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야마가타 트윅스터, 혹은 한받과의 인터뷰 - 지혜로운 늑대의 전사

2015. 9. 28. 11:23Feature

 

트윅스터 패밀리 in Europe

야마가타 트윅스터, 혹은 한받과의 인터뷰

2015년 9월 6일, 파리에서

 

인터뷰/글_지혜로운 늑대의 전사

사진_김보리

 

지난 9월 4일 금요일 밤, 파리 바스티유 근처의 클럽 Mécanique Ondulatoire (파동역학이라는 뜻을 가진) 에서 야마가타 트윅스터의 공연이 있었다. 공연 직전 시청 근처 키로 마트에서 마련한 3유로치의 의상을 걸치고, 방공호 같은 지하 공연장을 메운 파리의 관객 앞에 서 그는 말했다. 인 코리아, 위 잇 러비쉬. 잇츠 낫 메타포. 우리는 웃었고, 그 웃음에 왜인지 자조가 섞이지는 않았다. 긴 똥, 굵은 똥, 건강한 똥을 연호하며 함께 춤추었을 뿐. 공연 내내, 그렇게 계속 웃었고, 춤추었고, 그러다 나는 서글펐다. 쓰레기 같은 조국이 그리워서. 할 수 있다면 돌아가지 않고 싶다 생각했는데. 황폐한 거리마다 숨가쁘게 비틀거리는, 그곳에 살고 있는, 내 사랑하는 이들이 그리워서. 홍대찌라시. 항상많이시. 홍대아가씨. 잊지못했시. 저 외침에 몸을 맡기며, 나는 잊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했다. 앞서 있었던 독일에서의 일정 중, 한받은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더랬다.

 

감히 말해보자면

한국에서의 삶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다

베를린에 머무는 친구들을 보면서

그 친구들에게 한국의 참된 삶의 현실을 과장하지 않고

춤과 노래로 다시 느낄 수 있게 위로해주고 싶었습니다.

다시 돌아가면 또 싸워야지요. 싸울 수 있고 싸우겠습니다.

 

가비쉬 러비쉬 트레쉬. 흰밥 쌀밥 볶음밥. 유 돈만 아는 저질. 전자음악의 비트에 맞춰 과연 저 몇 개의 단어들을 함께 쏟아냈을 뿐인데. 과장도 자조도 없는 진실 탓이었을까. 알록달록한 의상들이 너무 예뻐서였을까. 오랜만에 볶음밥이 먹고 싶어져서였을까. 나는 감히, 위로를 받았다.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또 싸워야지, 싸울 수 있고, 싸우겠다. 그런 마음이 솟는 것도 같았다. 혹은 적어도, 여기서든 그 어디서든, 또 사랑해야지,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겠다. 그런 마음이. 깊은 밤의 앵콜곡이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위 머스트 고, 투게더라고.

* 이어지는 인터뷰 기록에서는 되도록, 한받의 조곤한 사투리, 느릿하지만 분명한 말투, 초가을밤의 정갈한 정취가 전달되었으면 했다. 문답에 실린 비교적 많은 쉼표가 그런 맥락에서 읽히길 바란다. 짧은 호흡의 쉼표라기보다,부디 드문드문 꽉 찬 말줄임표 같은 것으로 감각되기를.

 

 

오늘은 한받님의 전반적인 음악 여정보다는 지금 이 순간, 이 지점에서 할 수 있는 얘기를 나눴으면 해요. 우선은 독자들께 정보를 드리는 차원에서, 그간 유럽에서의 일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

8월 1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입국해 18일부터 30일까지 베를린에 머물면서, 베를린에서 총 네번 공연하고, 중간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한번 공연을 했고요. 그 다음 잠깐 함부르크에 가서 어떤 클럽의 오픈 마이크에서 또 한번 하고. 9월2일 파리로 들어와, 4일 금요일에 한번. 이렇게 공연을 했네요. 좀 많이 했네요.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총 한달 정도의 일정이군요 ?

한달 일정, 그렇죠. 이제 다음주 수요일 니스로 내려가서 산 속에서 공연 하나, 그게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거기서 참여하시는 건 어떤 종류의 축제인지요 ?

저도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니스 쪽으로 내려가서, 그곳 국경에 산들이 많이 있대요. 그 산 속에서 하는 음악 축제라고 하더라고요. 프랑스인 친구가 초대를 해서 가게 됐습니다.

그럼 축제 형식의 참여는 그거 하나고, 대부분은…

네 맞습니다. 원래는 축제가 베를린에서 하나 기획된 게 있었는데, 사실 그 일정에 맞춰서 오는 거였거든요. 근데 그게 취소가 돼버렸어요. 거기 맞춰서 비엔나 공연도, 프랑스 일정도 잡았었기 때문에 - 물론 프랑스에서는 또 다른 분이 기획해주신 거였지만 - 그래서 취소를 할 수 없는… 공연과 여행 일정 자체를 취소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일단은 베를린으로 왔던 거였고, 베를린에서는 거기 계시는 수많은 한국분들의 도움을 받아 여러 차례 공연을 할 수 있었죠. 다만 아쉬웠던 건, 베를린의 클럽에서 한번 공연을 하면 좋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있습니다. 다 열린 공간, 아니면 갤러리 같은 곳에서 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이 조금 개인적으로는 아쉽고. 마지막으로 했던 게 세월호 집회, 특별히 야마가타 트윅스터가 연대하는 형식으로 했던 집회인데, 그런 공연이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하고요. 또 이 여행이 온 가족이 다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이 다 같이 나오게 된 건 어떻게 진행이 된 것인지요 ?

