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어딘가로: 프로젝트 여기에서저기로<한남 제3구역_이주의 날 파이널>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어딘가로
프로젝트 여기에서저기로 〈한남 제3구역_이주의 날 파이널〉
글_김은우
당신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시나요?
어떤 장소와 그 안의 흔적들이 모두 사라진다는 것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보광동은 2003년 한남 뉴타운 지구 중 제3구역으로 지정된 이후 2024년 첫 주민 이주를 시작했다. 프로젝트 여기에서저기로는 이런 재개발을 앞둔 보광동을 소재로 2021년부터 <한남 제3구역>이라는 지역기반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2021년 보광동을 무대로 한 온라인 줌 연극과 2022년 두산 아트랩 공연, 2023년 보광동의 갤러리 아쉬랩에서 월간 연극, 그리고 2024년 5월에는 보광동을 기록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여정의 마지막을 나누는 <한남 제3구역_이주의 날 파이널>을 공연했다.
프로젝트 여기에서저기로는 남선희를 중심으로 한 프로젝트형 창작집단이며 연출이자 배우인 남선희는 2019년 겨울부터 보광동에 살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떠나와야 했던 남선희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출발한 물음은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이주’의 현대적인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보광동의 역사 속에서 ‘이주’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일제의 용산 일대 군사기지화 정책으로 인해 1916년 현 현 용산구 용산동 6가 일대의 둔지미 마을 주민들이 강제로 땅을 빼앗기고 보광동으로 이주, 정착하였다. 또한 1940년대 말부터는 북한에서 내려온 주민들이 정착해 살기 시작했고, 한국 전쟁 후에는 상이용사 주택, 전재민 주택 등이 건축되면서 새로운 이주민들이 정착했다. 1960년대 이후에는 농촌 지역 이주민들이 유입되며 기존 민가와 공공주택 등을 허물고 1~2층 규모의 단독주택이 유행하기도 했으며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보광동에 외국인 이주민들까지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긴 이주의 역사를 가진 보광동의 이번 재개발을 들여다보게 하는 <한남 제3구역>은 ‘이주’라는 일이 완전히 타자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감각하게 한다.
“누군가의 아지트이자 안식처인 이곳은 거대한 계획에 의해 이제 사라질 준비를 시작한다. ‘나’는 오늘도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2019년 12월 보광동에 와서 24년이 되는 동안 보광동 안에서 3번의 이사를 하고 보광동에서의 마지막 이사를 앞둔 그녀는 처음에는 다양한 개성의 이웃들이 재밌어서 연극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한남 제3구역>은 실제 보광동에 살고 있는 예술가, 어린이, 외국인 등의 인터뷰와 지역 리서치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녀는 예술가로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자신처럼 보광동에서 만난 사람들 역시 그들이 살아가고 싶은 모습으로 살기 위해 매일 고군분투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보광동의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엿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한남 제3구역>에서 보광동의 ‘길’이 가지는 의미는 단지 이동을 위한 통로를 넘어선다. “길은 사람들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자, 길을 통해 인간들이 서로 교류함으로써 문화를 만들어 가는 중요한 통로이다. 이러한 길은 단순한 물리적 대상이나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뛰어넘어 인류의 문화와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의미를 담고 있는 중요한 대상이다.” 1) 보광동의 길에서 만나는 풍경들과 사람들은 프로젝트 여기에서 저기로에게 지속적인 물음과 이야기를 제공한다. 주민 이주가 확정 실시되자 보광동의 길에는 엄청난 쓰레기들이 쌓이기 시작했고 프로젝트 여기에서 저기로는 그런 길의 풍경에서 받은 영감을 이번 파이널 공연에 녹여냈다. 실제로 이주의 날 공연을 보러 갔을 때 길에 갖가지 가전과 가구, 생활 쓰레기들이 엄청나게 쌓여있었다. 오랜 시간 어떤 장소를 이루었던 것들이 해체되고 펼쳐져 있는 광경은 보광동이라는 장소가 묵혀온 시간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2024년 <한남 제3구역_이주의 날 파이널> 공연은 그런 보광동의 길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버려진 것들’이라는 주제 아래 1부와 2부로 나뉘어 공연이 진행된다. 1부는 2구역과 3구역 사이, 곧 사라질 곳과 남아있을 곳의 경계를 관객과 함께 걷는다. ‘보광동 느티나무 쉼터’에 모여서 ‘그냥 갈 수 없잖아 슈퍼’, ‘도깨비 시장’ 등을 지나 아쉬랩 갤러리로 가는 길이었고 헤드폰을 끼고 걸으면서 장소에 대한 도슨트를 들을 수 있었다.
