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뷰] 2012 페스티벌 봄 프리뷰(freeview)

2012. 4. 4. 01:29Feature

 

질문을 전해주는

페스티벌 봄에

질문을 돌려주기

글_정진삼

 

 

1.

페스티벌 봄을 둘러싼 여러 가지 말(言)들이 있습니다. 먼저 축제 내부에서 만들어내는 말입니다. 설명이 필요한 공연에 대해서 주최 측에서 단 주석이지요. 두 번째로는 축제 바깥에서 공연 정보를 공유한 언론의 말입니다. 축제의 역사성 혹은 도발성의 의미를 되짚는 제스처가 더해지지요. 세 번째는 페스티벌 봄에 대한 비평 담론입니다. 연극계, 무용계, 미술계에서 이를 전문적으로, 혹은 현학적으로 풀이하는 발언이지요. 자, 마지막으로 관객들의 말이 있습니다. 예술분야에 종사하는 창작자 관객들, 혹은 공연예술에 관심이 많은 관객에서부터 억지로 끌려나온 리포트 관객까지, 축제에 참여하는 다수 존재들의 말입니다.

왜 ‘말’ 일까요? 고전 명작이나 완성도 높은 드라마(혹은 스펙타클) 앞에서 입이 다물어 지는 체험과는 반대로, 봄의 공연은 외려 입을 열게 하지요. 공연 자체가 질문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인지, 보고나면 꼭 응답을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도 듭니다. 공통감각 대신 개별적인 사유와 체험에 기대는 것이 이 축제의 특징이랄 수도 있겠지요.

말이 많다는 것은 어쨌든 이슈가 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슈의 가짓수가 많아지고, 논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페스티벌 봄은 동시대 공연예술 축제 중 가장 핫!(hot)한 축제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통해 풀어보고자 하는 것은, 페스티벌 봄을 둘러싼 말들 중 바로 마지막에 언급한 ‘관객들의 말’ 입니다. 실상 이 말은 나의 말이기도 하고, 여러분의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와 양에 비해 거의 들리지 않는, 낮고 작은 목소리기도 하지요.

작다는 표현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크다면 어떤 목소리들은 쉽게 묻힐 수도 있지요. 매끈하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리면 거기에만 귀가 쏠리게 될 수도 있구요. 중요한 것은 낮고 거친 소리라도 응답을 주는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쉽게 생각해보면 ‘관객들의 말’ 은 실상 축제에 참가한 예술가들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코멘트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하기에 페스티벌 봄의 송수신 경로에는 가로막이나 위계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잘, 소통되고 있는건가요?

 

2.

이 글은 페스티벌 봄에 대한 프리뷰(preview)로 한 달 전에 기획되었습니다. 이를 쓰기위해선 닥쳐올 공연들에 대해 알아야합니다. 허나 페스티벌 봄이 은밀하게 제시하는 세 줄짜리(펼치면 한 줄짜리) 공연정보를 가지곤 ‘미리보기’ 하기가 살짝쿵 어렵습니다. 물론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요. 유투브를 통해 해외의 창작자들의 공연 영상을 찾아 볼 수 있으니까요. 이미 제롬벨, 르네 폴레쉬, 쉬쉬팝, 네이처 씨어터 등의 영상이 웹상에서 존재합니다. 더 구체적인 검색을 통한다면, 외국 공연들의 관련 기사와 리뷰를 구해 볼 수도 있겠지요. 국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작년과 올해에 걸쳐 이미 완성형 혹은 과정중으로 선을 보였던 공연들이 있습니다. 이영준-김나영의 <라면앙상블>과 현시원의 <천수마트>, 홍성민의 영화작업, 팅크탱크의 작품들이 그러하지요. 이들은 페스티벌 봄에서 발표되기 이전에, 미술의 퍼포먼스 작업, 연극의 개념적 실험 등으로 분류되어 있지요. (페스티벌 봄의 ‘분류법’ 을 통해 온전한 다원예술로 호명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태껏 미루어왔던 것은 태만함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무대가 아닌 영상이나 기록으로, 완성태가 아닌 미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프리뷰를 주저하게 만든 큰 이유였습니다. 아마도 공연을 보지 않고 글을 쓰는 사람들의 ‘방식’ 이 다 그렇겠지요. 뭔가를 더 말하거나, 뭔가를 덜 말하거나. 아마도 그렇다면, ‘더말덜말’ 의 방식으로 나온 목소리는 대체로 비슷하겠지요. 축제 내부의 말과 이를 다시 쓰기한 언론의 말이 그러하듯이.