원래부터 온가족이 여행하는 것에 대해서, 뭐랄까요… 작년 3월에 한 일주일 정도 온 가족이 대만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여행으로 갔지만 어떻게 연결이 돼서 클럽 공연도 한번 했었고요. 그런 경험도 있고 해서 언젠가는 우리가 또 한번 여행을 하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계속 갖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독일과 프랑스로 오게 됐고, 또 긴 일정이니까, 같이. 우리 애들이 공룡도 좋아하고 하니까, 자연사박물관이나 동물원이나, 그런 것들을 체험시켜주면 좋겠다. 또 아내가 프랑스에 한번 더 와서, 예전에 불어를 가르쳐 주셨던 은사님도 오랜만에 뵙고 이야기 나누고 하면 좋겠다. 이런 생각으로, 함께 오게 됐죠.

가족 얘기를 좀 더 하고 넘어가면… 그 베를린의 공원에서 짜파게티를 끓였다가 사람들이 안 먹어서 선율이랑 드셨다고요. 아 로운이 ! 로운이가 그렇게 큰 거예요 ?

네네. 그때 육아일기 할때는 간난아기였는데. 로운이가, 공연이 끝나니까 로운이가 딱 오더라고요. 아빠 공연 끝났어 ? 어, 공연 끝났어. 근데 로운이가 그렇게 오니까, 왠지 공연 잘 마무리했다고, 뭔가 수고했어, 격려하는, 그런 느낌인거예요. 애가. 그래서, 고생했다고. 짜파게티가 있으니까. 같이 먹었던 거죠. (관련기사 링크 - 예술가 엄마 육아일기)

맛있었나요, 불지 않고 ?

제가 초반에 끓인 거는 너무 맛이 별로였는데, 새로 조금 물도 넣고 해서 끓여서 맛있게 먹었어요.

그러면 공연을 같이 옆에서 본 건 아니군요 ?

네, 뭐 보기도 하고, 또 자기도 하고요.

아빠가 공연하는 걸 종종 보나요 ?

아주 가끔 보죠. 저번에 갤러리에서 했을 때는 애들이 늦게까지 보다가 자고, 선율이는 늦게까지 계속 보고, 그랬죠.

한국에서는요 ?

한국에서는… 대체로 볼 일은 없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제가 업고 공연한 적도 있고 했었지만, 이제는 업을 나이들도 아니고. 투쟁 현장에서 공연하면 애들이 볼 만한 또 그런 환경은 아니고. 가끔 동네 축제나, 낮에 하는… 이런 데서 하면 와서 같이 구경도 하고.

아빠의 음악을 접하는 순간에, 그러니까 공원에서 공연하실 때 옆에 있었다거나 하는 순간에 아이들이 어떤 것 같아요 ?

아마 아내가 그건 확실히 알 텐데, 대체로 뭐 좀, 하하하. 잘 보는 것 같긴 합니다. 잘 보는 것 같긴 해요.

사실 평범한 음악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 놀라워할 수도 있다거나, 아니면 애기들 입장에서는 편견이 없으니까 오히려 즐길 수 있을 것도 같고요.

네네. 그리고 뭐, 길 가다가 그런 비트가 울려퍼지고 댄스 음악이 나오면 아빠 음악이냐고 막 묻는 경우도 있고요. 하하.

어쨌든 아빠가 하는 음악에 대해서 익숙하네요, 심정적으로.

네, 익숙하지요.

 

 

(사이, 질문자는물을 끓여 차를 따르고, 잠시 침묵이 이어지자 한받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가 아마츄어 증폭기로 시작했는데요, 음악을. 그때 아마츄어 증폭기를 두고 어떤 사람은 아 이거 좀 독일풍이다, 독일 느낌이 난다, 그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음, 그렇군. 제가 20대 때는 영화를 정말 좋아했고 많이 찍기도 했는데, 그때도 저한테그런 느낌이 있었거든요, 독일 표현주의가 좋다. 독일 표현주의의 어떤 것들이 막연하게 좋았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 나름대로는 분류를 했던 게, 리얼리즘이 있고 표현주의가 있는데, 저는 표현주의 쪽이다, 이렇게 계속 생각해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한국의 그런 영화들, 별로 안 좋아했죠, 이창동 감독님 영화라든지… 이명세 감독의 영화를 참 좋아했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야마가타 트윅스터로 공연을 할때, 특히 초창기에 어떤 분은 - 뭐 립서비스라고도 하던데 - 아 이거 정말 베를린에 가야 된다, 베를린 가면 이건 완전 끝장나는 거다, 그런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사실 저도 6년 전에 프랑스에 왔을 때, 릴에서 시험 보고 남은 기간에 쾰른 등에 가서 독일을 한번 보고싶었거든요. 그래서 어차피 한번 독일을 가긴 가야겠구나, 했죠. 근데 그때는 인터뷰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너무 멘붕이 와서, 그냥 계속 릴에 있다가 돌아왔거든요. 아, 그런 기억도 떠오르네요.

그런데 그때 릴에서 인터뷰한 게 저한테 큰 자극이 됐죠. 다시 돌아와서 음악만 할 수 있게. 그때, 포트폴리오로 영화도 보냈지만 음악도 같이 보냈었어요. 인터뷰하러 교수 연구실 같은 데를 들어갔는데, 까만 뿔테 안경을 낀 중년의 여교수가, 기다리면서 제 음악을 틀어놓은 거에요. 딱 들어가니까 음악이 딱 끝나고, 저한테 처음 하는 얘기가, 유어 뮤직 이즈 쏘 유니크. 그래서 그때 딱 깨달았죠. 아, 음악을 해야되는구나.

본인이 더 특별할 수 있는 분야가 영화보다 음악이라고 느끼신 거군요.

