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만남이 만들어내는 복합장르예술 -임프로드 바닥의 즉흥 8,9,10 여행기. 그리고 SPARK 쇼케이스

2009. 9. 18. 15:40Review



만남이 만들어내는 복합장르예술



-임프로드 바닥의 즉흥 8,9,10 여행기. 그리고 SPARK 쇼케이스

                                                                                                      개쏭



복합장르

장르간의 통섭이 대두되는 요즘, 학문의 영역뿐만 아니라 예술의 영역에서도 복합의 시도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그 예로 올 프린지 페스티벌의 수많은 복합장르예술공연이 있다. 이번 프린지 페스티벌에서는 장르간의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많은 수의 공연들이 한 장르의 문법만을 고집하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을 추구한다. 이미 복합장르는 예술계의 강단에서가 아니라면 특별한 언급이 필요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워졌고 그런 복합장르를 보는 관객들도 익숙치 않은 어색함을 떨쳐가는 중이다. 특히나, 목적으로 복합장르예술을 하겠다는 것이 아닌, 표현의 자유로운 방법으로 복합장르예술을 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되려 예술감상을 위한 장르적 문법에 대한 지식이 모자란 일반 대중관객의 경우, 더 자연스럽게 복합예술을 대하는 힘도 갖고 있다.

복합장르는 그 공연 양태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한 장르를 기반으로 다른 장르를 소품처럼 사용하는 원근법적인 접근의 경우와, 여러 장르가 만나 말그대로 복합이 된 경우가 있다. 여기서는 후자, 여러 장르가 만나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만들어낸 경우를 프린지 페스티벌의 공연을 통해 들여다보겠다.




하나 ) 임프로드 바닥의 즉흥 8,9,10 여행기

비어있던 골목에

거문고 소리가 울린다.

한땀씩 꿰올리는 자수마냥 빈 공간에 파문이 일고

기타가 따라 선을 그린다.

진양에서

돌벽에 영상이 비춰지고, 돌 벽 속에서 걸어가는

그 누군가를 따라

한 사람이 나무판 앞에 서

콩테를 들고

거문고 소리에 점 하나,

기타 소리에 선 하나,

영상 속 누군가의 발걸음을 따라 면을 채워간다.

하얀 아크릴 물감이 나무판을 벗어나 벽을 타고

흐른다.

옆으로 옆으로 흘러가 영상 속 누군가를 만나고

거문고와 기타를 지나 다시 나무판 앞에 선다.

허공으로 튀어오르는 하얀 선, 그 선을 따라

또 다른 사람들이 춤을 추며 온다.

이제 선은 소리를 담고, 색을 담고, 몸을 담아 돈다.

돌고 돌다 제힘에 떠밀러어 허공으로 솟구치고

눈마냥 허공에서 흩날리어 떨어진다.

휘모리로

모든 것이 몰아치어 바람을 만들고

그 바람은 골목 안에 가득 차있던 것들을

어디론가 날려보낸다.

하나 둘 무언가를 따라 사라지고

사그러드는 발자국 소리와

오랜 침묵

이제 골목은 처음의 비어있는 그 골목으로 돌아가있다.

아무 소리없이, 휑하게

박수소리도 잠잠해진지 오래

그러나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고

비어있는 골목의 소리를 듣는다.

이제 다시 비어있으나, 이전과 같지 않은 골목의

빈 소리를

 

임프로드 바닥의 즉흥 8,9,10 여행기 공연은 음악, 미술, 무용, 영상이 뒤섞인 야외공연이다. 음악에서는 서양의 기타와 동양의 거문고가 섞여서 음을 내고, 미술은 콩테 소묘와 아크릴화가 섞여서 색을 낸다. 무용은 현대무용과 퍼포먼스의 요소가 섞여있고, 영상은 스크린이 아닌 돌벽에 쏘아진다.


이렇게 큰 장르-미술, 미술 같은 분류-의 세부 장르들이 섞여있는 것 뿐만 아니라 큰 장르끼리도 뒤섞여서 영향을 주고받는다. 영상에서 거리를 거니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즉석에서 받은 이미지로 그림이 그려지고, 그 그림의 선은 켄버스를 넘어 영상이 틀어지는 벽을 지나 음악이 연주되는 공간까지 휘돌아친다. 무용은 이들과 얽혀 그림의 선과 같은 흰색인 두루마리 휴지를 소품으로 이용하여 공연하는 장소 곳곳을 잇는다. 그리고 음악은 이런 공연 전반의 분위기에 따라 음색을 변화시킨다.


이런 장르간의 만남은 하나하나 분리시켜 볼 수 없고 공연 전체의 분위기로 파악할 수 있다. 특히나 이런 분위기는 공연의 두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하나는 미술을 하던 사람이 지붕 위로 올라가 잘게 잘린 휴지조각을 의자가 놓여진 공연장 위로 흩뿌리는 장면이고, 또 하나는 공연이 끝나간다 생각될 때 공연자들이 하나 둘 공간 밖으로 사라져 아무도 남지 않고 공연장소에 고요만이 남는 장면이다. 이는 공연 내 한 장르의 예술이 만들어내는 효과가 아닌, 그것들이 어우러진 분위기가 낳는 효과라 볼 수 있다.
































둘) SPARK 쇼케이스



숲을 지나

홀로인 이를 만나

빛을 비추어

말이 비추이고

담배연기를 따라

새가 날고

풍선이 오른다.