그래도 프리뷰는 써야했기에, ‘미리 보기’를 대신하여 급조된 타이틀이 ‘내맘대로 보기’ 였습니다. 꼼수지요. 그래도 후리(free)하게 축제를 후려 보자(view)는 취지를 갖게 되니 딴맘은 정말로 내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한 기획은 <리포트 관객들을 위하여> 였습니다. 리포트 관객이란, 말 그대로 리포트를 쓰기위한 관객입니다.(이 말은 제가 생각해낸 개념은 아닙니다) 인상적이게도 페스티벌 봄에는 리포트 관객이 참 많지요. 추정컨대, 대학의 예술전공 혹은 교양 수업시간에 선생님들께서 과제를 낸 상황에 해당되겠지요. 각오를 하고 와도, 쉽지 않은 공연들이 많은데 단지 과제를 채우기 위해 끌려온 관객들은 얼마나 괴로울까요. 그들을 배려하는 마음에 분량을 채워줄 ‘말’ 들을 최대한 생산하고, 양질의 레퍼런스를 제공하는 게 의도였습니다. 화사한 봄인데 음습한 극장에서 머리를 쥐어 싸게 만든 선생님들을 곯려주기 위한 방편이었을까요, 예술교육자의 권위에 철저히 순응하는 척해서, A+를 받아내자! 는 계략이었을까요. ‘그러나’ 이 기획은 포기되었습니다.

다시금 생각해낸 꼼수는 <페스티벌 춘 CHU:N> 이었습니다. 페스티벌 봄 혹은 아방가르드 예술이 갖고 있는 ‘패러디’ 의 기능을 빌어, ‘스프링’ 에서 ‘봄’ 으로 개명한 페스티벌을 ‘춘’으로 비틀어보기 하자는 기획이었습니다. 작년 페스티벌 봄에는 한스페터 리쳐의 <웃는 소를 기다리며> 라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올해는 작가 김지선의 페:봄을 봄:페로 풀어쓴 작품도 있지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교묘하게 흩트리는 발상입니다. 춘, 역시 이를 따라하기지요. ‘역시나’ 이 기획도 중단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한달내내 아이디어를 내고, 망하기를 반복한 기획이 다음과 같습니다. <한음절의 도발 - 봄, 몸, 놈, 좀, 홈>, <당신의 현혹된 눈동자여, 맥락적 사회에 간빠이!>, <잼은 없고, 잠은 있는>. ‘그럴-싸’ 하거나 ‘별-볼일’ 없거나 중에 하나겠지요. 구태여 설명하자면, 한음절의 도발은 봄이라는 말에 착안하여, ‘몸-놈-쫌!-홈’ 등의 말장난으로 지난 페:봄을 다시보기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당신의 현혹된 눈동자여- >는 작년 일본의 원전피해를 이유로 방한을 일방적으로 취소한 르네 폴레쉬에 대한 항의성 코멘트였습니다. 제일 많이 쓰다가, 중단한 글은 <잼은 없고, 잠은 있는>이라는 프리뷰였습니다. 페스티벌 봄의 공연에서 관객과 소통이 실패하는 경우에는 많은 관객들은 ‘졺’ 을 시도하거나, ‘잠’ 을 청하게 됩니다. 왜, 새로움과 도발의 축제에서 ‘잼’이 없을까, 하는 궁금증을 풀어보자는 의도였지요. ‘당연히’ 이 기획도 취소되었습니다.

   

 

3.

앞 글에 대하여, 허허-동의하는 분도 있고, 쯧쯧-동정하는 분도 있겠지만 이러한 시도에 5전6기는 없습니다. 다섯번의 실패를 말한 것은 여섯번째의 극적인 성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되지 않는 것이 어떻게 되기 위해 애썼나를 보여주는 것 뿐. 여기까지, 눈치 빠른 분들은 ‘봄’ 에 대해 디스를 시도하려는 필자의 의도가 잡힐 것입니다. 왜 디스를 하려고 했는지, 를 구태여 밝히자면, 아마도 ‘더말덜말’ 에 대한 ‘삐짐’ 탓이겠지요. (봄의 따스함에 대한 꽃샘은 전혀 아니랍니다)

페:봄이 스프링웨이브 페스티벌이었던 시절부터, ‘낚임’ 은 축제의 주된 특징이었습니다. 경계를 오가던 아티스트들은 다른 장르의 관객들을 낚기 시작했고, 관객들은 혹해서 떡밥을 물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이 즐거웠던 적도 있었고, 당황스러웠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낚임의 방식은 탈장르, 탈경계에 대한 이해에 지대한 도움을 주었습니다. (웃으며 겨자를 꿀꺽하는 식이었지요) 낚임에서 가장 크게 작용했던 것은 바로, 축제에서 전해주는 ‘말’ 이었습니다.

