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페미니즘의 재점화인가, 여성의 타자적 위치의 재현인가<노라이즘>

2018. 8. 7. 06:31Review


페미니즘의 재점화인가, 여성의 타자적 위치의 재현인가

<노라이즘> 

 극단 불한당 @1회 페미니즘 연극제


글_김민관

 

방송을 매개하는 연극? 연극을 매개하는 방송!

 

공연의 통주조음을 이루는 리얼 와이프 서바이벌이라는 방송 포맷은, 노르웨이 출신 극작가 헨릭 입센(1828-1906)의 고전 인형의 집을 당대의 현재로 매개한다. 노라(박이슬 배우)가 억압적인 가부장적 집에 갇힌 것이 카메라로 송출되고 있다는 것은, <노라이즘>(극단 불한당, 연출 이수림)의 주요한 모티브이다. 비계 구조로 구획된 무대는 노라의 갇힌 삶을 실재화하는 반면, 이는 카메라가 켜져 있을 때만 단지 유효하다. 방송을 통해 라이브로 누군가의 삶을 브라운관으로 끌어오고, 이에 대해 직접 관객을 향해 말하는 것은 일견 착각을 주는 부분이지만, 결코 제4의 벽을 상쇄하는 장치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노라라는 바깥을 상정하지 않는 유일하게 속는 자의 예외그는 안을 파고드는 바깥의 시선을 가정하지 않는다가 있을 뿐만 아니라 관객의 시선 자체가 카메라가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관객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방송 진행자와 패널들 역시 관객이 아니라 카메라라는 가상의 관객을 보는 것이다.

 

여기서 실재, 곧 리얼리티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보는 노라의 집은 분명 라이브 방송 송출이다. 분명 연극은 허름하게 이곳이 실재임을 우기고, 그 바깥프로시니엄 아치가 아닌 극장의 무대 바닥에 그냥 의자 몇 개가 놓인 장소이 이를 스크린으로 관찰하는 방송국 스튜디오임을 우긴다. 하지만 그 다음으로 우리가 TV를 보는 것이라고까지 우기고 있는 걸까. 과연 이곳은 어디이고, 우리가 보는 것은 온전히 카메라인가, 그 안에 어느 정도의 실재가 있는가?’ 노라의 집을 비추는 카메라가 꺼져 있을 때는 조명이 꺼지고 노라는 방금 전까지의 특정 행위를 애매하게 멈춘다.

 

이러한 현상은 매우 이상한 느낌을 주는데, 왜냐하면 연극은 인위적으로 멈춰 있지만, 노라라는 실재는 TV 중계를 넘어 저기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현재 보는 것 자체를 중계 받는 상황인데도 중계 카메라가 꺼진 상황에서 화면 바깥이 실재로 매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우리가 아는 연극은 암전에 작동하지 않지만, 우리가 보는 게 모두 실재라고 믿게 된 것이다암전에 어떤 소리나 움직임을 우리는 암묵적으로 연극으로 포함시켜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연극은 의도치 않게 우리의 눈 자체를 카메라로 대체하는 효과를 낳는다. 모든 것은 화면이지만, 그 화면을 찍는 가상의 카메라 바깥에 카메라가 하나 더 있는 셈이다. 그 결과를 아무도 보지 못하는 카메라. 곧 이러한 라이브 방송의 형태 자체, 그리고 카메라가 담지 못하는 잉여의 영역이 관객에게 이전되며 관음증(‘보이지 않는 걸 누구의 감시 없이 본다.’)은 한층 증폭된다.

 

이러한 매체적 관음증은 이 공연에서는 생략되어 있지만, 원작 인형의 집에서의 남편 헬머의 말을 상기시킨다. “왜 언제나 당신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이따금 당신을 훔쳐보듯이 바라보고 있는지……내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어? 그건 당신이 나의 비밀스런 연인이고 젊은 약혼자이며 우리 두 사람 사이를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는 공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야.”(헨릭 입센, 인형의 집, 김진욱 옮김, 범우, 2009, p120.)그렇지만 노라를 자신의 시선 아래 가두고자 하는 헬머의 의지는, <노라이즘>에서 아내를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시켜 전 국민의 시선 아래 두는 진규(김태완 배우)의 선택으로 전환되어 나타났다는 점에서 기이하게 굴절되거나 변형된 욕망의 형태를 보인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지점은 극에서 자세히 다뤄지지 않고 생략돼 있다.

 

가부장적 권위가 지배하는 집이 갖는 폐쇄성은 곧 이를 인계한 카메라에 의해 열린 시점으로 확장되지만, 그것은 쾌락과 그에 접면한 죄의식 같은 것에 갇힌다. 곧 카메라라는 피드백은 우리의 안으로 수렴한다. 우리는 노라를 둘러싼 환경을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고 보기보다는 관음증 환자처럼 지켜본다. 노라의 마지막 선택은 집을 나가는 것이 아닌, 카메라의 렌즈를 닫는 방법이다. 하지만 관객의 시선까지 닫을 수는 없다. 그랬다면 관객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이 되었을 것이다. 곧 이 연극은 화면이라는 가상의 리얼리티를 끝까지 유지하는, 4의 벽을 그대로 계승한 연극이다.


