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시대에게 쫓겨나기 2. 인포숍카페별꼴 / 창문카페별꼴
시대에게 쫓겨나기
2. 인포숍카페별꼴 매니저들
예술계 동료들이 공간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소식이 자주 들리는 시절입니다. 지대 상승으로 인한 젠트리피케이션 얘기가 아닙니다. 기관장이나 담당자가 바뀌고 정책이 바뀌었다든지, 사실 원래 기관의 소유의 공간이고 이제 새 쓰임을 찾겠다든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그 이유들 앞에선 공간을 조성하기까지의 맥락도, 그 공간을 꾸려온 예술가들의 노고도, 시민성 그 자체도 바람 앞의 촛불 같습니다. 문득, 자본에게 쫓겨나는 것을 넘어 한 시대에게 쫓겨나는 기분이 듭니다. 인디언밥 기획연재 <시대에게 쫓겨나기>는 독립예술에게 필요한 ‘창조적 공유지’와 비슷한 역할을 해온 공간들이 어떻게 지금 예술가들을 쫓아내고 있는지 살핍니다. 그 안에서 어떤 패턴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와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상상해보고자 합니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과 함께하는 독립예술집담회까지 이어지는 이번 시리즈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글 : 인포숍카페별꼴 매니저들
공간이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 않을 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인포숍카페별꼴은 월곡에 있는 작은 공간이다. 2011년에 처음 문을 열 때는 중증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울릴 수 있는 카페로 기획되었지만, 차츰 소수자와 다양성에 대한 여러 기획을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휠체어가 드나들 수 있는 턱없는 공간과 휠체어 출입 가능 성중립 화장실은 늘 기본 조건으로 갖춰놓았다. 진(zine)이라는 매체를 좋아하는 매니저들이 만든 진 라이브러리가 있기도 하고 관련 워크숍을 열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카페 안에서 정말 많은 일들을 했던 것 같다. 브라우니를 굽고 커피를 로스팅하는 동시에 영화 촬영도 하고 예술 창작 워크숍도 열고 전시와 상영회도 꽤 했다. 매니저들이 고전 인쇄기술에 심취해있을 때는 40년 전 프린트 고꼬(print-gocco) 잉크를 사다 가리방이라고 불리는 등사인쇄를 밤새 하기도 했다. 불 꺼놓고 실크스크린 감광도 하고 인쇄도 했다. 수어통역 영상이나 사진 촬영을 할 때는 스튜디오처럼 쓰기도 했고, 가끔 이런저런 라이브 방송을 하기도 했다. 행사가 있을 때는 카페 문을 닫고 비건 음식을 차려놓고 와구와구 나누어 먹으며 이야기 나누었다. 인포숍(infoshop)으로 운영하고 있을 때에는 외국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고, 즉흥적으로 워크숍을 열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가지기도 했다. 코로나 이후 카페로 열어두는 것을 조금 쉬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안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기는 하다.
카페로 치자면 우리는 동네에서 많이 이상한 카페였다. 저렇게 장사를 해서 되겠냐는 시선과 동시에 (장애인들이 드나드니까) 좋은 일 하는 곳이니 지켜줘야 한다는 시선(?)을 동시에 받았다.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장사 잘 되는 카페는 당연히 아니었고, 정말 멀리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물어물어 찾아오는 공간이었다. 한 시간도 넘는 거리를 장애인 콜택시로 이동해 카페에서 소개팅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크로스 드레서 손님이 와서 조용히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다가 가기도 했다. 근처 동덕여대 학생들이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를 하기도 했다. 그 사이사이에 지역 주민들이 와서 인권영화제 포스터를 보고 ‘인권이 뭐예요?’ 라고 묻기도 했다. 평생 인권이라는 단어를 모르고 살아도 가능한 삶과, 전혀 그렇지 않은 삶들이 가끔 겹치는 곳이었다. 오는 손님들은 적었지만 그만큼 소중한 느낌이 있었다. 여기를 알고 찾아왔을 정도면 그래도 어느 정도의 감수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 최소한 여기에서는 월경컵 사용에 대해 크게 떠든다고 해서, 동성 연인의 손을 잡고 있다고 해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낯선 사람에게 눈총을 받거나 뺨을 맞을 일은 없겠지 하는 그런 불확실한 믿음. 그래서 어떤 손님들은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카페에 있다가 나중에는 동료가 되고 친구가 되고 매니저가 되고 했던 것 같다.
별꼴은 카페였지만 카페가 아닌 것 같은 방식으로 운영해왔다. 여러모로 그랬다. 어떨 땐 카페라는 건 그냥 핑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상해 보였고 또 정말로 핑계일 때도 있었다. 이윤이라고 할 것이 별로 없거나 항상 모자랐기 때문에 월세는 매니저들끼리 모아서 냈다. 그런 우리가 서울시가 관리하는 공간에서 카페를 운영하게 될 줄은 정말로 몰랐다. 이렇게 오래 하게 될 줄도 몰랐고, 서울시가 공간이 있는 공원 전체를 없애버리기로 결정하면서 그만두게 될 줄도 몰랐다.
