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낭만소녀야, 편지 왔다 - 제 4회 여성연출가전 : 낭만소녀 근대를 산책하다

낭만소녀야, 편지 왔다
- 제 4회 여성연출가전 : 낭만소녀 근대를 산책하다


  • 김해진
  • 조회수 621 / 2008.05.14



제4회 여성연출가전 ‘낭만소녀, 근대를 산책하다’ 중 <무성격자>, <적빈>을 보고

 

낭만소녀야, 편지 왔다-

 

   

낭만소녀야. 날씨가 괴상하다. 곧 비가 오려나 보다. 오늘 여성주의 저널 ‘일다’(www.ildaro.com)에서 온 뉴스레터에서 “여성들은 더 주체적이 되었나”(조이여울)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성형 요구하는 사회, 명품 요구하는 사회’,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인가?’, ‘현모양처가 꿈이 아니었는데….’, ‘‘가족해체론’ 급부상 이면에 가족주의 더욱 강화돼’, ‘자신을 알고 삶을 꿈꾸기 이전에 요구받는 것’의 소제목에서도 짐작하겠지만 여전히 여성들은 자신있게 주체임을 말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글이 반가웠어. 어렵게 꼬이고 무거운 현실을 차분히 둘러보고 나오며 이 반가움이 좀 더 단단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스스로에게 생겼지.

 

예를 들면 이런 거야. 낭만소녀는 오랜만에 중학교 친구들을 만났는데 저마다 명품 가방을 들고 나와서 서로를 흘끗거리고 있지 뭐야. 어느 날 티비를 켰더니 브래지어 광고를 하더라. 그 브래지어는 언제 어디서 화살이 되어 날아올지 모르는 남자들의 시선에 대비해 어떤 각도에서도 가슴이 예뻐보일 수 있도록 한다는 거야. 오, 마이 부라자!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어. 엄마 친구 딸은 좋은 학교 나와 좋은 직장에서 돈 많이 벌고 좋은 데 시집 갔다며 어제도 비교당했어. 소위 ‘정상가정’ 안에서 길러진 어느 철없는 이는 은연중에 선택 ‘하기’보다 선택 ‘받는’ 데 더 신경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야. 주체적이 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오는 18일(일)까지 제4회 여성연출가전 ‘낭만소녀, 근대를 산책하다’가 대학로 연우무대에서 계속될거야. 그 중에서 지난 5일 막을 내린 <무성격자>(최명익 원작, 서재화 연출), <적빈>(백신애 원작, 김국희 연출)을 만났어. 여성이 일생을 걸고 소망하는 꿈이 현실의 굴레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풍경이 담겨있었다. 여성연출가전은 매년 각기 다른 색깔을 가진 여성 연출가들이 모여 뜻 있는 작품들을 관객에게 선보이는데, 올해 그 뜻은 ‘근대’로부터 흘러나왔대. 작품은 각각 1937년, 1934년에 발표 됐는데 일제강점기와 더불어 서양문물이 들어오는 혼돈의 시대, 새로운 교육을 받은 신여성들이 그동안의 가부장적인 사회에 맞서 서서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대야. 사실 연도로만 따지면 그때로부터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았구나 싶어.

 

 


<무성격자>

 

공연 <무성격자>는 비단 여성뿐만이 아닌, 허방에 빠진 여러 인물들을 보여줘. 교원 생활을 하고 있는 사내 정일은 자신의 애인과 아버지 사이에서 갈등하는데, 애인은 의대 공부를 1년하고 돌연 아르헨티나로 떠나 탱고를 추었지. 하지만 폐결핵에 걸려 어둡고 자폐적인 자신만의 공간 안에 머물고 있어. 고집불통 땅부자로 보이는 정일의 아버지는 일생동안 착실히 돈을 모으며 살아왔지만 위암 말기. 아버지가 계신 고향에 머무르지도, 애인 곁에 머무르지도 못하고 무대 위에서 회색 상자들을 이리저리 매만지는 정일의 손은 늘 비어있어. 무대장치는 배우들이 직접 밀고 당기며 위치를 바꾸는 회색 상자들 뿐이야. 상자 위에 앉아서 핑크색 탱고슈즈를 처연히 바라보며 자기를 비웃는 여자가 위태로워 보이더라.

 

지금의 눈으로 보면 마냥 음울하고 답답한 풍경인 것 같지만 그 안의 고민은 아마도 부풀어올라있을 거야. 무성격(無性格)의 시공간이 회색 상자들로 긴밀히 구축되고 인물들도 마치 그 중 하나인 듯이 무심한 시대가 객석으로까지 부풀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러기에는 공연이 다소 헐거웠어. 애인과 아버지는 저마다 ‘나와 함께 있자. 나와 함께 죽자’, ‘고향으로 내려와라’ 요구해. 죽고 난 후에도 ‘이게 당신이 원하던 삶이었냐’, ‘고작 창녀 옆에 누워있는 주제!’라며 정일을 향해 소리치는데, 무대에서 그가 힘없는 자신을 일으켜 세울 결정적 때를 놓친다든지 하는 극적 근거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다만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어. 많은 부분 원작 「무성격자」의 시대적 배경이 인물들을 채우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보다 골똘히 표현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보았지. 한줄기 기차 소리가 1930년대에서 2008년으로 쓸쓸히 이어져오는 듯 했던 바로 그 때처럼 말이야.

