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너와 나의 세계, 그 불면의 시간 <영원한 침대>

2013. 12. 11. 00:25Review



너와 나의 세계, 그 불면의 시간

연출가 김철승의 실험극 <영원한 침대>

 

_ 성지은

 


 

1. 한 번쯤 가 보았던 어느 술집에서 나는 결국 이별을 고했다. 아무도 안 보는 계단 밑에서 펑펑 울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는 잠을 청했다. 숙면은 쉽사리 찾아들지 않았다. 눈 앞에서는 너의 표정이 뱅글뱅글 돌았고, 귀에서는 너의 목소리가 맴맴 거렸다. 초침으로는 잴 수 없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나와 너의 그 때가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내 팔은 거듭해서 너를 안았고, 너는 거듭해서 내게 소리쳤고, 나는 거듭해서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나와 너의 불면의 시간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불면들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잠이 들었다.

 

 

2. 지난 11월 강남에 위치한 LIG 아트홀에서 열린 김철승 연출가의 실험극 <영원한 침대>는 이와 같은 불면의 시간을 보여주었다. ‘실험극이라는 명칭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이 공연은 연극, 무용, 음악 또는 퍼포먼스 등 어느 장르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것이었다. 동시에, 이 모든 장르들의 요소가 한데 섞여 있기도 했다. 그 기본적인 형식은 이렇다. 우선 네 명의 배우가 있고, 한 명의 기타리스트와 한 명의 피아니스트가 무대 한 켠에서 실제로 음악을 들려준다. 그리고 한 명의 연출가가 계속해서 배우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극 속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공연은 한 여자가 무대 한 가운데에서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계속해서 쓰러졌다 일어났다를 반복한다. 곧이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무대 위로 올라와 서로의 몸을 손으로 쓸어 내리는 동작을 반복한다. 마치 헤어짐을 안타까워하는 연인의 모습과도 같다. 그리고나서 한 남자가 나타나 관객들의 수를 세기 시작한다. 하나, , , ... 육십사. 그는 관객들에게 큰 소리로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면서 숫자세기를 반복한다. 그는 외친다. “너의 너라고. 이렇게 그는 이 공연이 , 너의 너인 의 이야기임을 알려 준다.

 

 

3. 어느 세상이 로만 이루어져 있을까?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은 2자 관계만이 존재하는 세계를 이야기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갓 태어난 어린 아기는 자기 자신을 인지하지 못한다. 태어난 지 한 달이면 뒤뚱뒤뚱 걸어다니는 동물과 달리 발달이 느린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가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지, 아니 팔다리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것이다. 조금씩 인식 능력이 발달하면서 아기는 적어도 자기가 조종할 수 있는 신체가 있고 자기가 조종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그런 아기에게 외의 세계는 내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두 개의 존재로 이루어진, 다시 말해 내가 아닌 것외에는 아무 빈틈도 없는, ‘내가 아닌 것으로 꽉 찬 세계는 아기에게 이분법적인 경험으로 다가올 것이다. 다소 극단적으로 상상해보면 이 세계는 이거나 내가 아닌 것으로서 발견된다. 그것은 배부름 or 배고픔’, ‘유쾌 or 불쾌’, ‘예스 or 이렇게 반복되는 긍정 또는 부정으로 가득 차 있다. 라캉은 이러한 세계를 상상계라 이름 붙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는 오직 아이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상상계에서 아이에게 가장 분명한 긍정은 어머니가 보여주는 사랑이고 가장 분명한 부정 역시 어머니가 보여주는 거절이다. 사랑은 자기 존재에 대한 인정과 긍정으로서 다가오고 거절은 역으로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사랑의 부재라는 쌍은 내가 아닌 것이라는 쌍에 대응한다.

 

4. <영원한 침대>에서는 이러한 내가 아닌 너의 끊임없는 작용, 반작용이 일어난다. 라캉의 상상계에서 그 세계의 이분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사랑이었듯이, 공연에서 의 관계는 사랑의 작용과 반작용으로 나타난다. 무대 위에서 오고가는 말과 움직임들을 보았을 때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의 다툼과 만남인 것이다. 나를 밀쳐내었던 손짓이 생각나고, 너에게 뱉은 내 말이 생각난다. 물론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겠지만.

