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10. 12:04ㆍReview
꾹 눌러 담은 트렁크의 흔적을 들추며
<케샤, 레로, 케샤> 리뷰
글_김은한
좋아하는 일본 아티스트의 곡 중에 ‘어차피 내일이 계속된다면 / 추억은 필요 없어 / 이 발을 무겁게 하는 슬픔은 / 시궁창에 흘려보냈다’라는 대목을 흥얼거리곤 했다. 이번에 관람한 공연은 이 대목을 떠오르게 했다. 조바심을 내느라 어디로도 내디딜 수 없는 막막한 현실. 아랑곳하지 않고 나아가 보는 마음을 일깨워준 <케샤, 레로, 케샤>를 돌이켜본다.
코로나가 주춤하며 공연예술계에도 다시 활기가 돌아오는 듯하다. 여러 축제와 행사가 조심스럽게 다시 시작되었고, 많은 참여자가 그간의 시간을 떨쳐 보내듯 즐기고 있다. 꽉 찬 극장은 이제 한 칸 띄어 앉기보다는 비좁아졌지만, 생기가 돈다. 물론 힘든 시절이 완전히 지났다고 말하기엔 이르다. 공연예술을 둘러싼 삶은 늘 만만치 않았다. 일종의 자영업자로서 힘내고 있는 공연예술인이라면 여전히 우울한 시절일 수도 있다. 그만두기를 결심하는 동료, 세기의 대 발명적 혁신에만 지원하고자 하는 기관, 예측할 수 없는 정책. 창작자들은 폐허가 된 심신을 셀로판테이프로 간신히 여며두었고 관객은 공연을 즐기는 마음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 가야 하는 시기이다. 갓 뽑은 사랑니처럼 살이 차오를 때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지난 시절은 지속 가능한 공연예술 작업방식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 시기이기도 했다. 만나지 않고 작업하기, 최대한 덜어내며 작업하기, 매체에 대응하며 작업하기 등등. 트렁크씨어터프로젝트는 오프라인 공연과 온라인 공연이 병행될 수 있는 공연 형태를 고민하는 창작 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트렁크 가방에 담길 수 있는 간결한 무대, 기동성 높은 연극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 소개를 보고 처음에는 (필자를 비롯해) 무대에 아무것도 갖추지 않음으로써 기동성을 확보하는 창작자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들은 정반대의 태도를 보인다. 그들의 트렁크는 공연 공간 전부를 채울 만큼 풍성한 아이디어로 가득하다. 맥시멀리스트로 보일만치 기술과 도구를 사용하는 이들이지만 그냥 놓아둘 뿐인 소품은 없다.
극장 공연을 놓쳐 온라인 상영으로 만났던 전작 <메리, 크리스, 마쓰>에서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상상력을 선보였던 트렁크씨어터프로젝트는 신작 <케샤, 레로, 케샤>에서 프로젝션에 더 집중하며 팀의 스타일을 완성하는데 집중한 것처럼 보인다. 형식을 통일하면서 변주를 고민하는 것 또한 효율적인 작업방식으로 느껴졌다. 음악 프로듀서의 시그니처 사운드처럼 창작자의 색깔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니까. 이번 작품 또한 온라인 상영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메이킹 영상도 준비되어있다고 하니 리뷰와 소문, 프로그램북으로 남는 작품이 아니라 다시 만나볼 수 있는 작품이 되었다. 관객을 만나고 즐겁게 하기 위한 다양한 궁리 덕분일까? 이들의 작품 <메리, 크리스, 마쓰>는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재공연 된다고 한다.
무대에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OHP(오버헤드 프로젝터)가 있다. 작중에서 이것은 그 자체로 또 다른 무대가 되기도 한다. 미니어처 인형극 무대가 되고, 사막이 되기도 하고, 어쩌면 인물들의 격렬한 마음의 외침을 드러내기도 할 것이다. 무대 한쪽에서는 악사들이 라이브 연주와 소리를 선보인다. 다소 낯설지만 흥겨운 가락이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데, 작품 소개에 부시맨과 잠비아 무탄다 마을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아프리카의 가락이 아닐까 싶다. 작중에서도 큰 존재감을 드러낸다. 무대에 있는 배우, 오브제, 무대, 악사 등이 꼭 필요한 악기처럼 비슷한 비중을 갖는 것도 흥미로웠다. 의견을 어떤 식으로 조율하면서 제작했는지도 궁금했다. 구성원 모두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창작 과정은 종종 작품의 ‘이음매’를 의심하게 하는 장면을 만들 때가 있는데, 여기서는 그런 느낌 없이 조화롭게 흘러갔다.
