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극장은 불타고 있다 #거리예술편 - 우리는 거리에서

기획연재 "극장은 불타고 있다

#거리예술편 #metoo


우리는 거리에서


_김민범

 

온통 망하고 나면 


실망에도 희망이 필요하다. 지난 두 달 유명인의 이름이 포털에 등장하면 의심부터 했다. 오래 참았다가 터져 나오는 목소리들에 마음이 무겁다. 망연하게 바라보다가도 나 역시도 남성 중심의 구조와 위계 뒤에 숨어 비겁한 적 없었는지, 나 역시 피해를 준 적은 없었는지 지난 기억들을 살핀다. 내가 했던 말들이 무심한 말이 아닌 무지하고, 누군가에게는 무참한 말이 될 수 있었음을 반성한다. 더는 좋아할 수 없는 작품들이 생겨나고, 작품에 얽혀있던 추억마저 오염됐다고 말하는 일은 용기를 낸 사람들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투정이다. 이제 예술이 삶 앞에 놓여서는 안 된다. 무찌르기 위함이 아니라 비논리와 악습이 통용되는 세계를 자정하기 위해 지속되어야 한다. 한바탕 망해서 묵과되고 소외되었던 목소리에 모두가 귀를 기울이면 더 많은 목소리가 등장할 수 있다. 모든 차별과 폭력에 반대한다는 구호가 언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나는 3년 차 거리예술의 관객이다. 취재로 거리예술을 알게 됐다. 더 배우고 싶어서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 에서 진행한 거리예술비평아카데미를 수강했고, 그 인연으로 신진 거리예술가를 양성하는 거리예술 NEXT’ 사업에 구성작가로 참여했다. 여러 거리예술가들과 워크숍을 진행하며 거리와 예술에 대해 고민했다. 지금도 종종 거리예술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거리예술에 대해 잘 모른다. ‘업계의 일에 대해서는 더욱 모른 다. 거리예술 공연에 가면 마주쳤던 얼굴들이 보이지만, 인사를 건네기에는 조금 애매하다. 내부자가 아닌 언저리 있는 사람이 거리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기 조심스럽다. 그렇지만 경계에서 바라볼 때 할 수 있는 말이 있다고 믿는다. 이어질 글은 관객으로서 봤던 거리예술 작품과 풍경에 대한 인상이다.


▲유지영의 <신체부위의 명칭에 대한 의문> (사진출처_고양호수예술축제 홈페이지)


 

거리에 있던 풍경들

 

거리예술을 보고 배우면서 사람들의 관계가 수평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강의를 위해 나온 분들은 자신 역시 배우는 과정이고, 같이 공부하면 좋겠다고 했다.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업 방식과 작업물을 공유하면서 내 영역에 들어오고자 하는 제자가 아닌 참가자들을 동등한 예술가로 대했다. 워크숍이 끝날 때면 앞으로 국내 거리예술을 같이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라는 동료애를 느낄 수 있었다. 기획자들은 거리예술가들이 존중받고, 제약으로 인해 작품이 한계를 느끼지 않도록 노력했다. 거리예술이 자리를 잡아나가는 과정에 있는 예술 장르이고,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모여 협업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서로를 존중하는 분 위기가 전제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거리 예술은 몇 가지 약점을 지니고 있다. 어떤 거리예술 공연을 보고 있으면 유입되는 관객보다는 고정된 관객이 많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다. 겨우 3년차 관객이 아는 얼굴을 자주 마주칠 수 있다는 건 고정관객이 확보되고 있다는 의미보다는 관객층이 좁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대중들에 게 거리예술에 대한 인식이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거리예술 장르에 대한 애호층은 좁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을 차치하더라도 만드는 사람이 다른 공연의 관객이 되고, 관객이 다른 무대에서 관계자가 되는 일은 의도하지 않아도 폐쇄적인 상황을 만들 가능성을 내포한다. 위계는 닫힌 공간에서 자라난다. 지속적으로 다른 장르 의 예술가들이 유입되는 상황에서 기우일지도 모르나 어떤 장르에서도 최초부터 위계가 있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 거리예술을 알아갈 때는 모든 거리가 다 공연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지 않다. 자유와 제약이 동시에 존재한다. 합의가 필요하다는 거리라는 공간의 특성과 기관과 함께 발전해온 거리예술의 발전 과정상 기관과의 협업이 거의 필수적이다. 기획자는 기관에 속하는 경우가 많고, 예술가는 생계와 작품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관에 의지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작품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작품에 대한 고민뿐만 아니라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거리와 타협하는 과정에서 착한 예술만이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동등한 듯 보이지만, 자발적인 상하관계가 발생할 수 있다. 거리예술은 거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상기시킨다. 어디든 갈 수 있다고 해서 그 거리가 시민에게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못된 거리예술이 가끔은 궁금하다.

