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삼홍'이 피었습니다.

2009. 4. 10. 07:5307-08' 인디언밥

'십삼홍'이 피었습니다.
  • 현수
  • 조회수 856 / 2007.09.05

‘십삼홍’이 피었습니다

 

박은주의 춤 공연 <13홍>이 8월 9,10,11일에 ‘춤 공장’에서 있었다. ‘춤 공장’이 있는 문래역은 예술가들이 저렴한 임대료 때문에 삼삼오오 모여들고 있는 곳이라고 알고 있었다. 공연장으로 가는 골목에는 철공소, 철재 상가들이 늘어서 있었고 공연장은 그 사이에 있었다. 철재를 절단하는 쇳소리가 공중에서 부서지면 시큼한 철 냄새를 풍기는 곳을 지나 지하 공연장 입구로 들어서자 습습한 공기가 엄습한다. 안개 같은 습기 사이로 촛불 모양의 조명이 객석에서 빛나고 있다. 공연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동안 몸은 점점 눅진해져 무거워져갔다.

 

촛불이 꺼지자 무대는 까만 안개로 가득 찬다. 잠시 후 조명이 들어오고 그녀는 무대의 구석에 벌써 와 있다. 어두운 동굴을 더듬어 들어갔더니 오랫동안 수행한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가 서 있다. 그리고는 머리를 둥글게 감쌌던 팔을 천천히 뻗기 시작한다. 팔을 뻗는 동작은 어려운 것이 아니나 그렇게 팔을 뻗는 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닌 것을 느낀다. 그 ‘뻗음’ 속에 그간 그녀가 뻗어온-찾아온-긴 시간들이 축적되어 있음을 직감한다. 호흡과 리듬은 정재(매우 절제된 한국 춤을 일컫는 이름)와 같이 규칙적이다. 동선 또한 직선에서 다시 직선으로 매우 단조롭다. 이 동작들은 확인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하나하나 안무자의 움직임을 통해서 담겨진다. 안무자의 안무인데 밖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꾸 자꾸 안으로 안으로 움직임들은 중첩되고 겹겹이 쌓인다. 마치 절대적인 동작을 찾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움직임들이 움직임의 반복 속에서 매 순간을 견뎌내고 있다. 관객은 그와 함께 그의 움직임 안으로 들어간다. 조금이라도 집중력이 흩어질라치면 우리는 금방 관찰자로 바뀐다. 누군가의 차가운 구도를 숨죽여 지켜보는 관찰자로. 그럴 땐 그녀가 혼자 인 것이 분명하다. 둔탁한 장구의 소리만이 이 외로운 수행에 간헐적으로 맞장구를 치고 있다.

 

등을 벽에 부딪치게 한다. 입으로 가져간 손등과 입술을 부딪친다. 벽으로부터 밀려난-밀어낸- 등이 입술을 손등 가까이 데려다 준다. 입맞춤 소리가 속절없이 허공에 흩어진다. 기다림을 다짐하는 듯이 몸을 퉁기면서. 그러나 괜찮다는 듯이 사뿐히. 그녀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그녀는 무엇을 떠나보낸 것일까? 두 손으로 벽을 '꾹-' 눌러 몸을 밀어낸다. 밀어내면서 밀려난 몸으로 그녀는 맞은편 벽까지 다가간다. -왔다-갔다-왔다-갔다- 애써 밀어내던 힘들이 힘겨움을 넘어 몸에 베어버린 습관처럼 그 속도가 조금씩 리듬을 만들어가더니 무대의 공기를 바깥으로 바깥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고 한참 넋을 놓고 있노라니 마치 객석에 앉은 내 몸이 그네를 타는 듯, 파도에 실려 가는 듯 흔들흔들- 왔다갔다 한다. 그녀가 밀어낸 공기를 타고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녀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일까?

 

앞 서 나왔던 동작들도 춤이 되어 흐르기 시작한다. 반복되고 반복되었던 이전의 동작들이 새로운 춤들로, 그러나 무수한 반복을 담은 춤들로 살아난다. 새로운 춤은 또 다른 춤을 불러오고 이미 춤추는 사람은 사라지고 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격렬하게 떨리고 요동치고 무섭게 내리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해지는 폭풍처럼 떨리고 파닥거리다가 사그라든다. 한 판 푸닥거리가 휘몰아치고 간 후에는 굿거리 장단을 어깨에 실고 두 팔이 천천히 벌어진다. 두 팔은 수평선이 되어 고요하게 무대를 가르며 객석으로 다가온다. 약속하듯이, 다짐하듯이 떠나보냈던 것을 다시 한 번 더 떠나보내다가 문득 사라진다.

                             <사진 제공 : 화영>


다시 무대는 까매졌다가 처음처럼 작은 촛불만이 객석 사이에 빛나고 있다. 이제 그 불빛은 공간에 들어왔을 때 자리를 찾으려고 의지했던 빛만은 아니다. 더 날카로워졌고 더 따뜻해졌다. 그리고 날카롭고 따뜻한 빛 사이로 희미하게 그녀가 보인다. 빛 사이라고 말하지만-어둠 속에서 그녀는 허리를 굽혔다 -폈다-굽혔다-폈다- 두 팔로 크게 원을 그리고 있다. 똑같은 박자로 반복되는 동작이 어둠에 익숙해져서 조금씩 선명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멀어진다. 몸이 굽혔다 펴지면서 손이 바닥을 쓸어 올리는 소리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들려온다. 그리고 그 소리는 객석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마치 무한히 반복되기라도 할 것 처럼. 그러다 갑작스레 두 팔을 뻗어 올리며 몸은 멈춘다. 여리게 퍼져나가던 불빛도 함께 멈춘다. 다시 까만 안개. 그 사이로 철공소에서 흘러나왔던 쇳소리 같은 뷰욕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날카롭고 따뜻한 목소리가...  