 

노라를 집이 아닌 카메라 안에 가두다

 

원작에서 노라의 는 남편의 엄중한 병을 고치기 위해 은행에 담보가 되는 데 필요한 서명을 아픈 아버지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직접 요청하는 대신, 자신이 직접 가짜로 서명했던 사실에 대한 거짓말에서 기인하는데, 랑크 박사가 그 사실을 빌미로 은행 내 자신의 지위를 잃지 않게끔 은행장으로 승진을 앞둔 노라의 남편에게 부탁할 것을 종용하며 노라의 갈등이 시작된다. 그리고 랑크 박사 때문에 이러한 사실이 사회에 드러날 것을 염려하던 남편은 랑크가 자신의 의사를 접을 것을 전하며 갈등이 해소된 시점 이후에야 비로소 노라를 걱정하고, 그 과정에서 노라는 자신이 인형에 불과했음을 자각한다. 반면 공연에서는 이러한 다소 복잡한 이야기의 줄기를 잘라내고, 노라가 100만 원으로 몰래 낙태를 한 것을 비밀로 한 것이 가 된다.

 

사실 방송국의 카메라 시점을 스크리닝을 통해 실제 드러내는 후반부의 짧은 장면을 예외로 한다면, 원작의 매체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노라를 카메라로 매개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 일종의 형식에 대한 변전이라면, 노라의 죄는 결국 남편에게 한 거짓말이지만 그 거짓말이 싸고 있는 내용이 원작과 다르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일 것이다. 이는 원작에 대한 공연의 현재적 해석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공연을 보는 특정 시점을 만들어 내려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거짓말 자체가 부정적인 것이라는 맥락 아래, 공연은 노라의 죄를 가치 판단의 유예 대상으로 두는 듯 보인다.

 

1879년의 원작이 무대로 올라가게 됐을 때 자신의 아이들을 버리고 집을 나서는 무책임한 행위의 노라를 연기할 수 없다고 한 배우에 맞춰 입센이 희곡을 수정했다고 하는 일화를 비롯해, 당시 노라의 죄는 남편이라는 폐쇄된 집안에서보다는 오히려 당대 현실에서 논쟁이 되는 부분이었다. 이미 자신의 확고한 의지로 집 그리고 남편의 영향력을 벗어나는 노라를 붙잡지 못하는 남편이 노라에게 죄를 묻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죄는 단지 집안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책임이라는 것 역시 죄의 대가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미리 상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책임 자체가 죄의 유무를 분명하게 알려주는 것 역시 아니다.

 

자신의 남편이 말했듯 가정을 책임지지 않고 팽개친 사람을 긍정할 수 없는,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주로 노라에게 죄를 물었다. 물론 이러한 사실 자체가 노라가 죄가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의 입장에서 당대의 노라는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였던 것이다물론 당대를 지금으로 소급해서 그들의 입장이 무지하다고 쉽사리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 역시 아닐 것이다(‘낙태 합법화의 문제는 세계적으로도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이 문제가 진지하게 질문될 수 있는 여지는 극에서 거의 없다그러한 사실은 스쳐지나가듯 폭로된다. 이후 남편이 묻는 것이 거짓말인지 낙태인지 여부가 상세히 다뤄지지 않는 가운데, 오히려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틀리다는, 원작에서 남편의 주장이 갖는 가부장적 부조리함 역시 공연에서는 오히려 축소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는 단지 극의 길이를 축소하기 위한 과정에서 내용을 복잡한 문제에서 단순한 어떤 하나의 문제로 대체한 것단지 현재의 일에 속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채택한으로 보는 것 역시 가능하다. 어떤 의미에서 이 작업은 래디컬한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것일까. 과연 집을 나서는 대신 노라가 자신을 보는 카메라를 치우는 장면은 혁명적인가.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재현

 

다른 어떠한 권리보다 자신에 대한 의무를 주장하는 노라이는 <노라이즘>에서도 똑같은 결말의 메시지로 출현한다, 전근대적인 사슬을 끊고 나오는, 동등한 인간 권리에 대해 천명하는 캐릭터다. 이는 오늘날 여성만의 문제나 주장에 국한되지 않는 인류의 전체적이고 근원적인 인권 신장과 그에 대한 자각의 측면, 곧 보편적인 페미니즘의 측면에서 재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노라의 자유에 대한 자각의 측면은 개연성 있게 드러나지 않고, 결과적으로 카메라에 의한 관찰됨을 거부하는 소극적 저항에 그치는 데 가깝다. 그리고 이는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부분에 대한 저항, 관음증적 소비의 대상이 되는 데 대한 저항 사이에서 애매하게 위치한다.