땅과 하늘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따라 어떤 것은 남고 어떤 것은 사라져야 한다는 것, 재개발이라는 인위적인 과정의 생경함을 장소를 걷고 눈에 담으면서 감각하게 했다. 서울시는 2007년 33곳의 뉴타운 지역을 선정하며 재개발 대상 지역을 ‘노후 불량 주택 밀집 지역, 미(저)개발, 도심이나 인근 지역의 무질서하게 형성된 기성 시가지’로 정의했다. 나름의 규칙과 필요를 통해 형성되어 온 삶의 공간이 ‘노후’, ‘불량’, ‘미개발’ 같은 단어로 정의되면서 납작해지고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전 치르는 애도의 의식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갤러리에 도착하면 2부 낭독극 <버려진 것들>이 시작된다. 버려진 것들의 대화로 진행되는 희곡은 남선희가 쓰고 연출했고 김선기와 양대은이 연기한다. 보광동에서 40년을 살았던 LG골드스타 싱싱 냉장고와 한남동에서 보광동으로 3번의 이사 후 버려진 지펠 냉장고의 대화를 통해 이 장소가 품었던 삶과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냉장고들은 버려지기 전에 같이 살았던 인간들을 회상하며 대화한다. 냉장고를 처음 마련하고 행복해하던 젊은 시절부터 삶의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노부부, 김치 대신 외국 향신료와 후무스, 고수를 가득 담았던 외국인 가정,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같이 사는 쉐어 하우스, 한때는 도깨비불이 번쩍이는 것 같았던 도깨비 시장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조금은 이해하고 배려하게 된다. 그러다 문득 자기들이 길가에 버려졌다는 것을 자각하거나 애써 부정해본다. 보광설비를 기다리며 조금만 손보면 다시 쓰일 수 있다는 희망도 가져보지만 길가에 점점 쌓이는 다른 쓰레기들을 보며 이 장소에 남겨진 다른 모든 것들과 같이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 왜 우리만 여기에 이렇게 남은 거야?
- 더 이상 필요가 없으니까.
- 그건 누가 정하는 거야?
최신식 냉장고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새롭고 좋았던 것이 오래되고 낡은 것이 되어가는 것은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변한 것이 반드시 사라져야만 하는 것인가는 의문이 든다. “그건 누가 정하는거야?”라는 대사는 내가, 우리가 구분지어왔던 것, 좋고 나쁨, 남겨둘 것과 삭제할 것에 대한 기준이 과연 어디서 온 것인가 질문하게 한다. <한남 제3구역_이주의 날 파이널> 은 2구역과 3구역의 경계선 위에서, 사람들이 남기고 간 거대한 쓰레기 더미 위에서 그것을 질문하게 한다.
2천 331세대 규모의 아파트가 들어서는 이번 개발과 같은 아파트식 개발은 단기간에 도시의 모습을 바꾼다. 지역 나름대로 형성된 문화적 양상은 일부가 사라지고 사람들의 삶 역시 큰 변동을 맞이할 것이다. 6.25 전쟁 이후 인구가 밀집되면서 보광동에서는 하꼬방이라는 주거 형태가 유행했다고 한다. 하꼬방 유행으로 제재소와 철물점 장사가 매우 잘 되었던 당시를 회상하던 한 주민의 인터뷰를 발견했다. “지금 서울시에서 뉴타운이라고 하는데, 보광동은 옛날 그때 이미 뉴타운이나 마찬가지예요.” 2) 무언가 스러지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 계속 반복되는 이 세상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기억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과거에서 우리의 미래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듯이 ‘지금’ 사라져야 하는 것들이 나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나 역시 언젠가 잊혀지고 사라져가야 할 뿐인 존재가 아니라는 ‘위로’로 돌아올 것이다. 멈추거나 뒤쳐져서는 안되는 이 세계에서 항상 어디에서 어딘가로 바삐 걸어가는 우리들에게 한 번쯤은 멈춰서 뒤를 돌아보기를, 낡고 오래된 것들을 봐주기를 청하는 <한남 제3구역>의 시선이 소중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1) 서울특별시 뉴타운 민속지, 보광동 사람들, 보광동 1권, 김우림, 2008, 서울, 서울역사박물관 65쪽
2) 서울특별시 뉴타운 민속지, 보광동 사람들, 보광동 1권, 김우림, 2008, 서울, 서울역사박물관 68쪽
필자 소개
김은우
배우, 연극을 만들고 보는 사람.
연기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연극. 그러다 연기할 장면을 자꾸 글로 쓰게 된다.
어쩌다보니 이것저것 다양한 작업 속에 녹아드는 자신을 발견하고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인생이 재밌다고 느끼고 있다.
앞으로도 그렇게 다양한 사람과 작업들을 만나고 알아가고 싶다.
작품 소개
<한남 제3구역_이주의 날> 파이널
일시 : 2024. 5. 1.(수), 5. 4.(토) 17:00, 20:00 장소 : 아쉬LAP high(대사관로6가길 28-12) 출연 : 김선기, 양대은 전시 : 남선희, 우주현, 이수민, 조현희 무대/조명 : 김지우 음향/안전 : 이우람 사진 : 최도아 디자인 : 한사빈 도움 : 안지민, 최형욱, 한희선 공간후원 : 아쉬Lab high 후원 : 서울문화재단, 서울특별시 |
본 리뷰는 2024년 거리예술·서커스 창작지원사업 선정작-2024년 서울문화재단 거리예술·서커스창작지원사업 선정 프로젝트 <일상공간예술비평:잇몸 잘 쓰기>-의 일환으로,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