이 말과 움직임은 기승전결은 있지만 뚜렷한 이야기의 흐름은 보이지 않는 이 공연을 지배하는 요소들이다. 이것들은 반복되면서 레이어를 쌓고, 이를 통해 일종의 밀도와 흐름을 만든다. 가장 처음에 보았던 여자 배우의 쓰러졌다 일어나는 동작은 나중에 의자에 앉았다 쓰러지는 동작으로 변형된다. 두 남녀가 상대방의 몸을 쓸어내리던 동작은 남자가 떠난 후 자기 자신을 그대로 쓸어내리는 동작으로 바뀐다. 때로는 두 명의 배우가 공연장을 계속해서 돌기 시작한다. 꽤 빠른 속도로 뛰며 원을 그리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혹여 부딪히지는 않을까 아슬아슬하다. 계속 돌다 보면 어느새 돌고 있는 배우가 바뀌어 있거나, 도는 방향이 바뀌어 있다. 이렇게 하나의 움직임은 배우들을 옮겨 가며 반복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는 방향을 바꾸기도 하며, 부분 또는 대상을 변형해 계속된다. 이러한 차이와 반복 속에서,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움직임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중첩된다. 그렇게 하나의 유사한 움직임들이 쌓였을 때, 그 순간 감각의 밀도는 두꺼워지고 극 속에서 거센 흐름이 만들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을 때 다시 가늘어지는, 흘러가는 물결과도 같다.

그 같음과 다름 속에서 두 사람 사이의 작용과 반작용이 나타난다. 하나의 탁자를 가운데에 두고 여러 개의 의자를 가로로 길게 늘어놓아 서로 마주보는 형태를 만든 후, 두 명의 배우가 각자의 위치에 앉아 상대방에게 소리 지른다. “그렇게 밖에 못 해?” “더 노력해야지!” 한 배우와 다른 한 배우는 하나의 코트를 가지고 서로 입었다 벗기기를 반복한다. 한 명의 여자는 한 명의 남자에게 달려들어 철썩소리가 울릴 정도로 안겼다 떨어졌다를 반복한다. 누군가는 뛰어올라 몸을 벽에 세게 부딪히며 아하하! 재밌다!”라고 외치며 떨어졌다 부딪혔다를 반복한다. 이 모든 것들이 마치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애정과 싸움을 보는 것만 같다. 그리고 무대 중앙에 놓인 탁자 위에는 커피가 있다. “여기 커피 주세요!”하고 배우는 손을 들어 올린다. 거의 모든 연인들이 커피 한 잔을 가운데에 두고 시작과 끝을 맞이함을 생각해보면, 뜨거운 믹스 커피 한 잔은 커피를 좋아한다는 연출가의 애교이자 사랑의 밀당을 보여주는 위트인 것 같다.

이 반복의 향연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연출가 김철승의 존재이다. 그는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며 지켜보는 일반적인 연출가와는 달리 무대를 휘젓고 다닌다. 그의 가장 큰 역할은 배우를 째려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배우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지시하고, 의자를 날라다 주고, 물을 끓이고, 커피를 타서 잔을 들어 준다. 배우들은 그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뛰고 날아오르고 의자를 넘고 부딪히는 배우들의 움직임 속에서 연출가는 아슬아슬하게 이리 나타났다 저리 나타난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자칫하면 지루해 보일 수 있는 반복에 분절을 만들고 긴장감을 자아낸다.

 


그러는 사이 사이의 긴장은 고조되고 마침내 공연은 클라이막스에 이르렀다. 연출가가 무대 뒤쪽 벽을 힘차게 열자 하얀 베개들이 쏟아진다. 세 명의 배우는 그 안에 들어가 무대 쪽으로 베개를 마구 던진다. 무대 한 가운데에는 한 명의 배우가 서 있다.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베개들은 그를 중심으로 쌓인다. 베개는 미끄러지고 던져지고 포개진다. 한참을 베개를 던지고 몸을 던지던 배우들은 마침내 베개 속에 파묻힌다. 그 가운데 연출가는 마이크를 대고, 베개에 얼굴은 묻은 한 배우의 작은 흐느낌이 스피커를 통해 객석에 울려 퍼진다. 그 소리가 잦아들 때 쯤, 마침내 불이 꺼진다. 그렇게 하얀 베개가 가득 쌓인 무대는 영원히 침대가 된다.

 

5. 극연구소 <마찰>의 김철승 연출가가 마련한 실험극 <영원한 침대>는 이와 같이 로만 이루어진 세계를 보여준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나면 세상에 오직 나와 그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만 같고, 그 세계가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아 잠에 들지 못한다. <영원한 침대>는 결국 이러한 불면의 시간을 이미지화해서 무대 위에 올린 것이 아닐까. 누구에게나 있을, 그리고 앞으로 찾아올 불면의 시간을 말이다.

하지만 <영원한 침대>에서 어떠한 의미나 해석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상상계를 비롯한 2자관계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너 사이에 해석된 바의 내용이 존재해야만, 다시 말해 3자 관계가 되어야만 비로소 의미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원한 침대>가 펼치는 상상의 세계 속에서 의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속에서는 오직 내가 아닌 것’, 그 두 가지 존재의 긍정과 부정, 밀고 당기기만이 생생하다. 바닥에, 벽에, 살에 부딪히는 감각만이 서 있다. 이 무의미의 영역에서 너와 나의 세계는 계속해서 반복된다. 그리고 그 반복이 그치는 순간, 아마도 누군가는 잠을 잘 수 있을 테고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 사진 출처_ LIG아트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