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7. 25. 12:51ㆍReview
빨간 피터들 <러시아판소리-어느 학술원에의 보고>
인간을 향한 누군가의 냉소와 연민, 그리고 고통에 대한 보고
최용진 출연 / 적극 연출
글_이예은
프란츠 카프카의 <학술원에의 보고>. 이 소설은 인간다운 원숭이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 ‘빨간 피터’(이렇게 명명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렇게 명명하는 순간 그의 존재를 폭력적으로 정의하는 일에 가담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 라는 이름의 존재가 자신이 어떻게 인간다워지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학술원의 고매한 신사”들에게 독백으로 이야기하는 형식이다. 인간에게 포획된 원숭이가 살아남을 길을 찾기 위해서는 오로지 인간을 모방하는 것뿐이었기에 그에게 주어진 것이란 ‘자유’가 아닌 ‘출구’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 프란츠 카프카, <학술원에의 보고>, 『변신 (외)』, 전영애 역, 민음사, 2013, pp.110-111. “저는 일부러 자유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 원숭이였을 때 저는 아마도 그런 감정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그리워하는 인간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그때도 오늘날도 자유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 다만 하나의 출구를 오른쪽, 왼쪽, 그 어디로든 간에, 저는 다른 요구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자유라는 차원은 차치하고 출구를 찾는 것을 생의 과업으로 이미 인정해 버린 어느 존재가 정말로 출구를 찾아 가는 과정의 언어들이어서일까, 이 작품 속 문장들은 카프카의 여느 문장들보다 관조적인 가운데 의지적이고 발전적이다. 이렇게 출구를 좇는 것을 생의 과업으로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구를 좇는 그 존재의 내면은 자유를 좇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연민과 냉소, 그리고 고통으로 가득하다. 문장들은 의지적이고 발전적이나 그 의지와 발전성 속에는 자유를 꿈꿀 수 없는 존재의 무기력과 절망이 점층적으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그럼에도 다시, 문장들의 의지와 발전성은 이 소설을 확실히 카프카의 여느 작품들과는 다른 긍정의 토대로 이끄는데 이는 단지 문장의 차원을 넘어 이 작품의 지향이 자유건 출구건 살아남고자 사력을 다하는 어떤 존재의 생명성에 있기 때문이다. 문장들이 지속될수록 '빨간 피터'가 말하는 인간의 원숭이다움과 원숭이의 원숭이다움, 그리고 원숭이의 인간다움은 모두가 부정되지 않은 채로 매우 모호한 생명선 위에서 경계를 허문 상태로 공존하며 그저 한 존재의 생명성이 거역될 수 없이 밝게 빛난다.
“학술원의 고매하신 신사 여러분”께 보고하는 이야기라는 냉소적 프레임이 수미상관식으로 배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 안에서 존재하는, ‘빨간 피터’라고만은 명명될 수 없는 한 존재의 생명성은, 자유와 출구 사이에 끼어서 자신이 갈망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그러나) 자신이 부딪쳐야 할 것이 무엇이며 (그래서) 자신이 고통 받아야 할 것은 무엇이고 (결국) 자신의 고독과 슬픔의 형체가 어떠한 것인지를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는 이 존재의 생명성은 거룩하리만큼 깊고 고요하고 환하게 빛난다.
소설의 문장들이 독자의 뇌리에 맺히고 스쳐지나가기를 지속하는 동안, 떠오르고 주저하다가 발견되고 발전되는 어떤 문장들이 이윽고 존재라는 세계를 향해 가는 그 지속의 시간동안 독자가 만나게 되는 것은 단지 문학만이 아니다. 카프카를 무대화한다고 했을 때에는 문학 이상의 것, 희미하게 시작되어 기어이 존재라는 것을 만나게 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질문을 내포한 세계로 관객을 입장시키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리고 의심하게 된다, 과연 그것이 무대라는 물성 안에서 어떻게 성사될 수 있을까라고. 그래서 또한 흥미로운 기대를 하게도 된다. 정확히 말하면 의심과 기대 사이의 미지성이라고 해야 할까, 깊이 공감하는 어떤 예술가의 작품을 재료로 새로운 창작물이 발표될 때 그 작품을 만나러 갈 때 드는 마음은 말이다.
카프카의 작품을 무대화한 공연을 올해 두 편 만났다. 이미경 각색, 구태환 연출의 <성> (※ 이예은, 「설명으로 희석된 실존의 감각 〈성〉」, 히라타 오리자가 각색하고 연출한 <변신> (※ 이예은, 「포스트휴머니즘 공연과 실존의 문제: 프란츠 카프카 원작, 히라타 오리자 각색/연출, 로봇 연극 <변신>을 중심으로」, 현대영미드라마학회 2018 봄 정기학술대회 “포스트휴먼 시대의 드라마”(Drama in the Posthuman Age) 발표문 참고.)
이 두 작품은 모두 카프카의 작품을 원작으로 했다지만 모두 무대 위에서 카프카를 만나게 해 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번 작품도 반신반의하며 그러나 여전히 미지의 희망과 호기심을 품고서 찾아갔다. ‘러시아 판소리’라는 너무도 거창한 수식이 작품에 대한 의심을 발동케는 하였지만 궁금해 하고 있던 연출자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연극 초반은 쉽지 않았다. 집중이 되지 않는 내 자신과 힘겨운 싸움을 하며 익히 문자로 만난 바 있는 카프카의 문장들을 괜히 힘들게 다시 만나고 있다는 생각 이상은 들지 않았다. 단지 배우의 연기를 보기 위해 눈을 높이 치켜떠서 봐야 하는 고된 육체성을 담보로 카프카의 언어를 만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연극의 초반부에서 중반부까지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인간의 언어, 인간이려 애쓰는 원숭이의 언어, 원시적인 원숭이의 언어 사이를 오가며 이 언어들의 상태에 맞추어 배우가 육체적 연기를 함께 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이 연극은 ‘언어’라는 상태에 대한 집중력을 연출의 초점으로 맞추고 있다는 것, 언어와 언어이려 애쓰는 소리 사이의 부피 안에서 인간과 인간이려 애쓰는 존재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과 인간이고 싶지 않음에도 인간이려 애써야 하는 존재 사이를 표현하려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표현의 호흡이 어떠한 지점을 향해 꽤나 견고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 이러한 것들을 인식하고 있었을 뿐 이것들이 카프카의 문장을 아니 카프카의 문장에 흐르고 있는 존재의 차원을 어떻게 건드리고 있는지는 실감치 못한 상태로 말이다.