네. 영화는 뭔가, 이십대 중반부터 했지만, 여러가지 한계가 훨씬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저 자신이 일단 눈높이가 너무 높았고요. 뭐 장 뤽 고다르나, 레오까락스나, 왕가위나… 너무나 눈높이가 높았는데, 실제로 제가 하는 건 실험영화들, 이라고밖에 불릴 수 없는 것들이었죠. 투자 받고 사람들 모으고 하는 것도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비되고. 너무 힘들고. 소통하는 것도 힘들고. 그런데 음악은 그냥 자기 혼자서 그냥 생각나는대로 만들어도, 그것이 불려졌을 때 다른 사람들이 접점을 찾을 수 있는 거더라고요. 음악이 그런 게 좋았던 것 같아요. 솔직하게 그냥 내 이야기를 꾸밈없이 했을 때,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졌을 때, 뭔가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차츰 깨달았던 거죠.

 

 

유럽에 나오시게 된 계기에 대해서 여쭤보지 않을 수가 없어요. 아까 말씀하셨듯이 독일에 대해 그때그때 전해들었던, 귓가에 맴돌던 말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고, 특별히 뭔가 추진이 됐으니까 오게 된 것도 있겠지만, 뭔가 다른, 근본적인 계기가 있다면요? 이걸 왜 여쭤보고 싶었냐면, 제가 그간 봐온 해외 진출 케이스들은 어느 정도 분류가 되더라고요. 주로 한국 예술계의 좁은 프레임 안에서 수용이 되지 않는 예술가들이, 첫째로 외국에 다녀옴’ 이라는 무기를 취하기 위해, 둘째로 편견 없이 작품만을 보고 좋아해주는 관객을 만나고 싶어서, 셋째로, 이건 좀 다른 차원인데, 무언가를 (가령 아리랑을?) 알려주러 온다는 사명감에 취해서, 정도? 그런데 한받씨의 경우 이 세가지 모두 아닐 거란 생각이 들어서요.

네, 저는 아닙니다. 하하. 일단은 그 독일 느낌이라는 게 어떤 건지, 그걸 체험해보고 싶었고요. 정말 뭐 그냥 립서비스일지도 모르지만, 독일 가서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겠다 하던 게, 실제로 그런가. 그런 걸 한번 느껴보고 싶었어요. 또 다른 한 가지는, 서울에서, 투쟁의 현장에서 제가 연대하며 만들었던 음악들, 그 어떤 민중의 울분과 한이 함께하는, 그런 체험이 녹아든 퍼포먼스들이 유럽에 와서는 어떻게 발현되고, 또 가능하다면 소통될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체험하고, 또 어떻게 보면 실험해보려는 ?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 애기들에게 유럽의 여러가지 것들을 보고 느끼게 해주고 싶기도 했고. 파리 공연 끝나고 나서, 홍대 앞에서 밴드도 했고 지금은 파리에서 건축 공부를 하고 있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하고 밤새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 친구도 좀 비슷한 얘기를 하더라고요. 한받씨가 여기 와서 조금 실험하는 느낌이 들었다고요.

그렇다면 지금 말씀하신 몇 가지 계기들이, 겪어보니 어떠했는지를 여쭤봐야겠네요. 일단은 독일스러움’에 대해서 ?

베를린 사람들이 정말 끝장날 것이다, 그런 얘기를 많이 들어서, 실제로 그런가 ? 그렇지 않더라고요. 근데 그건 어떻게 보면, 뭔가 음향 장비라든지 하는 것들이 열악한 부분도 있었고...

반면 처음에 얘기했던 독일 느낌이라는 거는요, 확실히 그게, 제가 좋아하는 그런 느낌이 있더라고요. 근데 그 느낌이, 조금 헷갈리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베를린에 가니까, 힙한 게 느껴지더라고요 확실히. 그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다 힙해요. 그런데 그건, 자본주의의 느낌이 아니었어요. 사회주의의, 구동독의 어떤 정신이 그 공간들을, 그 사람들을, 고름이 썩지 않게 하는 뭔가가 있는 것 같은 거에요. 그건 뭘까. 프로이센, 이 사람들의 어떤 정신적인 측면 탓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확실히, 내가, 분명히 좋아하는 것들이 있구나, 독일 느낌이 확실히 있구나, 했어요.

또 한편 얘기드릴 수 있는 게, 나이트클럽을 가봤는데, 먼저 프랑스를 보면, 프랑스의 나이트클럽에서는 사람들이 귀엽게 놀더라고요. 그리고 음악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교제를 위해 곁들여지는 거고. 가끔씩 비트에 맞춰서 춤도 추지만, 얘기도 하고, 서로 웃고. 음악 볼륨 자체가 크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베를린은 음악이 압도하더라고요. 음악이 압도하고 사람들이 춤추러 와요. 얘기하러 오는 게 아니라. 그게 달라요. 근데 나는, 나도 보면, 클럽에 춤추러 가거든요. 교제하러 가는 게 아니라.

한국은 어떤가요 ?

한국은 뭐, 부비부비라고. 허허허. 춤추러 가는 사람은 적은 것 같아요, 제 생각엔. 한국은, 어디까지나 어떻게 보면 썸을 만드는, 그런 장소가… 한국에서 춤추러 가자, 이런 사람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근데 독일은 그게 확실히 있었어요. 어떻게 보면 이게, 몰입해들어가는 거죠. 그, 음악 속으로.

사실 프랑스에 와서 보면… 프랑스는 예술로 정점을 찍었던 나라죠. 연극이나 미술 등 각 장르마다 화려한 과거를 갖고 있고. 그래서 사실, 물론 힘들겠지만, 예술가들의 삶이… 다른 나라에 비해 보장되는 것도 많고, 일단 사람들의 기본적인 삶도 여유가 있고, 그러다보니까 어떻게 보면 또 치열함이 없긴 해요. 예술이. 보수적이고.

