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속의 현실 또는 현실 밖의 현실. DDISY 카페

 현실 속의 현실 또는 현실 밖의 현실. DDISY 카페
  • 조원석
  • 조회수 802 / 2007.09.20

 현실 속의 현실 또는 현실 밖의 현실.

  DDISY 카페 - 연출 강화정

 

경계가 있다면, 경계를 짓는 것은 시간도 아니고, 공간도 아니다. 시간은 끊임이 없고, 공간은 하나다. 그렇다면 경계를 짓고, 구별하는 것은 무엇일까? 혹 시선은 아닐까? 시선은 아마도 개인의 시선일 것이다.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이 어느 고장을 들른다. 여행자의 시선에는 낯설게 비치는 곳이다. 하지만 그 지역에 사는 사람에게는 낯익은 곳이다. 개인의 시선으로 보면 같은 장소라도 전혀 다른 곳이 된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 고장은 낯익은 곳일까? 아니면 낯선 곳일까?  개인이 아닌 ‘우리’라는 시선이 가능하긴 한 걸까? 가능할 것이다. 주관도 있지만 객관도 있으니까.


앞서 시간은 끊임이 없고, 공간은 하나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의 시선으로 볼 경우를 말한다. 하지만 개인의 시선으로 본다면 시간의 끝은 죽음이고, 공간은 안(자신이 있는 곳)과 밖(자신이 없는 곳)으로 나뉜다. 경계는 이렇게 개인의 시선을 따라간다. 그런데 이 개인의 시선을 방해하는 곳이 있다. 개인의 시선을 방해하고 ‘우리’의 시선을 강요하는 곳.


카페. 카페 디아더. 씨어터 디아더의 안에 있는 ‘DDISY 카페’가 그 곳이다. 처음에는 카페 디아더 안에 DDISY 카페가 있었지만, DDISY 카페의 파티가 열리면서 카페 디아더는 DDISY 카페 안으로 들어간다. 즉, 카페 디아더가 DDISY 카페의 무대가 되는 것이다. 안이 밖이 되고, 밖이 안이 되면서 공연은 시작 된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관객도 이 공연의 배경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검은 옷을 입은 관객들. 장례식을 연상하게 하는 복장들. 그런데 장례식에는 누가 오는가? 죽은 자를 아는 사람들. 또는 죽은 자의 가족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여기에 온 관객들은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낯선 사람들이 낯익은 사람들이 되는 것. 그것은 검은 옷 하나로 충분하다.  낯선 사람들이 낯익은 사람들이 되는 방식은 개인이 ‘우리’가 되는 방식을 따른다. 즉 검은 옷은 일종의 유니폼이다. 유니폼은 또한 장례식이라는 관습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국인이라는 유니폼을 입고 외국에 나가듯이. 그리고 외국에서 만나는 한국인은 한국에서 만나는 한국인이 아닌 전혀 다른 한국인이고, 이미 알고 있는 반가운 대상이 되듯이. 유니폼은 관습이고, 개인이 ‘우리’가 되는 방식 중에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이 ‘우리’라는 것은 혹시 거대한 개인이 아닐까? 거대한 개인이 아닌 ‘우리’가 가능할까? 이 궁금증을 풀기 전에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가자.

 

 장례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음식이다. DDISY 카페 역시 음식을 내놓는다. 검은 옷을 입고 먹는 음식은 어떤 맛일까? 맛이 없다. 맛이 형편없다는 것이 아니라, 맛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먹는 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죽음 앞에서 음식은 맛이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무게에 더 큰 무게를 둔다. 왜냐하면 그 무게만큼 삶이 연장되기 때문에. 또는 그 무게만큼 죽음이 연장되기 때문에. 그런데 이것은 너무 슬프다. 죽음의 연장으로써의 삶. 맛이 아닌 무게로 먹는 음식. 무게가 아닌 그 이상의 것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필요하다. 바퀴벌레를 먹는 빠삐용처럼.  빠삐용이 바퀴벌레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생의 욕구도 아니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아니다. 바퀴벌레는 그 무게 이상의 것을 빠삐용에게 제공했던 것이다. 아니, 빠삐용은 바퀴벌레에서 무게 이상의 것을 섭취 했던 것이다. 무게보다 더 무거운 것. 무게보다 더 무거운 것을 찾기 위해 무거워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빠삐용이 갈망했던 자유처럼 가벼워지는 것. 죽음 앞에서 가벼워지는 것, 죽음 앞에서 개인은 있을 수 없다. 죽음만이 아니다. 사랑 앞에서, 증오 앞에서, 개인은 있을 수 없다. ‘거대한 개인’도 있을 수 없고 오직 ‘우리’만이 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증오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여기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는 파티”를 하고 있는 DDISY 카페에서 ‘누군가’는 바로 ‘누구나’가 될 수 있다. 이 ‘누구나’는 곧 ‘우리’가 될 수 있고, 파티 역시 ‘무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는 파티”는 “우리의 죽음을 기억하는 우리”로 대체할 수 있다. 그래서 또한 기억이라는 단어를 쓸 수가 있게 된다. 개인은 자신의 죽음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즉 ‘우리’의 시선으로 보면 시간의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경계는 사라진다.