어떤 부족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으러 길을 떠난다. 광활한 사막에서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함일까? 그들은 뒤돌아보지 않는 걸 신조로 삼고 있다.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고 눈앞에 집중해 안전을 확보하기 위함이기도 할 것이다. 생존을 위한 걸음에서 누군가는 뒤처지고 누군가는 그를 돌아본다. 케샤와 레로는 그렇게 서로를 만나고 의식하게 된다. 주위에 가득한 가치관에서 벗어나니 바로 자유로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쫓아야 한다. 배우들은 손가락 인형으로 인물을 표현하고 또 롤러가 있는 상자로 끝없이 걸어가는 사막의 길을 나타낸다. 이들에게 앞으로 나아가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무대를 활자로 가득 채우면서까지 힘주어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한번 놓친 방향은 얼핏 다시 찾아낼 수 없을 것 같다.
그 와중에 케샤는 대수롭지 않은 듯 길을 이탈해본다.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것은 용기가 필요한 문제는 아니나 행동력이 필요하다. 방향을 정하고 마주하고 걸으면 어디든 앞이 된다. 오히려 즐거워 보인다. 아름다운 밤하늘 아래 잠을 청하는 두 사람. 다만 이 여정에는 헤어짐이 기다리고 있다. 본래 이들에게 죽음은 두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레로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하나의 죽음은 다른 삶을 먹이는 법이다. 이윽고 자기 안에서 낯선 감정을 길어 올린다. 새삼스럽게 슬픔을 발견한다. 이는 정신없이 격렬한 몸짓으로 나타난다.
처음에는 슬픔을 모르던 레로와 그의 부족이 부러웠고 춤을 추는 레로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죽음에 대한 인식이 다소 가벼운 세계관이 삶을 더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일본에서는 죽음을 권함으로써 역으로 ‘괴로운 세상에 바람구멍을 내고 더 쉽게 살 수 있다’라는 논조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전 세계 다양한 장례문화를 살펴보면 죽음을 받아들이고 애도하는 방식이 다양해서 환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연극은 만든 이와 보는 이의 삶을 비추기 마련이다. 작품은 마땅히 충분히 애도할 시간이 필요함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는 어떤 죽음에 당혹스러울 정도로 무심해지기도 하니까. 혼자가 된 레로는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잘 설명할 수 없는 울분을 안고. 오아시스로 가며 뼈만 남은 물고기를 만나기도 하고, 무대 입구 벽을 이용해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도 한다. 사막이 마치 대양이 된 듯 헤엄치는 물고기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작품 끝에서 레로는 다시 이동 행렬에 몸을 싣는다. 돌아보지 않는 부족의 세계로, 자신의 세계로 돌아온다. 거대한 흐름에 몸을 맡기며 걷는 그에게 이번에는 다른 케샤가 돌아본다. 아프리카 잠비아 무탄다 마을의 언어로 <케샤, 레로, 케샤>는 <어제, 오늘, 내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제목이라고 여긴 것은 오늘이 어제와 내일을 만나는 이야기임과 동시에 가로쓰기로 이들의 행렬을 나타내는 것 같다는 점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공연 예술 리뷰를 쓰는 행위를 생각해보았다. 하나의 관점일뿐인 리뷰는 공연이 다시 만날 수 없는 시간예술이라는 점에서 이상한(때로는 지나친) 힘을 얻곤 한다. 하지만 지금은 여러 방식으로 공연의 기록을, 과정을 만날 수 있는 작업이 늘어나고 있다. 공연을 돌이키는 과거가 문장을 이루고 행렬을 이루며 여기 마지막 문단까지 왔다. 마음이 동하는 지금의 독자, 미래의 관객이 있다면 온라인 상영을 기대해보는 것도 좋겠다. 몇 년 전부터 꾸준히 ‘공연 예술은 여가’라고 스스로에게 강조하고 있다. 극장을 나서며 조금 더 살아보고 싶다, 조금 더 앞으로 가보고 싶다고 마음먹게 하는 것만으로 좋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케샤, 레로, 케샤>는 그런 흥과 순간이 존재하는 작품이었다.
필자소개
김은한_매머드머메이드 명의로 연극을 만들고 있습니다. 낯선 재미를 발견하면 좋아요. @mammothmermaid
공연소개
트렁크씨어터프로젝트 <케샤, 레로, 케샤> @연희예술극장 2022.5.12 - 5.15 제작진 작/연출 조예은 (ID_퀸비) 조연출 박현 (ID_킹콩) 미술 신은혜 (ID_그레이스킹) 음악 백하형기 (ID_배카뚱기) 조명 김소현 (ID_베이비드라이버 음향 박진호 (ID_하이고 영상 리인규 (ID_을지로파리지앵) 기획 최문혁, 박현 출연진 박세인 (ID_센짱) 노기용 (ID_굥) 윤세인 (ID)별내동크리스틴스튜어트) 백하형기 (악사, ID_배카뚱기) 최문혁 (악사, ID_청와대용산지부)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연희예술극장, 씨티알싸운드, 스튜디오 문, 플레이 티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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