아, 그때도 느꼈다. 프레누아에 시험치러 갔었잖아요. 거기 재학생들이 얘기하더라고요. 우리 졸업하면, 잘 되면 독일 가는 거다. 최고로 잘 되면 독일 가고, 그 다음에 뉴욕 가고. 파리 가면, 그건 별로다, 이렇게.

저는 솔직히 프랑스 현대 예술에 대해서는 별로 기대가 없어요. 그래도 파리에 있어서 좋은 건, 그래도 여기가 예술의 메카고, 전세계 모든 공연들이 거쳐가니까, 이 현장감을 느끼면서 그걸 다 접하는 게 좋은 거고요. 제가 아는 한 공연예술이 계속해서 아방가르드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건, 무용 쪽은 벨기에, 연극 쪽은 독일 ? 베를린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곳에서 현대 예술이 계속 숨쉬면서 나아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고, 그 동력이 과연 뭘까 늘 생각해요. 사실 아까, 누군가 독일에 가면 잘 될 것이라 했다던 말을 저는, 음악에 어떤 독일적인 게 있다, 도 맞겠지만, 거긴 어쨌든 현대 예술이 계속 치열하게 발전하는 곳이니까 거기 가면 이걸 알아봐주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라고도, 오히려 저는 그쪽으로 이해를 했었거든요. 그런데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 확실히 어떤, 색깔의 접점도 있는 것 같고요. 그리고 그 접점에 있는, 자본주의의 것이 아닌 무언가, 같은 것들이 결국은 현대 예술을 계속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될 수도 있겠죠. 혹은 스스로 가해자였던 나라로서, 세계대전의 참상을 딛고 일어선, 그런 원동력도 있는 것 같고.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 클럽에 가서 느꼈는데, 다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러 왔는데, 거기서 어떤, 허무함 같은 걸 느꼈어요. 어떤 정점에 와 있는, 아니 정점이 아니고 극단까지 가고 있구나, 이곳 베를린에서는… 그건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의 한 모습이겠죠.

자본주의가 계속 유입되면서 생기는 허무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

네.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공급되는 게, 구동독이라는 존재감. 그 존재감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사회주의의 어떤 이상적인 정신이라고 할까요.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베를린의 그 나이트클럽에서,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거기서 어떤 허무한 공기를 느끼면서… 아 역시, 서울에서, 계속 치열하게, 그렇게 해야되겠구나. 그런 걸 다시 한번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실 그 구동독의 사회주의는, 그들의 이상과 실제 현실이 어긋났기 때문에 파국을 맞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자본주의의 벼랑 끝에서 사람들이 허무를 느낄 때,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실패했던 현실에 향수를 느낀다거나 그걸 다시 지향하는 건 아닐 거라 생각해요. 한받씨가 한국에서 싸우겠다고 하는 의미도 그것이 아닐 것이고. 그래서, 좀더, 그 색깔이 어떤 것인지 설명해주셨으면 해요. 그들의 허무라던지, 자극을 받으셨던 부분, 그게 조금 더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요 ? 단순히 사회주의를 경험했던 나라, 라는 건 좀 막연하니까요.

어, 그러니까, 사회주의가 있었던’ 나라였죠. 있었던 공간이었죠. 구동독이.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서베를린의 자본주의가 들어오긴 했지만, 그때 89년도의 젊은이들이 아직도 살고 있잖아요. 그 지역에. 충분히 그 에티튜드가 남아있을 수 있죠.

음 그렇지만 제가 유럽에서 만난, 독일은 아니지만 여타 동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그 시절을 아주 쓸쓸하게 회상하더라고요. 그 변질된 어떤 것들 때문에. 모든 것이 감시를 당했고, 똑같이 분배받아서 먹던 그 맛없는 음식과, 아무도 거리에서 웃지 않았고… 그런 것들도 있었거든요.

그렇죠, 음. 그러면, 뭐, 저의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냥 감각적으로, 감으로 느끼기에는, 그 구동독이라는, 사회주의 지역의 그런 공간감이 지속적으로, 자본주의에 굴하지 않는 어떤 흐름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나, 그런 감’이, 감이 들었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허무하기는 가장 허무할 것 같아요. 왜냐면 아주 아름다운 이상이 있었고, 그 공간에서 그걸 구현하려고 했지만, 그 이상대로 안 되었고, 그래서 결국 만난 파국이 저 괴물같은 자본주의와의 통합이므로, 지금은 정말…

그렇죠. 월(Wall). ‘월’이자 라인이 붕괴되면서 그런 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현재 전세계에서 유일한, 삼팔선이 있는 이 한국이, 불안하지만, 역동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또 그런 공간이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그 허무가 뭐였냐면… 분명히 한국하고 비교했을 때 그게 허무가 맞았는데… 얘들 여기서 기술적으로 예술적으로 극한까지 간다, 근데 의미는 없는 거, 이런 거… 그랬던 것 같아요.

한받씨는 한국에 돌아가서 계속 의미를 갖고 싸워야겠다, 그런 건가요 ?

어, 그 월’이 붕괴되면서 자본주의로 통합이 됐잖아요. 그러면서 뭔가, 역동적인 흐름은 소멸됐고, 자본주의가 계속 노리는 어떤 예술활동, 그런 것들로 갈 수밖에 없는, 그런, 막다른 골목 같은 느낌 ? 근데 한국은 뭔가 아직도 투쟁의 여지가 있다라는 거죠, 삼팔선도 있고.

