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7. 22. 22:09ㆍFeature
[기획연재] 극장은 불타고 있다 #관객편
추신. 우정과 편애를 담아서
글_차슬기
지난 2월부터 시작된 미투 운동은 단일하고 견고하게 여겨지던 ‘연극’이라는 어떤 개념을 깨부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투 운동은 연극 무대 위에서 현재 진행형이고, 또 한편으로 ‘고발’ 이후의 삶을 구성해나가는 것 같습니다. 여성이자 관객인 저는 객석에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경험합니다. 왜 이제야 말할 수 있었는지, 그토록 침묵하도록 만들던 그 카르텔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말해도말해도 불충분한 것 같은 이 먹먹함은 무엇인지 하는 분노와 함께, 이제는 말할 때가 왔다고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입들을 보며 밀려오는 변화의 힘을 느낍니다.
관객은 연극계 내의 폭력과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사람일까요? 무대 바깥에 있는, 객관적인 존재일까요? 배우와 극단, 그리고 연극에 대한 애정과 경외가 누군가의 폭력을 공고히 만드는 허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과 수치심을 어떻게 넘어서야 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을 찾고, 연극을 보는 건 어쩌면 무대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모두 연루되어 있다는 무력감과 책임감 때문일까요.
지난 겨울 이후, ‘여성’이자 ‘연극인’인 ‘나’에 대해서 고민하는, 그것이 설사 내러티브를 갖지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무대 위에서 발화하고자 하는 작품들을 보곤 합니다. 정치나 혁명 혹은 진보의 주체가 남성성의 얼굴을 하였을 때 배제되었던 비-남성성의 얼굴들이 연극 무대 위에서 날것으로 등장하는 걸 보면, 여전히 무대가 ‘안전한’ 세계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떠들고 외치고 말하고 망설이고 춤추는 몸들을 보면서 여전한 연극의 힘을 깨닫곤 합니다. 이 힘을 누릴 마땅한 권리가 있다는 것도요.
▲지난 2월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에서 열렸던 관객 #with_you 집회 모습
같은 자리에 모여 같은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갖는 힘이 있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되었습니다. 낄낄 웃고 탄식을 뱉어내고 경악을 하면서 객석에서 공유되는 미묘한 연대감. 눈을 마주치지도, 말을 섞지도 않았는데, 그저 같이 앉아서 동시에 관극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형성되는 우정이 있다는 것을. 물론 모든 연극이 다 그런 것도 아니고, 또 어쩌면 제가 자기검열과 자기방어로 인해 ‘안전한’, ‘안전할 거라’고 느끼는 작품들만을 보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끼리의, 무대 위의 배우와 관객 사이의 익명적이면서도 무조건적인 연대 의식을 느끼고는 합니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근하게.
무대 위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려오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드러나지 않던 관객들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뛰어난’ 작품이라는데, 여성인 캐릭터와 배우를 쓰는 방식이 지나치게 소모적이고 단편적이어서 어딘가 불편했던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말할 수 있겠습니다. ‘뛰어난’ 작품이라는데 나만 ‘뛰어난’ 걸 못 알아보는 것 같아 몰래 삼키던, 모른척하던 그 감각의 지점들을요.
▲ 제1회 페미니즘 연극제 참가작 <미아리예술극장> 공연 사진 (ⓒ박동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누군가는 이전과 변함없는 작품들을 만들겠죠. 이전과는 변함없는 방식들로요. 그런 것에 창작자의 나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게으름에는 별다른 자격이 필요 없으니까요.
누군가는 제게 너는 이미 특정한 관객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네, 저는 특정한 관객입니다. 이전 같았으면 고민하고(!), 반성하고(!!), 우물쭈물거리다 결국 “아닌데..”(!!!!)를 내뱉었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그런데요?”라고 반문하겠습니다. 여전히 난폭한 주제에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는 이 세상에 혼돈과 혼란을 일으키는 작품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연극’으로 숭배 받았던 이상한 환상과 폭력이 우스꽝스럽고 비루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우정과 편애를 담아서 응원합니다.
필자_차슬기 소개_미미함으로 계속해보겠습니다. |
※ 본 기사는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7월 포럼 ("미투 이후 연극계, 나의 현장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에서 발표된 글을 수정 보완하여 게재하였습니다.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에서는 5월부터 "극장은 불타고 있다" 는 타이틀 아래, 공연예술 장르와 개별 작품에서 나타나는 성폭력 및 성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미투(metoo)운동으로 불거진 공연예술계의 한계와 문제점들에 대해 인디언밥은 지속적으로 논의할 예정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극장은, 거리는, 광장은 불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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