창문카페는 서울 혁신파크라는 꽤 큰 규모의 공원 안에 있다. 그 안에 있는 많은 건물 중 하나, 그 안에서도 청년허브라는 중간지원조직이 운영하고 있는 공간 안에 있는 카페였다. 이 공간은 카페를 운영하고 싶은 청년들이 시험 삼아 운영해볼 수 있게 공모사업을 통해 운영주체를 모집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취지는 그랬지만, 안타깝게도 카페라는 공간은 그렇게 시험 삼아 운영을 한 다음 나중에 진짜로 자기 공간을 잘 꾸릴 수 있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운영이 배우고 싶다면 차라리 대기업의 체인 시스템 아래에서 일을 시작하며 배우는 것이 훨씬 합리적일 수 있다. 특별한 메뉴를 판매하는 식당이나 베이커리라면 모를까, 카페 영업은 메뉴도 중요하지만 지역과 공간이 매출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 아주 비슷한 장소에서 카페를 열 것이 아니라면 시험 삼아 해보는 경험은 그냥 거기에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지역에서 10년 전에 이미 망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공간을 계속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잘 알고 있었다. 또 창문카페에서 운영을 열심히 실험해 다른 곳에 카페를 만들어 성공하고 싶은 생각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그냥, 우리의 방식대로, 우리가 즐거운 그 상태로 다른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처음 창문카페를 운영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조금 설레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들었었다. 드나드는 사람이 생각보다 너무 많았던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과 우리끼리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편하게 있고 싶다는 마음이 늘 부딪치곤 했는데, 창문카페는 애초에 눈에 띄지 않게 있는 것이 어려운 장소였다. 이곳은 지역주민에게 열린 공간이었다. 드나드는 사람들의 연령대도 몹시 다양했다. 코로나 이후 폐쇄가 되었지만, 누워서 쉴 수 있는 플로어 공간이 있었고 그곳에서 낮잠을 자는 주민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주말이면 근처 북한산 등산을 마친 중년의 등산객들이 찾기도 했다. 종교 모임을 갖는 사람들도 있었고, 전기 콘센트에 네일 램프를 연결해 네일아트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공용주방에서 부침개를 부쳐서 파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카페에서 무언가를 사 마시지 않아도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무더위나 혹한을 피해 들어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너무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는 계급이 섞이는 곳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누군가에게는 2천원대였던 아메리카노 한 잔의 가격이 너무 비싸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너무 싸서 놀랄 만한 것이었다. 왜 이렇게 비싸냐는 타박과, 왜 이렇게 싸게 파시냐는 놀라움 섞인 말을 하루에도 여러 번 들을 수 있었다. 한번도 아인슈패너라는 단어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있는 반면, 너무 익숙하게 주문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다가와서 LGBTQ+가 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단어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공간 안에서 카페를 열고 공간을 ‘맡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인 동시에 꽤 책임감이 따르는 일이었다. 이곳을 어떤 곳으로 만들어 어떻게 소개하면 좋을까? 함께 여기에서 머문다는 사실로부터, 서로에게 어떤 작은 변화나 배움이 일어나면 좋겠다는 막연한 상상이 있었다. 카페가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뭘 할 수 있을까? 창문카페를 운영하던 첫 해에 한 일은 매장에서 일회용품을 전혀 제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 혁신파크에는 여러 건물에 여러 개의 카페가 있었지만 일회용품 없는 카페는 우리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매일매일 손님들의 불평과 불만, 때로는 당장 커피를 가지고 바깥에 나갈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분노와 맞닥뜨려야 하기도 했다. 정부 차원의 일회용품 규제가 생기기 전이었기 때문에 카페에서 플라스틱 컵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은 손님들이 충분히 화를 내고도 남을 일인 것 같았다. 감히 어떻게...? 몇 년 뒤에야 우연히 알게 되었지만 블로그와 네이버 평점 등에 뭐가 그렇게 오만하냐, 플라스틱 안 쓰는 게 벼슬이냐(?)는 덧글이 쏟아지기도 했다. 어차피 네이버에 가게 등록을 하지도 않은 우리로서는 별로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누가 해주셨는지 아직도 모른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정부에서 매장 내에서 플라스틱 컵을 사용하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왔는데, 그제서야 사람들은 뉴스에서 봤다, 요새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 일선에서 많이 힘드시죠? 라며 어쩔 수 없고 싫지만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는 시켜서 한 일이 아니고 법으로 정해지기 한참 전에 먼저 하고 있었다고 반발하고 싶었지만 어쨌거나 플라스틱을 다른 카페에서도 안 쓰게 되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런 낯선 일을 받아들이는 데 우리가 아주 작은 부분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한다.