그런 느낌이 한 순간에 왔던 거 같아요. 그때 비를 맞으면서 갔었는데. ‘베’를린의 밤’에 비’를 맞으며. 쓰리비(3B)죠. 허허허. 근데 베를린의 밤에 비는 상당히 어울리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한국에서는 그 어떤 구체적인 문제 상황이 정말 끊임없이 터지고 있고, 그 투쟁의 현상에 가셔서 공연을 하시잖아요. 한편 유럽은 지금, 어쩌면 그걸 다 겪고 난 후의 허무가 감도는 분위기일 수 있고… 이곳의 젊은이들에게도 여전히 고통과 문제가 있지만 그게 한국의 상황과 비교했을때는 좀 막연하면서 만연한, 그런 거랄까요. 그 관객의 차이가 어떤 식으로 경험이 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음, 베를린에서는 어떻게 보면 한국 사람들에게 많이 다가갔던 측면이 있어요. 공연을 보러 온, 베를린에 있는, 한국에는 더 이상 안 가고 싶어하는, 그런 분들에게 다가간 측면이요. 독일어로 노래를 만들기도 했는데 - 비어진트 다스 포크라고 - 동독 시민들의 구호를 바탕으로 만들어 보기도 하고. 좀 나름대로는 독일의 민중 혹은 시민들에게 어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았지만 역시 그건 욕심이었다, 를 깨달았고…

파리나 비엔나 같은 경우에는 나름대로… 비엔나에서는 좀 영어로 설명을 하기도 했는데, 그게 온전히 이해될 수는 없었겠죠. 그런 한계를 이번에 다시 한번 또 크게 깨닫고, 어떻게 하면 좀 함께 느낄 수 있게 만들까, 그런 숙제를 또 안고 가게 되는 것 같아요. 물론 퍼포먼스 자체에서 느껴지는 지점들이 있기는 하겠지만. 단순히 그냥, funny, funny한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funny에 이르기까지의 과정들, 그리고 funny가 위로했던 그런 사람들의 존재, 그런 것들까지도 전할 수 있게 된다면… 다음 유럽 투어가 만약에 또 있게 된다면 그런 부분들을 좀더 고민해서 보완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사실 파리 공연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잖아요. 첫곡을 하기 전에. 한국에서는 우리는 쓰레기를 먹는다.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말그대로 쓰레기를 먹는다... 조금 정리를 해보자면, 한국에서는 정말로 우리가 물리적으로 쓰레기를 먹는 그 상황에서 노래를 하셨던 거고, 여기에서는…

사실 그게 그 뒤에 이야기가 더 있는데, 아무래도 무대에 올라가면 경황도 없고 해서 생략을 했거든요. 그 뒤에 얘기는, 그냥 단순히 쓰레기를 먹는다는 게 아니라, 물론 정치인도 쓰레기고, 온통 쓰레기가 에워싸고 있는 서울이지만, 우리가 그 쓰레기를 먹고 건강한 똥을 눈다는 거거든요. 네. 우리가 아무리 쓰레기를 먹어도, 건강한 똥을 눠서, 다시 건강한 비료로, 쓰일 수 있게 되는, 그런 거. 결국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비록 쓰레기를 먹지만, 똥은 황금똥, 굵은똥을 눈다는 거죠. 그런 이야기.

음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데요… 우선은 한국에서는 그게 더 물리적으로 와 닿는다면, 여기서는 어쨌거나 어느 정도는 비유가 맞는 것 같은데, 대신 그게 이곳 젊은이들의 다른 아픔을 건드려줄 수 있는 ? 그런 힘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은 프랑스인이든 독일인이든 가사를 모르므로… 그런 애로가 있죠. 그렇다고 클럽 공연에서 자막을 할 수는 없고... 언어적으로 이야기가 통하지 않아서 아쉬운 느낌은 있지만, 만약에 통한다면 아픔은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분명히 제가 파리 공연을 위해서 아내와 협력해서 번역 작업 등을 했다면 더 나았을 수 있겠죠. 그런데 그런 부분이 조금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아요.

아내는 사실 야마가타 트윅스터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허허허. 그게 왜냐면, 그게 독일 느낌하고도 연결되는데, 독일이 어떻게 보면 테크노의 고장이잖아요. 하우스음악, 댄스음악, 전자음악. 전자음악의 기본은 비트거든요. 단순 반복적인 비트. 제가 그런 거를 추구하는 게 있어요. 미니멀한 거. 꾸밈없이. 그냥 비트가 계속 반복되고 그 위에서 몇 안 되는 음들로 노래하고. 그게 어떻게 보면 투쟁 현장에 잘 접목이 되어서 막 구호를 외치듯 반복하고 하는 것들과 어우러지게 된 건데요. 독일에 갔을 때도 그런 것들이 많이 느껴지기도 했고, 미니멀하게 반복되는 종류의 것들을 독일에서는 좋아하고 선호하는구나, 즐겨하는구나,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아내는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너무 평면적이다 이거죠.

그런데 저는 오히려 프랑스에서 관객들이 딱 좋아하겠다고 느낀 건, 익살스런 부분 ? 프랑스가 좀 유머, 익살, 풍자, 이런 거에 강한 전통이 있어서요. 그런 부분을 좋아했을 거 같아요.

아, 그렇군요… 아내는 항상 제 음악을, 요즘 들어서 더, 이게 선동 구호인지 음악인지 모르겠다, 너무 평면적이고 단순하고… 좀더 입체적으로 음악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그렇게 얘기하는데, 저는 제 가치관 자체가, 입체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런 게 있어요. 단순 반복적인 거, 미니멀한 거를 계속 추구하고 싶은 그런 가치관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아내는 야마가타 트윅스터 음악을 별로 안 좋아하고. 그래서 작업을 같이 하기가, 서로가 부담스러운. 허허.

저는 사실 음악을 잘 모르고, 뭔가 들었을 때 막 몸부터 반응하고 그러지도 않아서… 오히려 가사나 이런 측면을 보자면- 그것도 매우 미니멀하고 반복적이긴 하지만, 그 돌직구가 굉장히 뭉클한 게 있다고 느꼈어요. 음 그래도 클럽 공연에서 자막을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고… 그러면 놀지를 못하잖아요.