축제가 본격적으로 핫! 해지기 시작하면서, 낚임의 유쾌한 기억은 점점 불안한 것으로 변해갔습니다. 누군가 떡밥에 대해 더 말하기 시작하고, 수중에서 지상으로 도약하는 ‘낚임’ 의 과정에서도 나의 포즈보다는 남의 시범이 중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낚이는 것은 나인데, 왜 남의 참견이 신경 쓰일까요. 이젠 관객의 상당수가 ‘연극이 미술이고, 미술이 무용이고, 무용이 문학일수 있다’ 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도, 페봄의 방식은 예전의 ‘말의 낚시질’ 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과거 ‘봄’이 ‘스프링’ 이었던 때에, 축제는 참 고즈넉했습니다. 리포트관객들도 봄 대신 서울연극제에 가야만 했던 시절이었지요. 언론의 관심이나 전문적인 비평이 필요할 때, 페봄은 평단의 침묵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리미니 프로토콜의 <자본론>이 대박을 치고, 공연예술계의 이론적 화두가 포스트 드라마틱 연극으로 자리 잡자, 침묵의 시기는 수다의 시기로 넘어가게 됩니다. 말 많은 시절이 도래했건만, 나의 말이, 우리의 말이, 관객들의 말이 잘 들리는지, 서로 소통하고 있는지, 자못 궁금합니다.

4.

다원예술 작품들은 경계에서 피어난 꽃 같은 작품입니다. 그러한지라, 어쩌면 전반적인 자연과 생태 환경을 알아야지만 정확하게 또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 눈앞에 피어난 식물의 ‘종속과문강문계’ 를 모르고도, 참 예쁘다, 곱다, 징그럽다, 를 말할 수 있지요. 관객은 그저 사람으로써 꽃과 만나는 게 좋을 뿐입니다. 자꾸 옆에서 지구과학이나 생물을 말하면, 그것과 나의 관계는 실험실적이거나 책상적이 되겠지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꽃이라고 해서 ‘까임방지권’ 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실험이라도 그 공연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고, 훈련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개념을 충분히 익히지 않았다면, 미숙한 생산자들이 재생산 과정에 참여했다면, 혹은 공공의 공간이 실험과 맞지 않는다면, 그리고 더말덜말로 인해 과잉의 평가를 받는다면, 당연히 관객으로부터 지적질을 당할 수 있는 것이지요. 축제의 신비화와 불투명성이 개별 작품의 가치와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디스를 하려고 했지만, 걱정만 했습니다. 페스티벌 봄을 나의 말로 하자면, “히피가 되어 버린 전 여자친구” 정도로 풀이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하든 자유롭게 영혼을 구가하길 바랄 뿐입니다. (너무 멋부리지만 말고, 너무 이상만 쫓지 말고 등등의 잔소리를 더해주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만...) 여러분도 여러분의 말로 지적인 유희의 장, <페스티벌 봄>을 정리해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말로 풀이될 때, 인문학이든 미학이든 예술이든 다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요. 아마도 리포트를 내준 선생님들도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디언밥은 여러분의 리포트를 받습니다. 장학금은 드리지 못해도, 소정의 원고료는 드릴 수 있겠지요. 페:봄의 공연들에 대한 자기말로 된 풀이들이 궁금합니다. 글자크기10의 A4용지 1장에서 3장 사이의 제출용 수업과제도 좋습니다. 더말덜말이 아닌 내맘딴맘으로 쓴 노트도 환영합니다. 취지와 방향성은 엇나갔지만, 결국엔 다시 ‘리포트관객들을 위하여’ 로 돌아왔네요. 그러고 보니, 리포트를 받을 창구는 인디언밥이나 아카데미가 아니라 실은 페스티벌 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관객과의 소통, 분명 잘 되고 있는 거지요?

 

 

***사진출처

1. 2012 페스티벌 봄의 포스터  

2. 2009,2010 페스티벌 봄의 로고  

3. 2011 페스티벌 봄 중 방한 취소된 르네폴레슈의 공연 포스터 

4. 2009년 페스티벌 봄에서 공연된 리미니 프로토콜의 <자본론> 공연사진 (Ⓒ리미니프로토콜)