 

우리가 보는 게 화면이라면 응당 막이 닫히거나 우리의 시야가 검어져야 했을 것이다. 노라의 저항은 자유에 대한 의지적 각성과 그 외부를 상정할 수 없는 충격으로 온전히 전해지는 대신, 노라는 카메라를 튕겨내는 순간까지 여전히 관찰되는 이로 남으며, 노라의 저항 역시 카메라에 잡히느냐 마느냐의 정도로 축소되는 듯하다. 노라를 지켜보는 방송 패널들과 카메라에 그 순간 우리가 매개되어 있었다고 말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미 우리는 이 모든 걸 하나의 화면으로 외재화해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라의 죄가 탄로 나고 남편과 대화를 나누며 자각하던 원작의 장면은, 같은 상황에서 노라가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잘못했어요.”라고 하는 장면으로 갑자기 넘어간다. 붉은 조명 아래 의자에 결박돼 포로처럼 고문을 받는 듯한 노라의 모습은, 이후 마치 심리 드라마 장면에서의 등장인물의 자기 고백처럼 드러난다. 조명을 통해 안팎의 구별이 없어지고, 역설적으로 폐쇄된 노라의 상황 역시 해제되는 듯하다. 반면 집 바깥의 모든 것까지 싸안아 어둠이 되며, 극단적으로 노라의 몸을 조여 온다. 원작에서는 노라의 각성과 결심은 그 남편의 쩔쩔매는 태도와 함께 비교되며 드러나는 반면, 극에서는 그 과정에서 오히려 가부장적 상황이 옥죄는 가운데 노라의 공포에 찬 심리까지가 드러나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실재의 외양, 곧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종용하는 자기 고백, 과도한 자극이 극단적으로 연출되는 상황으로 봐야 할까.

 

이 모든 상황이 카메라를 자각하지 못한 노라의 심리적 진실함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노라의 행위에 대한 동시대적 판단을 재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노라의 심리가 자극적으로 반영되는 상황이다. 단순히 21세기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외양을 패러디했어야 할까, 궁극적으로 매체에 대한 비판을 향하는 작업이 아닌 상황에서. 노라는 몰래 관찰되고 현실과 극의 경계로부터 투여된이것이 리얼리티 프로그램이지만 노라가 그것이 방송이 아니라 현실인 줄 알고 있음을 이중으로 아는인물들에 의해 자극되고 실험되는 대상이 된다.

 

노라는 노라의 집을 넘어, 전 국민에게 인형 놀이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노라의 위치는 관음증적 대상으로 소비되는 여성이라는 타자의 위치를 정확히 반영한다앞서 남편이 노라를 TV에 동의 없이 출연시켰다는 점에서 선제적인 폭력의 주체이지만, 이후부터는 그 역시 시청자의 일부가 된다는 점에서, 소비의 폭력은 무차별적인 주체로 확장된다. 하지만 거기에 비중을 두고 다루기에는 <노라이즘>인형의 집의 과정을 고스란히 반복, 재현하는 데 그치고 있다.


 

페미니즘의 소재적 차용과 재현을 넘어

 

<노라이즘>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 전이된 연극 형식의 치환을 새로운 형식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공연일까.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노라이즘>은 연극의 방송 포맷으로의 변전에서 세밀한 번역을 실행하지 못한 채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형식 그 자체를 전달하는 데 그치고 마는 듯 보인다. 연극에서 페미니즘의 새로운 관점은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노라이즘>이 전하는 바는 역설적으로 개인을 소비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에 가까워 보인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차용해 인형의 집을 각색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그러한 매체의 번역 자체에 갇혀 버린 듯 보인다.

 

페미니즘이라는 연극으로서의 형식은 어떤 것일까.’ 이는 단순히 페미니즘이 소재로 차용되거나 내용의 재현이 되는 데 한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쩔 수 없는 비약을 하자면, 그것은 연극이 얼마만큼 가부장적 수직 구조로 만들어져 왔는지, 그리고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 언어가 연극을 관성적으로 장식해 왔는지, 결국 연극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새롭게 하는 일 아닐까곧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져가는 것 이상으로 연극 자체의 형식을 메타적으로 재검토하는 것 아닐까. 노라가 스스로가 인형이었음을 자각했듯 그동안의 연극이 여성을 타자화하고 축소하고 왜곡하며 온전한 결말로 세상을 봉합해 왔는지를 사유하기. 그리고 가령 그러한 자각은 여성을 타자로 재-재현하며 고통에 대한 동감을 강요하는 형태로 나아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진제공_페미니즘 연극제 

**1회 페미니즘 연극제 SNS페이지 바로가기 >>> facebook.com/femiplay


 필자_김민관

 소개_아트신(artscene.co.kr) 편집장. 예술을 체험하고 기록한다. 다양한 예술 아카이브에 관심을 갖고 실천하고자 한다. 좋은 예술이란 무엇일까라는 탐문과 함께 비평적 관점으로 동시대 예술의 계보를 재구성해 나가려고 노력 중이다. 한편으로 예술()이 더 좋아질 수 있는 환경과 이를 위한 개인적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