그런데 연극의 호흡이 나에게로 흘러들어 와 내면을 지나간 순간이 있었다. ‘빨간 피터’가 좁은 틈새로 뱃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들을 관찰하고 모방하기로 결심을 하는 순간이었다. 단순히 이 순간, 객석 옆 쪽문이 열리면서 어둡던 방에 현실 소음과 째한 빛이 들어오는 효과가 침투해서만은 아니었다. 이 순간 인간을 모방하기로 결심한 원숭이의 고백에, 아니 그 고백을 드러내는 배우의 고백에, 인간이려 하는 힘과 인간이려 하지 않는 힘 모두를 내포한 부피가 견실하게 들어 차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인간이려 애쓰는 어떤 존재들-소위 ‘인간’이라 명명되는 대부분의 존재들-에 대한 ‘누군가’의 냉소와 연민이 있었고, 그 ‘누군가’ 역시 냉소와 연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되는 문제에 필사적이어야만 하는 고통이 함께 있었다. 냉소와 연민, 그리고 고통. 이 만날 수 없는 세 가지 층위의 현실이 하나의 층위에 공존하여 도저히 비뚤어지지 않을 수 없는 내면을 가지게 되는 것. 그 비뚤어진 내면을 가지고서도 생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자유’가 아닌 ‘출구’를 택해야 하는 것.
연극에서 보여준 이것은 다름 아닌 카프카가 그의 작품 속 숱한 K들을 통해 토로하려 했던 것이다. 카프카가 문학을 통해 도달했던 문학 이상의 것. 이 연극은 그 동일한 것에 도달하려 애쓰고 있었다. ‘교양 있는 인간들’의 언어처럼 정형화된 프레임 속의 것들과 그 프레임에 들어맞지 않는 무정형적인 존재 자체를 오고 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토록 비뚤어진 언어의 여러 층위들을 몸짓과 함께 표현해 내었던 것이로구나 하는 발견이 뒤늦게 이루어지면서 이제까지의 고된 관극 시간이 일순간 견실한 의미로 관통된다.
그리고 이제, 이러한 발견이 이루어진 이후 (단지 이 발견을 이룬 나에게만 그러한 것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이 연극은 유려하리만큼 능숙하게 카프카의 내면을 유영한다. ‘빨간 피터’는 인간을 따라 하기로 결심했으나 그에게는 결코 따라 하고 싶지 않은, 내면의 지향성을 구속해야만 따라 할 수 있는 행위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술 마시는 행위였다. 그는 이 행위를 모방해 보려고 그의 인간 파트너와 함께 사력을 다한다. 매번 실패함에도 불구하고 내면을 극복해보려 노력한다. 그러나 매번 실패하며 ‘빨간 피터’와 그의 인간 파트너는 함께 좌절하며 급기야 슬픈 절망감을 공유한다. 침묵적인 폭력을 사이에 둔 정반대 입장의 그 둘이 좌절감을 공유하는 이 장면에는 하나의 존재를 둘러싼 세계의 끝과 끝이 함께 들어 있다. 그리고 세계의 끝과 끝을 다 부여잡음으로써 조망할 수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총체적인 냉소와 연민과 고통이 들어 있다.
연극은 여기에 유머러스함까지 추가한다. ‘빨간 피터’는 결국 사람들 앞에서 인간처럼 술 마시는 행위를 완주해 보여주며 “시-빠”라는 음가로 그가 익히 들어 온 인간들의 소리까지 흉내 내면서 결국 냉소와 연민과 고통 모두의 경지를 넘어선다. 오랜 사투 끝에 도달한 인간식의 발화인 만큼 배우는 이 음가를 성스러우리만큼 신중하게 공들여 발음한다. 동시에 그토록 공들여 발화된 음가가 한낱 우스운 욕설임을 자각하게 되는 관객은 폭소를 한다. ‘시-빠’라는 궁극의 음가 하나로 발휘되는 카프카에 대한 이 총체적이고도 초월적이며 유머러스한 해석이란!
카프카가 무대라는 물성 위에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를 궁금해 하며 찾은 이 연극에서 나는 또렷이 육화되어 보여지는 카프카를 만났다. 아니 그 이상의 카프카를 만났다. 소설의 문장들보다 더욱 또렷하게 살아서 춤추며 농까지 걸고 있는 카프카. 카프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K들이 그러하듯 이 연극의 ‘빨간 피터’는 이 작고 조용한 무대 위에 카프카의 K가 되어 그저 인간을 비웃는 존재도 그렇다고 인간에게 한낱 짓밟힌 존재도 아닌, 인간과 결탁되어 끊임없이 인간과 관계 맺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존재. 자신의 존재가 그러한 상태에 있음을 자각한 존재다운 존재. 생명다운 생명. 가장 불완전하며 가장 힘차게 살아 있는 생명체로 서 있었다.
*사진제공_삼일로창고극장(photo by 이강물)
필자_이예은 소개_작품의 깊은 고독에 위안을 주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 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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