카페에서 여러 시행착오와 부딪침을 겪으며 우리는 어떤 분위기를 만들었던 것 같다. 매니저들 중 대부분은 예술과 연결된 일을 하거나, 창작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몇몇은 공간을 운영하는 일을 어떤 무형의 창작처럼 느끼기도 했다. 아침에 문을 열고 음악을 틀고 손님을 받아 음료를 만들면서 하는 일은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이었지만, 우리는 거기에 어떤 분위기,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순간들 같은 것을 만들고자 했다. 네온 간판에 무지개 깃발을 꽂아둔다든지, 다양성과 소수자와 관련된 이벤트의 포스터를 붙여놓는다든지, 관련된 음악을 튼다든지 했다. 공간에 머무는 잠깐의 시간에라도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무의식적인 배움 같은 것이 일어나면 어떨까 했다. 카페 공간을 이렇게도 운영할 수 있고, 공간 운영자가 이렇게 덜 친절할 수도 있고, 장애가 있는 손님이 탁자를 쾅 쳐도 사실 그렇게 위험하지 않을 수 있고, 어린아기가 울어도 괜찮고, 나이 많은 손님이 종일 앉아 컬러링 북에 색칠을 하고 있어도 괜찮고, 조금 이상한 옷을 입고 있어도 괜찮고... 여기에서 누구라도 안전하게 존중받으며 있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했다. 손님들이 줄 지어서 왔다가 무지개 깃발 앞에서 사진을 찍어갈 때, 동성 커플이 손을 꼭 잡고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수어를 쓰는 손님, 시각장애가 있는 손님, 휠체어를 이용하는 손님이 같은 공간에서 편안하게 있을 때, 누군가 우리가 만든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왔을 때, 나이 지긋한 손님이 지금 틀어놓은 음악이 너무 좋다고 알려줄 수 있냐고 말을 건낼 때(매니저들은 돌아가며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두었는데 그게 바흐일 때도, 모세스 섬니일 때도, 스테레오랩일 때도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분위기에 대체로 만족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창문카페 운영을 하는 동안 다이애나랩과 함께 차별없는가게 프로젝트를 기획했다.(차별없는가게 웹페이지 wewelcomeall.net) 소수자에게 편안한 공간이 모두에게 편안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당연한 분위기가 더 넓게 퍼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많은 소규모 공간들이 이 프로젝트에 함께 하고 있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다양한 삶을 사는 이들이 서로를 보며 이런 삶도 있군, 괜찮다 라고 느낄 수 있는 어떤 찰나를 만들 수 있었던 것으로 만족한다. 더불어 마지막까지 창문카페별꼴을 공동운영 했던 매니저들 8명이 인건비를 받으며 안전한 분위기에서 일할 수 있었다는 것 또한 나름의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카페는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정말로 많았다.
이것이 가능했던 바탕에는 국가 소유의 건물을 싼 값이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있었다. 공간을 운영하는 우리들에게도 공간에 드나드는 사람들에게도 그랬다. 자본의 논리와 상관없이 값을 지불하지 않거나 아주 적은 금액을 내고도 공간을 이용하는 것이 가능한 곳이 있다는 것은 모두에게 너무도 필요한 일이다. 음료를 사마시지 않고도 앉아 있을 수 있는 창문카페별꼴 공간 밖으로 나가면 공원에서 조깅을 하거나 동물과 산책하는 사람들, 앉아서 도시락을 먹거나 악기 연습을 하는 사람들, 킥보드를 타는 어린이들과 유아차가 늘 있었다. 혁신파크는 올해 10월에 문을 닫고 복합쇼핑몰과 반값 아파트가 된다. 인근에 다른 공원이나 이 정도 규모의 도서관 같은 공공시설물은 없다. 매일 공원을 이용하는 이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나? 이미 몇 년 전 공원 안에 있던 다른 건물에 싼값에 입주해 있던 청년들이나 단체들은 계약만료로 공간을 떠나야 했다. 건물은 텅 비어있고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이윤의 논리에서 벗어나 무언가를 할 기회를 가지는 것, 돈을 지불하지 않고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지는 것. 그럴 수 있고 그것이 당연한 권리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슬픈 일이지만 그래도 씩씩함을 잃지 말아야겠다. 카페가 예전에 이루어놓았던 반짝이는 순간들을 생각하면 유쾌해진다.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계속 연결되어 이어지리라는 것을 생각한다.
필자소개
인포숍카페별꼴을 공동 운영하는 매니저들 하마무, 무밍, 지로, 승구, 세현, 유희, 유선, 은혜. @infoshop_cafe_byulkk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