그래서, 어감도 생각해서 번역을 잘해서, 노래를 바로 해도 좋겠다 싶어요. 왜냐하면 저도 불어를 좀 배우다가 말았기 때문에… 조금만 더 노력하면 그런 것도 가능할 거 같긴 해요.

제가 프랑스 오기 직전에 함부르크의 어떤 락음악 전문 바에서 오픈마이크를 신청해서 공연하는 걸 했었거든요. 그때 어떻게 보면 독일 클럽에선 처음 한 거였죠. 약식으로 세 곡 정도 한 거였지만. 근데 역시나 독일 사람들이 반응이 좀 덤덤하더라고요. 베를린이 아니라 함부르크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베를린은 독일 안에서도 좀 특이하게 생각을 하기 때문에. 여튼 그렇게 세 곡 마치고 나오니까, 함부르크에 좀 오래 계셨던 분이 여러가지 얘기를 해줬는데, 일단은 프랑스 간다 하니까 프랑스 사람들이 더 좋아할 거라고… 그런데 역시나, 해보니까 프랑스 사람들이 많이 좋아했어요.

네, 그 익살적인 부분 때문이었던 거 같아요. 아 참, 프랑스 공연하고 페이스북에 짧게 올리신 글에서 보고 유추한 바로는, 나가실 때 원래 다 안 따라나가나봐요. 그런데 다 따라나간 거죠 ?

아, 원래 한국에서 할 때는 다 따라나오는데, 유럽에서는 처음 해본거죠. 그래서 큰 기대는 없었어요. 뭐 나오든 안 나오든 저는 길거리에서 할 자신 있으니까. 처음에는 안 나왔어요. 두번째 돈만 아는 저질 할 때는 많이 나왔더라고요. 그렇게 거리에서 어떤 해방감을 느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저한테는.

맞아요. 참 아까, 쓰레기를 먹지만 건강한 똥을 낳는다 하실 때 생각난 건데, 친구 중에 지금 독일 남자랑 결혼해서 독일에 사는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가 만삭일 때 파리에 와서 만났거든요. 그런데 재미있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여자들이 첫 아이를 낳고 나면 생리통도 줄고, 몸의 안 좋은 것들이 많이 없어진다고들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이한테 자신의 안 좋은 것들 절반을 나눠줘서 그렇다는 거에요. 요즘 보니까, 신체에 쌓인 호르몬 같은 것들 때문에 모유 수유를 할 때도 좋은 것 뿐 아니라 안 좋은 게 그만큼 간다는, 그런 화제가 이슈가 되기도 했더라고요. 그래서 그 친구는, 내가 이 아이를 낳는 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게다가 더 나아가서, 이 아이가 지구에 와서 살면서 배출할 쓰레기를 생각해보라, 나는 결국 쓰레기 하나를 낳는 게 아닌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하는 거에요. 물론 웃으면서 하는 얘기죠. 그런저런 생각이 있지만 나는 또 이렇게 아이를 가졌고, 기쁜 마음으로 낳아서 정신없이 키우겠지, 하면서. 그런데, 제가 워낙에 아내분이 쓰신 예술가 엄마의 육아일기를 보고 좋은 느낌을 받았던 것도 있고, 쓰레기를 먹지만 건강한 똥을 누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을 하시니까… 그 친구 말대로 우리는 아이와 육신의 쓰레기를 나눠 갖고, 또 그 애도 쓰레기를 낳는, 또 다른 쓰레기가 될 거지만, 그래도, 그래도 건강한 똥을 눌 수 있을 거라는, 뭔가 그런… 희망까진 아니더라도… 재밌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사실 실험을 하러 오셨다고 했지만, 실험이라는 건 꼭 성공을 목표로 하는 건 아니니까요. 말하자면 그저 어떤가, 보러 오신 거잖아요. 어떠셨나요 ?

일단은 우리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그런 시간들이 좀 있지 않았나, 그게 좋고요. 또 아내도 프랑스에 다시 와서 체험하고. 우리 가족, 가족을 먼저 생각해보게 되네요. 또 많은 분들의 응원을 받았고, 후원을 막 해주기도 하셨거든요. 그런 것들에 마음이 또 많이… 열심히 해야겠구나. 하하하. 그런 생각이 또 들었고. 네 그렇습니다.

한국에 돌아가시면 어떤 일정이 기다리고 있나요 ?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공연들이 엄청 대기하고 있어요. 일단 돌아가자마자 다음날, 포이동이라고, 강남에서 어떻게 보면 가장 가난한 동네에요. 불이 크게 한번 타서 재건한 마을인데, 거기를 강남구청이, 어떻게든 사람들을 내쫓으려고, 그렇게 하고 있고 있거든요. 그에 대항하는 투쟁이 계속 있어왔고. 그 재건마을 문화제에서 또 공연을 해요. 제가 그곳 문화제에 몇번을 갔었는데, 포이동 주민들이 야마가타 트윅스터를 정말 좋아해주시거든요. 서울 시청 앞에서 데모할 때도 제가 가서 연대했었고요. 그런 게 뭔가 전해지나봐요. 마음들이. 포이동이라는 노래도 만들기도 했었고, 하여튼 좀 찡한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찡한 순간들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자체도 음악가로서 참, 뭐랄까, 뿌듯하고요. 늘 모든 사람들과 함께하진 못하지만, 이렇게 거리로 내쫓길 위기에 처한 분들에게 다가가서 위로도 되고 즐거움도 줄 수 있는, 그런 공연을 계속 하고 싶죠.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티비에 나오고 뭐 명성을 끌고 인기를 끌고 이런 것과 상관없이, 하나의 소명으로서요.

내심 베를린에 오면서, 베를린의 어떤 민중들과 연대할 수 있는 그런 접점을 찾고 싶었는데, 이번에 못 찾았어요. 다음에, 숙제로 남겨두고 갑니다. 오히려 한국 교민분들 도움을 많이 받아서, 특별히 세월호 집회까지 신고해서 하게 해주시고.

