갈되다시피 한 현실 속에서 단순하고 소박한 무대와 조명, 사운드만으로도 충분히 집중할 수 있었고, 아이는 두 번째 공연을 관람한 후 “어제랑 완전히 다른 곳에 온 것 같았어.”라고 말했다. 각 공연의 현실 속으로 완벽히 젖어 들었던 것이다.
두 공연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건 바로 어린이 당사자가 주체가 되어 참여했다는 점이다. 무대라는 공적 공간에서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내어놓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가르치고 훈육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한 명, 한 명 고유한 인격체로서 존귀하게 빛을 발하는 ‘존재’들이었다.
어른과 마찬가지로 어린이도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어쩌면 어른보다 더 강렬하게 부정적 감정을 경험하며 이때 동심은 수시로 파괴된다. 어린이 공연의 의의 중 하나는 이 감정들을 억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느끼며 건강한 방식으로 표출할 수 있는 지혜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양육자와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때 어른은 자신이 인생살이의 해답을 결코 다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고, 어린이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파괴된 동심이 다시금 재건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관람 후 피드백 작성 링크가 도착했다. 나는 연령별 발달 사항을 고려하고 그에 맞는 주제를 다룬 공연이 더 촘촘하게 준비되면 좋겠다는 것과 공감적 관계 형성을 위한 비폭력 대화를 경험할 수 있는 교육연극이 개설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적었다. 그리고 이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방향을 함께 모색해보는 공연도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뒤늦게 가져 봤다. 충분히 고민하고 연구했을 창작자들에게 감사와 응원의 인사만을 전하고 싶었지만, 앞으로 제1회, 2회, 그 이후에도 계속될 어린이연극축제를 기대하는 마음에서였다.
<천사동심파괴>를 통해 예술성 있고, 참여적이며, 어린이뿐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세계까지 아우른 작품들을 만들고 발전시키기 위해 오랜 기간 고민해온 창작자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매우 기쁜 마음이다. 기회가 생긴다면 나도 그들과 함께 어린이극을 힘껏 고민하고 싶다.
수다회에 참석했던 한 창작자의 의견에 깊이 동감하며, 그날의 기록을 빌려 리뷰를 마친다.
그래서 우리는 힙해지자는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어린이 연극이 젊은 연극의 주류가 되거나, 한국연극의 주류가 되거나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상상을 해봅니다.
제0회 어린이연극축제 연습️ <천사동심파괴> 5.18(목) 오전 11시 양육자를 위한 즉흥공감 포럼연극 < 해방보다 먼 억압보다는 가까운 > 조커 #원성원 배우 #김현정 #신상용 외 구성 #교육연극프락시스 *참가비 10.000원 5.18 (목) 저녁 7시 어린이연극을 만들고 싶은 창작자들의 티타임 < 어린이 연극 수다회 > 패널_ #칠더하기7+, 김숙희 (어린이극 제작자), 박재연 (미술사연구자/그림책 번역가), 박세련 (연출가) 사회_ #정진새 (어린이극 연출가) 안 착한 어린이희곡 낭독회 3편 5.19 (금) 저녁 7시 30 <그레텔과 헨젤> Suzanne Lebeau 작 원지영 번역/연출 배우_#김지연 #변승록 #김현정 5.20 (토) 오후 3시 <죽었니? 살았니?> 강훈구 작/연출 배우_ #김솔지 #현상희 5.20 (토) 오후 6시 <샌드위치> 정진새 작, 한아름 연출 배우_ #이하영 #최유진 5.21 (일) 오후 2시 낭독극 <그레텔과 헨젤> 5.21 (일) 오후 4시 가족극장 <이게 다 가족 때문이야> *참가비 2인 가족 기준 10,000원 구성_#교육연극프락시스 프로그램 총괄 #원의안과밖 축제를 만든 사람들 #칠더하기 |
최승미
불현듯 방문했던 죽음과 대면하고 매 순간 갱생 당하는 육아의 나날을 보내다 다시, 연극을 합니다. 찰나의 생을 더불어 기쁘게 살아갈 방법에 대해 모색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