 

그녀의 몸은 공연장의 둔탁한 공기와 절묘하게 섞여있었으나 그녀의 춤은 또 다른 공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음악과 어둠속에서 관객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한동안 그 공기에 젖어들었다.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작은 불빛조차 어둠 구석구석에 퍼져나가는 것을 본다. 철재 공장의 서늘한 기운이지만 그 기운들을 조금씩 움직여갈 수 있다는 것으로도 작은 몸짓의 소중함을 품는다. 더불어 창작의 결과를 함께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창작 작품을 올릴 무대가 있다는 것으로, 그리고 어둠에도 불고하고 여전히 춤을 추고 있다는 것으로 우리는 감사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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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홍’ 안무 및 연출, 박은주 인터뷰 >>

-그간 춤을 추면서 걸어온 길을 말해 달라.

살풀이를 접했고 한국무용을 배웠다. 가만히 앉아서 춤추는 일들이 즐거웠고 요동치며 게워내며 나 자신의 춤의 형상을 찾아 헤매는 일들이 점점 이 세계와 나를 가깝게 만들었다. 항시로 열려있고 항시로 이 세계와 접합해 있고 싶다. 그러기에 춤은 좋은 매체이다.

 

-이번 작품 <13홍>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13홍>은 가로지르고 넘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빛을 염원한 작품이다. 12를 주기로 반복되는 세상에 13이라는 넘쳐나거나 빠져나가는 삶들에 대해 외치고 싶었다. 이미 드러난 빛을 등지고 새로운 빛을 기대하며 어둠으로 향하는 사람들과 이 춤을 나누고 싶었다. 누군가는 죽어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없는 공간이라고 말하는 곳에 붉어지는 생명력, 그 곳에 피는 꽃의 이름을 <13홍>이라고 이름 붙였다.

 

 

-반복되는 동작들이 많았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언젠가 바다에 앉아 파도를 바라본 적이 있다. 밀물과 썰물의 반복과 들숨과 날숨의 반복을 보며 사람들은 우주의 이치를 깨닫는다고 하지만, 나는 지혜롭지 않아 바다가 뒤엎어지거나 갑자기 정지하거나 밀물이 썰물을 엎지르는 상상을 했다. 기존의 흐름과 운동에서 벗어나서 다른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사는 힘들에 대해 생각했고 나 자신이 그렇게 살고 싶었다. 결국은 반복을 넘고 싶어서 반복을 했다.

 

 

-반복을 넘어갔는가?

내 삶의 턱 하나를 넘긴 것 같다. 내 자신의 한계 같은 것을 가로질러 건너갔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반복'이라는 주제를 넘어갔는지에 대해선 자신할 수 없다. 공연의 모티브가 되었으나 아직까지는 내게 남겨진 과제이기도 하다. 반복을 넘어가는 힘들에 관한 것은 앞으로 계속 기쁘게 고민되어질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가.

내 안의 심상과 극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으로부터 움직임은 출발했다. 그 내용으로부터 적합한 동작을 즉흥 움직임을 통해 찾아갔다. 그러나 후에는 점점 움직임의 뉘앙스와 감각의 파동에만 집중하려 했다.

 

 

-실제로 공연하는 무대에서는 어떤 것을 느끼는가?

무대 위에서 전생의 몸, 금생의 몸, 내생의 몸을 불러들여 지금 여기의 몸에 투사시킨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공연 중에 난 배를 많이 내밀었다. 그 배 안에 몸들이 임신을 당하고 있었다. 난 에이리언일 수 있다.(웃음)

 

 

-혼자 연출과 기획을 다한 셈인데, 공연 준비하면서 어려웠던 점과 좋았던 점은 무엇인가?

내 삶에 어떤 시점에선 꼭 그렇게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해보고 싶었다. 앞으로도 나를 무용수로 요리조리 마음껏 써먹을 계획이다. 그러나 기획까지 하는 것은 내게 버겁다. 혼자여서 외로웠으나 고독해서 황홀했다. 외로움을 넘어선 곳엔 자신이 만들어낸 동작의 아름다움에 취해 사랑이 깊어지고 감사가 탄성으로 흘러나왔다. 추운 날씨가 어려웠고, 그 추위로 인해 강해지고 단단해져 얼음처럼 투명해질 수가 있었던 것 같다. 표현이 독창적이길 원해서 진도가 천천히 나아갔고 어디서 본 듯한 표현들이라 여겨지면 힘들어졌다. 결국 내 안을 잘 들여다보았을 때 진심에 가까운 동작들이라 여겨지면 독창성에 대한 압박을 버리고 진심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국 어디서 본 듯한 남의 옷이라 여겨지던 동작들은 내가 원하는 표현의 마중물이 되어주었다. 차갑고 깊은 것은 표면을 거치지 않으면 들어올려 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공연이 끝난 후 당신에게 찾아온 것이 있는가.

작은 성취감이다. 그리고 바다다. 무지개도 언도받았다.

 

 

- 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

춤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 한 사람은 하나의 산맥이다. 산맥은 다차원성을 간직한,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공간이다. 그러면서 긴 시간이다. 한 사람이 자신의 긴 시간을 자신의 산맥을 파도쳐내는 것이 춤과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춤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고 궁금하여서 난 계속 움직이고 싶다.

 

 

-희망과 계획은 무엇인가.

새로운 안무적인 발상과 창작의 힘을 키우는데 주력하고 싶다. 미지의 것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두려움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곳곳에 숨어있는 춤의 산맥을 찾고 그것을 붉어지게 드러내는 자로 투신하고 싶다.

 

보충설명

2007년 8월 28일 원고 1차 수정.

필자소개

플레이백씨어터 <목요일오후한시>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