불 한점 없는 어두운 실내, 사람이 벽에 붙어있다. 그이의 손이 벽에 닿는 곳마다 어둠은 먼지처럼 걷히고, 파르르게 줄기를 뻗은 나무들이 보인다. 비온 후의 새파람같이 나무들은 숲으로 물들어있다.



숲에 그림자가 진다. 사람의 그림자, 홀로인 사람의 그림자가 진다. 그 그림자에 숲의 나뭇잎들은 오랜 밤의 어둠을 닮아간다.



하나의 빛이 부시다. 그 빛은 이곳, 혹은 저곳에 깃들며 이것, 혹은 저것을 비춘다. 사람의 등을 타고, 볼에 부시고, 손등을 환히 밝히다, 글씨 앞에서 멈춰선다. 천천히 글씨를 따라가며 빛이 글을 읽는다. 빛에 닿은 이들의 몸에도 빛을 따라 글씨가 새겨진다. 글씨 하나가, 또다른 글씨를 낳고 그렇게 이어지고 이어져 어느덧 빛이 밝힌 사람의 온 몸에는 글씨가 가득하다.



그 글씨를 떨어버리듯, 담배를 입에 문다. 연기가 퍼진다. 퍼진 연기가 색색으로 빛난다. 그 형형한 연기가 그 사람의 주변을 가득 매울 즈음, 그 총천연의 공기 속에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비둘기는 그저 날아가지만, 그 비둘기의 그림자, 거울에 비친 그림자는 그 사람의 가슴에 날갯짓을 한다. 공기가 가벼워진다. 발바닥이 간지럽다. 허파가 크게 부푼다. 하얀, 비둘기와 같은 풍선이 부푼다. 그리고 풍선들이 부풀고, 하나 둘 높게 뛰어오른다. 착륙은 잊은 체. 셋, 넷, 다시 뛰어 오르고 -아니, 차라리 그들은 날아올랐다-다섯, 그리고 다섯 이후의 수많은 여섯들이, 공기를 대신하듯 빼곡히 차오르며 허공에 오른다.




열병이 난듯 몽롱하다.



SPARK의 쇼케이스는 영상과 몸짓이 기막히게 공연공간과 어우러진 경우이다. 시작부터가 그렇다. 암전이 걷히고 희미한 조명 아래서 한 사람이 벽 앞에 서있다. 그 사람이 손을 대는 곳에는 마치 먼지가 걷히는 듯이 영상이 비춰진다. 그렇게 벽의 ‘먼지’를 지워나가고 완성된 영상인 숲의 한 장면은 곧이어 정면 스크린의 또 다른 숲의 동영상으로 넘어간다. 이렇게 몸짓과 영상이 어우러져 다음 장면과 연결이 되는 것인데, 이때 공간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만약 위의 첫 장면이 대형 극장 벽에서 이루어졌다면 어땠을까. 아마, 잘 보이지도 않고 벽면인 구석을 제외한 다른 공간의 크기에 눌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공연은 클럽 ‘빵’에서 이루어졌고 무대 위가 아닌 관람석(관람석이라 불릴 게 있다면) 옆의 벽에서 이루어졌다. 즉 작은 공연장이라 한쪽 벽 전체를 사용하면서도 관객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어지는 장면들은 ‘빵’의 여러 공간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암전 속에 공연자가 전구 하나를 들고 다니는 장면은 관람석 안을 헤집고 다니면서 이뤄졌고, 비둘기 영상을 거울로 비춰 날아다니게 하는 장면은 관람석 정면, 측면, 후면을 모두 날아다니게 하면서 이뤄졌다. 이러한 공연이 가능한 것은 ‘빵’의 비교적 작은 공간이란 특성과 관람석을 공연장 중앙에 두고 의자가 아닌 방석을 주어 몸을 돌리며 볼 수 있도록 유도했기 때문이다. 즉, SPARK 쇼케이스는 영상과 몸짓의 복합장르일 뿐만 아니라 그 각각의 장르가 ‘빵’이라는 독특한 공간과 만나 만들어진 복합-공간예술이기도 한 것이다.















 

 

 

 

 



두 공연을 통해 살펴본바, 비원근법적 복합장르예술은 다른 것들의 만남에 기초를 두고 그 만남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진 이미지를 장르문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만남은, 자연스레 각 장르특성의 만남 뿐 아니라 공연자끼리의 만남이고, 동시에 공연 공간과의 만남이기도 하다. 두 공연 모두에서 한 장르가 독점하지 않은 것은 각 장르의 공연자들이 무수히 만나 조화를 만들어냈다는 것이기도 하면서, 그 바탕에 공연 공간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즉흥 8,9,10은 서교 365번지 골목이란 공연장을 통해, 그 공간을 적극 활용하며(지붕위에 올라 하얀 휴지조각을 뿌리는 것이나 벽을 스크린 삼은 것 등) 공연자들이 어우러질 수 있었다. SPARK의 쇼케이스의 경우에도 클럽 ‘빵’을 뺀다면 다른 공연의 형태로 나타났을 것이다. 이렇게 복합장르예술은 여러 것들의 ‘만남’을 중시하고 그 만남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무언가를 자유롭게 표현하고자 한다고 볼 수 있겠다.




 

글 ㅣ 개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