세월호 집회는 어떤 식으로 진행됐나요 ?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사실들을 알리고, 제가 전체 공연을 했던 거죠. 세월호와 관련된 노래도 하고, 민중과 함께 연대했던 다른 노래들을, 주욱 이어서 했습니다.

작년 이후에 떠나오신 분들이 많더라고요.

뭔가 이번에 다녀가시는 것이, 한국에 돌아가서 하실 일에 - 물론 계속 해오시던 걸 하시겠지만 - 약간은 영향을 미칠 부분이 있을까요 ?

일단은 베를린에서 어떤 허무를 봤기 때문에… 서울에서 계속 열심히 해봐야겠다, 계속 열심히 연대해야겠다, 그렇게 했을 때 역시 살아있는 음악이 나오는 것 같다, 그걸 더욱 깨달았다고 할까요.

파리에서 앵콜곡으로 위 머스트 고 투게더를 부르셨을 때…

아 그 노래도 역사가 있는데, 맨 처음에는 대구에서 퀴어 퍼레이드를 할 때, 행진하면서 노래할 게 필요하다 해서 만든 곡이에요. 그때는 영어가사는 없었죠. 그때 가사는 이 세상의 모든 억압받는 자들, 거리로 나와요 함께 가요’ 이런 거였는데, 그 다음에 제가 일본 투어를 갔어요. 일본의 새로운 민중이라 할 수 있는, 그런 분들과 함께 신주쿠 거리를 행진하면서 사운드 데모를 할때 그 노래를 함께 불렀죠. 그때는 일본어로 번역을 해서, ‘세카이노나카데 유메미루 히토다치’ 라고 부르면서 행진을 했는데, 그때 막 사람들이 울먹이고, 그런 좋은 기억이 있었어요. 그리고 계기가 있을 때마다, 작년에는 또 홍대 앞을 행진하는 프로젝트도 했었고, 그때도 같이 사람들과 불렀을 때 뭉클함이 있었고요. 그런데 프랑스로 공연을 초대해준 프랑스인 친구가, 뜬금없이 그 노래 얘기를 하더라고요. 위 머스트 고 투게더, 이거 프랑스에서도 먹힌다, 같이 부르면 좋겠다. 그래서 그때, 원래 셋 리스트에는 없었지만, 앵콜이 계속되니까, 그 노래도 하게 됐죠.

저는 계속 앞에 서 있다가 그때는 나가는 계단 쪽에서 봤는데, 멀찍이서 또 한번 보니까 좋더라고요. 근데 좀, 그냥 제가 원래 그런 정서가 많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좀 슬픈 느낌이 있었어요. 그냥 저 개인으로서는, 뭔가 이런저런 작은 뜻을 가지고 한국에 돌아가서 하고자 했던 일들을 어느 순간부터 할 힘이 없다고 느껴지는, 좀 지친 것 같은 그런 상황에서, 딱 그런 말을 들으니까… 뭐랄까, 어쩔 수 없다는 생각 ? 어쩔 수 없이 가야지 나도, 이런 생각 ? 그리고, 모두가 다, 결국은 슬픔을 안고 가는 거지, 싶어지는 거죠. 모두가 다, 힘이 없지만. 음 그런데 저같은 사람들도 대상으로 염두에 두셨다고 하셨잖아요. 한국의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들 ? 그런데 예를 들어 그들을 앞에 두고 그런 노래를 부를 때, 위 머스트 고 투게더는 대체 어떤 의미의 메시지인가요 ?

(함께 폭소) 하하하. 사실 그건 국경이나 세계관을 초월해서 함께 투쟁해나가자, 그 옛날 인터내셔널, 공산주의 연맹이나 이런 것처럼. 그런 어떤, 언어와 인종과 민족, 이런 것들 다 초월해서 함께 투쟁해나가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계속 부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말 그대로, 그렇죠, 네, 분명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외쳐야 되고, 네. 위 머스트 고.

그때 저는 너무 좋았어요, 그 노래할 때. 어떤 희열을 느꼈어요. 왜냐면 보통 공연할 때, 투쟁 현장이나 우리나라 클럽이나 대부분 열악하거든요. 음향 장비들이 받쳐주지를 못해요. 그래서 그 비트의 댐핑이나 그 어떤 타격감을 못 느끼는데, 그때 파리에서 확실히 느껴지더라고요. 한국에 있을 때 제가 공연을 수백번 했지만, 그런 느낌은 진짜 손에 꼽을 정도에요. 음향적으로 봤을 때. 투쟁 현장은 물론 더 열악하죠. 스피커 빼앗아가요, 막. 경찰이. 시끄럽다고. 케이블 막 다 떨어지고.

아, 독일에서 클럽 공연을 못 해본 게 아쉽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한편으로 거리에서 하는 것도 좋아하시고. 클럽에서 하는 거랑 그거랑 각각 어떤 의미가 있는 거에요 한받님께 ?

클럽은 어떻게 보면 갖추어진 환경이잖아요. 갖춰진 환경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런 걸 체험해보고 싶었던 거고요. 아마도 그때 나한테 너 베를린 가서 공연하면 끝장날거야 했던 건 어떤 클럽에서, 이번 파리 공연과 비슷하게 갖춰진 공간에서 했을 때를 말한 것 같고. 그런 것들을 체험하진 못했으니까요. 또 무대에서만 풍길 수 있는 그런 이미지도 있고요.

반면 거리에서나, 아니면 대규모 집회 - 여러 가수들이 같은 뜻으로 참여하는 - 그런 집회에서는 무대가 아주 큰 경우도 있잖아요. 그런 곳에서 혼자 공연하실 때는 느낌이 어때요 ? 그때에도 충분히 꽉 차는 느낌이 있나요 ?