 


 

어느 덧 음식을 먹고 나서, 또는 음식을 먹으면서 공연을 관람하게 된다. 카페의 구조는 중앙에 하늘을 볼 수 있는 마당이 있는 사각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 입구를 들어서면 음식을 시키고, 음료수를 마실 수 있는 바가 있고, 마당을 가로 질러 천장이 막혀 있는 독립된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은 마당을 가로질러 갈 수도 있고, 마당 옆에 나 있는 복도를 따라 바가 있는 공간으로 갈 수도 있다. 모든 공간의 경계는 유리벽으로 되어 있어, 사방을 모두 볼 수 있다. 마당 한 가운데에는 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를 이용해서 설치 미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당에서만 볼 수 있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복도와 이층의 난간이 있다. 테이블과 의자는 공간 여기저기에 놓여 있다. 공간을 자세히 설명하는 이유는 테이블의 위치에 따라 관객은 시선을 제한받는다는 걸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당에 있지 않는 사람은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이층 난간에서 하는 포퍼먼스를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마당에 있는 사람도 위치에 따라 기둥과 관객에 가려 시선의 제한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앉아 있는 위치에 따라 공연에 대한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같은 위치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곳곳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한 배우에게 집중하려면 다른 배우는 포기하거나, 음성으로만 접해야 한다. 한마디로 이 공연 전체를 다 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공연의 공간이 이미 개인의 시선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내가 본 공연이 전체 공연의 몇 퍼센트인지 가늠할 수 없다. 질 낮은 무전기에서 나오는 음성과 잡음, 고함에 가까운 대사와 간헐적으로 들리는 대사, 선풍기와 선풍기의 부품으로 과거로 돌아가는 기계를 만드는 설치미술.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시체처럼 엎어져 있는 배우, 이층 난간에서 별안간 내려온 꼭두각시 공룡. 앉아있는 관객에게 다가가 포도주를 권하는 배우, 관객에게 음식을 나르다가 갑자기 마이크로 대사를 하는 연출자. 난간에서 등산용 밧줄로 곡예를 하듯 내려오는 배우. 구석으로 가 포도주를 마시는 배우, 바에가 손님처럼 앉아 있는 배우,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연출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동시에 터져 나오는 대사들은 서로 부딪치며 파편처럼 흩어진다.  흩어진 걸 다시 주워 모으면 또 다시 흩어진다.

 의미? 무슨 의미일까? 의미가 있긴 있는 걸까? 일회용 기저귀를 차고 다니는 남자와 간질병 환자처럼 온몸을 떨면서 서 있는 남자의 관계는? 떨어져 있을 때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각자의 포퍼먼스를 하다가 둘이 만나면, 서로 어울려 포퍼먼스를 한다. 어쩌면 이곳의 무대는 하나가 아닐 지도 모른다. 배우마다 각자의 무대가 있고, 배우와 배우가 만나면 두 개의 무대가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닐까? 사람마다 색깔이 다른 공간을 가지고 있다가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의 공간과 섞여 전혀 다른 공간이 되듯이. 노란색 공간을 가진 사람이 파란색 공간을 만나면 초록색 공간이 되듯이. 그런데 이런 모든 색깔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색이 있다. 검은색. 관객이 검은색 옷을 입은 것은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각자의 색깔을 지닌 사람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관객이라는 하나의 이름을 지닐 때, 관객은 검은색을 띠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명한 색깔을 지닌 배우들의 대사가 부딪칠 때마다 그 경계에서 나오는 소음. 소음은 경계의 색깔이다. 그리고 죽음의 색깔은 침묵. ‘파티’가 벌어지는 동안, 침묵의 색깔을 입은 관객들은 한 배우의 죽음을 보고(또는 기억하고) ‘파티’가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검은 색을 벗어버린 관객들이 각자의 소리를 내며 공연장을 빠져나간다. 소음. 포퍼먼스가 계속 되는 걸까? 

카페를 나왔다. 카페? 어느 카페? 카페 디아더? 아니면, DDISY 카페?

나는 어느 카페를 나온 걸까?

보충설명

* "DDISY 카페"는 뮈토스에서 오래동안 활동해온 강화정의, 죽음을 주제로 한 두 개의 전작을 혼합한 것이다. 2007년 포스트극장에서 만났던 "1인칭 슈팅-물속에서”의 인물들이 "DDISY 카페"에서 2006년 혜화동 1번지의 "죽지마나도따라아플거야”의 인물들을 만나고, 때때로 대화했다.

* 현재 서울 대학로에서 열리고 있는 10th 변방연극제 참가작
일시_2007년 9월 15일(토)~16일(일) 17:30
장소_카페 디아더
출연_차유봉 / 정성호 / 김현아 / 권택기 / 정유미 / 곽고은
김설진(Guest), 김호종(요리), 유영봉(설치)
드레스 코드_검정

* 사진제공_사진작가 이도희

필자소개

글쓴이 조원석은 서울 271번 버스 승객, 진로 마켓 손님, 이 현수의 남편. 상추를 키우는 정원사. 구피 열아홉마리를 키우는 어부. 도장 자격증이 있는 페인트공. 시나리오 '벽에 기대다'를 50만원에 팔고 남들한테 자랑하는 사람. 주중에는 충북음성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학원 선생. "현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다가 말다가 하는 게으른 사람.

그 외에도 수많은 "나"가 있어 어떻게 소개해야 할 지 모르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