 

▲간디니 저글링의 <스매시>@서울거리예술축제 (사진출처_서울문화재단 홈페이지)



예술이 놓인 자리

 

거리예술을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보러 간 날이면 우직하게 보려고 노력했다. 그들이 왜 거리에 나와야 했는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사려 깊게 읽어내고자 했다. 거리예술이 위계와 구조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 탐구하고 있는지 작년에 봤던 세 작품을 통해 거리예술이 지적하고 있는 문제점과 아쉬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유지영의 <신체부위의 명칭에 대한 의문>은 제목처럼 너무나 당연해서 아무도 의문을 갖지 않는 신체부위 의 명칭에 대해 탐구한다. 코는 입으로, 눈을 귀로, 입은 무릎으로 익숙하던 신체를 낯설게 재정의한다. 행위자들은 나레이션에 따라서 새롭게 부여된 이름들을 숙지하고, 점점 빠르게 호명되는 신체 부위들을 이용해서 무용 과 닮아있는 동작들을 펼친다. 속도가 빨라지면서 새로 정의된 신체들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한다. 이러한 실패를 통해서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질서에 대해 질문을 한다. 신체는 어릴적 코코코 놀이에서 한치도 나아가지 못한채 평생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각각 신체에 대해 이상적인 형태를 학습하고, 범주에서 이탈하는 신체에 는 무의식적 반감을 습득한다. ‘신체부위의 명칭에 대해 저항은 더 큰 단위의 질문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지닌다. 남성과 여성은 왜 이분법적으로만 구분되는지, 왜 성별에 따라 색이 부여되는지, 개인에게 요구되는 삶의 태 도가 있는지 물을 수 있게 된다.

 

저글링을 실패해야만 하는 저글링 공연이 있다. 간디니 저글링의 <스매시>는 사과로 저글링을 한다. 저글링은 성인이면 당연히 지켜야 할 일종의 규칙이 된다. 혹 이를 어길 때(떨어 트릴 때)에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비웃음을 견뎌야 한다. 공연이 지속되면서 남성들은 여성들을 가르치려고 들고, 불필요한 신체 접속을 지속한다. 백인 남성은 흑인 남성을 조롱하고, 차별한다. 복장에 따라 나뉜 그들의 계급을 통해 상위 계급은 하위 계급을 착취하고 업신여긴다. 차별과 폭력이 행해질 때마다 그들은 사과를 떨어트린다. 공연의 막바지에서 그들은 우아함을 포기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폭력을 행하고, 공연장에는 짓이겨진 사과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저글링에 실패했다. 부서진 백 개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정작 깨져야 할 차별과 폭력은 깨지지 않았다. <스매시>는 우리 사회에서 무너져야 할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성별, 인종, 계급 등 모든 종류의 차별은 지속되어야 할 규칙이 아 니라 조각나야 할 대상임을 보여준다.

 

마임 공연인 류성국의 <빈손으로 드리는 이야기>는 한 사람의 삶에 대해 들려준다. 마름모꼴의 좁고, 불안정한 무대에 오른 배우는 빈손으로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그 장면 안에서 배우는 아이가 되었다가,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된다. 두 손으로 가상의 벽을 만들고, 몸짓으로 그 벽을 넘고, 부숴낸다. 긴 문장을 한 표정에 담아내는배우는 인생의 희노애락을 무언으로 그려낸다. 제자리를 걷는 그는 아버지의 모습은 닮아있다. 한 손에는 사랑하는 이를, 다른 한 손에는 자신의 아이와 함께 걸어 나간다. 힘듦과 고통은 온전히 그의 몫으로 재현된다. 이러한 공연의 모습은 기존의 가부장적 체계하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무게의 절대량과는 무관하게 각자 감내하고 있는 삶의 무게가 있다. 가장이 가족의 모든 무게를 짊어진다는 신화는 깨어져야 한다. 모두를 떠나보내고 초라해진 그가 울음이 가득한 웃음을 지어 보일 때, 쉽게 그와 함께 웃을 수 없다.

 


다시, 거리에서


거리예술 공연을 앞둔 날이면 날씨를 살핀다. 혹 비가 오지는 않는지, 바람이 많이 불지는 않는지 확인한다. 소풍 가는 기분으로 잠자리에 든다. 날씨도 공연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거리예술은 많은 변수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번이 아니면 영원히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실함으로 공연을 관람한다. 오래 관객으로 남아 지지와 응원의 눈인사를 건네고 싶다. 어쩌면 거리예술은 망하지 않아도 지속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필자_김민범

 소개_열심히 읽고 꾸준히 씁니다.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에서는 5월부터 "극장은 불타고 있다" 는 타이틀 아래, 공연예술 장르와 개별 작품에서 나타나는 성폭력 및 성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미투(metoo)운동으로 불거진 공연예술계의 한계와 문제점들에 대해 인디언밥은 지속적으로 논의할 예정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극장은, 거리는, 광장은 불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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