네 있어요. 그때야 환경 자체가 연대하는 분위기고, 모든 사람들이 한 곳을 바라보는 거니까…

오히려 사람들의 에너지로 인해서 ?

네. 집중되잖아요. 그게 응집력있게 결집해주는 그런 역할을 하거든요.

각각의 매력을 버리지 못하겠군요.

네네. 맞습니다.

그런데 아마츄어 증폭기 때는 보니까, 앨범 형식으로 묶여서 노래가 발표가 됐더라고요. 4집까지. 그런데 야마가타 트윅스터는 그렇지 않잖아요.

앨범으로도 묶이고도 있는데, 그게 두드러지진 않죠.

그러니까, 노래를 이만큼 주욱 만들어서 앨범으로 발표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때그때 활동을 하며 노래가 만들어지는 그런 거죠 ?

네, 맞아요.

그럼 예를 들어 새로운 곡이 만들어졌는데, 사람들이 그걸 접하는 방식은 오직 공연장에 가서…

공연장이 거의 유일하죠. 아니면 뭐, 좀 기다리면 음반에 실릴 수도 있고요.

대개는 특별한 투쟁의 자리가 주어지고, 그때그때 그것과 맞는 음악을 만드셨던 거죠 ?

네, 돈만 아는 저질도 두리반이라는 공간 사건 때 연대하면서 함께 만들었던 거고요.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인데, 음악이라는 개념이 아주 옛날에는, 막 바로크 실내음악 그런 때는, 집에 음악가들이 오고 가족들이 모여서 밥도 같이 먹고 연주하는 거 같이 보고… 그 전반적인 모든 것을 통틀어서 음악’이라는 단어로 불렀대요. 그런데 음악 개념이 점점 축소돼서 요즘에는 겨우 파일이 돼버렸잖아요. 음원.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음악이 사실은 어떤 시공간을 품는다고 할때, 곧 나의 행위와 관객의 존재, 그런 것들을 다 품는다고 할때, 한받씨는 그런 식의 음악을 하고 계시는 것 같네요. 그렇죠 ?

네네.

사실 파일로서의 음악은 가장 좁은 의미의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아쉬움은 있을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한받씨처럼 작업을 하시는 경우에는요.

그리고 어떤, 소비 지향적인 게 아니죠. 음원으로서 그저 그때그때 자기가 원할 때 감상 목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랄까요. 물론 제가 음반을 판매하기도 하니까 감상용으로도 들으시겠지만...

연극은 공연장에 가야지만 볼 수 있고 그게 아니면 끝인데, 음악은 찾아들을 수 있으니까, 훨씬 더 넓게 퍼질 수 있고,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모이면 또 힘을 가지게 되는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연극보다는 음악이 그런 면에서 용이하다고. 그런데 한받씨는 어떻게 보면 연극에 가까운 음악을 하시는 것 같네요.

맞아요. 대중적으로 퍼지기에는 한계가 있는. 네, 그런 한계를 저는 뭐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 날이 오지 않겠지만 - 왜냐하면 아무리 세상이 기적적으로 좋아진다 하더라도 소외받는 사람은 늘 있을 테니까요 - 그렇지만, 만약에 정말로 완벽하게 모두가 행복한 순간이 온다면, 어떤 음악을 하실 것 같나요 ?

아무래도, 천국의 음악을 하겠죠. 천상의 음악.

더 이상 투쟁하자’ 가 아닌 ?

네. 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그런 음악을 하지 않을까요 ? 그렇죠, 음악이, 그냥 자연의 그런 소리처럼, 들리지 않을까.

니스 근처의 산 속, 그곳이 궁금하네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일 것 같은데. 그 음악의 색깔과, 그 곳의 풍경이 어떨지, 정말 궁금해요.

네, 저도. 이 여행의 마지막 여정인데,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하하하. 기대하고 있습니다.

 

 

며칠 뒤 천국같은 산 속에서의 공연을 마치고, 한받과 그의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한달여의 공백이 무색하게, 전과 다름 없이 그는 날마다 각종 투쟁의 자리를 찾아 가 땅을 구르며 연대한다. 찾아 간다는 것. 그것의 위대함, 다정함, 절실함에 대해 생각해본다. 야마가타 트윅스터의 음악은 아마도 그런 것. 세상에서 발견한 허무를 가슴에 품고, 여전히 불안하지만 그래서 더욱 역동적인 조국으로 돌아가, 다시 땅을 구르고 이단옆차기를 하려, 구석진 곳에서 아파하는 이들을 찾아가는 것.

해서 그가 개인적인 실험을 명목삼았을지언정, 이곳을 다녀가주었던 것이 참 고맙다.

함께 가야 한다고 외치기만 하는 것 아니라, 함께 가자고, 먼저, 후미진 이곳까지 찾아와주었기에.

그의 음악이 그런 것이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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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엄마 육아일기 인디언밥 지난기사 바로가기 >>> http://indienbob.tistory.com/702 

 

  “베를린 ZK/U에서 하기로 했던 악산밸리 베를린 공연이 취소된 것은 생각보다 제 안에서 충격이 컸던 것 같았습니다.” 야마가타 트윅스터 혹은 한받은 이러한 충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오랫동안 미뤄왔던 가족여행을 이루기 위해, 유럽으로 향한다. 여행이면서 공연이고, 공연이면서 여행이었던 그의 유럽투어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다. 파리에 체류중인 인디언밥의 전-편집인 지혜로운 늑대의 전사가 함께 만나 이를 풀어보았다. 본 인터뷰는 지난 9월 4일 금요일 밤에 있었던, 프랑스 파리 바스티유 클럽 메카닉 에서의 "위댄스" 와 합동 공연 이후에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