 

 



<적빈> 

 

<적빈>은 ‘몹시 가난하다’는 뜻이라지. 공연은 나무로 짠 평상을 주요한 공간으로 삼고 빛으로 평상 주변에 길을 내기도 해. 이 공연은 굶어죽을지도 모르는 가난의 파국을 맞을 때까지 두 아들 내외를 품어 안는 어머니(매촌댁)를 보여준다. 혼례를 올리며 청실홍실 달콤한 꿈을 꾸었던 두 아들의 이름은 ‘돼지’와 ‘노루’. 아니나 다를까. 돼지는 게으르게 밥과 술을 축내며 벙어리 아내에게 패악을 부리고, 노루는 툭 하면 집을 나가 놀음판으로 폴짝 뛰어간다. 모아놓은 돈을 모두 놀음판에서 날려버린 이 집안에도 곧 아이들이 태어날 텐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실질적인 가장 매촌댁은 나이 들어 허리가 굽어서도 동네를 돌며 구걸을 한다. 똥이 마려운데도 뱃속이 빌까봐 속곳을 움켜잡고 기어이 참아. 그 힘으로 살아나간다며 공연은 끝을 맺는데 <적빈>의 풍속은 구수한 데가 있다.

 

여덟 명의 배우들은 고루 힘이 넘쳐. 옷도 마루도, 매촌댁이 구걸하느라 맴맴 도는 길도 제 때 힘을 발휘해. 특히 벙어리 첫째 며느리가 꿈속에서 말하는 장면은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느껴졌어. 곤궁한 처지를 답답해하는 그녀 앞에 홀연히 나타난 친정동네의 청년은 언제라도 자신에게 오라고 위로한다. 멀끔히 키가 큰 꿈속의 청년은 돼지 서방과 너무 비교가 돼 잠시 웃음이 나기도 했지. 생명을 북돋는 매촌댁에게서 해학적인 삶의 힘을 엿볼 때, 생활을 돌보지 않는 돼지와 노루를 만들어 나가는 배우들의 능청스런 힘을 느낄 때, 한 숨 나오는 피곤을 몸에 지고 부엌일․농사일을 해야 하는 며느리들의 마뜩하지 않은 삶과 마주할 때 공연 보는 이의 마음은 즐겁다가도 어수선해졌어.

 

낭만소녀야. 누군가의 애인, 누군가의 며느리, 창녀인 것이 공연 중의 역할이고 보니 여성이라는 인물이 참 단편적이라는 생각도 드는 거야. 애인, 며느리, 창녀는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그려지기 일쑤이니까. 아니면 모성 짙은 어머니가 되어서야 강한 주체를 피력할 수 있는 셈이지. 여성의 주체적 얼굴이 그뿐일까? 그래서 공연이 허구여서 다행이다, ‘근대’가 지나간 시간이어서 참 다행이야, 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알다시피 허구는 현실의 그림자처럼 드리워지고, 지나간 시간은 현실의 토대가 되잖아. 바로 여기에서 2000년대 지금의 여성을 다시 떠올려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네. 산책을 마치고 나면 너도 이 관객도 소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물론 “난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예요~” 그런 노래 말고 말이야.

 

 

<무성격자>                                                     <적빈>



보충설명

<무성격자>를 만든 사람들
원작 최명익, 각색 이충무, 연출 서재화
배우 이종목, 김덕구, 남명옥, 강주경
의상감독 박은희, 조명디자인 손종화, 음악감독 김지탁, 무대디자인 김형주

<적빈>을 만든 사람들
원작 백신애, 연출 김국희, 드라마터지 백권집, 한재우, 한종만
배우 류주연, 김미준, 정소영, 리민, 유상재, 최수빈, 하명호, 송창현
무대디자인 박미란, 무대제작 구상모, 조명디자인 한종만, 음악감독 백훈기, 음향오퍼 김예은, 분장 김보선, 무대어시스트 박초은, 조연출 유지혜

제4회 여성연출가전 ‘낭만소녀, 근대를 산책하다’
< B사감은러브레터를읽지않는다>, <자화상>이 오는 18일(일)까지 연우소극장에서 이어진다. 평일 8시, 토요일 3시, 6시, 일요일․공휴일 3시(월요일 공연 있음)

* 이상 팸플릿 참고
* 사진제공 - '여성연출가전', 나온컬처


필자소개

글쓴이 김해진은 극단 ‘목요일 오후 한 시’ 단원.
플레이백 씨어터Playback Theatre를 한다.
grippen@hanmail.net http://blog.naver.com/suna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